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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LNCK 2023. 9. 6. 23:47

https://blog.naver.com/karamos/80119393508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요11:1~44                 2006.05.28.

 

사랑하는 사람, 즉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부모 혹은 가까운 친구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실제로 그런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경우를 가끔 겪어왔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분이 만수 萬壽를 누리고 "이제 가셔도 원이 없다"는 생각이 들 경우에는

그런대로 견딜만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참 나이에 그런 일을 당할 때면,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아직 떠나보내야 할 때가 아닌데, 아직도 더 함께 있고 싶은데,

그렇게 가기에는 너무도 억울한데, 전혀 손쓰지 못하고 당해야만 할 때,

우리는 정말 낙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어가는 그 사람을 살릴 방도가 있는데,

거기에 손이 닿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한다면, 얼마나 더 한스럽겠습니까?

 

제가 설교 서두에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설명

 

예루살렘에서 약 4Km쯤 떨어진 곳에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아주 친근하게 지내던 가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청년과 그의 두 누이, 즉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마르다와

내성적이고 정적인 마리아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남매를 모두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때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

즉 요단강 건너쪽에 머물러 계실 때였습니다. 요10:40 그들과 멀리 떨어져 계셨죠.

 

나사로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우선 손을 쓸 수 있는대로 손을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험도 없고, 병은 악화되어 갔습니다.

할 수 없이 두 자매는 예수님에게 기별을 보냈습니다.

 

어떤 질병이든 즉시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고는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소식을 듣는 즉시 달려와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겉으로 냉담힌 반응을 보이십니다.

나사로의 위급한 상태를 전해 준 사람에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4절)라고 말하시고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습니다(6절).

 

이틀 후에 예수님은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7절)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틀 길을 걸어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장면을 바꿔 나사로의 집을 한 번 들여다 보십시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면서 신신당부했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쉬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속히, 예수님을 찾아가 소식을 전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틀이 지나, 즉 심부름꾼이 겨우 예수님에게 당도했을 즈음에,

나사로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틀만 더 살아 주었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치료해 주셨을 텐데!

그랬으면 오래도록 함께 살면서 행복을 누렸을텐데!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했습니다.

이틀을 더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감도 일었습니다. 그들은 비통한 슬픔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쉬움이 커지면 탓할 대상을 찾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가 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탓하더니,

얼마 후에는 그들과 함께 있어주지 않은 예수님을 탓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 계실 때면, 그리고 예루살렘을 드나드실 때면,

항상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들러 가셨습니다.

 

어떤 때는 그 집에서 며칠 씩이나 머물러 계시면서, 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많은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역을 돕는 것이 너무도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데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만,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삶의 의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아,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그분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은 옆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여러 가지 질문이 엉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뭐란 말인가? 우리 집에서 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을 바쳐 봉사했는데, 정작 우리의 문제는 해결받지 못했으니,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이용당하고 버려질 대상이었단 말인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던 예수님은, 어찌하여 우리가 그분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았단 말인가?

우리가 그분의 사역을 위해 바친 그 모든 희생은 뭐란 말인가?

 

하나님은 어찌하여 며칠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그렇게 비정하게 우리를 대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당도하면 따져 물을 셈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가 되었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완전히 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치 이용만 당하고 버림 받은 것 같은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어려운 순간에 우리 곁에 있어주지 않은 것도 한스러운데,

사랑하는 친구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도 모른체 하셨단 말이지?

예수님에게는 나사로가 죽고 사는 것이 그렇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단 말이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이지? 우리 존재가 그분에게 그렇게 하찮았다는 말이지?"

 

사랑하는 형제를 잃어서 비통한 그들의 가슴은

예수님의 무심함 때문에 더 심하게 찢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보다, 정성을 다바쳤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이

더 견디기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비통해하는 가운데 네 번째 날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갈 즈음,

마침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두 자매에게 날아들었습니다.

 

내성적인 마리아는 그 소식을 듣고도 집에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외향적 적극적인 성격의 마르다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바쁜 걸음으로 집을 나서서, 오고 계신 예수님을 길에서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의 서러움과 섭섭함을 이렇게 털어 놓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21절).

