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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하나님 손바닥에 있습니다

LNCK 2023. 9. 2. 17:36

[창세기17강] 내 인생은 하나님 손바닥에 있습니다 - 고성준 목사 - YouTube

◈내 인생은 하나님 손바닥에 있습니다    창45:3~8       ☞창세기 설교모음

                                                                 ☞ 창세기18강 (이어지는 설교)

창세기의 인물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까지 야곱에 대해서 살펴봤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오늘은 그 네 번째 인물이자

창세기에 등장하는 마지막 주인공인 요셉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에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처음으로 시작하시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DNA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형성을 하셨지요.

그래서 그 DNA를 통해서, 그로부터 이어질 모든 믿음의 후손들에게

똑같은 믿음의 DNA가 흘러갈 수 있도록

'믿음이 무엇인지'를 만드셨던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인물인 요셉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도입 / 4대만에 믿음의 성숙에 이르게 된 아브라함 가문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주 존경하는 신학교 총장님을 한 번 뵌 적이 있었어요.

모임에 갔다가 되었는데,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굉장히 인상이 깊었어요.

이분이 너무 성숙하시고, 꼭 예수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분이 은사가 강력한 게 있거나, 카리스마가 있거나 이런 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설명 할 수 없는 영적인 아우라가 있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이분이 어떤 분이냐면

아주 오랜 몇 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의 사람이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의 4대째 조상이 이미 목사님이셨고..

그다음에 그의 할아버지도 목사님, 아버지도 목사님.. 목사만 4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의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 그 아우라가 거기서 나오는 거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지요.

한국은 복음의 역사가 아직 135년 좀 넘는.. 역사가 서구에 비해 짧기 때문이죠.

근데 미국에 보면, 신실한 목회자나 성도 가문의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분들을 보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의 가문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뭐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거나, 막 죽은 자를 살리거나 이러는 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성숙함에서 나오는 어떤 아우라들이 있습니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진

어떤 성숙한 믿음, 그것이 보여주는 어떤 힘이 있다는 거죠.

요셉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대를 이어오는 믿음

요셉은 정확히 4대째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4대 손이었죠.

그래서 요셉은 바로 이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우라가 있는 크리스찬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듯이

요셉도 역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핵심은 뭐냐면

'성숙한 믿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에요.

아브라함 때는 믿음이 시작되는, 믿음이 개척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성숙하다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돌파하고, 시작되고.. 뭐 그런 모습이었다면,

요셉 대에 이르면, 이 믿음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게 되는데

믿음이 성숙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완전(성숙, 온전)해지면, 이런 모습이 되는 구나'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요셉의 믿음이요, 요셉의 삶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믿음의 여정이

요셉 때에 이르면 비로소 성숙한 믿음으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성숙한 믿음이,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도달해아야 될 최종 종착지인 거지요.

우리의 믿음도, 막 시작하는 믿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점점 발전되고 점점점 성숙해져서,

요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런 믿음의 종착력에 이르게 되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믿음의 특징>이 뭘까요?

'성숙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 성숙한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입니까?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요셉의 성숙한 믿음의 내용은 뭐냐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셨다"는 믿음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그 얘기를 하고 있죠.

'당신(형)들이 나를 이곳(애굽)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든

하여간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 믿음이 바로 요셉이 보여주는 성숙한 믿음입니다.

'나를 애굽에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분은, 바로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나를 옥에 가게 한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로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의 꿈을 풀어주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성숙한 믿음의 핵심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거예요. God is in control

하나님이 모든 것을 컨트롤하신다는 거예요.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손밖을 벗어나서, 컨트롤할 수 없는 어떤 변수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과, 완전한 하나님의 컨트롤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요셉이 보여주는 성숙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삶에 대한 이 믿음이 있으십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든 God is in control,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될 믿음의 종착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그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내 인생의 성공뿐만 아니라, 고난과 힘든 일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나 실패로 인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고난이 왔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도 없고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고난이 오든, 아니면 성공을 하든 누가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 데 누구세요? 하나님이세요.

여러분의 믿음도, 이 종착지까지 이르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요셉의 믿음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요셉의 성숙한 믿음의 특징은, 상황에 개의치 않았어요.

원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숙한 믿음은 원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떤 상황 가운데 있어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원망과 불평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척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얼마나 원망하는가, 얼마나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척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성숙 해지면 성숙해질수록, 원망이나 불평이 없어지는 거예요.

여러분의 믿음이 어느 정도 수준에 와있는지를 보려면

여러분의 말을 잘 들여다 보십시오.

