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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의 하나님

LNCK 2023. 9. 11. 07:08

 

[창세기14] 하나님의 실재를 만나다- - YouTube

◈벧엘의 하나님            창25:10~26               ▣전도 관련글 모음

 

오늘은 야곱에 대해서 두 주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왜 그러냐면 하나님께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DNA를 만드시는

프로토타입(원형)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또 이삭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야곱의 삶을 통해서

믿음의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그런 prototype(원형) 으로 세우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봤고요.

오늘은 이제 세 번째 인물인 야곱, 야곱의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창14, 15, 16강)

 

◑모태신앙인의 대표, 야곱

 

그런데 "야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누구냐면 모태신앙들이에요.

왜냐하면 야곱은 모태신앙이었거든요. 그것도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무려 아브라함 가문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인 이었습니다.

 

아마 굉장히 부담이 있었을 거예요. 그렇죠?

오늘날 선교사님들의 자녀들 MK, 목회자들의 자녀들로 PK 태어난 사람들이

굉장한 부담을 가지듯이, 아마 그것 이상의 부담을 가졌던 사람이 야곱이 아닐까요?

대단한 어마어마한 믿음의 영웅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인이죠. 그런데 이런 모태신앙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태신앙인 만의 특징은 아니고요.

그냥 믿음 없이 교회를 오랫동안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저는 이 사람들을 '후천적 모태신앙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똑같이 가지게 되는 그런 특징인데,

 

그것은 부모님, 또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자기 믿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산다는 거예요.

모태신앙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 그렇게 자랍니다.

그냥 부모님의 믿음이 자기 믿음인 줄 알고 자라요.

 

왜냐면 한 번도 다른 걸 들어본 적도 없고, 한 번도 다른 데로 가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냥 자기 믿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자랍니다.

 

그런데 모태신앙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드렸던 후천적 모태신앙인들,

즉 그냥 별 생각 없이 교회를 오래 다녔던 사람도요,

처음에 교회 나왔을 때는 새롭게 듣는 말씀들, 또 이해가 안 되는 것들..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하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 10년 되고 20년 되잖아요.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별로 거기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안 하고, 아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이제 모태신앙들의 특징 인데

 

▲그런데 어느 순간에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자기는 믿음 좋은 크리스찬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아닌 것 같아..' 이런 순간들이 온다는 거죠.

 

자기가 추구하고 자기가 원했던 것들을 보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아무것도 다른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거죠.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내가 자랄 때는

당연히 나는 그냥 크리스찬이고, 당연히 나는 그냥 믿는 사람이고.. 이렇게 자랐는데

어느 순간 아차하는 순간에, 자각하는 순간이 오는데, 어떤 순간이냐면

'가만있어 봐, 내가 안 믿는 사람이랑 뭐가 다른 거지?

안 믿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거랑 내가 추구하는 게 뭐가 다르지?'

 

전혀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딱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는데

이 순간에 굉장히 당황하게 됩니다. 당황하게 돼요.

 

그래서 이 땅의 가치와, 하늘의 가치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는 거죠.

자기는 분명히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 보면, 다 땅의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추구하는 것도 그렇고, 원하는 것도 그렇고

다 보면 땅의 것들이에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땅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랑

자기(모태신앙인)를 비교해 보니까, 전혀 다른 것을 못 느끼는 거예요.

 

이 순간에 당황하게 됩니다. 이제 그러면서 질문을 던지죠.

'나는 크리스찬이 아닌가? 나는 평생도록 교회를 다녔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크리스찬 인 것 같아요.

그런데 보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한 번도 진지하게 믿어본 적도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또 크리스찬이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여기에 그런 사람들 많을 거예요.

특별히 우리 중딩 고딩들 중에 이런 고민을 막 시작하고 이럴 텐데,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다들 겪게 되는 어떤 과정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까 '내가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에요.

 

'나는 분명히 믿음에 대해서 의심해 본 적도 없고,

하나님 계신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또 진지하게 믿어본 적도 없어.

그럼 나는 도대체 크리스찬이냐/ 아니냐?' 뭐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야곱처럼, 어떤 위기의 순간들을 맞게 되지요.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지요.

 

그 전에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들, 내가 추구하는 것들을 보니까

그냥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랑 별반 다른 게 없는 것 같아요.

 

똑같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고

그들이 살아가는 대로 나도 살아가는 것 같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나도 추구하는 것 같고...

