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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걷기

LNCK 2023. 9. 19. 10:11

같이걷기 - 이용규 선교사 : 갓피플TV [공식제휴] - YouTube

 

◈같이 걷기                        아2:10                ☞▣임재, 교제, 친밀함

 

제가 지금 잠시 일주일간 한국에 있다가 내일 출국하는데요. 
근데 이번에는 제가 앞서 미주지역에서 몇 곳 집회를 했었는데 
굉장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은 그런 교회들을 계속해서 섬겼어요. (미주 한인교회가 대부분 노령화)
그러면서 '아, 우리가 쇠퇴를 준비해야 되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인도네시아는, 지금 이렇게 특별하게 하나님이 
젊은 사람들 가운데 예배하는 마음을 주시고, 
또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게 하시는 
이러한 특별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번에 미주지역의 한인교회를 다니면서 
'점점 노령화가 심해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으로 제 마음이 좀 어두웠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를 오니까, 제가 굉장히 정신이 없어졌어요. 
참 재미있는 모델이고, 참 기대된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을 열심히 응원할 테니까 
좋은 교회, 좋은 목회,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분위기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런 공동체로 자라가기를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부르신 목적이 뭘까요? 
어떤 분들은 영광받으시기 위해서, 예배받으시기 위해서 라고 말하죠. 

그거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관계 속으로 부르신다'고 저는 믿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 관계로 부르세요. 

이거는 다른 신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다른 신들은요. (사람을) 관계 속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은 달라요. 
'우리는 하나야, 우리는 한 팀이야, 우린 함께 가는 거야!' 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일반 동물들의 경우에는, 태어나서 얼마 안 있다가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먹을 걸 찾아 먹을 수 있게 되고, 스스로 걸을 수 있고,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걷고, 스스로 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부모 밑에서 충분한 시간을 양육받아야 됩니다. 한 20년 이상. 

하나님은 사람을 왜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왜 이렇게 사람만 특별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동물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로 부르셨어요. (하나님은 개인적 인격적 친밀한 관계를 원하세요)

우리의 가정에서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모사본 copy 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가정에서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요. 

제가 자녀를 키우면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그 부분이었어요. 
'우리 자녀들은, 나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것이 주는 긴장감과 부담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권위자에 대한 상처를, 가정이나 사회에서 받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굉장한 방해 요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또는 가정에서 맺는 관계와, 또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게 돼요. 

자 그래서 예수님이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그 비유의 핵심은 결국 뭐냐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주시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관계를 '목자와 양' 또는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왕과 신하' 등
이런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설명해줍니다

가장 대표적인 관계로 부부관계를 들 수 있어요. 
오늘 본문 <아가서>에서의 부름은 
연인 관계로의 부름, 또는 부부관계로의 부름으로..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맺음을 묘사하시고 초청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두 개의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 맺고 사랑하면서, 이 감정이 더 커지기를 기대하게 되는데요. 

그게 첫번째는 <존중감> 이에요. 리스팩트에 대한 거에요. 
특별히 남자들이 이러한 이러한 것에 있어서 갈증이 있어요.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뭘 원하느냐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좀 인정해줘!'
'내가 좀 대단한 사람이고, 그래도 뭔가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쓸만한 사람이라고 좀 인정해 줘!' 
그 얘기 들으려고 그렇게 허세부리는 거에요. 

남자의 허세의 핵심에는 '나 좀 인정해줘!' 가 있어요. 
남자들이 왜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요? 왜 그렇게 사회에서 성공하고 싶어해요?
결국은 자기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확인 받고 인정받고 싶은 뭔가가 있기 때문이에요. 

자 여성분들이 원하는 감정이 있어요. 그거는 뭐냐면 사랑인데, 
그런데 그 사랑이 주로 케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사랑, 
'내가 잘 배려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어떤 감정이에요. 그죠. 

여성들은 배려나 케어를 받았다고 느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또 사랑하는 마음까지 갖게 되는 경우를 보게 돼요. 

자 이 두 감정(리스팩트와 케어)이 부부 간에 교류되고 오고 갈 때, 
거기서 이제 친밀감이 나오고, 그 다음에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게 돼요. 

자 그런데요. 이렇게 존중감과 사랑에 기초한 친밀감이 생길 때 
우리 안에 자존감이라는 게 생기고요. 안정감이라는 게 생겨요.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모든 관계를 
스스로 선택해서 안전한 환경에만 머물 수는 없어요. 

