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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2:1-11 2006.06.18. ▣ 크리스천 인격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빛의 사자로 둔갑한 사탄이
사막에서 기도하고 있는 교부에게 다가가서 그를 시험하게 됩니다.
사탄은 말했습니다. 빛나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다가가서 그를 유혹합니다.
"나는 가브리엘 천사다. 하나님이 내게 메시지를 주어서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네게 왔느니라."
그때에 교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 잘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보냄을 받았겠지요. 저는 천사의 방문을 받을만한 사람도 못되고
아무런 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이 사탄의 방문을 물리쳤습니다.
사탄은 실패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겸손한 자는 사탄인 나도 유혹할 수 없다."
여러분, 겸손한 자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반대로 교만하면
사탄의 시험에 그대로 빠져듭니다. 이 귀중한 진리를 다시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고민이 있습니까? 근심이 있습니까? 때때로 좌절하십니까? 실망하십니까?
그리고 낙담하십니까?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교만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빠져드는 것이에요.
그럼 이 모든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는 무엇이겠습니까?
고민과 근심과 좌절과 실망과 낙담을 극복할 수 있는 마스터키는 딱 하나예요.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이 모든 것 하나도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그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도 못하고,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많지만 감사하지도 못하고
왜 이렇게 무능하고 왜 이렇게 능력이 없을까? .. 하여 알고 보면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이에요. 겸손이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교만한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뭘 가졌다하더라도 더 가지고 싶으니까,
아니 더 못 가진데 대한 불만이 있으니까 교만한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 하면 교만한 사람은 한 평생을 통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못합니다.(그러니 불행하죠)
끝없는 교만과 교만이 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불만과 원망뿐입니다.
그런고로 겸손한 사람은 겸손한 만큼 감사할 수 있어요. (그러니 행복하죠)
겸손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자기를 낮추는 순간, 모든 것이 감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해야 될 사람을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왜 그렇게 원수 맺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교만하니까. 교만해서는 전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면 쉽게 아주 저절로 용서할 수 있는데, 교만한 자는 용서할 힘이 없어요.
우리는 때로 분열을 슬퍼합니다. 이견을 괴로워합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왜입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겸손은 복입니다. 아니, 겸손은 은사 gift 입니다.
내 스스로 겸손할 수 있다면 그건 큰 축복이구요,
내가 겸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비상조치를 취해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더라도 겸손을 얻었으면 그 사람 복을 얻은 거예요.
다 잃어버렸더라도 겸손만 바로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성공할 때 버렸던 것을, 실패하고 나서야 찾습니다.
건강할 때 버렸던 사랑을, 병들고 나서야 아쉬워합니다.
그렇다면 실패와 병드는 것, 그것 자체를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모처럼 병들어서 모처럼 실패해서, 제대로 제자리에 돌아가서 겸손을 찾았으면
그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복중의 가장 큰 복이 겸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합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어요.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낮추고 낮추시기 위한 비상조치였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한평생 있었어요.
그래서 낮추고 낮추어서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은혜가 은혜 되고, 그 은혜가 능력이 되고 사명이 되어서
자신에게 영광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겸손은 모든 은사 중에 최고요, 복 중의 최고의 복이라고
사도 바울은 그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해야 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과고로) 피곤에 지쳐서 쓰러지는 것.. 그 모든 것이 교만 때문입니다.
왜 사는지 알 수가 없고, 늘 피곤하고 좌절에 빠지는 그 깊은 곳의 원인이 무엇일까?
여러분, 겸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신을 정비해보세요.
또한 여러분,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에요.
겸손한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교만하다. 나는 교만하기 쉬운 사람이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또 고개를 드는 사람이다. 나는 교만하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그는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암시된 내용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을 받는 교회요, 당대의 가장 높은 칭찬을 받는 교회지만
그래도 그 교회 안에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가 좀 있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염려하면서 그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2절로부터 4절까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2-4)."
하나 되지 못하는 것,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해법은 바로 겸손에 있다고 말씀하는 가운데, 완전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2:5)"
품어야할 마음, 예수의 마음은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입니다.
겸손은 심리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의 감상이 아닙니다. 후회의 눈물도 아닙니다.
겸손은 행동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입니다. ‘겸손은 행동이다!’
그것이 바로 Incarnation,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을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소위 사도 바울의 기독론의 성육신을 담은 대단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겸손을 네 단계로 말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비워’ 3:7
'에케노센', 영어로는 empty, nothing, no reputation 곧 텅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비운다, 비워버린다, 마음을 비워버렸다, 자기 자신을 비워버렸다,
능력을 비워버렸고, 지식을 비워버렸고, 명예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능력 있으나 없는 것처럼 완전히 없는 것처럼 된 것입니다.
알고 있으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모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몰라 버렸습니다. 그것이 비운 거예요.
아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아는 대로 다 말해선 안 돼요. 아주 잊어버렸어요. 벌써, 벌써 잊어버렸어요.
서울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는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한 장로님이 계셨어요.
이제 목사님은 65세에 은퇴했고요, 그 장로님이 어찌 어찌 하다가 이제 돌아가시게 됐어요.
돌아가기 전 병원에 입원한 것을 알고 목사님이 찾아갔어요. 찾아가니 할 말은 많죠.