뭐 이렇게 되면 굉장한 이제 혼란의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자 어찌 됐든 선천적인 모태신앙 이든, 후천적인 모태신앙 이든지 간에

이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이 이야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분명히 알았을 거예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겁니다. 그 할아버지가 누구세요?

아브라함인데.. 조부 아브라함이 하나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그 아버지가 누구예요? 이삭인데, 이삭이 하나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아마 야곱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잘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였냐면?

 

'우리 할아버지의 하나님'이고,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인 거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 본 적은 별로 없어요.

그냥 그 믿음의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여기고 자라왔던 것이지

한 번도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어요.

 

그러던 야곱이 벧엘에서 무엇을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나 야곱의 하나님이구나!'

이것을 알게 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언제 야곱이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죠?

그것이 바로 벧엘의 사건이죠. 이 베델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통해서 야곱이 무엇을 알게 되냐면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신 분이셨네?' 이걸 알게 된 거죠.

'하나님이 진짜로 실재하는 분이셨네?' 이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신앙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여러분, 체험의 종교예요. 아멘? 이론이 아니란 말이죠.

저는 이 말을 100%, 1000 % 신뢰합니다.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체험하는 종교예요. 왠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요!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당연히 우리를 만나주시고, 체험하게 하시지 않겠어요?

만약 아무런 체험도 없고, 아무런 만남도 없다면..

그러면 그냥 이론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겠지만

 

만약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시다면,

뭔가 우리에게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체험을 우리가 하게 돼지요!

 

모든 믿음의 여정에 시작이 있습니다.

이 시작이 믿음이 완성됐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이후로도 가야 (성장해야) 될 길이 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는데

뭐냐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이게 야곱에게는 벧엘의 사건이에요.

 

그래서 그냥 이야기로 듣고, 알고, 익숙하게 생각하던 신앙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네!'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되는...

이 체험이 여러분, 모든 사람의 믿음의 여정의 시작인 줄로 믿습니다.

 

혹시 이런 영적인 체험이 여러분에게 있으셨습니까?

만약 아직 이 벧엘의 체험이 없으셨다면,

여러분은 이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으셔야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은 그냥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냥 종교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지금도 역사하는 분이시구나!'

이것을 맞닥뜨리는 순간, 이 체험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있으셔야 돼요.

그래야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겁니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거예요.

 

▲야곱이 말해주는 믿음을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땅의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믿음은, 영적인 실체를 경험할 때 생긴다'는 거예요.

이것이 야곱의 믿음이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보여주는 믿음은 언제 생기냐면

영적인 실체를 체험하면서 생긴다는 거예요.

 

물론 기독교 신앙에 대해, 우리가 들어서 익숙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 내 것으로 체득되는 순간은 좀 다르다는 거예요.

 

그냥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것에 여러분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까?

못 걸어요. 그건 진정 믿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그 지식이, 진짜 나의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게 진짜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는 체험들이 반드시 있다(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세 번의 사건을 살펴볼 겁니다.

-첫 번째는 벧엘 사건,

-두 번째는 양과 염소를 얻게 되는 사건,

-세 번째는 얍복강의 사건입니다.

 

이 세 번의 체험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펴볼 텐데

야곱의 믿음은요, 한 번의 사건(체험)만으로 다 완성된 것은 절대 아니었어요.

 

이 가운데 특별히 모태신앙들은 잘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자라다 보면, 초등학교 때 수련회 가서 성령체험도 하고,

그러다가 또 중고등학교 때 되면 고민이 들기 시작해요.

 

'이상하다. 나는 분명히 성령체험도 하고, 하나님도 만난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별로 세상 사람들하고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뭐 이런 모습 때문에, '과연 내가 체험했던 것이 진짜야? 의미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뭐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는데, 아니요. 그것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야곱도 보면, 이 믿음의 여정이 어디서 시작되냐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완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어요.

벧엘에서 '맞아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셔, 정말로 실재하는 분이셔!' 하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야곱의 인생을 보면, 사기 치고 다니죠.

여전히 야곱의 인생을 보면, 라반한테 이렇게 꾀 쓰고, 사기 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별의별 짓을 다 하잖아요.

 

그러다가 이제 두 번째 체험, 세 번째 체험.. 이렇게 계속되는 이 믿음의 여정을 거쳐가면서

진짜 성숙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점점점 만들어져 가는 거죠.

이것이 여러분 야곱의 여정이 보여주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뭐냐면, 야곱의 체험, 벧엘의 체험이 전혀 없는 게 문제이죠.

