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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8장, 섬김과 중보기도의 사람이 된 아브라함

LNCK 2023. 9. 19. 18:52

◈섬김과 중보기도의 사람이 된 아브라함           창18장       ☞창세기      스크랩, 정리

 

창12~25장에는, 아브라함의 행적이 나옵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의 행적을 길게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한 사람이, 어떻게 믿음의 성숙을 이루어가는가?’

다른 말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12~17장까지 살펴보았고요. 그 내용은 여기를 보세요.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오늘 본문 창18장은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해서,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주고,

이어서 소돔 성의 멸망 계획을 듣고, 아브라함이 중보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창18장의 전체 제목을 “섬김과 중보기도의 사람이 된 아브라함”으로 정해 봅니다.

17장에서 할례를 통과한 아브라함이

한층 성숙한 믿음의 삶을 이어가는데,

-지나가는 나그네를 섬긴 것과

-이웃 주민 소돔 성을 위해서 중보기도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 나그네를 섬기다가 천사를 섬기다 18:1~8

 

창18장에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마므레는 헤브론이라고도 하는데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입니다.

 

마므레에는 상수리나무와 동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가

127세로 죽었을 때 헷 족속에게서 동굴을 샀는데 그 이름이 막벨라 굴입니다.

여기에 사라가 묻히고, 아브라함도 175세로 죽었을 때 이곳에 묻혔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13:2

위 구절은,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는 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설명합니다.

 

중동 유목민들은, 손님 환대 hospitality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옵니다.

아마 평소에 사람 발길이 뜸한 곳이라, 지나가는 길손이라도 반가워서 대접하는 모양입니다.

 

근데 지금 아브라함은 99세입니다.

아무리 175세까지 살았다고 해도 거동이 원활하지 않을 연세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 3명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본문 창18장의 주제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의 열매를 맺었다’는 거죠.

그는 '생각 속의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살았습니다.

신약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한 것인데... 아브라함은 뜻밖의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내년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수태고지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10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어진,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믿음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지고 계시는 이 아브라함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를 믿게 된 우리 각자가

어떤 성숙된 모습으로 자라가게 되는가?

그것 중 한 가지는 '이웃을 사랑하고, 대접하며, 중보기도 하는 모습으로 성숙된다'는 것이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저 문화도, 지나가는 행인을 그저 대접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7

이렇게 좋은 송아지를 잡을 정도로 극진히 예우하며 대접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장막 앞에서 앉아있다가 부지불식 중에 그분들을 만난 것이지만, :1~2

뭔가 이 손님들에게서, 위엄과 영광의 모습이 깃들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15:6,

이제 실제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7:1

 

할례의 언약을 통과하고, 아브라함(열국의 아비)로 이름이 변경된 그가 *17장

실제로 거기에 걸맞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또 잠시 실족할 때도 있지만 (20장에서 아내를 누이로 속임)

대체로, 전체적으로, 아브라함은 변화된 삶, 열국의 아비로서 걸맞는 삶을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구원론에서 우리는 종종 ‘칭의’ 한쪽만 편향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창세기나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거론할 때도,

창15:6절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이 한 구절만 강조하는데, 잘못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두루두루, 전체를 봐야 됩니다.

창세기에서 ‘칭의’ 측면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15:6,

그 반대 측면의 구절도 얼마든지 나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는 의아한 구절이 있습니다.

창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우리는 보통, 아브라함 하면, 창15:6절의 ‘칭의’ 구절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 구절은 ‘행함’을 강조합니다. ‘성화’를 강조하는 거죠.

 

창세기 성경은, ‘칭의’와 ‘성화’ 균형있게 둘 다 강조한다는 것이죠.

결코 한 쪽(칭의)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편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죠.    주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도(17:23), ‘칭의’ 성격과 일맥상통 합니다.

오늘날의 세례인데, 그가 또는 우리들이 완전해서 ‘할례,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할례, 세례’를 먼저 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격을 획득하고 나서,

이제 그 자격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적 노력으로 애를 써서 그렇게 사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내면의 변화된 심정으로, 즉 믿음으로

(구약에 성령이 간헐적으로 임하셨습니다. 구약에도 성령이 안 계신 것이 아니죠)

하나님의 자녀, 성도에 합당한 삶을 향해, day by day, little by little 변화/성숙/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항상 칭의와 성화는 짝으로 같이 강조되어져야 합니다. 칭의 한쪽만 보면 안 되고요.

-순서가 중요합니다. 칭의가 먼저 나오고, 성화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만약 성화가 먼저 나오고, 칭의가 뒤따라 온다면.. 율법주의가 되고 말죠.

 

▲오늘날 교회에서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새파란 신학생을 ‘교육전도사’로 임명하고는

‘전도사님’으로 부르면서, 그를 예우해 주면서 기다리다 보면,

그가 결국은 점점 하나님의 성숙한 종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장로님, 권사님, 육군사관생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온전한 그릇으로 뚝딱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각자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참고 기다려주어야 하며, 다른 이들도 그렇게 참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빚어지고, 성숙해지기까지요! 아브라함은 지금 24년 지났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그 이름이 변경된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실제로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가 아직 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이르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비전대로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신약의 우리들에게는 ‘성도 a saint’라는 호칭을 주시고 *거룩한 자

‘그리스도인 Christian’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닮은) 자라는 호칭도 주시고, 행11:26

그것이 우리가 받은 ‘새 이름’인 것입니다. 계2:17

 

(*물론 이 모든 것은, 온전히 거듭나고 회개한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지적동의로 예수 믿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본문 창18장을 통해서

의롭다 칭함 받고, 열국의 아비가 된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변화가

“섬김의 사람이 되었다”는 주제를 살펴보는 중입니다.

