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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증명하지 말고, 예수님을 증명하십시오

LNCK 2023. 9. 8. 18:41

 

◈자신을 증명하지 말고, 예수님을 증명하십시오        막1:12~13          ▣삶의 통찰력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정체성(identity)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1. ‘네가 누구인지 증명하라’는 마귀의 시험

 

그런데 마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다가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4:3

기적으로 네 존재를 증명하라.. 는 마귀의 유혹입니다.

 

무엇을 행함으로 네 정체성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체성’은 내가 뭘 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사람들은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려 합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함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큰 차를 타고 다니려고 합니다.

무리하게 골프장에 출입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리하게 명품가방과 구두, 액세서리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리하게 큰 집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근본 기저에는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가 있는데... 그건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증명하려고 하면 늘 불안합니다.

 

사람이 언제까지나 외식적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평판과 시선에 신경 씁니다. 그렇게 살아가니, 사는 것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폄하합니다.

마귀는 이것을 부추깁니다. ‘너를 증명하라’고 합니다. ‘너를 알리라’고 합니다.

‘네가 최고가 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자신이 초라해지고 불안합니다.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수님을 확실히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나야 됩니다.

회개와 회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확실히 만난 사람의 최대 유익은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 이게 흔들리지 않는, 자기 삶의 기초가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수세를 받고 나오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을 듣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는 그 분의 존귀한 자녀’.. 이 정체성이

그때부터 마치 도장찍듯이 확실하게 자기 뇌리에 박히게 됩니다.

 

청소년, 청년들의 가장 큰 문제도.. 정체성의 불안이라고.. 어느 전문가가 진단했습니다.

거기는 학급에서, 학교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늘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또래집단 사이에 비교의식과 우열반 나눔이 극대화되는 현장이 바로 ‘학교’입니다.

 

작게는 핸드폰으로부터 시작해서, 대학생들은 개인 자동차, 개인 집이 서로 비교됩니다.

성적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아버지 재산, 할아버지 재산까지도 서로 비교됩니다.

 

그래서 청소년, 대학생, 청년들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기를 사모해야 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개인적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정체성의 불안과 열등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이 세상에는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이런 시험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향해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착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거나 증명하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낼 때,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다는 것을

세례요한은 늘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목회자,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드러내려고 한다면..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사역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흥하여진다면, 자신이 쇠하여지는 것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올려준다고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로 포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만약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더 높이 올려드리고, 자신은 낮아지고 사라지는 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잊혀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스스로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그 신분 하나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부잣집에 초대되어 식사대접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자녀는 당당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기관이나 기업에 초청되어 예배를 인도할 때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로 당당합니다.

김용기 장로님이 막사이사이 상을 받으러 필리핀에 갔을 때도,

두루마기에 흰고무신을 신고 가셨다고 하지요.

거기 간다고 평소에 안 입던 정장에, 검은색 구두 장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타이틀을 가지고 폼 잡을 필요 없습니다.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만 남습니다.

 

◑2.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신자들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돌이 떡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지만,

다른 목적으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자신에게 당면한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마귀가 시험하려는 것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현실 문제, 경제 문제,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삶이 힘들어지면,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병에 걸리거나, 삶에 위기를 만나면, 눈앞에 그것만 크게 보입니다.

지금 다급한 문제가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암에 걸린 것보다, 자신의 감기가 더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에 돋보기를 갖다 댑니다.

우리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가 중요하고, 그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부풀립니다. 거기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을 다 놓치게 합니다.

 

성도가 생존의 문제에 쫓기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삶의 목적을 놓칩니다.

생존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계속되는 문제입니다.

떡의 전쟁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귀의 전략에 빠져들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의 문제는 우리의 턱 밑까지 차오릅니다.

거부하면 실패할 것 같고, 당장 가정에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님께 떡은 솔깃한 현실의 문제, 떡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으셨습니다.

긴급한 것이요 현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 사명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실의 문제로부터 빠져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면한 문제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의 문제에 집착하여 영원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일상의 문제로 인해 소명을 놓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죠.

 

먹고 사는 문제를.. 너무 크고 중대하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에게 꼭 필요한 과제이긴 하지만, 거기에 올인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 성도는 금식을 할 때, 배고픔이 찾아오면 자신에게 이렇게 명령한다고 합니다.

음식을 갈급해하는 나의 육신아, 너는 잠잠할지어다!’

 

이렇게 자기 육신을 꾸짖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에, 자기가 너무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담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먹고 사는 생계 문제’를 너무 크게 보고,

그 앞에서 벌벌 떨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굶으신 후에도, 먹는 문제에 대해 그렇게 벌벌 떨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유혹하는 마귀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성도의 존재 이유, 정체성은

현실의 피부에 와 닿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문제가 아무리 시급하여,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아도,

현실의 문제에 연연해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를 보내신 삶의 이유를 따라, 사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거기에 굴복하면.. 평생 마귀의 시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의식주의 문제로 시험해 올 때,

한 번 이기고, 두 번 이기고, 세 번 이기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이길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시험이 시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철저히 헌신을 안 해서 그렇지,

철저히 헌신하는 종들에게는 마6:33절은 헛공약이 아닙니다.

그런 체험을 한 번, 두 번, 세 번 해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의식주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현실의 필요요, 다급한 문제라고 늘 말합니다. 늘 유혹합니다.

 

그것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처럼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래 신분과 사명을 놓치게 합니다.

 

현실의 필요에 급급해하며 사는 것은 끝없는 전쟁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사실은 아닌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게 마치 지상 최대의 과제인 것처럼, 크게 부풀려서 보고,

거기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방해되는 ‘사명 감당’ 같은 것은, 개밥그릇 차듯이 차버립니다.

 

이 시험 앞에서, 우리는 담대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죽으면 죽으리라’로 나가면.. ‘죽으면 삽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욕망은 채우시지 않지만, 우리의 필요는 반드시 채우십니다.

 

▲질병이나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일차적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문제 해결’이, 내가 예수를 믿는 일차적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 ‘질병이나 자녀나 사업의 문제’가 있더라도,

너무 안달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주님께 다 맡기고

문제 가운데서도.. 계속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암환자에게 ‘암과 함께 살아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암으로 당장 죽지 않는다면, 그 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당뇨병 환자들도, 당뇨병과 함께 10년~20년 조심조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질병이나 삶의 문제를, 주님이 우리에게 오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는,

성도가 겸손해지라는 것입니다.

그 일로, 주님을 더욱 간절히 찾으라는 것입니다.

건강해서 낙방하는 것보다, 병들어서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더 내게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질병이나 사업이나 자녀의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 해결, 고통 해결’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고,

여전히 ‘사명 감당, 하나님의 영광’ 위주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 문제와 고통은요?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다만 그 문제와 고통 때문에, 오늘을 허둥지둥 허겁지겁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문제 해결에만 내가 올인하게 된다면.. 그게 마귀가 승리하는 길입니다.

 

늘 병원에만 쫓아다니게 만들고...

늘 사업이나 남편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면 좋지만,

혹시 문제가 질질 끌고,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마십시오.

‘문제와 함께’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와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원제목 : 고통을 피하고 싶은 유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