◈구원받은 자의 새로운 삶 창8장 설교 두 편 조합
◑서론
창세기 6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은 외우기가 쉽습니다.
왜냐면 창세기 6, 7장과 8, 9장이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6, 7장은 홍수사건이고
8, 9장은 회복사건입니다.
그리고 창6, 7장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파괴하는 사건이고
8, 9장은 재건하는 사건입니다. 얼마나 외우기가 쉽습니까.
창세기 6, 7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노아와 세 아들이 먼저 소개되고
그들이 방주에 들어간 7일 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40일 동안 비가 내려와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합니다.
그러면 창세기 8, 9장의 내용은 어떻게 됩니까?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150일 동안 물이 감하고 40일이 지나서 방주의 창을 열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는데,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돌아왔고,
7일 후에 다시 내어보내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어 왔고
또 7일 후에 내어보내니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의 세 아들이 다시 소개되며 인류가 다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6, 7장은 망해가는 이야기이고
8, 9장은 흥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중요한 질문은 6, 7장의 망해가던 세상이
8, 9장에서 어떻게 다시 흥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1.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기억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창 8:1).
‘기억하셨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God remembered Noah’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망하던 세상이 다시 흥하게 된 핵심요인이 바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6, 7장의 멸망이 8, 9장의 회복으로 돌아가는 돌쩌귀(hinge)에는
오직 한마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더라.”
인간의 삶이 절망과 슬픔과 저주에서 소망과 기쁨과 축복으로 바뀌는 돌쩌귀에는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은혜로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잊지 않으십니다.
창8:1절의 ‘기억하다’와 같은 단어 (자케르)가 다른 곳에선 이렇게 쓰였습니다.
창30: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창40:14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출2: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런 구절들을 검토해 볼 때, 본문 8:1절의 ‘기억하다’ 라는 말은 *자케르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마음속에 품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평소에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딱 생각이 난게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병이 걸려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했다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이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니 문제없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놓고 격려하십시오. “너는 지금 가난하지만 문제없다.
네 아버지가 부자 아니냐? 네가 지금 몸이 아프지만 문제없다.
네 아버지가 만병을 고치시는 대 의원이시지 않느냐?” 이렇게 격려하십시오.
왜냐면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우연히 생각나서, 다시 기억하셨다.. 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늘 우리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계셨지만,
이제 하나님이 액션을 취하실 때가 되었다.. 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기억은.. 지적인 회상이 아닙니다. 반드시 액션으로 연결되는 ‘기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적인 회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40년 전 중학교 동창생을 길에서 만났는데
이름을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생각났을 때 이것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기억’은 지적인 회상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회상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카이로스의 시간에, 하나님은 액션하시는 기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말은
가장 적합한 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도움을 주시는 자비로운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자케르)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창 30:22).
그래서 라헬의 태를 여시고, 자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액션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자케르)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 19:29).
소돔이라는 곳은 동성연애가 심한 곳입니다.
이처럼 성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소돔에 하나님은 유황과 불을 비 같이 내려 심판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그의 조카 롯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에는, 액션이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4).
출애굽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때에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북한 주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기억하사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북한 주민을 기억해주시고 공산 치하에서 건져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밥을 먹지 못해 굶어죽고 예배도 못 드리게 하는 나라지만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최적의 때에 개입하셔서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키시고 한민족이 다 함께 일어나
신앙의 부흥을 이루고 세계 선교를 감당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셔서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8:1
그때 비로소 바람이 불고 땅 속에 있는 물이 막히고, 하늘의 창도 닫히자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산꼭대기도 나타나고 육지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은혜가 날마다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망한 사람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그 다음부터 계속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해야 됩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시 25:7).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인생살이에 어려움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따라 나를 기억하소서.” 이런 기도를 올림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이 기억해주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새창조의 세계가 열리다
이제 이 그 무서웠던 홍수 심판이 끝이 나고
이제 대홍수에서 구원받은 자들 구원받은 자들이,
새로운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시작점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노아와 그 방주 안에 들어갔던 모든 구원받은 자들을
어떻게 새롭게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지를 몇가지 살펴보면서
(홍수에서, 멸망에서, 심판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8:1~4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그런데 지금 본문 창8장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물이 걷히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인데요.
하나님이 마치 처음 창조하셨을 때처럼 (창1장처럼)
또다시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시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8:1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셨대요.
여기서 말하는 '바람, 루아흐' 는
창1:2 '하나님의 영(루아흐)이 수면 위에 운행 하시니라'
지금 똑같은 현상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8:1은, 1:2와 같은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또다시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시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4절에 보니까 아라랏 산이 드러나고
지금 뭍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땅을 주신 것입니다.
창조 셋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둘째날에 하늘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죠.
그리고 셋째날 하나님께서는 물이 물러나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어요.
창조의 셋째날 있었던 그런 일과 똑같은 일이
지금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 현장 속에서 드러납니다. :4
이렇게 하나님은 홍수 심판 이후에
마치 창1장의 창조처럼,
노아 가족에게 새로운 세상을 주시면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받은 축복도 동일합니다.