우리가 부모를 선택할 수가 없고요. 
때로는 결혼을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닌게 아닌가?' 하는 순간들을 만나요. 그죠. 

원치 않게 또 여러가지 면에서 이용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고,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관심 받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그런 상황들을 만나게 돼죠.

교회 안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심지어는 나름대로는 부모가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뭔가를 제공해 주려고 하는 과정에서도 
자녀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보게 돼요. 

자 그런데요. 그런 관계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분이 주시는 존중감과 또 친밀감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 안에 가족/부부/부자/교우 관계로 인해서 어그러졌던 부분들에, 회복이 일어날 수 있어요

'안정감'이라고 하는 부분, 그것이 우리 삶에서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굉장히 중요한 믿음의 초석을 다져줄 수 있어요. 

저도 돌아보면요. 이 부분이 흔들렸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어요. 
비근한 예로는 제가 이제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을 받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제가 본 상황은, '여기서는 정말 아무 것도 일어날 수가 없겠네, 
여기서는 뭔가 하나 이루는 게 너무너무 힘든 환경이네..' 라는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가운데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계속해서 뭔가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놓고 
꽁꽁 묶어놓으신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었어요. 

마라톤 경주를 해야 되는데, 손과 발을 줄로 꽁꽁 묶고 달리기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묶여 지내야 되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좀 빨리 달려 가려고 그럴 때마다, 우리 집에 애기가 새로 생겼고, 
그런가 하면 아내가 건강의 어려움때문에, 
또 아이들 양육하는 게 어려울 때 제가 옆에서 도와야 됐고 
또 제가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생사의 갈림길을 지나가는 그런 상황도 경험했고... 

아무런 돌파도 없이, 아무런 도움도 없이 '그냥 나는 내팽개쳐졌다' 라고 느껴지는 듯한 
그런 시간들을 지나야 됐어요. 

그때는 몽골을 생각하면 몽골이 너무 그립고, 또 약간의 향수병도 생기고... 
그 인도네시아의 더운 날씨가 너무 버겁고 힘들다고 느껴지는 그런 기간을 지나야 됐어요. 

그 당시에 현지 교회를 찾아가 봐도, '당신이 누구죠?'하는 듯한
때로는 이렇게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 이런 느낌이 들 때였어요. 

그럴 때는 제가 그때 한번 한국에 나왔다가, 어느 큰 교회의 카페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누구와 만남이 약속이 돼서 간거였는데, 그때 제가 일찍 도착해서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한 40 분 동안 앉아서 기다리는데, 주변에 어느 누구도 저를 아는 척 해주지 않는 상황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옛날에는요,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옛날에는 누가 그렇게 아는 척 해주고, 또 같이 사진 찍자고 하면.. 제가 불편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아무도 저를 알아봐 주지 않는데, 갑자기 제 마음이 허전한 거에요. 

여러분, 허전하고 외로운 건,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하고 관계하고 있는가?' 하고 상관이 없어요. 
그 시기에는, 제가 자카르타의 한 한인교회에 출석하면서 예배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래도 한 두 달에 한번 꼴로는 설교도 하고 그랬기 때문에, 교인들을 잘 알아요. 

그런데요. 교인들을 알아도, 그 교회 한복판에 있는데도 외로워요. 
여러분 그 느낌 아세요? 
지금 여기서도 여러분들 가운데, 교우들이 많아도, 오늘 외로운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 외로움의 감정, 우울함의 감정은 
결국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느냐? 하고는 무관한 거더라고요. (주님과 관계입니다)

저는 그 방면으로, 제가 기본적인 훈련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인도네시아에 가서 보니까 
다시 (밑)바닥인 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됐어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면서 살 수 있다고 고백을 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상황이 열리지 않고.. 
특별히 우리 사역자들이 이제 저를 믿고 많이 (인도네시아로?) 와 줬어요. 

