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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4장 아브라함의 무모한 전쟁과 그 승리

LNCK 2023. 9. 14. 09:05

46 교회여 세상을 향해 출격(出格)하라 (창14:1‐24) (tistory.com)

 

◈아브라함의 무모한 전쟁과 그 승리       창14장        ☞창세기

 

◑도입, 성경에 아브라함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은?

 

창세기를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록 목적에 맞게 읽어야죠)

그것은 세상과 민족들과 이스라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노아의 사적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고, 구원받은 남은 자가 있다는 거죠. 창6:8

 

그럼 아브라함의 사적을 길게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11~25장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그의 사적이 너무 길고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한 장, 내지 두 장만 지면만 할애해도, 그 설명을 충분히 할 것 같은데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복을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목적일까요? No

구약의 아브라함(그림자)을 신약(실체)과 연계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을 신약과 연계해서 해석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창세기에 길게 기록한 이유는

“제자가 부름받은 이후 어떤 영적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믿음이 성장해 가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그림을 머리에 그리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어나가면 될 것입니다.

 

앞서 12은, “떠남”이 가장 키워드 였습니다.

제자의 삶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죠.

옛 생활, 육신의 삶, 내가 의지하고 살던 것들로부터 과감하게 떠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3은, “물질의 유혹”에서 아브라함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엔 ‘기근’의 시험 앞에서, 이기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중엔 ‘물질’의 시험 앞에서, 롯에게 양보하고 물질의 욕심을 내려놓는 성숙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롯이 떠나가고, 물질의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더 동서남북 사방의 큰 약속을 주십니다. 13:14~15

 

본문 창14장은,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가 그 주제입니다.

 

.....................................

 

◑동방 원정군의 침임, 롯이 잡혀가다

 

아브라함이 기근의 시험과 풍요의 시험을 마치고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단을 쌓고 다시 헤브론 지역으로 내려와

그의 가족과 종들과 함께 남방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세 번째 시험을 치릅니다. (애굽에 내려감, 롯의 떠남에 이어)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애굽 땅처럼 좋은 요단들과 소알 땅을 차지하고 떠나버린

조카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동방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그 전쟁의 기원은 이러합니다.

원래 이 일이 발생하기 14년 전에 엘람의 그돌라오멜 왕이 원정을 하여

사해일대를 정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해 서쪽 다섯 나라는 12년 동안은 열심히 조공을 바치며 살았는데

제13년에 갑자기 배반을 하여 조공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4년 째 되는 해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자신과 동맹을 맺고 있던

동방의 세 나라와 연합을 하여 다시 원정에 나선 것입니다.

 

그 때 소돔과 고모라도 그 동방의 원정군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 동방의 원정군은 오늘날 이란 지방에 해당하는 큰 나라 엘람과

후대에 바벨론이라 불렸던 대 제국 시날,

 

(1에, 당시 그 시날의 왕의 이름이 아므라벨이 나오죠. 학자들은 그가

아브라함과 동시대를 살았던 함부라비 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왕이라 추정합니다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풍요의 나라 엘라살, 티그리스로부터 메디아 국경까지

넓은 지경을 소유하고 있던, 후대에 앗수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고임

이렇게 네 나라의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위세가 어떠했겠습니까? :1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동방의 원정대는 그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타인 중부의 여러 족속들을 치면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본문 5을 보시면 그들은 먼저 갈릴리 동쪽 바산 땅의 아스드롯 가르나임을 쳤습니다.

그곳에는 르바 족속이라는 거인 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 르바 족속은 매우 잔인하고 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부 거인들이었으니 얼마나 강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엄청난 원정대의 서슬 앞에서 그 거인 족들도 맥을 못 추고 정벌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얍복강과 아르논 강 사이의 함에 머물던 수스 족속이

동방 원정대에게 무너졌습니다. 5

 

그 다음에는 사웨(평야)기랴다임에 사는 거인 족 엠 족속이 무너졌습니다.