17절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이 축복의 말씀은 창1:28절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홍수 이후의 제반 여건은, 창1장의 첫 창조 때의 여건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세례를 받다
또 하나는 새로운 터전만 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어요.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죠.
이걸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8:18~19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자, 방주에서 나왔어요. 그러나 사실 어디서부터 나온 것입니까?
물에서 부터 구원받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 노아 홍수사건 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2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사도 베드로는, 홍수 사건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세례를 받았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노아나 우리나 똑같이
물에서부터 세례를 받아서 구원받은 자,
그러니까 우리는 세례를 받으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새 생명과 새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그들도 물에서 건짐 받은 그 세례를 통해서
그들이 새 마음과 새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지나고 난 이후에,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시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새로운 터전, 새로운 세상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마치 세례받은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고,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새 생명을 주셔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3. 자 그래서 창8장은, 이런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삶의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새롭게 된 성도의 마땅한 반응)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가진,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즉 세례를 받은,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본문의 노아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첫 번째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지만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어야 한다>.. 입니다.
8:6~8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지금 홍수가 다 끝이 났는지, 심판이 다 끝이 났는지,
이제 땅에 다시 발을 붙일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6절에 보면, 그 방주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거에요.
그리고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먼저 까마귀를 내보냈어요.
아라비아 신화에도 까마귀는 날씨를 예측하는 새로 기록되어 있듯
날씨에 관한 한 까마귀가 비둘기보다 더 영특한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까마귀 울음소리가 보통 때보다 시끄럽게 울면
폭풍우가 다가온다든지 까마귀가 배가 고플 때라고 합니다.
본문에, 까마귀가 지면에 거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 위로 날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이 모습은 지면의 상태가 거할 곳도 없지만, 먹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귀소본능이 없는 까마귀를 왜 먼저 놓아주었을까요?
노아가 그렇게 한 것은 까마귀가 귀소본능은 없지만
먹을 것만 있으면 질퍽이는 땅도 아랑곳하지 않는 까마귀가
다시 방주 근처로 돌아올 정도라면, 밖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물이 마르지 않았다는 증거죠)
까마귀가 돌아오되 방주 안 노아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7절을 보면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왕래하였더라”의 원문 뜻은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방주 주변을 배회하면서
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까마귀는 원래 야성이 강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이제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8절에, 비둘기를 내보내어서 물이 줄었는지를 알려고 합니다.
왜 까마귀를 내보냈다가, 다음에 비둘기를 내보냈을까요?
까마귀가 귀소본능이 없어서 배 안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귀소본능이 있는 비둘기를 내보냈으리라 봅니댜.
그런데 비둘기가 어떻게 합니까?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고요. :9
그리고 또 7일을 지나서 비둘기를 다시 내보냈어요.
비둘기는 귀소본능이 있는 새라서, 정확하게 방주로 되돌아왔습니다.
11절,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자 땅에 물이 줄어든 지를 알았어요.
'아 이제 방주에서 내려가도 되겠다' 라는 것을 알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또 7일을 기다려서
다시 비둘기는 내 보내니까 비둘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12
비둘기는 귀소 본능이 강한 새임에도 불구하고
비둘기가 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비둘기가 마른 땅에서 새로운 보금 자리를 찾아 정착했음을 알려주는 거죠.
노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 먼 곳에까지, 물이 말랐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13절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 1일로서
홍수가 발발한 지 314일째 되던 때입니다.
자 이제 물이 물러간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왜 노아가 지금 좀 신중하게 방주에서 나오냐 하면,
언제 또다시 홍수가 들어닥칠지.. 염려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돌다리도 두드려보며 건너듯이, 신중하고 안전하게 방주에서 나오는 거죠.
지금 노아가 거의 일 년 이상 방주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방주 밖으로 나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601년 첫째 달 첫째날, 그가 물이 줄어든 줄 알았어요.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리고 그가 방주 창문을 제치고 보니까
물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말입니다.
자 그런데 이때 노아가 하는 행동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601년 첫째 달 첫째날 (1월 1일에) 정확하게 물이 말랐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그들이 방주에서 나오게 된 것은 어느 시점입니까?
2월 27일쯤에 그들이 이제 실제로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방주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밟는 첫 발걸음이
무엇에 의하여 움직여졌을까요?
그가 보게 되었던 그 환경에 허락 때문이었습니까? No
'이제 내려가도 되겠다'는 환경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물이 다 줄었다' 내 눈으로도 확인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확신 때문에, 그 첫발을 내디디는 것입니까? No
14~17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오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에 따라서, 이제 새로운 삶의 첫발을 노아가 내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월 27일 이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점에
그가 새로운 삶의 터전에 첫발을 내딛고 있다.. 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의 방식, 그 첫 번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환경의 허락도 아니요.
자기 자신의 간절함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구원 받은 자가 살아야 되는 방식이다...
본문의 노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두번째 구원을 받은 자에 새로운 삶의 방식은
바로 <제단을 통하여 사는 삶>입니다.
즉 희생과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방주에서 나오고 난 이후에 노아가 했던 행동은 이렇습니다.