근데 이 사람들하고 어떻게 뭘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을, 이제 대면하는 게 
제가 너무 싫은 거에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오늘 뭐하지?' 이렇게 할 게 없는 상황.. 
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러면서 '내가 시간을 지금 무가치하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지내야 되지?' 
'내가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라는 퀘스천이 붙는 그런 시기를, 제가 지나가야 됐어요.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제게 계속 내면에 찾아와서 말씀을 주셨던 것이 있었어요. 
상황은 열어 주시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고, 
또 제 안에 내밀한 어떤 영역들을 만져주시는 경험들을, 제가 지속적으로 했어요

저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이제 하게 됐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긴 했죠. 
'너가 자식을 가질 거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식을 주시는 타이밍을 계속 늦추시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계속 힘들고 어렵게 지내야만 했는가요? 그렇진 않아요. 
하나님과의 동행가운데 지속적으로 채워지는 뭔가가 있었어요. 

그걸 통해서 받는 위로와 격려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있었어요. 
저는 그때 깨달았어요. 
'아 그렇구나.. 사역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이거는 하나님의 (하실, 주인되신) 영역이고... '

그런데 하나님이 내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그분과 깊은 교제가운데 있으면서 
그분으로부터 오는 리소스로 충분히 채워지는 거구나...' 라는 거를 다시 고백할 수 있었고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하나님 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23:1
구체적으로 제 삶가운데 고백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됐어요.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에게, 부족한 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자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부족한 거 있어요, 없어요?
많아요, 적어요? 라고 물어봐야 되나요. 많다고요?

근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과 
아담이 갖고 있던 것 사이에, 누가 더 많은 걸 갖고 있을까요?

(이것은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여러분이 먹는 과일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먹었을 과일보다 
훨씬 당도가 높은 거 아세요?
정글에서 나는 과일들은요, 기본적으로 떫고 맛이 별로 없어요. (에덴을 정글로 가정할 때)

여러분이 좋아하는 키위, 그것이 원래의 모습이었을 때는 떫고 맛이 없어서
아무도 먹으려하지 않는 과일이었어요. (에덴이 품종 계량이 안 됐다고 가정할 때)
그것이 지금 여러분의 식탁에 오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차례 품종개량을 했기 때문이에요." 

자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담이 누리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아담은 부족한 게 없었을 것 같고 
여러분에게는 부족한 게 많고... 그 차이가 뭘까요? 

그건 바로 아담에게는 믿음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우신다.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고 있었지만, 자신을 가려야 된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단이 다가와서 이야기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얘, 무슨 소리야? 너는 필요한 게 있어. 
당장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열매, 너는 먹을 수 없잖아. 그거는 엄청난 결핍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네가 그 선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기준점이 되는 거야.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네가 되는 거야. 
네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포지션에 가는 거야!' 
그렇게 사단이 이야기를 합니다. 

자, 아담과 하와가 결국 그 선악과 열매를 먹게 됐어요. 그 결과 어떻게 됐죠?
예전에는 하나님이 판단의 기준점이었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이후, 내가 판단이 기준점이 되면서 
내가 나 자신을 봤는데 너무 부끄러운 거에요. 내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은 거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얼굴에 만족하세요? 제가 어떤 한국에 왔을 때 어떤 프로를 잠깐 봤는데 
무슨 아이돌 경연대회 이런 거였어요. 

근데 한 친구가 너무 멋있게 노래 잘 하고 들어와서, 이제 인터뷰를 하는데 
'당신 여기서 상금 받으면 뭐 할거냐?' 그랬더니 
성형수술 할 거라고 했어요. 

제가 볼 땐 이미 괜찮은 얼굴인데 왜 그럴까요? 
이거는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결핍때문에 그래요. 
그 결핍이 있으면요. 아무리 가져도 모자라요. 
아무리 이루어도 목이 말라요. 

자 그런 눈으로 아담은 자신을 본 거죠. 자기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남을 봤어요. 하와도 벌거벗은 모습.. 그래서 가리고 싶었어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자신을 가리죠. 그건 뭘 의미해요?

여러분 우리는요. 우리 안에 결핍을 느끼고, 배고픔을 느끼잖아요. 
그러면 뭔가로 우리를 가리고 싶어해요. 
그거를 '교양'이라고도 하고요. 
또는 우리가 '신분'을 구분해서, 그걸로 가리려고도 하고 

그걸 위해서 '집'이 필요하기도 하고, 
'차'가 필요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재정'적인 능력 필요하기도 하고, 
뭔가로 그것들을 가려야 되는 거에요. 

나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위장하기 위해서, 뭔가가 필요한 거에요. 
그래서 짙은 화장이 필요한 거고, 
때로는 마스크가 도움이 되는 거고.. 그런 것 같아요. 