간단한 한 마디이지만, 이 말 속에는 마르다의 마음 속에 있던

그 복잡한 감정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도 역시,

주님을 만나자 마자 똑같은 말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섭섭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2절).

 

◑예수님의 교훈 “지금, 여기” Here and Now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서 한 첫 마디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21, 32

 

이 말로써, 두 사람은 형제 나사로가 죽은 책임을 예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할 능력을 가진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말 속에는 자신들이 그분을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는 그렇게도 자주 드나드시더니,

정작 우리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는 우리 곁에 계셔주지 않으셨지요?

어쩌면 그럴 수가 있지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와 주지도 않았으니, 더욱 섭섭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24절)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화 밑으로 아주 뜨거운 감정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십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마르다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무심하게 늑장을 부리고 나서, 겨우 하신다는 말씀이 그런 겁니까?

마지막 날에 모든 믿는 자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쯤은 나도 압니다. 그런 말로 저를 위로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26절).

 

이 말씀의 숨겨진 뜻을 다 알기 어렵지만, 대략 이런 뜻입니다.

"마르다, 너는 내가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에 대해 말하는 줄 오해하고 있구나.

아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일어날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네 오라버니를 ‘지금’ 살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네가 눈으로 확인할 것이다.

자, 마르다, 이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마르다는,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27절)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보다 더 완벽한 고백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39절에 보면, 마르다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매장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했을 때,

마르다가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하면서 말립니다. :39

 

그러자 예수님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40

 

그러니까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마르다의 고백은 :27

‘반쪽 고백’(imperfect confession)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만,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지금’ ‘그녀에게’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때에 모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지금’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실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믿었지만,

‘자신’에게는 어떤 일을 하실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알았지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분인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정확하고 완벽한 고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믿고 따릅니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셔서 우리 중에 영으로 함께 하심을 믿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에게 연합되면 그분의 능력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역시 교리적으로는 완벽한 고백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고백이 지금’ ‘여기에서살고 있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이라는 탄식과 불평이 자주 흘러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들과 아픔들이 모두,

예수님이 우리 사정에 무관심해서 생긴 것처럼,

혹은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서 생긴 것처럼,

"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느냐?"면서 투정하고 화를 냅니다.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할 때마다 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거냐고,

왜 이렇게 응답이 더딘 거냐고, 왜 내 사정을 몰라 주시는 거냐고,

아쉬움과 섭섭함을 토로하곤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는

"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좀 더 서두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때가 늦어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그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누가 오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아무리 세상의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곁에 계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해 줄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 대목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는 까닭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 예배를 안식일 예배로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새로움을 입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림으로 부활하셔서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늘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매일, 매 순간 만나 사귀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더 밀도있게 그분을 만나 사귈 수 있습니다.

 

매일 주님과 사귀는 삶을 열망한다면, 주일 예배를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 예배가 충실할수록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지금 여기서 Here & Now

만나서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 설교의 주제

본문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목적이, 이 교훈을 주시려는데 있다고 봅니다.

먼 미래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 때마다 듣고 또 들어야 할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왜 복음입니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면,

죽음이 가시고 생명이 움트며, 어둠이 지나가고 빛이 비치며,

근심이 지나가고 평안이 자리잡고, 눈물이 그치고 기쁨이 터져 나오며,

한숨이 그치고 웃음소리가 터져나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고, 기쁨을 발견할 수 있으며,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이번 영성훈련포럼에서 강사로 나섰던 USC의 철학 교수인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강연 중에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밥 호프가 부활했다면 여러분은 행복하시겠습니까?"

밥 호프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분들을 생각해서, 이 질문을 바꾸면 이런 것입니다.

"서영춘 씨나 이주일 씨가 부활했다면 어려분은 행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부활 신앙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부활을 이렇게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 그게 아니라)

그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영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회중) 가운데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그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26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고, 마침내 그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복음입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에게는 죽음까지도 이길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머리로만 인정하고, 마음으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분의 능력이 놀라운 것은 알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부르짖지만, 정작 그 능력이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도록

준비하는 일에는 주저합니다.

