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 (창13:5~18) *이 설교 정리
◈아브라함의 선택과 롯의 선택 창13:5~18 ☞창세기 설교모음
※아래 설교는,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따로 있고,
롯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 한 사람안에, 아브라함과 같은 요소와 롯과 같은 요소를 둘 다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왕 바로에게 자신의 아내를 판 대가로
그로부터 많은 재물과 노예들을 얻어서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12:16
아브라함이 자신의 꾀로 애굽에 내려가서 굶주림을 해결하고
많은 재물과 노예들을 얻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절대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얻은 재물과 노예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실수를 반추했을 것이고
자신의 불신앙과 파렴치함에 대해 많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재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로 인한 에피소드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분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창13:6‐7)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7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네겝에서 30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멀쩡했던 삼촌과 조카 사이의 관계가
소유가 많아짐에 의해 분열이 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맞은 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기근이었습니다.
물질에 관한 시험입니다. 궁핍의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첫 번째 시험에서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크심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가르치신 후
다시 가나안으로 올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근과 정반대의 시험인 풍요의 시험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역시 물질에 관한 훈련입니다.
◑풍요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두 번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물질로 시험하실까요?
뒤에 14장에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소돔 왕 앞에서 또 물질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물질이란 그것에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시험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물질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버린 인간은
물질의 도움 없이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성도도 여전히 제한된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쉴 곳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속에서도 재물은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탐심과 의존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품위와 인격을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격하시켜 버립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재벌가 황태자들의 재산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비단 재벌가 뿐만 아니라, 물질이 많은 집안은 거의 형제들끼리 ‘왕자의 난’을 치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많은 곳에서 물질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사하고 운용할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피하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물질이 인간을 다스리는 힘은 크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재물을 하나님과 견주어서
하나님 반대편의 신 (맘몬) 이라고까지 표현을 하시겠습니까? 마6:24, 눅16:9 KJV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재물은 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복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나아닌 다른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나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도에게 ‘청지기가 누리는 청지기의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은사로서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물질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paradigm shift)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물질을 나를 자랑하고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이내 하나님 반대편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성도의 신앙생활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에 관한 시험에서
그러한 세상의 힘이 주는 매력과 쾌감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자로 서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의 성숙을 향한 일평생 훈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에 유독 물질에 관한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신앙성숙으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물질은 성도가 버려야 하는 세상 힘의 대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첫 번째 기근 앞에서의 물질의 시험 때와는 달리
두 번째 물질의 시험에서 롯에게 풀밭의 선취권(先取權)을 양보함으로써
더 이상 물욕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는
아브라함의 멋진 양보의 진술을 들을 수 있습니다. 13:9
그렇게 세상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는지 오늘 본문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풍요라는 물질의 시험에 멋지게 통과한 아브라함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자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질에 대해 자유롭지 못했던 첫 번째 위기 때는
자기 아내 사라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스스럼없이 팔아넘김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지요.
그런데 두 번째 시험에서는 그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아주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으로 성숙되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조카 롯이 알짜배기 땅을 모두 차지하고 나면
자칫 자신의 육축은 아사(餓死)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이의 유익을 먼저 챙겨주었던 것입니다.(창13:9)
다음 장에 세 번째 시험이 나오죠.
그돌라오멜을 격파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은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물질만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전한 자의 당연한 권리(전리품)까지도 거절함으로써..
물질의 시험을 거뜬히 통과함을 보여주었죠.
이렇게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에 대한 훈련이 잘 된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타적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의 힘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만을 의존의 대상으로 서슴없이 택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타인을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분쟁을 포기한 면도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살았던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함께 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굳이 모세(창세기 저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7절에 등장시킨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지금 모세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아브라함과 롯이 살던 곳에 함께 거했다는 기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지금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눈이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과 롯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록한 거죠.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신자들이 불화하는 모습을 보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8절에 아브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불화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카 롯에게 갈라지자 했던 것이고 땅을 가르는 과정에 있어서도
자칫 자신이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롯과 다툼이 생길까봐
롯에게 먼저 선취권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성장한 것입니다.