특별히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재수없는 일을 당했을 때

뭐가 튀어나오나 보세요. 그게 우리 믿음의 척도라는 거예요.

요셉은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이 요셉을 보면, 요셉의 인생은 아시다시피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기구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죠.

요셉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납니다.

적어도 큼직큼직한 사건이 세 번 일어나는데, 사람들에게 크게 세 번 뒤통수를 맞습니다.

그냥 작게 맞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뒤통수가 핵폭탄급입니다.

첫 번째 뒤통수는 친형들이었습니다.

친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여러분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꿈 많았던 정말 행복했던 십대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노예가 됩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의 노예도 아니고, 먼 나라, 말도 통하지 않는 이집트 나라에 가서

노예가 됩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악몽으로 바뀐 거죠.

여러분 이거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친형 한 두세명이, 작당을 해 가지고 여러분을

필리핀의 새우잡이 섬에다 팔아버린 거에요. 이거하고 지금 똑같은 거잖아요.

돌아올 수도 없는.. 필리핀의 새우잡이 섬.. 이거와 비슷한 겁니다.

여러분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죠. 아마 보통 사람이 이런 사건 한 번 겪고 나면

정상적인 멘탈을 가지기가 힘들 겁니다. 그것도 가장 믿었던 혈육이...

두 번째 사건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보디발의 아내입니다.

억울하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해서,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해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감옥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정치범들이 들어가는 감옥이에요.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술 맡은 관원한테, 꿈을 해석해 주고,

'당신이 복직되고 나면 나를 기억하소서' 했는데, 그가 까막득하게 잊어버린 거예요.

이게 하여간 요셉이 겪었던 큼직큼직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아무 부족함 없던, 꿈 많던 소년 요셉이

그 삶 가운데 폭풍이 치기 시작하는데... 하여간 이런 일들이 겪게 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절망의 끝에 위치한 곳이죠.

도대체 거기서 요셉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주 생각이 복잡하지 않았겠어요?

타국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부족해서, 다시는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아주 절망적인, 절망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어찌어찌 적응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제 왕의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 주죠. 그리고 이렇게 부탁합니다.

40:14~15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래서 요셉의 예언대로 이 술 맡은 관원이 감옥을 나가서 복직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요셉은, 이제나 저제나 2년을 기다렸어요. 41:1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요.

여러분, 이런 사건은, 일생에 한 번만 경험한다고 해도, 멘탈이 무너질 겁니다.

이런 일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인간이 싫어집니다.

인간이 싫어지고.. 인간을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고..

모든 인간이 다 그런 인간처럼 보이고.. 그러지 않겠어요? 멘탈이 무너질 겁니다.

그리고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겠죠.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는 조금 다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요셉의 반응, 요셉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성경에 하나도 안 나온다는 거예요.

다른 조상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보면

성경에 감정에 대한 묘사가 많이 있습니다.

야곱이 화를 내기도 하고, 억울해 하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하고.. 이제 나오거든요.

그런데 요셉 이야기에 이르면, 요셉이 뭐 억울했다거나, 분노했다거나, 좌절했다거나,

원망했다거나... 하여간 요셉의 이 반응을 묘사하는 단어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아요.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요셉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아요.

뭐 화냈다는 말도 없고, 노했다는 말도 없고, 좌절했다거나, 원망했다거나, 억울했다거나..

하여간 요셉의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게 여러분 뭔지 아세요? 바로 요셉의 믿음의 저력인 거에요.

나중에 보면 요셉이 왜 원망, 억울, 한탄하지 않았는지를 기록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죠. 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억울해할 이유가 없다는 거죠.

나를 애굽에 보낸 것도,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나를 감옥에 들어가게 한 것도,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술 맡은 관원이 나를 잊고 지낸 것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거에요.

나를 애국의 총리가 되게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요셉은 이 믿음이, 철저하게 그의 믿음의 기초를 깔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그 일 때문에 원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아니면 교만하거나 그럴 이유가 없었다는 거예요.

형들이 한 게 아닌데, 원망할 이유가 없어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곳에 두신 거예요.

그래서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각해 보세요. 술 맡은 관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됐겠습니까?

또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술 맡은 관원을 만났겠습니까?

애국에 팔려가지 않았다면, 감옥에 갔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계획은, 사람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작품이라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작품이라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도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불순종하고 엉뚱한 짓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뒤틀어 놓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뒤틀린 상황 가운데서도

어떻게든지 우리 인생에 고비고비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축복하는 분이세요.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시는 분이세요.