그건 아직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벧엘의 체험이 있었다고 해서, 믿음이 그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잘 기억하십시오.

 

야곱의 믿음이 진짜로 완성되고 성숙된 것은,

마지막의 야곱이, 굉장히 나이가 들어서, 하여간 할아버지가 되어서

먼 훗날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비로소 믿음의 성숙의 경지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완전했던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바로 벧엘 사건입니다.

 

▲그런데 모태신앙 들에게는 또 하나 주어지는 굉장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은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을 경험해서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면

거기에 부어지는 믿음의 유업(유산)이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유업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 믿음의 유업은 엄청납니다. 엄청난 유업이에요.

 

그러므로 모태신앙인 여러분들은, 믿음의 유업들을 여러분 것으로 누리시 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1세대로 1st generation, 처음으로 믿음의 개척자로 시작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지지하심과 축복이 있을 거예요.

 

왜냐면 여러분의 아버지의 믿음, 할아버지의 믿음이

유업으로 여러분들에게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축복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유업은 언제 우리가 취할 수 있냐면,

'나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취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직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았는데, 그 유업이 우리에게 물려지지는 않아요.

 

◑야곱의 벧엘 체험

 

야곱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대단한 영적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로 태어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인으로서 야곱이 추구했던 것들은, 그렇게 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았죠.

 

▲야곱이 인생에 첫 번째로 추구했던 것, 야곱이 가장 먼저 추구했던 것은 뭐냐 하면

'장자의 권리'였습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억울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차남으로 태어났죠.

이게 한 2년이나 3년쯤 늦게 태어났다면, 아예 장자권을 기대도 안 했을 거에요.

 

그런데 이게 억울하잖아요. 몇 초 차인지, 몇 분 차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자기가 먼저 태어날 수도 있었는데, 진짜 재수가 없어서

진짜 억울하게 형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아주 아슬아슬하게 장자의 자격을 놓칩니다.

 

그걸 놓쳐서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 억울함을 이제

에서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나오는 걸로.. 성경에 나와 있죠.

 

그래서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갈망 있었냐면,

장자의 권리를 자기 손에 넣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당시 근동지방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권리는 굉장히 했거든요.

 

장자는 그 외 자녀들 하고는 다른,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상속을 받을 권리를 가졌고,

많은 권리와 많은 유업들이 주어지는 특별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게 둘째로 태어한 것이 참 아쉬운 거죠.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도, 야곱 안에 이 장자권에 대한 열망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갖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합니까? 형을 속이지요.

형을 속여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삽니다.

 

그렇지만 이걸로 충분하지 않죠. 그 다음에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축복, 장자에게 주는 축복을 받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도와 줍니다.

 

어머니와 둘이 함께, 나이가 들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속입니다.

자기가 애서라 그러고 들어가서 장자의 축복을 받죠.

그래서 비로소 그가 원하던 것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야곱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지를 볼 수 있어요.

이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죠.

 

뒤에도 가보면 계속 그렇습니다. 라반을 대할 때도 보면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이제 형 에서에게 찍혀서, 미움을 받아서 도망가게 되죠.

고향을 등지고 멀고도 험한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이 두 번째로 꽂힌 것이 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갔더니 자기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어요.

라헬이라는 여인의 두 번째로 자기 눈에 꽂힙니다.

 

자기 인생에 간절히 얻고 싶고, 간절히 손에 넣고 싶은 두 번째 것을 보게 됩니다.

29:18~21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야곱이 두 번째로 손에 넣고 싶어했고, 갈망했던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열정이 얼마나 컸든지 '7년을 며칠같이' 여겼대요.

그래서 외삼촌 집에서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사실은 7년이 아니라

라반이 또 속여 가지고 레아를 먼저 주는 바람에 14년을 일하죠.

 

그래서 14년을 머슴처럼 일했는데, 한 번도 불평하지도 않고, 한 번도 멈추지도 않았어요.

이걸 통해서 우리가 야곱이 어떤 사람인지 또 알 수 있는데

이 야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포기할 줄 모르는 집요한 사람이었어요.

무려 14년을 포기하지 않고 일합니다.

 

▲야곱이 세 번째로 얻기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30:40~43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이 세 번째로 추구했던 것은 부였습니다. 부자가 되기 원했던 거예요.

라반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보니까, 라반 삼촌은 돈도 많고 아주 부잔데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나도 삼촌처럼 많은 양과 나귀와 종들을 거느린 부자가 되고 싶다' 하는 갈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목표를 정했으면 어쨌거나 얻어야지요.