그 엠 족속 또한 거인 족속으로 아주 강한 군대가 있었음에도

동방 원정대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5

 

동방 원정대는 그렇게 갈릴리 바다 동쪽을 훑으면서 내려와서 사해 동쪽까지 이르렀습니다.

사해 동쪽의 호리 족속이 나중에 에서가 거했던 땅, 세일 산간에서 그들의 먹이가 되었고 :6

동방원정대는 그길로 아래로 치고 내려가 바란 광야까지 내려갑니다.

 

그들은 그 바란 광야, 엘바란을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정탐꾼을 보내었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이릅니다. :7

 

그러니까 지금 동방 원정대가 팔레스타인 땅 동부를 모두 점령하면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아말렉 족속을 때리고 하사손 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까지 점령을 했습니다. :7

하사손 다말은 사해 서쪽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살고 있었고, 근처에 큰 도시가 없었다 봅니다.

그는 광야에서 줄곧 장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공격에서 제외되었던 것입니다.

원정대에게 장막은 먹잇감으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방의 원정대는 사해 서쪽까지 점령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반역을 한 다섯 왕들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던 소돔과 고모라와 스보임, 아드마, 소알의 왕들은

역청 구덩이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워 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 역청 구덩이에 자신들이 빠질 정도로 혼비백산 했습니다. :10

 

◑기드온의 3백 용사와 같았던 아브라함의 318명 가신들

 

성경이 이렇게 가나안의 수많은 왕들과 나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돌라오멜의 동방 원정군의 뒤를

아브라함이 가신(식구와 종들) 318명을 이끌고 나가서 공격한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좀 더 현실감 있게 설명을 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동방 원정군을 향한 아브라함의 반격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318 명의 가신들과

자기가 빌붙어 살고 있던 헤브론 땅의 아모리 족속, 마므레 삼형제의 부족, :13

(이들은 패잔병으로 여겨집니다)

즉 마므레와 에스골과 아넬 족속으로부터 소수의 동맹군을 얻어 황급히 출전했습니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가나안 땅 전체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가는 막강한 동방 원정군입니다.

 

이 장면을 보시면서 사사기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그 수가 메뚜기 떼처럼 중다했다고 하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연합군을 향해

3백 명의 군사와 함께 출정했던 기드온이 생각나시지요?

 

원래 이스라엘 군대가 삼백 명밖에 안 되었나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삼만 이천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돌려보내시고 삼백 명만 남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삿7:2) ‘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 사람들을 네가 거느린 군대의 손에 넘겨주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제쳐 놓고서, 제가 힘이 세어서 이긴 줄 알고 스스로 자랑할까 염려된다.’

 

하나님께서 삼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군대를 모두 해산 시키시고 삼백 명만 남기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치르는 전쟁은 그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승패가 갈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도 그 관점에서 이해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지금 아브라함이 가신들 삼백여명과 출정하여

동방의 원정대와 치르는 전쟁은 아브라함의 지략과 능력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대적들과 치르시는 전쟁은

어떤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과의 싸움에서

하나님 백성들 편을 들어서 세상에서 늘 승승장구하게 만들어 주는 싸움인가요?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지요.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과 싸워서 져주라고 하셨지 어떻게 해서든 이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

바로 성도가 신앙생활 내내 치러야 하는 영적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의 동방 원정군과의 전쟁에서 물리적이고 세상적인 보상을 받았나요?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의 엘람(이란, 이라크 사이)이라는 나라를 차지하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그돌라오멜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전쟁에서 패한 나라들이 아브라함에게 조공을 바치기라도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전쟁을 통하여 세상적인 보상이나 물리적 결과를 조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서방정벌에 나섰던 동방 연합군들이

아브라함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다시 정비해서 아브라함을 좇아 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우습게 여기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던

다섯 나라를 혼내주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몇 명 안 되는 적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위신을 완전히 땅에 쳐 박아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아브라함을 혼내주었어야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출격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시청각 자료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신앙여정에서 겪게 될

보편적 영적 전쟁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전쟁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엡6:12)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전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아브라함의 전쟁과,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비교해 보자고요.