 

18장 전반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현실적 섬김의 사람이 되었지만

18장 후반부는, 소돔 성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영적인 섬김의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과 빛같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거죠.

 

◑2. 사라, 수태고지를 받다 18:9~15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이 99세입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았다면,

근 24년을 믿음으로 살아온 시점입니다. 이제 성숙할 나이가 된 것이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깨어지기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만약 10~20년 일찍 그가 이삭을 낳았더라면,

사라와 함께 자기들 힘으로 이삭을 낳은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힘이 다 없어지고, 사라의 경수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어떤 힘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힘이 포기되어졌을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사라가 웃었습니다’ 왜 웃었습니까? :15

자식 낳는 일을 포기했다는 증거입니다.

자기의 경수가 끊어지고, 더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때라는 거죠.

 

▲사라가 웃으며, 자기 마음속에 왜 이런 불신앙이 있었습니까?

 

메튜 헨리가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사라는 이 일에 ‘2차적인 원인’만 생각하고,

‘1차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차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고,

2차적인 원인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2차적인 원인으로 불가능해도 1차적인 원인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눅1장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습니다.

 

2차적인 원인으로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까 마리아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2차적인 원인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고 믿은 것이고

사라는 2차적인 원인으로 안 되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이 많아도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게 되었더라도

하나님이 고치시면 살게 되고

내가 어려운 일에 빠졌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라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사용해야 합니다.

 

사라(또는 오늘날 우리)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됩니다.

창18:10절과 14절에 하나님이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0).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그러니까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두 번이나 약속의 말씀을 주셔서 불신앙을 치유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라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창18:12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을 가리켜

“내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것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벧전 3:6).

 

사라의 장점은 남편을 존중한 것입니다. 남편이 믿음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라의 믿음이 부족해도, 그는 이삭을 낳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소돔 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아브라함 18:16~31

 

본문의 아브라함의 기도는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중보기도입니다.       주2) ‘도고기도’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인가요?

중보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창18: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하나님은 성경에서 세 번이나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벗 아브라함” (대하 20:7).

나의 벗 아브라함” (사 4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친구의 특징은 서로 친하게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돔을 심판하려고 하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을 건져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사람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교제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진정한 영적 교제의 두 가지 필수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말씀과 기도에 점점 더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가까이 해야 되고 기도를 더 친밀하게 해야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친구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만 택하여 친구로 삼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5).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진리를 제자들이 다 알게 하시고,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구이자

하나님의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가 없다고 해서 외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친구여도 얼마나 자랑하고 다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친구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였고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1~22).

 

성부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죗값을 대신 갚아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우리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친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 가지의 복을 받습니다.

사죄, 칭의, 화친, 즉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며

하나님과 친구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 믿지 않는 친척들 그리고 믿지 않는 동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중보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의인 50명이 있으면 온 지경을 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단들에는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렇게

다섯 개의 도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인 50명이 있으면, 다섯 개의 성 모두를 용서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50명은 많으니까 45명으로 줄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45명으로 줄여주시니까 이번엔 또 40명으로 줄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30명, 20명 결국 10명까지로 줄였습니다. 하나님과 여섯 번이나 협상을 한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장사를 했으면 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끈질긴 기도를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을 야단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 18:1).

하나님은 기도하되 끈질기게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실상 하나님이 인도하신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는 것도 미리 알게 하셨고 아브라함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도

다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들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응답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의인 50명이 아닌 10명만 있어도 온 지경을 용서하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부패하고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심판하시기에 합당한 나라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에는

새벽마다 기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어려운 중에서도 발전하는 줄로 믿습니다.

 

나라를 살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롯은 소돔에 들어가서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창 19:1).

소돔에서 그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돔이 망할 때 롯이 기여한 것은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거나 정치를 하지도 않았지만 롯보다

훨씬 더 공헌한 것이 많았습니다.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를 한 롯의 공헌보다 기도를 했던

아브라함의 공헌이 훨씬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올바른 정치가도 있고 이상한 정치가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을 밝게 하고 나라를 건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하는 성도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족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해야 되겠고 나라를 위해서도 중보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저 북한 땅에 예배드릴 자유도 없는 우리의 동족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들에게도 예배할 수 있는 자유의 때가 속히 오게 하여 주시고

남북한이 복음으로 통일되어 남북한 성도들이 합력하여 세계를 향해 선교하는 선교의 대국이 되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나라가 잘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말할 때, 칭의 측면만 강조하게 된 이유는,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측면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공부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칭의의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2천년 전에 사도바울이, 로마서4장에서, 아브라함을 '칭의의 믿음의 소유자'로 설명한 이유는,

당시 초대교회 유대교, 유대주의자들은, 믿음을 모두 '행위'적 측면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칭의'를 소개함으로써, 창15:6절을 인용해서요,

그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지, (칭의와 성화를 둘 다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지)

결고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의 측면으로만 편향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주2) 혹자는 ‘도고기도’와 ‘중보기도’를 엄격히 이렇게 구분합니다.

 

도고기도(intercession)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중보기도(mediation)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런데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약속’입니다.

오늘날 ‘중보기도’라는 명칭이 두루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이 말을 써도 상관 없다고 봅니다.

누가 ‘중보기도’ 라는 말을 쓰면서, 자기가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넘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