 

그래서 사실 사기는 아닌데 이상한 방법을 씁니다.

30:32~39절을 각자 찾아보십시오.

 

야곱이 이제 라반하고 딜을 합니다. 자기 재산을 모아야 되니까 비즈니스를 시작한 거죠.

그래서 컨트랙트(계약)를 맺는데, 새로운 새끼가 태어날 때

아롱지고 점 있고 얼룩덜룩한 양과 염소는 자기가 가지고,

 

그렇지 않고 그냥 원래대로 순백색이거나 뭐 이런 것들은

라반의 몫으로 정합니다.

 

이때 야곱은,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껍질을 벗겨서

양들이 새끼 가질 때 그 앞에 보여줬더니 (뭘 섞어서 보여줬더니, 섞인게 나왔다는 거죠)

얼룩무늬 새끼를 낳았다는 거예요.

 

이건 유전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얘기에요.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다음 장에 보면 야곱이 이렇게 고백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무슨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창31:8~9

하나님이 그냥 자기를 지지해 주신 거죠.

그렇지 않고는 그거 보여줬다고 갑자기 얼룩양이 왜 나와요? 말도 안 되죠.

 

그러니까 이게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뭐냐 하면

야곱은 진짜 부자가 되고 싶었다는 거에요.

 

오늘날로 치면, 무슨 미신 같은 거를 사용해서라도 부자가 되고 싶었다는 거예요.

뭐 이딴 거 해가지고 얼룩 양이 왜 나옵니까? 이게 미신이죠.

이게 당시에 근동 지방에 널리 퍼진 미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게 있죠. 동전을 집에 많이 모아두면 부자가 된다든지...

묫자리를 잘 쓴다든지,

일종의 그런 미신을 동원해서라도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추구했던 게, 이 세 가지였어요.

권력(장자권)과 여자(라헬)와 돈(양과 염소)이었어요.

 

여러분 이게 야곱 뿐만이 아니라, 고금을 막루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게 <돈 섹스 권력>이잖아요. 리처드 포스트의 유명한 책이 있죠.

 

그러니까 철저하게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 했던 것을

야곱도 똑같이 추구 했다는 거예요. 아직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죠.

아직 얍복강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죠.

 

혹시 이 야곱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특별히 모태신앙인들, 여러분이 추구하고 있는 건 뭡니까?

 

감사하게도 이어지는 야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세속적인 야곱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영적인 실체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이 한 번, 두 번, 세 번 이어지면서

야곱의 진짜 믿음으로 성숙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것들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결국 마지막 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야곱이 되죠.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28:10~1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이야기는 야곱이 집을 떠나서 그 먼 길을 걸어서,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갈 때,

그날 밤에 생긴 일입니다.

하란으로 가는 중간에, 이제 날이 저물어 가지고 하룻밤을 자고 가야 됐어요.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게 됩니다.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를 삼고 거기서 자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야곱에게 강력한 영적인 체험이 찾아옵니다. 난생처음 강력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잠을 자고 있는데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죠.

 

야곱의 꿈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이 땅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땅의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또는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조우가 일어납니다.

 

이 영적인 체험이 야곱의 믿음의 여정의 <시작>이었다는 거예요.

이 체험을 통해서 야곱이 한 가지를 알게 됩니다.

 

그 날 밤에, 믿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건 아니에요. 그런데 한 가지를 알게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아!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구나!' 이 사실을 알게 돼요.

이것이 여러분 믿음의 여정의 <시작>인 줄로 믿습니다. *끝은 아닙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서 야곱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 이 벧엘에서의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야곱이 이제 세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그 첫 번째 반응이 뭐냐면, 하나님의 실재성을 체험합니다.

 

'아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거예요.

물론 이전까지 야곱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을까요, 몰랐을 까요?

 

잘 알았습니다. 모태신앙인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었고요. 아버지가 이삭이었어요.

아마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을 거예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그냥 빠삭하게 알고 있었을 거예요.

 

오늘날 모태교인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또한 성경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지요.

성경구절도 줄줄 암송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새롭게 고백하게 되는 건 뭐냐면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구나!' 하는 걸 알았다는 거예요. here & now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을 이전까지 나는, 그냥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또는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하나님..

그런 종교의 대상으로는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구나!'

즉 '하나님이 지금 살아 계시구나!'