 

나사로를 살려내기 위해 무덤 문을 열라고 예수님이 명령했을 때,

그래 보아야 부질없는 일이라고 만류하는 마르다의 태도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앞에 모시고도 여전히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자신을 살릴 약봉지를 옆에 두고도,

그것을 먹지 않아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는 사람과 같은 형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철학이나 계몽을 넘어섭니다.

인간을 계도하고 순화시키자는 것도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티켓을 얻자는 것도 기독교의 핵심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가르치자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과 전혀 상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하셔서 우리 중에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사귀고, 그분에 의해 변화되고 사로잡혀, here & now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만을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천당 갈 것만을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 ‘여기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부활의 사건을 사모하고

그 능력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앞으로의 목회 방향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과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고민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삶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보게 되면서, 고민이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 속담에 "꽃 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만,

말 그대로, 문제 없는 가정, 문제 없는 사람이 없음을 봅니다.

 

때로는 그 문제가 너무 크고 깊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 매일같이 겪는 이 절절한 고통과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헌신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진다 한들,

교회의 모든 노력은 의미없는 몸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성도들을 ‘목사가 필요없는 성도들’ 로 키우는 데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키우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키우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 일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주님의 키우심을 방해하여

성도들을 유아기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는지요!

 

이같이 잘못된 양육으로 인해, 문제를 직면했을 때,

그들과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찾지 않고,

두리번 거리면서 이렇게 불평하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능력있는 주의 종이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걸!"

"어디를 가면 능력있는 종의 안수기도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 교회가 좀 더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우리 목사님의 영성이 좀 더 강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자,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세워 두고,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와 계신 부활의 주님과 연결되어, 그분과 함께 사귀어 살아가면서,

그분의 능력을 힘 입으면,

능력있는 종의 안수기도가 없이도 부활의 능력은 얼마든지 힙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계신 부활의 주님은 무시하고 능력의 종만 찾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흘러 넘치도록

우리의 삶을 구조 조정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막연하게 도움만을 간청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겨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뭔가 기적적인 구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만을 기다리고 울고 앉아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루 하루의 생활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사귀어 살면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그 능력으로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믿는 사람다운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가 ‘목사가 필요 없는 성도’입니다.

목사가 필요 없는 성도라고 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주님을 만나 사귐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여

목사에게 의존하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비로소 목사의 동역자로서 함께 건강하게 사역할 수 있습니다.

 

영성이 파리하게 야위어 언제고 목사에게 의존하는 성도들은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에서 언제나 무력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인이라고는 하지만, 교인다운 차별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병약한 신앙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더욱더, 하루 하루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귀어 사는 삶에 대해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럴 때, 교우들 각자는 매일 매일, 구체적으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상처를 치유받고, 역경을 극복하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이 성도들 각자의 삶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6월 첫 주부터, 8주 동안, 매주 수요일 저녁 8시에 ‘특별 기도학교’를 열 것입니다.

이 기도학교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매일 매일 부활의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훈련하는 데 있습니다.

 

수요성서연구에 참여하던 성도들과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아침에 모이던 영적 여행반 식구들은

모두 이 기도학교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이 학교의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본당에서 모이겠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영성을 키우기 위해

힘껏 참여하여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의 눈을 열어 여러분 내면에 계신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

부활의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이미 여러분 안에, 여러분 옆에, 여러분 뒤에, 여러분 가까이에 와 계십니다.

 

그러면,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혹시나 우리 사랑하는 사람이 일찍 주님 곁으로 떠나도

세상 사람들처럼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보시고는,

"주님이 진작에 여기 계셨더라면!" 이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눈을 떠서 그분을 알아보고,

여러분의 삶에 초정하며, 그분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도록,

여러분 몫의 노력을 지속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고 낙망하여 앉아서 울면서 다른 사람 탓만을 하고 있겠습니까!

떨치고 일어나 예수님 앞으로 가십시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나의 마음을 여십시다. 한 번 뿐 아니라, 늘 그분과 함께 동행하도록 영성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십시다.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게, 믿는 겁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오시어 함께 거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도우시어 주님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진실로 의지하게 하시어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빛나게 하소서.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걷는 삶으로 저희를 인도하소서.

 

그 삶을 배우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부활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