그러나 다 씻고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말씀했어요. "장로님, 저도 섭섭했던 일이 있지만,
혹 그저 마음에 섭섭했던 일 뭐 그런 것 이제 다 잊어버립시다." 그렇게 목사님이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장로님이 딱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 말에 그만 목사님이 한대 얻어맞았어요. 장로님은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지금 장로님의 임종 시에 다 가지고 와서 잊어버리자고 했으니
아직 목사님은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목사님이 너무너무 죄송해서 그걸 돌아다니면서 설교하시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당했노라고. 벌써 잊어버렸어야지 뭘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면서..
이제부터는 다 잊어버리자고...’
비워버리는 것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애창곡 가운데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그 말은 진리라고 생각해요.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작아지는 게 아니죠. 없어져야죠. 아주.
그대 앞에 서면 무능해지고 바보가 돼야죠.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겸손하면 작아져요. 겸손하면 없어져요. 그게 사랑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순간이에요. 모든 것을 비워버렸어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비웠어요.
에케노센, 비웠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게노메노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7
이 말은 Becoming,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되었다’는 것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녜요.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말입니다. 그와 같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되어버리셨죠.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아주 큰 음악회가 있었어요. 이 콘서트에서 곡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지휘자는 온 정열을 다해서 지휘를 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아주 혼신을 다해서 그 곡에 도취되면서 연주를 하고
청중들은 조용하게 그 연주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인데 어쩌다가 너무 열정적으로 지휘하다보니까,
이 가난한 지휘자의 예복의 소매가 찢어지면서 펄렁 펄렁 하더니 이 소매가 떨어져 나갔어요.
한쪽 소매가 떨어져나갔는데도 지휘를 합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잠깐 쉴 때,
이 지휘자가 민망하니까 옷을 벗어버리고 그만 셔츠바람으로 지휘를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수선해졌습니다. 망신스럽게 셔츠바람에 이게 뭐냐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때 맨 앞 에 앉아있던 귀족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자기 웃옷을 벗고 다시 앉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차례로 웃옷을 벗습니다. 모든 사람이 웃옷을 벗고 오케스트라를 보게 됐어요.
곡도 곡이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 음악회는 최고의 감동을 주는 음악회가 되었어요.
지휘자의 옷이 찢어졌다고 비판하겠습니까? 당신도 벗어! 이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존경입니다.
여러분, 같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멀리 앉아서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는 것, 그건 사랑이 아녜요. 저가 죄인이면 나도 죄인이요,
저가 아프면 나도 아픈 거예요. 누구를 향해서 비판을 하겠어요? 같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복종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2:8
여기 '휘페코오스'라는 말은 노예적 복종을 말합니다. 모르고 순종하면 복종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데도 따라갑니다. 이게 복종입니다.
다 알고 하는 게 아녜요. 납득이 가서 하는 게 아녜요.
그러나 사랑과 믿음으로 순종하면 이것이 복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하나님 앞에 복종했어요.
겉으로 볼 때는 빌라도 앞에 로마군병 앞에 끌려가서 매 맞고 죽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했어요.
그걸 잊지말아야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는 순간
온전하게 복종했어요. 그 다음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현실을 그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요18장에서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18:11)"
이 현실 속에서도 조용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어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입니다.
여러분, 변명하지 마세요. 구차하게 이론 늘어놓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에 조용하게 복종하세요.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구두를 자기가 닦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비서가 깜짝 놀라면서 "아니, 대통령께서 이렇게 구두를 닦으시다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닦아야 되는데..."
그러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껄껄 웃으면서
"이 사람아, 그러면 미국 대통령이 자네 구두를 닦아야겠냐?
내 구두 내가 닦는데 그게 그렇게 무슨 큰 문제냐?"
대통령이 낮아져서 자기 비서처럼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참 평안한 겸손입니까? 교만하다보면 시끄러워집니다.
겸손하면 이렇게 편하고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아주 완전한 자유인이에요.
자 보세요.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자유롭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겸손하게 되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무슨 소원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 기도 아무리 해보세요.
그냥 들어주는 법은 없어요. 하나님은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응답하십니다.
‘돈 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돈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돈을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겸손하게 만들어 놓으신 다음 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교육의 교과과정입니다. 달란다고 그냥 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겸손을 갖춘 다음에만 주십니다.
그러니까 겸손하게 만든다는 그 자체가 복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진 다음에, 그 겸손한 마음에, 겸손한 그릇에 하나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제야 높이십니다. 예수는 낮아지고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는데
하나님은 다시 그를 높여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시고 만주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것,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높이는 것처럼 맹랑한 일은 없습니다. 다 쓸데없어요.
그것으로 되지도 않고요.
문제는 나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은 높이시는 바로 여기에 축복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물어보세요. 그리고 모든 문제의 그 깊은 곳의 원인이 무엇인가 물어보세요.
겸손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고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그 그리스도의 겸손, 그 마음을 품으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심을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교만한 모습으로
은혜받기를 바라며, 복 받기를 바라는 미련함을 고집하고 산 것을 용서하옵소서.
겸손을 깨닫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기에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꼼짝 못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원하오니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바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참으로
저 깊은, 깊은 곳에 내려가는 겸손이 있게 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한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