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돌로 쌓아서 만든 번제단이죠.
노아 홍수 이후에, 처음 쌓은 제단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노아가 처음으로 여호와께
동물들을 잡고,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는 제단을 쌓음으로서
그 제단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께
삶을 드리고 있고, 제사를 드리고 있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노아가, 제단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제사를 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로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고, 삶을 드릴 수 있다 라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또한 제단을 통해서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분의 피를 통해서만
우리의 삶이 그분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삶을 드린다고 할 때,
예수 없이,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 사람들 보다
나은 것이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선을 왜 받지 않으십니까?
그들의 삶을 왜 받을 수 없으신 것입니까?
그들은 '제단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못한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더럽고, 추악함 여전히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우리의 삶을, 산 제사로 받으실까요? (제단은 언제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정성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실력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제단(십자가를 의미)을 통하여,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들의 신들에게 기도할 때
우리보다 열정이 부족함니까? 그들의 정성이 부족합니까?
그들의 어떤 갈급함이 부족합니까?
아니요, 그들도 아주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요.
그런데 왜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데
우리의 기도는 슬쩍 하는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보시고 다 받아주실까요? 왜요?
우리 기도 끝에 우리는 뭐라고 기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이 말은, 그 분의 피,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뜻인 것이죠.
그래서 이제 세례 받고 구원받은 자의 삶의 두 번째 방식은
바로 번제, 제단, 즉 죽음과 희생을 통해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삶이어야 하고,
△또 한 가지 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옛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삶을 드리기 위해서는
두가지 죽음이 우리한테 적용됩니다.
-첫번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또 한가지는 나의 옛 자아의 죽음.. 이 둘이 같이 가야 되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릴 때
내가 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죽었다 라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받으실 수 없어요.
가장 불쌍한 인생은, 교회 밖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전히 자기 자아가 살아있는 신자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믿는데
그 예수와 함께 내가 죽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께 열심을 내고, 헌신하고, 봉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태로,
'예수가 죽었다'는 그 지식적인 믿음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단을 통해 드려지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자아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삶은 하나님께 하등 소용없는 삶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내 자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그것이 바로 세례 받고 구원받은 자의 삶의 두번째 특징이고요.
▲3. 마지막 세 번째로, 구원 받은 성도는 <번제로 드리는 삶>이 됩니다.
잠시 설교 흐름과 맥을 되짚어보면,
노아는 지금 방주에서 나와서 제사를 드렸죠.
이것은 창1장의 새창조와 마찬가지인 새 세상인 것이고,
노아는 마치 아담처럼 새 창조된 인간입니다.
즉 신약적으로 보면
구원 받고, 세례받은 자의 삶인데, 그 특징은 이렇다는 겁니다.
그 새롭게 창조된, 지어진 인간이 새롭게 하게 되는 일은,
-말씀을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삶이고 (십자가를 통한 신앙)
-특별히 '번제'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총체적인 죽음)
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번제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번제' .. 히브리어로 '올라' 라는 이 단어는
성경에 280회 정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280회 등장하는 것 중에, 처음 쓰여진 곳이 본문입니다.
번제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번제로 드린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제단에서 우리가 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제사를 드릴 때,
번제는.. 어느 한 부분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내 삶과 몸과 인격 전체를.. 다 태워 드린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 아니라
몸과 함께 마음과 인격과 영혼을 다 함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를 들으면서도 깨닫는 건 잘해요. 깨닫는 건 지적 knowledge 영역이죠.
근데 마음에 감동이 없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은.. 정적인 영역이다.
그런데 '정 emotion의 영역’만 은혜 받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배 시간마다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 회개하고는 잘 하는데
문제는, 예배 마치고 세상에 나가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에요.
즉 의지 will 적인 부분이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이것도 번제가 아니죠.
그래서 번제 라는 것은, 지+정+의+영혼+몸
이렇게 우리 삶 전체를 다 드리는 것을.. 번제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고 구원 받은 자에 삶은
번제로 올려 드려야 된다.. 라는 것이고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번제를 드릴 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이 피워졌죠.
그리고 그 위에 제물을 전부를 올렸어요.
자 그러면 이제 이것이 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올라(번제) 라는 이 단어는
의미가 무엇이냐면 '올라가다' 이런 뜻입니다.
연기가 나기 시작하죠. 그것이 고스란히 어디로 갑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거죠.
그래서 번제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냐면
이것이 땅에서 태워지지만 이것이 어디로 올라가는 거예요?
전부 타서 이 연기가 하늘로, 하나님께로만 올라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므로 구원받고 세례를 받은 자의 삶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전부를 드려서 어디를 향해서, 누구를 향해서만?
하나님을 향해서만 올려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같은 삶을 살아도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연기가 땅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어요.
같은 삶을 살아도,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땅에 머무는..
그저 이 땅과 자기 주변에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라(번제)는 오직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그 향기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무슨 죽음, 뭘 태우고 죽이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죠.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진 몸과 마음을 받으셨다'
이 말인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것은,
신약적으로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를 예표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의무가 아니라,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자연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위에서 3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