자 그런데 '나를 가리고 싶은 마음' 그것은 결핍에서 오는 거에요. 
결국 내가 판단의 주체로 섰을 때, 내가 내 결핍을 감당할 수 없게 돼요. 
그것이 우리 인류의 비극이에요. 

우리가 예전에 낙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뭐냐면 
'하나님 그분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에서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그 분과 실제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리소스가 공급되는 것을 경험할 때  *리소스 : 자원
특별히 정서적인 리소스가 공급되는 걸 경험할 때 
거기서 내가 근원적인 기쁨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거에요. 

▲저는 그렇게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소위 월급이라는 거를 지금껏 받아보지 못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저 보세요. 제가 굶은 얼굴은 아닌 것 같죠? 

저는 엄청난 필요와 싸워야 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면서 부터는 배고프지 않아요. 
내게 결핍이 있다고 느껴지지가 않아요

그렇게 되니까 좋은 건 뭐냐면요.
 누군가에게 계속 뭔가를 줄 수 있고, 도울 수 있게 돼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한 1천 억 정도를 가진 자산가는 늘 행복할 것 같죠? 
근데 저는 그분들이 갖고 있는 고뇌와 아픔이 뭔지를 알 수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분들을 만날 때면, 약간의 부러움과 함께 제가 긴장을 했어요. 
'혹시 어떤 방식으로든 제가 도움받을 수 있는 게 있을까? 사역을 위해서...'

그런데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을 경험하고, 감정적으로 채워지고 나니까 
오히려 그분들을 볼 때 관점이 바뀌어요. 

'이분에게는 또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과 어려움이 있거든요. 
그거는 뭔가를 이뤘다고.. 돈이 있다고.. 인기가 있다고.. 잘 알려졌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분들에게서 그 부분들이 보이고 
'어떻게 티하지 않게 저 분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인지도가 있는 유명한 분들을 만나게 하실 때가 있는데 
그분들을 만날 때, 제 관심은 
'내가 그 분에게 어떻게 잘 보일까?'가 아니라 
'어떻게 그 분의 결핍에 대해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내가 도울 수 있을까?'를 보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면서, 관계나 집회에서, 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제가 뭘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제 대신 일해주시는 거를 보게 되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 제 주위에 도울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제가 경험하게 돼요. 
그리고 그들을 돕다 보면, 제 필요는 하나님께서 계속 채워가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한번은 사업이 너무 어려워서, 코로나 시기에, 
'차라리 조용히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어떤 젊은 사업가 분을 이렇게 기도해드리고 도와줄 일이 있었어요. 

근데 저는 돈이 없는 사람이고, 그분은 돈이 많았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제가 갖고 있는 돈을, 그분께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이제 이제 빡빡 긁어가지고 한 백만원되는 돈을 드리면서
'이걸로 맛있는거 사드시고 기쁘게 좀 생활하세요' 라고 전달해 드렸어요. 

그러면서 제가 속으로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돈이 그 분 사업에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해주십시오!' 

그랬는데 그 날 이후 며칠 이후에, 엄청난 어떤 반전이 있으면서 
이분의 사업이 굉장히 중요한 돌파를 연속적으로 이뤄가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분은 또 그 이후에 저희 사역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가 됐어요. 
저는 무언가를 바라고 그 돈을 묻었던 건 아니에요. 
정말 거저 주는 마음으로 드린 거였어요. 

그저 그 분 사업에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원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부담을 많이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인 것 같아요. 
왜 그러냐면 일반 목회자들 보다는 짐이 더 많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는 사역적인 짐도 있지만 
또 학교를 세우고 운영해야 된다는 데서.. 
어떻게 보면 사업하는 사람들의 고민과 부담이 또 제게 있어요. 

근데 일반 사업하곤 달리, 이것은 이윤을 남기는 사업이 아니라, 계속 퍼주는 사역이에요. 
그러면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해야 되기 때문에 
일반 사업보다는 훨씬 많은 장애와 제약을 가지고 가야 돼요. 

제가 인도네시아 있었을 때, 인도네시아가 이제 '주재원들의 무덤'이라고 많이 불려요. 
그 삶의 환경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말이 생긴 거예요. 