▲네겝(헤브론)에서 만난 기근으로 두려워 벌벌 떨며 애굽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던 아브라함,
거기서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마저 팔아버렸던
겁쟁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두려움 없는 양보와 겸손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애굽의 경험에서 그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은
세계의 왕이라 자타가 공인했던 바로보다 센 분임을 알게 되었고
당신의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난 만큼 그 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 전능의 하나님을 아는 만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남방 네겝에서 그리고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관해 그리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근과 애굽왕의 권세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6:3)라고 거듭 외치는 것이며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호4:1)그들이 그렇게 패역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성경기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고 반복하여
권고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신앙여정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에 의거하여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여정의 최종목적지는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세상의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에화) ‘15분’ 이란 제목의 연극이 있습니다. 주1)
◑반면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어떠했나요?
롯은 땅의 선취권을 주겠다는 삼촌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단을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의 기자인 모세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요단을 어떠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그 땅을 물욕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롯이 물이 넉넉한 초장인 그 땅을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땅이라 평가했습니다.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보태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곳’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여호와의 동산’을 고작 ‘애굽 땅’에 비교한 것이죠.
물질욕이 있는 사람은, 물질이 있는 곳은 어디나 천국,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이는 거죠.
그래서 애굽도 ‘여호와의 동산’에 비교되는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본 땅은 나일 강의 잦은 범람으로 생긴
풍요의 상징인 삼각주 땅에 물이 넘치는 곳이었고, 그 도시들은 고도로 발달된 곳이었으며,
바로의 궁궐은 풍요의 절정이었습니다.
삼촌 아브라함과 나그네처럼 통과하여 내려온 가나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진 곳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롯에게는
바로 그러한 풍요의 땅 애굽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의 모습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애굽의 화려한 추억은 롯의 머리에 그대로 각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요단의 초원과 소알까지의 도시들을 바라보았을 때 *요단강 때문
그 땅이 물이 많고 초목이 우거진 풍요의 땅 애굽과 견줄만한 좋은 땅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롯이 그러한 좋은 땅을 보자마자 그 땅이 애굽 땅과 같았다고 표현을 한 것은
롯의 관심이 온통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풍요와 사치와 열락(悅樂)의 땅 애굽과 같은
자신만의 작은 애굽 건설에 쏠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이 꿈꾸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기회가 온 것입니다.
▲롯은 아브람이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주고 돌보아 준 삼촌이라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에 필요한 땅을 움켜쥐었습니다.
삼촌과 그의 육축들이 굶어 죽든 말든
그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이었던 것입니다.
롯은 지금 크게 혼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애굽 땅은 하나님의 임재가 무시된 곳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롯의 눈에는 그 둘이 같은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풍요가 있는 곳에 여호와가 함께 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health and wealth gospel, 번영의 신학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성숙하지 못한 롯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가난은 죄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롯은 그렇게 아브라함과 긴 시간을 여행하며 아브라함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의중 또한 읽지 못하던 자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아무리 오래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중 또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동산과 애굽 땅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의 신앙생활에서 롯처럼 이렇게 엉뚱한 선택을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신도 곤란을 겪게 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은 롯이 물욕의 눈으로 선택한 그 땅의 대표적인 도시인 소돔을 가리켜
큰 죄인 들이 사는 땅이라고 못 박아 이야기를 합니다.
(창13:12‐13)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3절의 ‘여호와 앞에’라는 어구는 직역을 하면 ‘여호와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지금 소돔 사람의 죄를, 히브리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급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들의 죄악의 극악함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라는 어구를 사용하여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수식하는 수식어로 썼습니다.
지금 모세는 롯이 물욕에 눈이 어두워 선택한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악한 자들이 거하는 멸망의 땅임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물욕에 어두워 선택한 세상의 화려한 것들은
죄가 양산해 놓은 더럽고 추악한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아수라 백작 같은 것들에 불과합니다.