 

지금 아브라함의 출정이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세력을 승리하신 내용을 예표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에서 아브라함과 삼백 가신들은 어떤 역할을 한 것입니까?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시8:2)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삼백 가신들은 그들이 치른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승리한 것임을 보여주는 어린아이와 젖먹이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로 어린아이처럼 젖먹이처럼 전혀 무능력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승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고 ‘나’라는 존재의 능력을 발휘하여

‘나’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라

‘나’는 숨고 하나님이 드러나 내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향기처럼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순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지금 아브라함의 출격에서 그림자로 보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보잘것없음을 드러냄으로 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보여주었던 것이 기드온과 삼백용사였던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인간 쪽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골리앗 앞에선 소년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전쟁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고후12:10)

 

하나님의 승리는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실현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보잘것없는 출정은 바로 그 십자가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의 전쟁은 모두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티끌인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와의 싸움 아닙니까?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는 저의 추론이 아닙니다.

시편 110편으로 가 보시면 왜 제가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영적 전쟁으로 이해를 하는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시110:1‐5)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2 주께서 임금님의 권능의 홀을 시온에서 보내 주시니, 임금님께서는 저 원수들을 통치하십시오.

 

3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 임금님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고,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 이슬이 맺히듯이,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4 주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5 주께서 임금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분께서 노하시는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왕들을 다 쳐서 흩으실 것입니다.’

 

이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전쟁을 하시는데

그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계신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110편은 단순히 다윗의 전쟁에 관한 시편이 아니라

메시아의 통치와 심판에 관한 시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메시아 왕국이

그러한 모습으로 완성이 될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젖먹이로 서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의 힘으로 완성이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4절을 보시면 다윗은 승리의 비결로 등장하는 그 주님을 가리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 묘사를 합니다.

 

히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시편과 히브리서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건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아브라함의 출정 이야기가 바로 구원의 이야기,

영적 전쟁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세 번째 시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1st 애굽으로 내려간 시험, 실패

2nd 롯에게 양보하고 떠나보낸 시험, 승리

이렇게 주의 제자 아브라함은, 시험에 이기며 or 패배하며 믿음이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출정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예표하고 있는 사건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시험이 될 수가 있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에 그의 군사로 초청을 받습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성도의 삶 속에서 실재 화 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빌3:10, 벧전4:13, 계1: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믿음의 후예들인 교회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손해와 상(傷)함을 감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그의 삶 속에서 보여야 하는 예수의 전쟁에 동참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교회는 그 의 삶 속에서 바로 예수의 행함을 드러내야 하는 시험대에

수시로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본문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롯이 동방의 원정군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상당히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롯이 떠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위로해 준 것을 기억하시지요? 13:14~16

그만큼 아브라함은 롯의 배신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괘씸한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러야 할 일이 아닐까요?

나를 버리고 가더니 고거 참 쌤통이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그를 사로잡아 간 군대는 막강한 동방 4개국의 연합군입니다.

자신에게는 3백여명의 가신들과, 같은 동네에 사는 마므레 삼형제 부족들의 소소한 지원군 뿐 입니다.

 

게다가 원정군들은 이미 직선거리로 140마일이나 되는 단까지 철수해 있는 상태입니다. 14:14

 

아브라함이 기병과 보병들을 거느리고 600리를 좇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주일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래저래 아브라함에게는 힘겹고 손해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원정군의 손에 하나님의 백성 롯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괘씸한 롯을 위해 여러모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출격을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삶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므로

그 전쟁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는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원수 같은 롯을 구하러 출격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치러내야 할 전쟁들이 자기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의 말에 자신의 전리품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창14:20)

 

본문 20절을 보면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초를 치는 말을 합니다.