어느 주재원 한 분이, 너무 힘겨워 하기에,
제가 그분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제가 힘든 이야기를 나눠 드렸어요. 
그런데 그분이, (제 고생하는 얘길 들으시고) 너무 너무 위로를 받으시더라고요. 

근데요, 더 많은 짐을 지고 있다고 해서.. 꼭 불행한 건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직접적으로 공급하시는 그 공급만으로도 
우리는 평안할 수 있고, 안정감을 누릴 수가 있어요. 많은 짐을 지고 있더라도요!

그래서 저는, 한국이나 미국에 나오게 되면 
특별히 우리 목사님들을 위로하게 되는 일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보면 너무 그분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너무 제 마음 안에서 긍휼이 생기면서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까, 어떻게 섬겨드리면 좋을까?' 라는 생각이 있어요. 

왜 그래요? 제가 부유하기 때문에 그래요. 
무엇을 갖고 있어서 부유한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랑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을 경험하지 못할 때는 
저도 외롭고 우울하고 결핍이 있다고 느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과정 가운데, 
내 안에 결핍이 사라지고, 내 안에 어떤 안정감이 찾아와요. 

그때 비로소 다윗이 고백했던
'하나님이 내게 바위가 되고 산성이 되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제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가지지 않고, 짐이 무겁든지 무겁지 않든지
그것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우리가 평안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요. 

 

세상은 '네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너는 비참한 거야' 
'너는 충분히 그 비참함을 느껴야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세상이 주는 거짓말이더라고요. 

(자, 지금 제가 계속 안 가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어디서도 얘기하지 않았던 일들을, 계속 하고 나누게 되네요..)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삶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자 오늘 본문에 보면요,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2:10

여러분 그 분과 함께 걸을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 채워지게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그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리스팩트 입니다. 

또 그분이 우리를 또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예배에서 오는 어떤 평안이 있어요. 
그리고 그분에게 우리의 사랑을 올려 드리고, 

또 그분의 사랑을.. 귀로만 들었던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그런 과정을 갖게 되면서 
주님과 동행이 점점 깊어지고 친밀해지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교류하는 데 있어서 
'언어'를 통한 교류를 하게 돼요. 

자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신 이유가 있어요. 
무엇 때문에? 교제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자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는요. 반드시 '대화'라는 것이 있어요. 언어로 '교류'하게 돼 있어요. 
예수님이 땅에 오신 이유도, 하나님과 우리를 관계 속으로 맺어주기 위해서예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도 그거에요. 성령님은 교통(커뮤니케이션)하시는 분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님과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어떤 통로를 만들어 주시는 역할을 하는 거에요. 

자 우리가 찬양하는 것, 예배하는 것, 기도하는 것 
이것들이 하나님과의 어떤 교류, 커뮤니케이션, 교제예요. 
근데 교류는 일방적이지 않아요. 쌍방적인 거에요. 

여러분 어떤 친구가 항상 나한테 전화해 가지고 
주절주절 한 시간동안 자기 이야기만 하고 전화를 끊으면,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죠. 우리는 서로 말하고, 서로 들어야 돼요. 

여러분, 여러분 중에 기도를 혼자서 15분 이상 못 하는 분들이 있을 거에요. 
왜 그런지 아세요? 벽 보고 이야기 해보세요. 
15분 이상 대화할 수 있어요? 못해요!
자 대화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제가 오전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런 표현들을 몇번 썼어요. 

'이게 뭐지? 저 사람은 무슨 특별한 능력자야?' 그런 식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이거는요. 어떤 특별한 은사의 영역이 아니에요. 

이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류하는 방식이에요. 쌍방 대화하는 거잖아요. 일방이 아니라.

근데 이것이 굉장히 막연하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조금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이게 여러분의 상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류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라는 것을 좀 설명을 드려볼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말씀을 접하는 거고요. 예배가운데 있는 거고요. 
은혜 가운데 그분을 누리고 경험하는 과정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어떤 영역에서는 
좀 구체적인 디렉션을 놓고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신학교 진학을 고민해 보라고 그러는데, 
정말 내가 신학교 가야 되는거야, 말아야 되는 거야?' 
이거는 기도 해봐야 되는 거예요. 
이 부분을 놓고, 근데 성경을 본다고 해서, 바로 답을 얻기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런가 하면 뭐 목사님들이라면 
'그 교회에서 초빙이 왔는데, 내가 가는게 맞나, 멈추는게 맞나?' 