즉 '지금 여기 내 인생 가운데 찾아오셔서, 지금 여기 내 인생 가운데 개입하시고,

지금 여기서 내 인생을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약속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구나!' 이것을 처음으로 야곱이 깨닫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요. 모든 믿음의 여정의 <시작>점입니다.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이것이 믿음이 <완성>되는 단계는 아니에요...

 

그래서 모태신앙인 여러분,

과거에 여러분도 한 때, 야곱의 베델과 같은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한 때 뜨거웠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확히 야곱이 그랬거든요.

 

물론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요. 그냥 한 번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서

굉장히 큰 방향의 전환이 생깁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안에 자아가 굉장히 셌거든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포기 할 줄도 모르고, 집요하고,

그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아가 아주 센 사람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체험을 해도 잠깐은 뜨거워도,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면, 다시 자기가 원래 추구하던 것을 추구하려고 그래요.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엘의 사건이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것을 체험하는 사건이에요.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에요.

 

△저도 그랬습니다. 재간증을 잠깐 나눌게요. 저도 모태신앙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컸지만

하지만 저도 보면 야곱이랑 좀 비슷한 게 있어요.

 

야곱은, 목표한 게 있으면, 그것을 이룰 때까지는 결국 포기 할지도 모르고

지치지도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게 야곱이죠.

 

그런데 저도 제가 원하는 게 있으면, 꼭 그것을 해야지만 만족하고

그것을 성취해야지만 만족하는.. 그런 성격 을 타고났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조금 나이가 들고 나니까

가장 원하는 건 당연히 우리 또래 청소년들이 그랬듯이, 좋은 대학에 가는 거였죠.

 

'입시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가면 내가 행복하겠다'

그래서 서울대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 소원이 제 안에 굉장히 컸어요.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너무 행복했는데 딱 약발이 6개월 갔어요. 딱 6개월 지나고 나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제 안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혼란이 일어나면서 '가만 있어 보자. 이게 뭔가?

내가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서 있는데

그런 행복이 1년도 못 가는 거면 이건 도대체 뭐냐? 난 뭘 하면서 살아야 되느냐?'

 

굉장한 혼란 가운데 제가 아는 선배 한 명이 제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듣고는 제가 집에 돌아왔어요.

 

모태신앙이고 평생을 교회에서 살았는데, 새롭게 복음을 전해 들은 것이

별로 큰 변화는 없었어요. 그냥 평소에 알던 그대로의 복음이었어요.

 

그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에 이제 혼자 자려고 이렇게 누웠는데

낮의 그 생각이 계속 나는 거예요. 그래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일어나 앉아서 제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면, 나를 좀 만나 주십시오.

나는 당신이 너무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데요.

 

그런데 그때 그냥 왈칵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 우는지도 몰라요. 왈칵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두세 시간을 계속 울면서 기도를 한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그게 성령께서 역사하신 거죠.

성령의 체험이었는데, 이 체험을 통해서 제가 믿음의 여정이 시작이 됐어요.

야곱으로 치면, 벧엘의 체험이었죠.

 

그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뭐였냐면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다'고 하는 믿음이 생겼어요.

 

물론 제가 이 한 번의 사건으로 모든 게 다 완성된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아,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은 실제하시는 분이시구나!'

 

여러분, 야곱의 벧엘 체험의 핵심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실재성이에요.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거에요.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믿게 된 거에요.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그 체험들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체험이 없으면,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지 않아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그냥 변화가 일어나질 않아요.

 

왜요? 믿음의 여정이 시작이 안 된 거에요.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은,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시네, 아 하나님이 지금 여기 역사하는 분이시네!'

이것을 대면하게 되고, 체험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인에게, 이 야곱의 벧엘의 체험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이 이 베델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실재성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자 야곱 안에 이전에 없었던 것들이, 새로운 것들이

야곱의 내면에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28: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 새롭게 올라오는 건 뭐였냐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어요.

경외함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을 무겁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전까지 하나님은 그렇게 무거운 분이 아니었어요.

그냥 많이 듣기는 했지만, 내 인생에 그렇게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비로소 야곱이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서 비중있게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두려워했다는 게 그 말이죠. 28:17

 

'가만있어,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그럼 하나님이 벌하시면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 화내시면 어떡하지?' 이것을 이제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이런 '두려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오랫동안 왔다 갔다하고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시간이 지나서 익숙 해지잖아요?

그럼 하나님을 별로 게 심각하게, 두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하나님은 뭐 그냥 별로 존재감 없이 내 안에 존재하죠.

