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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 받은 아브람

LNCK 2023. 9. 12. 18:49

◈부름 받은 아브람           창12:1~9         설교 두편 조합          ☞ 창세기 설교모음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고, 완성하기 위한 그 열심으로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타락 때는, 노아와 그 가족을 부르시고,
바벨탑 타락 때는, 아브람과 그 가족을 불러내십니다.

 

그렇게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방식은 하나님 사역의 패턴이죠.

신약 때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은헤로 부름 받은 그 한 사람 아브람은, 사실 전적 부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자였죠. 아버지도 우상숭배자이자 우상 매매상으로 알려졌죠.

그리고 그가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달의 신 신(Sin)을 섬기는 우상숭배 지역으로서 
그는 전적으로 부패했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내 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했던, 생산력이 없었던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부패한 자를, 무능력한 자를 부르셨습니다.
잘나고 훌륭해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은혜로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 아브람을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 은혜로 되어지고, 
우리의 노력이나 실력이나 열심이 아니라, 은혜로 되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진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아브람이었죠.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 각자의 모습과 똑같죠.

 

본문 창12:1~9절을 통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자기 구원 뿐만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 부름받은 이 한 사람 아브람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아브람은 "떠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비로소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1절은 드디어 아브라함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처음 등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떠나가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하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갈대아 (지방의) 우르(도시)에 살았던 사람이에요. *이라크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창12: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그가 하란에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는가요?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닙니다만)

행7:2~4절을 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위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 (갈대아 우르)에 있었을 때, 
그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본문 1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이 말씀은 
행7장과 함께 보면 '두 번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면이 되는 것이죠. *첫번째는 갈대아 우르

그러니까 원래는 갈대아 우르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데라와 그의 아들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이 땅을 떠나서 내가 내게 보여줄 약속의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즉시 들어가지 아니하고 
강 건너편인 하란에 일단 머물렀다는 것이죠.

창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정리하면,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에 살 때, 창12:1절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데라의 가족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인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데라가 그의 자식들을 데리고 일어났어요. 
그런데 가다가 하란에서 어디에서 멈췄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죽습니다. 11:32
아브람의 형 하란(롯의 아버지)도 하란에서 데라보다 먼저 죽습니다. 11:28

그러자 비로소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러면서 이제 영광스러운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삶이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받은 성도들인 우리는 
무엇을 떠나야 하는가요? 어디서 떠나야 하는가요?
 
나를 지체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떠나는 삶이여야 해요. 
그것이 아브람에게는 고향 친적 아비 집이었죠.

'하란' 땅의 특징은 갈대아 우르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규모만 좀 작았지, 갈대아 우르와 비슷한 고대 도시, 문명의 교차로였어요.

거기는 풍족한 땅이었습니다. 문명이 발생한 땅이었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곳이고, 
안전한 곳이었고, 우르처럼 달의 신 신(Sin)이 통치하던 곳이었어요. 

데라의 가족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우르에서는 떠나왔어요.
그런데 하란까지 와서는, 이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바로 그 직전에서, 데라의 가족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가
거기 하란에서 주저 앉아 버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라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란, 나홀, 아브람  11:27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그곳 하란에서 죽고, 나홀은 하란에 정착했고, 
아브람만 아내 사래와, 하란의 아들이자 조카 롯을 데리고..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피할 때, 다시 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갔죠.
나홀에겐 아들 브두엘이 있었고, 브두엘은 리브가와 라반을 낳았죠.  *맨 아래 데라 가계도 도표 있음
밧단 아람과 하란은 동일 지명이거나, 광범위하게 같은 지역) 

하란은 유브라데 강 상류 지역으로, 오늘날의 터키입니다.
당시 무역로를 감안하면, 아브람도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얍복 강쪽으로 내려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위 지도를 보세요.
  
고대시대에 강을 건넌다,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목숨을 건다는 얘기죠.

 

그래서 하나님은 갈대와 우르 지역, '메소보다미아' 지역 (메소포타미아는 유브라데 티그리스 '두 강 사이' 라는 뜻)
에 있었던 아브라함과 데라를 데리고서 어디로 가시려고 하셨습니까?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을 건너지 못한 채, 지금까지 자기들이 살았던 갈대와 우르와 비슷하면서 
지금까지 자기를 통치했던 달 신이 통치하고 있는 그 하란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말이죠. 순종해서 우르를 떠났지만, 온전한 순종을 못한 것이죠.
중간(하란)에 주저 앉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떠나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런 하란에서 떠나야 하는데,
아브람이 지체했던 원인이 무엇이냐면, 사실은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나타나는데 
11:32 '데라는 나이가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런데 아브람의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위대하시다' 입니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 떠받들고 존경하고 있었던 아버지가 
하란에 거류하도록 지체시켰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데라'의 이름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지체, 지연'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성도 각 사람도, 
나를 지체시키는 요인이 아버지, 가족이라도, 고향이라도, 또한 제2의 고향이라도,
그곳에서부터 단호히 절연하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지체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떠나야 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적용하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떠나야 되는가요? 
내가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떠나야 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너의 고향과 친척은, 나의 큰 보호막입니다. 
고대시대에 있어서.. 지금처럼 법이 있습니까? 지금처럼 치안이 제대로 되어 있겠습니까? 
고향을 떠나는 순간, 무슨 대적을 만날지, 어떤 대적을 만날지, 어떤 위험을 만날지 몰라요.