또는 여러분이 직장을 선택할 때 
'그냥 어디든 붙여주시면 갈 게요'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몇 개의 옵션(선택지)을 놓고서, 기도해야 되는 때가 있어요. 

근데 이럴 때, 어떤 식으로 내가 주님의 뜻을 찾고 분별해가는가? 
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건 뭘까요? 
제가 좀 이렇게 마이크로 렌즈로 제 삶의 어떤 부분들을 부각해 가지고 
'인도하심'이라는 게 어떤 건지를, 그리고 그걸 찾아간다는 과정이 뭘 의미하는지를 
좀 설명을 드려볼게요. 

제가 몽골에서 재밌게 즐겁게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분들이 기도 가운데 '제가 몽골 떠나는 것에 대해서 준비하면서 기도하라'는 마음이 온다..는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들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저도 언제부터인가, 그 부분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오기 시작했어요. 
왠지 하나님이 나를 옮기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 그럴 때 제일 먼저 해야 될 건 뭐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는 어떤 톤과 방식에 대해서 익숙해지게 돼요. 
나만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식이 있어요.  

그것이 어떤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평안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제 몸에 어떤 반응을 주시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뭔가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일 하신다'라고 느껴지는... 

특별히 기도 가운데 막 눈물을 펑펑 쏟고 기도하게 된다 거나, 
'정말 하나님이 이걸 원하시는가 보다...' 라고 느껴지는 뭔가가 있을 거에요. 

근데 그런 과정 가운데, 하나님과 기도하면서 계속 그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이제 '분별력'이 생길 수 있는데,   (*경험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헷갈릴 수 있어요. 

이게 감정적인 반응인 건지, 이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감동인 건지... 
그 기준점이 모호한 경우들이 대부분일 거에요. 

여러분 처음 아이가 말을 배울 때 실수해요. 
아이가 걸어 다닐 때도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워요.

우리는 많은 경우 '실수하면 안 돼' 라고 생각하는데, 
근데 (분별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실수해도 돼요. 

(분별과정에) 실수를 계속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를 향한 인도하심이 실패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진심으로 반응하기만 한다면, 잘못 선택해도 돼요. 잠시 돌아갈 뿐이에요. 
복음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건, 항상 세컨 찬스가 있다는 거에요. 

자 그런데, 그 가운데 내문제는 더 잘 안보여요. 그쵸? 
그럴때는 저 같은 경우는, 항상 아내하고 상의를 해요. 
그리고 아내한테 기도해 달라고 그러고, 나와 동일한 응답이 오는지를 구해요. 

또 필요하다면, 영적인 리더십들에게 (분별에 대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요. 

자 그리고 이 부분은 나와 관련된 부분이어야지,
남에 대한 거나, 아니면 내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어떤 응답이 있는 것 같이 느껴저도 
그거를 굳이 이야기하거나 발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자 그런 여정가운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맞춰지는 경우가 있어요. (나와 아내가)
근데 저는 그때 하나님께 또 물었어요. 
'하나님,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제가 나가야 될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세 가지 이상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도를 했어요. 

근데 그 기도대로 응답이 됐던 어느 포인트에서 
제가 미국에서 오신 한 선교사님하고 식사 교제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근데 식사 교제중에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그냥 저한테 툭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왠지 제가 지금 이 부분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면서 자기의 과거에, 하나님의 뜻을 찾느라고 좀 힘들어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주셨어요. 
그건 뭐냐면, 멕시코에서 단기사역을 할 때 
상황적으로는 거기서 나가야 될 것 같은데, 
왠지 여기에 더욱 붙어서 끝까지 버티는 게 맞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놓고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대요. 

그래서 그때 자신이 같이 기도하던 팀 그룹이 있었는데, 
그 팀원들한테 기도 요청을 했대요. 

'오늘 특별히 제가 멕시코를 떠나야되는지, 여기 머물러 있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함께 분별하면서 기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받은 응답을 서로 나눠봤대요. 

근데 정확하게 '멕시코 떠나야 된다'로 분별한 사람이 절반, 
'멕시코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로 음성을 들은 분이 절반, 
그래서 이분이 이제 실망이 됐대요. 

'아니 무슨 응답이 반반씩 오는 게 어딨어? 
그러면 둘 다 아니라는 건가?'