물론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최선의 복은 놓쳐버릴 수 있어요.

그러고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그 다음 (차선의) 복을 주시려고 그러시는 분이셔요.

거기서 또 우리가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복을 놓쳐버릴 수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 다음으로 (차차선으로)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 분이셔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지,

저주하는 분이 아니세요. 또 잊어버리거나 실수하지도 않는 분이세요.

시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고 서는 것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이라 그러시죠.

절대로 놓치는 것도 없으시고, 실수 하는 것도 없으신 분이세요.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의 내용입니다. God is in control.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을 컨트롤 하고 계신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이것이 여러분 요셉이 가졌던 믿음이고, 성숙한 믿음의 내용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첫 번째 특징은.. 요셉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의 삶 가운데도, 믿음이 있다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들.. 원망의 말이 나오느냐, 감사의 말이 나오느냐?

이것이 내 믿음의 척도예요.

내 안에 어느 정도 성숙한 믿음이 있는가?

그것은 '내가 믿습니다' 이런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요.

'감사의 말이 나오는가?' 아니면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오는가?'

이것이 믿음의 정확한 척도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믿음의 척도가 굉장히 낮다면... 늘 불평이 나오고, 늘 원망이 나오고,

'그 사람 때문에 그랬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늘 이런 부정적인 얘기가 나온다면, 환경에 대한 원망이 나온다면...

죄송하지만 여러분의 믿음은 굉장히 베이비라는 거예요.

성숙한 믿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이해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분노할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아요.

요셉은 여러분, 원망과 불평의 기록이 한 번도 없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2. 두 번째 요셉의 성숙한 믿음은 <주어진 일에 충성>되게 합니다.

주어진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요셉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여러분 노예에게 무슨 소망과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노예가 열심히 일하면 승진할까요? 노예가 열심히 일하면 상여금이 있습니까?

노예가 열심히 일하면 자유인이 됩니까? 아니요.

노예는 미래가 없습니다. 노예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노예는 그냥 열심히 일해도 노예고,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노예에요.

그래서 노예는 보통의 경우,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예 근성'이란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요셉은 좀 달랐어요. 요셉은 노예가 됐는데, 그냥 대충 대충 떼우지 않았어요.

노예처럼 일하지 않았습니다.

39:5~6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여러분 요셉이 일을 엄청 잘했다는 뜻입니다.

일을 잘못하는 사람에게 주인이 모든 걸 맡기겠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노예도 부족해서 죄수가 되어서 감옥에 갑니다. 이 감옥은, 정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정말로 거기는 그냥 시간을 버티는 곳이지, 열심히 일하는 곳이 아니에요.

그런데 요셉은 이곳에서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39:22~23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간수장이 모든 행정적인 일들을 다 요셉에게 맡겼다는 거예요.

맡겨놓으면 충성되게 잘하거든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모든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기고,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았대요.

요셉은 여러분 감옥에서도, 일반 사람들하고 다르게 일했습니다.

충성되게 최선을 다 했어요.

이것이 여러분, 요셉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곳에 보냈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신경씁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는가'를 신경썼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신 곳에서는,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감옥이라 하더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직이나 변두리..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것은, 누구를 향한 거예요? 하나님이시죠.

눈에 보이는 인간 리더를 향한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결국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지 아십니까?

보수와 승진 때문에 열심히 일할 건지, 대충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떤 사람도 바로의 궁궐에 갖다 놓으면, 게으르게 일할 사람이 없어요.

거기는 조금만 열심히 하면, 상상할 수 없는 보상이 주어지는 곳인데

왜 열심히 일 안 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보디발의 집에서 어떻게 열심히 일하냐는 거예요.

문제는 감옥에서 어떻게 일하느냐는 거예요.

거기는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별로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상과 인정에 의해서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면, 궁궐에 있을 때는 몰라요.

한직에 있을 때, 어떻게 일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돼요.

많은 크리스찬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가면 열심히 할 거에요. 나도 그런 일 맡겨주시면 잘 할 거에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일을 안 맡겨주실까요?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자리에 올라가게 하지 않으실까요?

힌트를 제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세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이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인지를 보기 원하시는 거예요.

'나를 이 자리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내게 이 일을 맡기셨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심정으로 그 일을 하면,

결국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에 쓰십니다. 이건 절대 불변의 원리예요.

많은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해요.

내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든지, (그래서 내가 천한 일을 한다고..)

아니면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고 여깁니다.