‘네 전쟁은 너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전쟁이었다’고 그 전쟁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전합니다. :20

 

그 때 아브라함은 자기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공로와 공적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세 번째 시험에서도 보기 좋게 합격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똑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단의 세력이고

그러한 죄의 세력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아니 매 순간 매 순간 아브라함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전쟁에 임하여야 합니까?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겨 놓으신 전쟁이기에 때론 감당할 수 없게 보이는

우리의 죄성을 향해 과감히 출정(전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동방원정대 앞에 선 아브라함과 가신 318명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우리는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서 열심히 싸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겠지 하고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지만 무작정, 무모하게 달려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수 정예의 군사들로 많은 수의 적군을 상대해야 했기에

그들을 나누고 밤을 타서 그들의 후미를 공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을 수 있는 동맹군을 모두 모아서 출격을 했습니다.(창14:14‐15)

아브라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무모함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행위처럼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우리 죄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린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라는 결과를 못 박아 놓고 싸우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전에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패배 또한 승리를 향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결국 우리는 승리의 고지로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확고한 구원의 최종성과 확실성을 우리가 정말 믿고 있다면

우리는 간혹 실수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그 싸움을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길 것이니까요.

 

그러한 싸움을 싸우는 신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삶 속에서 세상의 힘을 과감히 버리고 영적인 것을 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죄를 얼마나 멀리하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기에

세상의 힘이 아닌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마4:1‐10)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오면서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들을 하나도 받지 않았던 것을 보셨지요? (창14:23)

 

그러나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는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살렘이라는 말은 평화,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살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멜기세덱은 왕이라는 의미의 ‘멜렉’이라는 단어와 ‘의’라는 의미의 ‘쩨덱’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살렘왕 멜기세덱은 평강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많이 듣던 소리지요?

그리고 그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당시 고대시대 왕은 제사장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통치에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를 사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제사를 지내는 것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왕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리는 삶으로 통치의 수단을 삼는 하늘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주시는 떡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그 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아브라함이 그 떡과 포도주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분별력이 생겼을까요? 그게 믿음입니다.

창15장에 가면 그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소돔 왕의 금은보화와 보잘것없어 보이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고 계십니까? 다른 말로 바꾸어서 여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세상의 힘을 과감히 버리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세상의 힘과 영적인 것들 사이에서

영적인 것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가리켜 주님은 자기부인의 삶이라 하셨고 십자가의 삶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출격에서 우리는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 부인의 삶은 우리가 크신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피조물이라는

자기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원래 무(無)에서 출발한 존재로서 손해와 상함 앞에 담담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내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아니 나라는 존재 자체도 하나님 것이니까요.

 

(고전6:20, 7:23)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소유에 대해 초연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승리를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돌렸습니다.

그 싸움은 애초에 승산이 없었던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오로지 하나님 힘만 믿고 그 싸움에 어린아이요 젖먹이로 출격을 했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그 싸움은 아브라함의 힘으로 치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싸움에서 티끌에 불과한 자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길 힘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길 밖에 구원의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내안에서 그 분이 사십니다.(갈2:20)

 

우리의 삶 속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나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 이만큼 했어요’라는 교만을 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상을 향해 출격을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서 열심히 십자가의 삶을 살고 계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우리의 거룩을 향해 손발을 힘껏 움직여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충성한 후에(계2:10,딤후4:2) 자신의 무익성을 통감하면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청지기로 살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눅17:10)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출격이 이야기하고 있는 영적 전쟁의 실체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 안에는 아브라함의 출격 속에서 모형으로 보여 졌던 순종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옛 육신입니다.

 

우리는 그 옛 육신의 습관, 집착, 중독, 통제성향, 자기 방어 등의 배설물들을

과감히 닦아 내는 전쟁을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 세상을 향해 과감히 출격을 하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삶,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열심히 추구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살아냈던 신앙생활이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평생을 바쳐 추구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6장은 그러한 영적 전쟁의 공격 무기를 단 하나로 제시합니다.

 

성령의 검, 즉 말씀이라고요. 여러분이 영적전쟁을 잘 치러내시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유일한 공격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히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공격 무기를 잘 벼르고 닦아서 세상을 향해,

여러분 안에 매복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향해 출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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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 왕 멜기세덱           이 단락 출처

 

위대한 승리자가 된 아브람이 돌아오는 길에 ‘왕의 골짜기’이라고도 불리는 사웨 골짜기에서

두 명이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한 사람은 소돔 왕이었습니다.