그래서 오히려 더 헷갈리고 상심이 돼서 
집에 와가지고 이렇게 넋두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감동과 함께 생각을 주셨대요. 

'얘야, 근데 정말 네가 원하는 건 뭐니?' 
여러분 제가 '이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라고 느끼는 
몇 가지 포인트들이 있는데 

-그거는 첫번째, 내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뭔가가 딱 임했을 때, 
-또 어떤 경우는 아내가 나를 정말 불편하게 하는 말을 했을 때, 
네, 그거는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근데 그때 오는 감동과 함께 '정말 네가 원하는 건 뭐니?' 
이분(미국에서 온 선교사)은 그동안 
자신이 원하는 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둘 중에 골라주세요'를 했던 거에요. 

이게 흔하게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중에 하나에요. 

보통 이지선다, 사지선다로.. 자판기에 동전 넣었듯이 기도 하면서 
결과를 얻기를 원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겠죠. 
'근데 정말 네가 원하는 건 뭐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 괜찮아!' (*큰 중대한 결정이 아닌 경우)

그 말씀을 제가 들었을 때, 제 안에서 정리되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 하나님 그렇군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확신도 중요하지만, 
내 안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하나님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먼저군요.' 

그리고 나서 보니까 '몽골을 떠나는 게 맞다'라는 것이 
선명하게 정리되는 포인트가 있었어요. 

▲제가 인도네시아에서 건축을 앞에 두고 '하나님, 계속 가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고민할 때 
그때 중요했던 건 무엇이냐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 삶에서 인도해 오셨던 방식을 기억해보는 거에요. 

그리고 그 역사성을 생각하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던지시는 그 말씀이 
'아, 이거군요. 하나님, 내 삶 가운데 일관되게 찾아오셔서 일 해주신 당신이 
나를 이렇게 인도의 가시는 거군요' 라는 확인이 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임할 때 오는 깊은 평안이 있어요. 
내 생각하고는 다른 생각이 임하는데,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내게 깊은 어떤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포인트가 있어요. 

하나님은 억지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함께 결정하자. 나와 함께 너희 앞 길을 논의하자' 
그리고 네가 기뻐하는 뜻을 이야기하렴. 
또 내가 너의 삶 가운데 기뻐하기를 원하는 포인트를 네게 이야기 해줄게' 
그렇게 맞춰가는 과정이에요. 

▲어떻게 보면 제가 (젊은 시절) 십 여년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제 삶이 너무 너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급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에 늘 놓여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덕분에 하나님이 제 삶에서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에 늘 관심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거의제 삶을 던지는 것에 좀 익숙해져있었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그랬고, 몽골에서 사역할 때도 그랬고 
인도네시아 사역도 그렇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와 어떻게 교제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경험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제 축적할 수 있었죠. 

그 여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다윗의 시편의 고백이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공급을 막 해주시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여호와가 내 목자라는 사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부족함에서부터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더라고요. 

제가 몽골에서 사역할 때, 저희가 9층짜리 아파트의 8층에 살았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하고 돌아와 보니까,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있었어요. 
그런데 고장난지 3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 고치고 있대요. 부품 하나가 없어서. 

그래서 제가 그 짐을 아파트 8층까지 들어올리면서 막 불평을 많이 했어요. 
'이 아파트에서 이사 나가야 되겠다' 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불평하고 난 다음날, 집에 도착해 보니까 
아파트 복도에 전기가 다 나갔어요. 밤에는 깜깜하고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들었어요. 

그곳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아파트 옮겨 이사나가는 게 맞다'라는 확신을 더 갖게 됐어요. 
그 다음 날 이제 장을 봐가지고, 저녁예배 끝나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차 타고 집에 돌아왔어요. 

이제 위로 올라갈 일을 생각하니까 깜깜한 거예요. 
가방 옆으로 메고, 그때 저희 집 셋째가 아직 어렸는데, 많이 먹어서 무거웠을 때였어요. 

셋째를 한 쪽 팔로 안고, 그리고 다른 손에는, 손가락 마디마디
우유, 주스, 빵 뭐 이렇게 봉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걸고 
손가락이 끊어질 정도로 이렇게 꽉 채우고.. 그리고 세 손가락을 비워놔야 됐어요. 
왜냐면 계단이 깜깜하니까 그 핸드폰 불빛을 이용해 가지고 발밑을 비추면서 올라가야 됐어요. 