롯은 동으로 장막을 옮겨가며 결국 가장 악한 땅 소돔에 정착을 해 버립니다.
창세기에서 '동쪽'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방향이죠. 3:24, 4:16,
아마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대신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떠났던 것 같아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물욕에서 비롯된 성도의 선택은
결국 죄악의 한 복판으로 달려가는 저주의 달음질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을 걷으며 순종의 산 모리아 산으로 행진을 한 것에 비교하여
롯은 장막을 걷으며 기어이 그 저주의 땅, 쾌락의 땅, 소돔 땅으로 입성을 합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막을 옮긴 것이 아니라 세속적 판단에 의한
물질적 성공의 전망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모리아 산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물욕을 채워주는 소돔입니까?
▲롯은 자기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아주 고통스러운 결국을 맞게 됩니다.
창19:1절과 9절을 보면 롯은 풍요하고 화려하나 하나님의 면전에서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 멸망의 땅 소돔의 장로가 됩니다.
그가 ‘소돔 성 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 성의 장로로서
그 소돔 성 사람들의 법관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성문에서 백성들의 재판이나 민원사항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롯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롯이 죄인 중의 괴수 노릇을 하고 있는 꼴입니다.
성도가 성도간의 교제를 떠나 홀로 죄악 된 세상에 놓이게 되면
그는 반드시 신앙생활의 맥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에 둔감해 지게 되고 곧 자기가 토해 놓은 토사(吐瀉)물에 뒹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홀로 적진에 들어가서 그들을 모두 교화시켜 하나님께로 인도하겠다는 오만한 발상은
어서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을 하면서 ‘내 배우자를 반드시 전도하고야 말겠다고’
호언(豪言)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이나 그가 한 말에 책임 있는 행동을 하던가요?
대부분 믿지 않는 배우자의 생활양식 속으로 오히려 끌려 들어갑니다.
왜냐면 고리타분한 신앙생활보다 화끈한 불신 세계가 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롯은 소돔 사람들을 가리켜 ‘형제여’라고 부를 만큼 소돔화(化)되어 버렸습니다.(19:7)
그러나 결국 그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택한 애굽 같은 땅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모두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위들을 모두 잃고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소돔 땅에서 누리던 부와 쾌락과 배우자까지 몽땅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이 세상 것들의 정체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부를 좇아갔던 롯이, 가졌던 부마저 몽땅 잃게 된 것입니다.
그게 부를 추구하는 사람의 결말이지요.
그리고 동성애와 문란한 성생활이 아주 자연스러웠던 소돔에서 자란 두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모압과 암몬이라는 자식을 낳아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 즉 불신자들의 조상이 됩니다.
그렇게 근친상간에서 비롯된 모압과 암몬은 대대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 동쪽의 요르단의 수도가 아직도 암만입니다.
그들이 바로 암몬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물욕 적 세계관에 의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한
성도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패망의 자리로 자신을 몰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롯이 떠난 후에
▲마치는 말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간의 평화를 위해
복된 선택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는 발붙일 만큼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 천국에서 성도를 품어 안고 아직까지
이 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형제들을 응원하는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로 가시겠습니까? 세상의 (물질) 힘을 좇다가 쫄딱 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느라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올바른 선택과 롯의 잘못된 선택을 비교하여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현명한 선택을 하는 자로 살자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러한 올바른 선택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훌륭한 모습만 보여 주었나요?