사람과 재물 모두를 빼앗기고 숨어 지내다가 아브람이 다 찾아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영접하러 나온 것입니다.

 

아브람을 영접한 다른 사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아브람과 그 가신들을 맞이하면서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벌써 맨몸으로 나온 소돔 왕보다 얼마나 생각이 많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어떤 존재인가요?

멜기세덱은 참으로 신비한 인물입니다. 창세기 14장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더 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900여년이 지난 후 다윗 왕이 시편 110:4절에서 갑자기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다윗 왕이 멜기세덱 이야기를 하더니

히브리서 5장과 7장에는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멜기세덱은 어떤 존재입니까?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이라는 견해입니다.

멜기세덱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후에 예루살렘이 되는 살렘의 실제 왕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멜기세덱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성육신하기 이전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견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견해를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

1) 아브람에게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적이 한 번 더 있습니다.

창18장에 보면 세 사람이 아브람에게 나아왔다고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창18장에서 아브람에게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수 있었다면 14장에서도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만약 멜기세덱이 단순한 살렘의 왕이었다면, 아브람에게 덕분에 망하지 않게 되었다며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멜기세덱이 아브람보다 높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7).

 

그리고 창14:20절에 멜기세덱은 아브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십일조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가 성도에게 십일조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런 목사는 이상한 목사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목사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권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과 같이 위대한 분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은

보통의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 것이 분명합니다.

 

3) 세 번째 이유로 멜기세덱은 왕이면서도 제사장으로 두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닌 존재였습니다.

성경에는 왕이 제사장 직분을 겸할 수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왕과 제사장 직분을 함께 행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것입니다.

유다의 왕이었던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그만 문둥병에 걸려서 별궁에 홀로 거하며 죽을 때가지 문둥병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성육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경배하며 십일조를 드렸던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멜기세덱이라는 말의 의미는 ‘의의 왕’이고 살렘 왕이라는 말의 의미는 ‘평강의 왕’입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1~2).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왕이시고 평강의 왕입니다.

죄인들에게 의를 나눠주신 왕이고 죄인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왕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고 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영혼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낮에는 웃고 다니는 사람도 밤이 되면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근본적으로 영혼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셨고 그 순종을 근거로

죄인들에게 나누어주실 완전한 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나눠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완전한 의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의가 없음을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죄인입니다. 본인이 실질적으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입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 우리 죄를 다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를 덮어주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정에서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우리로 의인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의를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를 얻은 사람은 영혼에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제거되고 죄는 완전히 용서받고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되고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는 과거, 현재, 미래 가릴 것 없이

다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호의의 회복. 이 두 가지가 의를 얻은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 찡그리실까요? 웃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웃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좋으신 분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많고 죄 지은 것이 많아

기도할 때마다 부끄러워도 나의 잘못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 나를 보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의의 왕이시며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인 것입니다.

이 순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를 얻은 사람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를 얻지 못하고 불의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57:21).

 

필리핀 교도소에 가보면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다리부터 얼굴까지 문신이 다 그려져 있고 눈빛도 매섭습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부터 다릅니다.

똑같은 죄수지만 눈동자가 빛나고 얼굴이 밝습니다.

옷도 똑같은 죄수복인데 저희 의료선교팀이 만들어준 ‘Freedom in Jesus’라고 적힌 죄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에 적혀진 글씨처럼 몸은 감옥에 있어도

영혼이 의를 얻었음으로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기 때문에 얼굴이 달랐던 것입니다.

 

▲침례교회 조상 가운데 존 번연이라는 훌륭한 분이 계십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이신데

이분이 고민하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실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걷는 도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의 의는 하늘에 있느니라.”

이런 음성을 듣고 존 번연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비록 실패하고 때로는 연약해서 죄를 짓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의를 버리지 않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의인이 된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질지 모르는데 얼마나 위험합니까? 위험한 가운데 살지 마시고

우리의 피난처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