 

그 당시에 나를 지켜주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나라가 아니에요. *아직 가나안에 고대국가 없었음
고향 친척 아비 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친족을 이뤄야 되고, 씨족 공동체의 보호막을 설치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나를 보호해 줄, 내가 안전하게 구할 수 있는 땅, 
그 안에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친척, 나의 아버지의 집, 
이것은 내가 하나님 없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이것은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다 버려야 된다' 이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데, 내가 의지하고 있던 그 모든 것, 내가 보호받고 있던 모든 것,
그것을 떠나고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자는 
그가 과거에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을 
자기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내버리고 
하나님이 전부인 삶을 살아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가 개인 구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자는 
이렇게 나를 하나님의 뜻에 나아가기 위하여 지체시키고 있었던 
하란이나 데라를 떠나는 삶이어야 하고, 
내가 하나님 아닌 의지하던 것들을 떠나는 삶이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어느 미국인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원주민 청년 사역자들을 훈련시킬 때,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 중 하나는 '고향 친적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정의 연을 끊으라는 뜻은 아니지만, 
정서적 독립, 경제적 독립, 의지적 독립, 가정적 독립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지켜보지 않아서, 그 열매나 결과가 과연 어땠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아브람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독립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선교사 (펀 글)
몇 해 전에 제(이재환 선교사)가 
'웨스트 파푸아 뉴우기니' 지역을 탐방해 본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먼저 놀란 것은, 그 깊고 깊은 정글에,
도저히 육로로 접근이 어려운 그 원시 마을에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원시마을이 그대로 남아있다니...)

캐나다 캐빈 마틴 선교사 가족이, 그 곳 7백 명 원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상점도 없고, 학교도 없고,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는 곳에서
선교사 가족은 자기 자녀 셋을 데리고,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이 났다. 정말 놀라웠다.

우리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 캐나다, 미국, 호주로 유학이민을 떠나지 않는가?
기러기 아빠가 되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캐나다로 못 떠나서 난리다.

그런데 저들은, 왜 그 좋은 캐나다를 다 버리고,
이 원시 밀림에 들어와서 사는가?

제 정신이 아니든지/제 정신이든지...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말이 된다.

그는 ‘제 정신’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다 보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그 원시 부족으로 들어온 것이고,
한국에서 더 살기 좋다는 나라로 가는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명퇴한 아브람... 모험을 택하다... 미래를 열다 (펀 글)
아브람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서 발생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그 핵심 도시인 우르에서 살았다.
TV방송에서 우르 도시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것을 보았는데,
(전기만 빼면) 오늘날 중동의 소도시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문명도시였다.   

그의 사업은 ‘우상제조 및 판매상’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당시의 최첨단, 최고 수익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루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명퇴’를 명하셨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뿐만 아니라
더욱이 ‘내가 지시할 미지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창12:1

오늘날 대기업에 다니다가 명퇴를 하면,
몇 층 높이 빌딩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이 있다고 하는데,
아브람이 그런 큰 충격을 경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브람은 ‘모험’쪽을 택했다.
그는 당시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괴짜’로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오늘날 20억 크리스천의 미래를 열었다.
(기도로 분명한 음성 듣고, 말씀인도, 환경인도 등 응답 받고 움직이셔야 한다.) 

당시 우르나 하란의 고향 사람들은, 아브람을 '괴짜'라고 불렀을 것이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성도는 '괴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역사를 보면 종종 '괴짜' 들이 뭔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은 
 "장막을 치는 삶"이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아브람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첫 발을 내디딥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당시 통행하던 길을 따라 얍복강을 건넜을 것이고,
그리고는 요단강을 건너서 제일 먼저 세겜에 도착했습니다. 위 지도 참조.

12:5~6 하란을 떠난 아브람은 '마침내 (얍복강,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그런데 아브람이 세겜에 머무르지 않은 것은, 세겜은 당시에 큰 도시라서
이방인에 대해 텃세도 심했을 것이요, 아브람과 같은 유목민은 (오늘날의 몽골처럼)
풀이 돋아난 곳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을 하니까, 거기 머무를 수도 없었지요.
계속 광야를 돌아다니며 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세겜은 '어깨'라는 뜻이죠. 

이런 이름은 세겜이 에발 산의 하부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죠.