 

그런데 하나님이 실재하신다고 하는 것을 딱 마주치고 나면

그 다음에 우리 안에 올라오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중요한 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중요.한 믿음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완성되지는 않지만, 벧엘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중요한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믿음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중요한 분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2. 그러자 야곱이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28:18~19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오늘날로 얘기하면 예배하기 시작하는 거죠.

예배는 뭐냐면,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에요.

 

하나님의 실재성을 인식한 사람은, 반응이 예배로 나타나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하나님의 실재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참된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종교행위고, 그냥 엄마 따라오고, 아내 따라오는 거죠.

 

진짜 예배는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어, 하나님이 진짜시네?

어.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시네? 정말로 삶 가운데 역사하는 분이시네?'

그거를 인식했을 때, 비로소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 예배예요.

 

모태교인이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면, 그래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반응이 뭐냐 하면

예배가 기다려지는 거예요. 영적 체험을 하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예배가 기다려지는 거예요.

 

△저도 그랬습니다. 저도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 체험을 하고 나니까

예배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전까지 예배가 이런 건지 몰랐어요.

예배에 가면 항상 지루하고, 졸리고, 설교 시간을 견디고.. 그랬죠.

언제 끝나나 시계만 보고 이랬었는데...

 

제 안에 이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한 것들이 경험되고 나니까, 예배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 후부터는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배가 재밌고, 흥분되고...

그래서 예배를 계속 찾아다니게 됐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주일예배만 가다가, 이거 가지고는 만족이 안 돼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교회에서 중간에 수요예배가 있대요. 그래서 수요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랬더니 조금 나아요. 그래도 월화 목금 토는 할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또 다른 예배를 찾습니다. 그래서 목요일은 선교단체 예배에 가고,

토요일 날은 또 무슨 예배에 가고...

그래서 결국에 나중에 보니까 월화수목금토요일에 예배를 다니고 있더라고요.

 

이 반응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실재성을 경험할 때,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신 분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

거기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3. 세 번째로,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달라진 변화는

이제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

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모태신앙의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 벧엘의 체험이 없을 때의 얘기입니다.

다른 종교생활은 다 해도, 기도는 안 하거나, 못 한다는 거예요.

 

제가 잘 알아요. 왜냐하면 저도 모태신당 출신이라서

예배도 참석하고, 수련회에도 가고.. 다른 교회생활은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개인기도 시간은 못 가지는 거예요.

 

중고등부 다니면 재밌잖아요. 애들 만나면 또 재밌는 것도 있거든요.

또 주일학교 선생님이 성경 읽어오라고 하면, 숙제니까 또 읽어봅니다.

또 성경 암송하라면, 그것도 암송해서 상도 받고...

심지어 봉사하라면 하고, 전도하라면 하고... 형식적인 교회생활은 다 하죠.

 

그런데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어요.

개인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벧엘의 체험이 아직 없는, 순수 모태신앙인 치고

하루에 10분 이상 기도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요. 절대 없어요!

 

기도가 왜 안 되는지 아십니까?

뭐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 모르는데,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기도는 언제 나오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을 알 때

비로소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그때 기도에 대한 필요성과, 간절함과, 갈망들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벧엘의 체험이 있고 나니까, 야곱이 드디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아브라함도 기도했고, 이삭도 기도했고

하나님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거든요. 이게 기도지요.

 

그런데 야곱은 벧엘 이전까지,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어요.

야곱이 처음으로 기도하는 장면이 어디냐면, 벧엘 사건 이후에

비로소 진지한 개인기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이 사건 한 번으로 믿음이 다 완성된 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정이 비로소 시작됐어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을 체험으로 아십니까?

성령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조명해 주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예요. 신앙은 공부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영적인, 초월적인 체험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으셔야 됩니다.

어떤 체험?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지금 여기 함께 계셔!'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체험입니다. 아멘!

 

이 체험들이 있으셔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삶 가운데 믿음의 여정, 순례길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없으시다면

오늘 그 여정을 시작하십시오!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개인의 '벧엘의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벧엘의 체험이 없는 분은,

오늘 밤에 집에 가서라도, 혼자서라도 솔직하고 진솔하게 하나님 앞에 서세요.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얘기하십시오.

 

'하나님, 나는 오랫동안 교회 다녔고, 모태교인으로 지금까지 다녔지만,

사실 하나님이 살아서 나와 함께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습관적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솔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혹시 만약 오늘 당장 그렇게 만나주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매일 하나님을 찾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서, 여러분도 야곱처럼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