'내 인생은 왜 맨날 꼬일까? 왜 맨날 이렇게 힘들까?'

아니요. 여러분, 그런 생각 때문에, 거기서 못 벗어나는 거에요.

요셉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를 여기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셔. 보디발의 집에 보냈은 분도 하나님 이시고

나를 감옥에 보냈은 분도 하나님 이시고..'

이 믿음이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를 쓰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믿음이 없으니까 맨날 부정적인 생각을 해요.

'내 인생은 왜 안 풀릴까? 나는 왜 여기서 못 올라갈까?'

성숙한 믿음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God is in control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자리에 있어도

하여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나를 여기 보내셨으니까!

신약에서 예수님도 이 말씀을 하셨 습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여러분 이게 성경의 원리고, 영적인 원리라는 거예요.

작은 것에 충성된 사람을 보시고, 큰 걸 맡기신다는 거에요.

맨날 큰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왜? 영적인 원리입니다.

크고 중요해 보이는 일만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받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크고 중요한 일을 왜 추구하겠어요?

자기 안에 있는 야망 때문에 추구하는 거지, 하나님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거겠어요?

하나님 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일이 크든, 작든

중요하든, 안 중요하든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기 때문에, 나는 이 작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작다고 무시하더라도,

나를 여기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게 일하는 거에요. 이게 여러분 영적인 원리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거에요. 왜?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거든요.

예수님은 여러분, 왕이셨고,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작은 일을 무시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사람들 눈에 작아 보이고,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은 일에, 성실하고 충성되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위대함 아니겠어요?

그리고 여러분, 오늘날 크리스천의 위대함이 어디서 드러나는 겁니까?

여기서 드러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보상이 있는 일,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일,

크다고 생각하는 일, 거기에 충성되고

그 반대의 일에는 충성되지 않지만

크리스천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 사람들이 다 피하는 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 그런 일들에도 충성되게 최선을 다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크리스천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줄로 믿습니다.

제 대학 때 친구는 의대생이었어요. 의대생들은 시체 해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시체 해부를 하고 나면, 그걸 치워야 되는데

아무도 치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친구가 어느 날 결단을 하고 '시체 치우는 건 내가 계속 하겠다'

그래 가지고 학생인데, 해부하고 나면, 시체 치우는 일을 계속 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됐을까? 사람들이 그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거죠.

'쟤는 뭔가 다르다'

거기서 크리스천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거예요.

시체 치우는 거,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겠어요?

시체 치운다고 누가 알아주기를 해요?

그저 귀찮고, 싫고,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 일을 계속 하니까, 결국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위대함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지역에 원전이 터졌을 때,

그때 원전사고 수습을 위해 결사대를 모집했습니다.

그 결사대에 자원한 사람들 중에, 일본 크리스천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이라서, 그 결사대에 자원했다는 것이죠.

모두가 기피하는 그 일을, 목숨을 버릴 각오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위대함도 똑같이 거기서 드러났거든요.

예수님의 위대함은 여러분 크고 중요한 일을 막 하셔서 드러난 게 아니었어요.

굉장히 크고 위대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거의 인식하지 않는 일, 즉 죄인들의 친구, 세리들의 친구,

별로 보상이 주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일들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되셨다는 거예요.

거기서 예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났다면

크리스천의 위대함도, 같은 종류의 위대함이 있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직장에서 일하시는 분들,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고 인식하셔야 됩니다. 직원은 주인처럼 일하십시오.

사원은 사장처럼 일하십시오. 알바생은 정규직처럼 일하십시오.

이것이 성숙한 믿음이고, 크리스천의 위대한 영광인 줄 믿습니다.

▲3. 요셉의 성숙한 믿음의 세 번째 특징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이 했던 말입니다.

요셉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왜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자기가 왜 아등바등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겠어요?

되게 하시려면 하나님이 되게 하실 텐데요...

여러분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고자 하는 유혹이 생겨요? 왜요?

이거 넘어가면 뭔가 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God is in control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셔, 모든 것을 통치하셔!'

 

그러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이 되게 하시겠지'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실수도 안 하시고, 능력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세요.

하려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하신다는 거에요.

그런데 왜 내가 굳이 이걸 넘어갈 필요가 있겠어요?

넘어갈 이유가 없지요.

넘어가는 게 바보 같은 일이죠. 어차피 하나님이 하실 건데, 내가 뭐하러 위험감수하고 넘어가요?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하는 믿음이 없으면, 그러면 사람은 불의와 타협을 하게 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에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선을 넘어갈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혹시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 너무 스트레스 갖지 마세요. 삶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 갖지 마세요.