그래서 세겜을 거쳐서 장막을 친

벧엘과 아이는 아직 인적이 드문.. 당시엔 거의 광야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던 것입니다.

12: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는 장막을 치는 삶'이었습니다.
언제나 움직이고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쨌든 그가 장막을 친 장소가 참 중요한데, 
8절에, 장막의 위치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서쪽에는 벧엘이 있고 동쪽에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을 뜻하죠.
'아이'는 '폐허더미, 무더기' 이런 뜻인데, 그러니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아이, 폐허더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자는 장막을 치며 가는데 
그 장소가 어딘가 하니까, 벧엘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라 
벧엘과 아이 사이, 그 중간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동쪽'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방향이죠. 3:24, 4:16,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8
야곱은 벧엘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자는 
'베델과 아이 사이에서' 살게 되는데, 

먼저는, 베델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고,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께 예배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벧엘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벧엘과 아이('세상'을 뜻함)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12:2~3절에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셨죠. 그래서 '아이'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퍼트리고, 나눠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위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또한 성도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아이 (세상) 성 언저리에서, 성도는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죠.

창12:2~3절에, '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고 했는데,

사실은 '너' 대신에 '하나님'을 넣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이렇게 말해야 맞는데,

'하나님' 대신에 '너, 아브람'을 집어넣은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자기와 연합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서 
하나님처럼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지고, 복의 근원이 되어지고, 
복 자체가 되어진다, 하나님과 전권 대사가 된다..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고스란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용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부름받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는 나와 연합된 자로서, 아이, 즉 폐허더미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어진 
나의 축복을 흘려보낼 통로다' ..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이 아브라함의 삶은, 
벧엘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높이는 삶과 동시에 
아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흘려보내는 통로여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아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축복을 흘려보내는 
그 중간지점에 서 있는 자여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적으로 표현한다면 '제자'입니다. 
 
마16:24~2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아브람은 부름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신약적으로 보면,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은 신약으로 말하면 '제자, 사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하는 말씀과 매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언제나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복을 흘려보내는 존재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그저 구원받고 천국가게 하는 사람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고, 완성해가기 위한 제자로, 즉 아브라함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야브라함의 가나안 여정, 세겜 벧엘 헤브론        (분석은 좋은데, 해석 및 적용이 약합니다. 각자 연구 요망)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여정과 
야곱의 여정과 
전체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의 여정을 비교해 보자고요.

(창12:6~9)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8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께 바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9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서,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거쳐 간 세 지역이 나옵니다. 
세겜과 벧엘과 아이 사이 그리고 남방입니다.
여기서 남방은 남쪽 지방이라는 뜻이 아니라, 네게브, 헤브론 지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창23:19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를 장사지낸 곳, 남방을 
‘마므레 곧 헤브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남방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헤브론에서 그의 인생을 마칩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난 지명은 
야곱의 여정에서 그대로 반복이 되어 나타납니다

(창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세겜 땅에 이르러 단을 쌓습니다. 
아브라함과 똑같은 지역에서 똑같은 일을 합니다.

(창35:14~15)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 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제사(전제, 奠祭, drinking offering)를 지냅니다.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어떠세요? 야곱의 여정 속에서도 아브라함의 여정에 등장했던 세겜, 벧엘, 헤브론이 똑같이 등장합니다.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나왔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그리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도 아시고요. 
야곱이 그 존재 안에 품고 있던 이스라엘의 여정은 어떠한지 볼까요?

▲여호수아 때 12지파의 여정
 
(수7: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벧엘과 아이가 나옵니다.

(수8: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복병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서 잤더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여정 중에 나오는 벧엘과 아이 사이라는 어구가 그대로 등장합니다.

(수8: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에발산은 세겜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곳에서 단을 쌓았습니다.

보세요. 모세오경의 저자 모세는 지금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의 여정 속에 등장하는 지명을
야곱과 여정 속에 등장하는 지명과 중첩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또한 그 창세기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중첩해서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선택과 그들의 신앙 여정’은 
이미 아브라함 속에서 확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아브라함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될 하나님의 교회의 삶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통행하던 길이 마치 경부고속도로처럼 정해져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여정이 동일한 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아브라함이 갔던 구원의 여정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벌써 같이 갔지만) 
또 실제로 야곱이 갔던 구원의 여정이 같고, (야곱의 허리에서 벌써 같이 갔지만)
또 실제로 여호수아가 갔던 구원의 여정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구원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아브라함과 연합된 자들이 함께 구원받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아브라함과 함께, 그 후손들이 함께 구원받는 것을 예표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연합이 되어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자들과 동일한 자들인 것입니다.  롬4:23~24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 안에 연합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이 되어 이미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엡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6절의 ‘앉히시니’는 과거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아브라함과 함께’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역시 ‘연합’을 가리키는 어구인 것입니다. (*이 단락, 김성수 목사 창세기 40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