아니지요? 그 후로도 많은 실수와 실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말년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은 뒤
수많은 첩들을 통해 많은 자식들을 낳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창25장
오늘 우리가 공부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 성도의 인격 안에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과 롯과 같은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인 아브라함과 육적인 롯 사이를 왕래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고
한탄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롯과 같이 세상적인 풍요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살 때
성도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풍요하고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의 영혼은 파리하게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시106:14~15)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이유가 있으셔서 성도에게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묵인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묵인 속에서 영혼의 파리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그렇게 아브라함과 롯의 모습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밀어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주시는 화평 속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롯이 아브라함을 밀어낼 때 우리는 고통당하고 고문을 당하며
처절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내 속에 들어 있는 육적인 롯을 자꾸 몰아내고
영적인 아브라함의 지경을 점점 더 넓게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실하고 경건하고 순결한 삶을 반복하여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통해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기쁜 삶이 어떠한 삶이며,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인생 내내 맞게 될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올바른 선택은 천국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아직도 롯이 우리 생애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 삶은 고통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욕적 관점에서 세속의 요단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쾌락의 땅, 그러나 멸망의 땅 소돔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얼른 육의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가축의 살을 찌우게 할 수 있는 푸른 초장은 아닐지라도
영혼을 살찌우고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하늘의 초원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참고로, 롯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갔나요? 아니지요?
성경은 분명 롯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벧후2:7)
왜냐하면 의인의 칭호는(稱義)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벧후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창세기에서 '롯'은 세상적인 죄악에 빠져 있었던 인물로 언급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후서는 롯을 '의로운 자'로 언급하는 것은
외경의 전승을 따른 것으로(지혜서 10:6)
아브라함에 비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에 비해 의로웠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롯을 ‘의인’이라고 부른 이유는 소돔의 호색적이고 변태적인 성욕의 죄악에 빠져들지 않고
심령에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그래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롯의 구원을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8절 서두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어
롯이 불심판에서 구원받은 원인을 상술합니다.
(왜냐면)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8절에 ‘상하니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 ‘바사니조’는 ‘고통을 당하다, 고문을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롯은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을 위해 소돔 땅에 들어가서
물질적 풍요와 세상의 명예는 얻었을지 몰라도
그 삶이 참으로 고통스러웠고 심지어 고문을 당하는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롯의 의로움을 나타내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근거가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법한 자들 가운데 거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하여 고통하는
롯의 모습을 의로 여기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전7:20
고전3:15절에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완전히 불에 거슬려서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구원이란 의미입니다. 롯이 그런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롯은 소돔성의 유황불 가운데서 가까스로 턱걸이로 구원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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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5분’ 이란 제목의 연극이 있다.
결혼을 앞 둔 30대 유망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박사 학위논문을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만 불치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이 나서
의사로부터 15분 후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게 된다.
연극에서, 청년은 불안한 마음과 초조 속에 떨면서 몸부림친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15분에서 14분, 13분, 12분, 11분으로
자꾸 흘러만 간다.
그 때 “편지요!” 하는 소리와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봉투를 열어보니 내용은, 억만장자인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고,
그 삼촌은 가족이 없어서, 삼촌의 상속 재산이
모두 자기에게 물려졌다는 변호사의 통보서였다.
그러자 청년은 즉시 “몇 분 남았느냐?”고 물어보는 시간에도
시계바늘은 청년의 생명이 10분, 9분, 8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며
계속 흘러갔다.
이 때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 안에는 박사 학위논문이 통과되었다는 통지서가 들어있었다.
안타깝게도 시계 바늘은 7분, 6분, 5분, 4분... 남았음을 가리키면서
계속 흘러가는데...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뜯어보니 청년의 애인이 편지를 써 보냈는데,
드디어 자기 부모님이 결혼을 승낙하셔서,
이제 마침내 우리는 결혼할 수 있다는 행복한 소식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시계는 아무리 멈추려고 발버둥쳐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그 청년이 숨이 멎는 것으로 그 연극은 막을 내린다.
그 청년에게는 억만장자의 상속권도, 내로라는 박사학위도,
아리따운 여인과의 결혼승낙도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15분은 모든 인생들에게
15개월도 될 수도 있고
15년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50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원하는바 물질, 명예, 정욕도
그 축복을 받기도 쉽지 않지만,
설령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 땅에서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계를 아예 꺼버리고 살든지,
아니면 애써 시계를 쳐다보니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외면하든지,
물질, 명예, 정욕 때문에 심지어는 영원도 하나님도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