제 안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저는 정말 이 믿음이 있어요.

저희 아내가 증인인데, 별로 저는 스트레스를 많이 안 받습니다.

중요해 보이는 일이 막히면, '할 수 없지, 하나님이 막으신 걸 어떡하라고?'

그런데 제 안에 진짜 그 믿음이 있어요.

진짜 중요해 보이는 일이 막혔어요. 그러면 어떡하라고? 하나님 막으신 걸!

 

물론 최선을 다하긴 합니다. 진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충성되게 해요.

그런데 충성되게 했는데, 만약 일이 안 되면...

안 되면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이 막으신 건데.. 딴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러다 보면 여러분 스트레스를 별로 안 받을 수 있어요.

삶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 마세요.

그냥 문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문을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셔요. 아멘!

삶의 의미와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거예요.

삶의 의미와 열매는, 하나님 앞에서 맺어지는 거예요. 상황하고는 관계없어요.

무슨 얘기냐면, 요셉은 평생을 감옥에서 죄수로 보냈어도 노 프라블럼 이었을 거예요.

물론 사람인지라, 나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생각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나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인생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다면,

주변 상황과 환경과는 관계없이

사람은 의미 있고 충만한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의미와 성공을 어디서 추구하고 계십니까?

이거 다시 한 번 짚어보셔야 됩니다.

많은 경우 교회를 다니면서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삶의 의미와 성공을 어디서 찾고 있어요?

보상과 사람의 인정에서부터 찾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곳에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중요.하지 않은 곳에 있으면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낙심하고 억울해합니다.

아니요. 여러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는 그런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의미와 성공이 결정되는 거예요. 아멘!

현대인들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좀 스트레스 없이 사셨으면 좋겠어요.

염려 마세요.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요.

정말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이 막혔다... '좀 쉬라는 뜻인가 보지?'

하나님께서 좋은 계획이 있으시니까 그렇게 하신 것이죠.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이 만약 성사되지 않았다면,

그냥 이불 깔고 편하게 주무시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믿으십시오.

스트레스 없이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등바등할 필요 없습니다.

▲4. 하나님은 성숙한 믿음을 가진 요셉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복이 있는데

그 복 중 하나가 뭐냐면, 사람들 사이에 높여주시는 거예요.

39:1~3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의 평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고, 여호와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셔서

보디발 집에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보았다'는 거예요.

'아, 저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하시는구나' 사람들이 다 알았다는 거예요.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죠. 39:20~23절을 읽어보십시오.

감옥에 있는 간수장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저 사람은 뭔가 있네,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네' 다 알았다는 거예요.

바로의 궁전에서는 어땠습니까? 41:37~40절을 읽어보십시오.

바로의 궁전에서도 사람들이 알았다는 거예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형통하게 하시는 사람이네' 하고 알았다는 거예요.

성숙한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어떤 복을 주시냐면

사람들 사이에 높아지는 복을 주십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대충 믿음을 갖고 있어서는 이렇게 안 됩니다.

대충 어설픈 믿음은요, 사람들 사이에 오히려 오해를 사요.

뭐 믿음 있다 그러고, 교회 다닌다 그러며 떠벌이고 다니는데,

보니까 살아가는 건 자기하고 똑같아요.

그러면 별로 사람들이 그를 높이지 않아요.

오히려 경멸하고 조롱하고 뭐 그래요.

그런데 요셉처럼 진짜로 성숙한 믿음으로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요. '어? 뭔가 다르네?'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같네' 안다는 거예요.

성숙한 믿음에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그를 높여 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은 꼭 어떤 세상적인 포지션이 올라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것 같아도, 참 성도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아멘!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무엇 때문에? 요셉과 같은 성숙한 믿음 때문에!

포지션 때문이 아니라, 성숙한 믿음 때문에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요셉의 성숙한 믿음 다섯 번째 특징은

성숙한 믿음은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는 뭐니뭐니 해도 오늘 본문입니다.

형들과의 재회!

정말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형들을 만나는 장면이죠.

그런데 형들을 만나서 요셉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에게는 용서의 DNA가 있었어요.

형들만 용서한 게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셉이었다면, 총리 되고 나서 제일 먼저 뭐 했을 것 같아요?

보디발의 아내부터 찾았을 거예요. 시시비비를 가렸을 것입니다.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그 얘기 아니에요.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얘기가 그 다음엔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갔다는 거예요. 왜요?

요셉이 형에게 했던 거랑 똑같은 원리예요.