참고로 몽골에서는 계단 높이를 일정하게 만들지 않아요. 
그래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발을 헛디디게 되고, 그러면 큰 일나죠. 애까지 안았는데.

 

게다가 술먹은 사람이 컴컴한 계단에서, 간혹 자고 있을 수도 있어요.
걸려 넘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짐을 들고서, 애를 안고서, 핸드폰 불빛을 비추면서 
그리고 힘겹게 올라가는 거에요. 올라가고 있었는데 
'뭐 이제 한 5 층은 왔겠지?' 하고 핸드폰 불빛으로 벽을 비춰봤는데 
거기에 '3층' 이라고 씌어져있는 거에요. 

'내가 잘못봤나?' 해서 다시 봤는데, '3층'이더라고요. 
정말 절망스럽더라고요. 그렇게 너무 힘겹게 8층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났어요. 제가 그 친구 집에서 놀고 있던 저희 큰 아이를 픽업해서 
이제 차를 세워놓고, 그 날이 굉장히 추웠어요. 영하 20 도 정도. 

차고와, 아파트 입구까지는 또 멀기 때문에 (지하 주차장 없음)
제가 큰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막 뛰다 걷다 이렇게 했어요. 

근데 그렇게 걸으면서 오랜만에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데, 너무 뿌듯한 거에요. 
아이한테 '얘야, 너 손 많이 컸구나. 아빠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아빠가 너랑 이렇게 같이 걸으니까 마음이 너무 따뜻하고 행복한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또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아파트 입구에 들어와서, 이제 또 8층까지 또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좀 걸어올라가다가 한 절반이나 왔을까? 하고서 핸드폰 불빛으로 딱 봤는데 
벽에 8자가 있었어요. 벌써 집 앞 인거에요. 아이랑 동행하다가 보니까, 금방 올라온 거죠.

근데 그 순간 아쉬움이 확 몰려오더라고요. 
'에이, 우리 집이 16층은 됐어야 됐는데...' 
갑자기 '이사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그 거리가 짧은 게 아쉽더라고요.

몽골에 그 당시에 다랑 이라는 곳에 16층짜리 아파트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근데 그 아파트 8층에 구멍 가게가 있었는데, 단골고객을 확보해서 장사가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근데 제가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몽골에서 살았던 삶의 여정가운데 
하나님이 내 손을 잡고 같이 걸어주신 거구나..'  

그 분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은, 너무 짧고 아쉬움이 남는 길이었어요. 
걸을 때는 깜깜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고, 어디까지 왔는지 계속 확인해야 될 것 같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그런 길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저를 초청하셨어요. 
'얘야, 나와 함께 걸어보자. 내가 네 손을 잡고 걸으니까 참 좋구나.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구나..' 

그렇게 걸었던 그 길, 먼 것 같고 험한 것 같았는데, 
아이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은, 너무 아쉽고 짧은 시간이 되더라구요. 

저는 그것이 '제 삶에서 하나님과 걸었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분과 함께 가는 길은, 내가 어떤 환경에 있는지 상관없이 
여전히 나를 채워주시고, 내게 안정감을 주시고 
내 안에 기쁨과 평안을 주는 그런 길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동일하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그 말씀이 문자 그대로 다가와서 믿어질 수 있게 된 거에요. 

▲이 시간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이 산을 내려가게 되면, 또 세상을 접해야 됩니다. 
세상에서는 수많은 이야기와 거짓말로 여러분을 낙담시키려 할 겁니다. 

'너는 가진 게 없잖아, 내세울 게 없잖아? 
앞으로 손가락 빨고 지낼 거니?
너는 부담도 많이 지고 있고, 여러 가지로 볼 때 부족한 게 많잖아? 
네 인생은 참 불쌍하다...' 

그런데요. 우리가 어떤 환경을 지날 지라도 
그분의 손을 잡고, '얘야, 나와 함께 가자'라는 그 분의 초청가운데 
'주님, 알았어요!' 하고 그저 첫발을 떼기만 해도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그 풍성함 속에 휩싸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경험하고 고백했기 때문에 
여러분들한테 자신 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 '얘야, 나와 함께 이 길을 걷자' 초청하시는 그분 앞에 반응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우리 같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