'나를 감옥에 보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를 애굽에 보낸 사람은 형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이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 용서가 쉬워져요. 왜 용서가 어려운 줄 아세요?

'그 놈이 그랬다고 생각하니까' 어려운 거에요.

'어떻게 그 놈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런데 '다 하나님이 하셨어!' 이 믿음이 있으면 용서가 쉬워져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아무리 황당한 일을 당해도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용서가 쉬워져요.

용서가 중요한 이유가 여러분 뭔지 아십니까?

용서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축복하실 때 사용하시는 통로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을 통해서 축복하신다는 거예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아주 엄청난 흉년의 때에 구원함을 받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요셉을 통해서!

이 복이 누구를 통해서 온 거예요?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온 것이죠.

요셉이 총리대신에 올라가는 복을 누렸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술 맡은 관원을 통해서요.

잘 보세요. 여러분, 축복의 통로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용서하지 않으면 뭐예요? 축복의 통로가 막혀버리는 거에요.

축복의 통로들에 큰 돌멩이들이 하나씩 가로막고 있는 거에요.

축복이 오려고 그러는데 올 수가 없어요. 왜 통로를 막고 있으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축복의 통로들이 잘 뚫려 있으십니까?

혹시 축복의 통로가 무너져 있지는 않으세요? 그럼 빨리 재건하셔야 됩니다.

축복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 있지 않으십니까? 빨리 치우 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을 누리지 못하는 거예요.

용서는, 여러분 먼저는 철저하게 나를 위한 것이지,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용서는 철저하게 여러분, 먼저는 나 자신을 위한 거예요.

축복이 흘러와야 되는데, 다 막혀 있는 거에요.

용서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여러분 그 사람을 통해서 축복이 못 흘러오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으로도 영향을 미칩니다. 영적으로 축복의 통로가 꽉 틀어 막혀요.

막혀있거나, 무너져 있는 축복의 통로가 있다면.. 제거하셔야 됩니다.

막혀있는 축복의 통로가 있다면.. 뚫으셔야 됩니다.

어떻게? 용서하심으로!

그런데 이 용서는 어디서부터 온다고요? 믿음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용서는 내 의지가 아니에요. 믿음에서부터 오는 거에요.

어떤 믿음? 'God is in control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는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있어요.

내 손으로 놔도, 하나님이 주실 거면, 반드시 내게 주세요.

내가 아무리 움켜잡아도, 하나님이 안 주실 거면, 내 것이 안 돼요.

근데 내가 그냥 다 놓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기로 작정한 것은요,

내가 아무리 손을 다 놓고 다 가져가라고 해도..

결국 갖다가 여러분의 손에 다 쥐어주실 거예요.

여러분 이거 경험해보셔야 됩니다. 저는 진짜 경험했어요.

'다 가지라고.. 마음대로 다 하라고..' 이렇게 다 양보하고, 다 내어줘도

하나님이 제게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이 다 제 손에 쥐어주시더라고요.

저는 지난 3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처음부터 이런 믿음이 있었던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제 안에 성숙하게 만드신 믿음의 종착지는 여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요즘은 누가 뭐 달라고 하면 다 줘요.

왜? 그거 내가 움켜쥐고 있어봐야 사이만 나빠지지요.

다 양보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결국 하나님이 제게 주실 것은, 다 돌아서 제게로 오더라고요.

그런데 제게 안 주신 일은, 애당초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거에요.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는 것은, 제가 붙잡겠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엔 제 손에서 다 빠져나가는 거예요.

말씀을 마칩니다.

요셉은 그 험난하고 기구한 인생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에 들거나, 복수를 맹세하거나.. 이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주가 하셨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둘 중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했다' 아니면 '저놈이 그랬다'

일이 잘 되면 '내가 했다!' 그러죠.

일이 꼬이면 '저놈이 그랬다. 저 놈 때문이다' 그러죠.

둘 다 틀렸습니다. 내가 한 것도 아니고, 저놈이 한 것도 아니에요.

모든 일은 누가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이게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될 믿음이에요.

일이 잘 돼도, 내가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된 거예요.

일이 꼬여도, 저놈이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요셉의 믿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교만할 것도, 낙담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 일이 안 되면, 그냥 자리 깔고 주무세요. 그냥 푹 쉬세요.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다음 기회를 기다리십시오.

다음 시간에 나누겠지만, '요셉의 축복'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그 가지가 담장을 넘었도다'

그게 뭐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인 줄 믿습니다...

그럼 우리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