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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라 이사야43:1~3 2022.02.09.
오늘 설교 제목은 "조급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라" 입니다.
'성공보다도 승리를 구하라 (3강)' 라는 주제입니다.
이진희 목사님이 쓰신 <가나안에 거하다> 책의 86페이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의 핵심과도 같습니다.
「광야는 그저 통과하는 곳이 아니다. 빨리 통과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에서 살 준비를 충분히 해야 한다.
준비 없이 들어가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다시 쫓겨날 수 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다 광야생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할 리가 없죠.
먹고 살 대책도 없고, 매일 아침에 만나를 내려주셔야 그날 먹고 살고,
집도 지을 수도 없고,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늘 옮겨 다녀야 하고,
끝도 없는 광야생활... 그거 누가 좋아하겠어요?
근데 꼭 아셔야 됩니다. 이 광야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광야가 우리에게 너무너무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광야를 그냥 싫어만 하지 않게 됩니다.
광야가 주는 유익, 광야가 주는 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래야 광야 생활을 제대로 해내게 됩니다.
▲이 광야가 있었던 사람과, 없었던 사람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다윗왕과 사울왕이 성경이 아주 대조적인 사람인데, 사울왕은 광야 생활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오랜 기간 동안, 약 13년에 걸친 광야 생활을 거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울왕과 다윗왕이 차이가 나는 거예요.
사울은 그냥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실패한 왕이 됩니다.
다윗은 13년 동안 광야를 거치면서, 왕으로서의 준비가 갖추어졌어요.
그래서 그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광야를 괜히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고생해봐라' 그렇게 주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만약 광야 같은 삶이 있다면,
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가 있어서 주신 겁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광야를 거쳤습니다.
물론 똑같은 형태의 광야는 없습니다. 누구도 광야는 다 제각기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았는데, 이삭의 이름이 '웃음'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웃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그제야 비로소 웃었다'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그 전까지는 웃을 만한 일이 없었어요. 아들이 없었으니까.
그가 75세에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아들 없이 25년을 지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들어가도, 가나안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들이 없는 세월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25년을 '기다림의 광야' 시기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백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져서 죽을 뻔 했다가, 건짐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거기서도 또 지하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벗어나서, 애굽의 총리가 되요.
요셉이 13년 동안이나 사실은 구덩이 속에 살은 겁니다.
구덩이에 빠졌다가, 또 구덩이(감옥)에 갇혔다가,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돼요.
그러니까 요셉은 '구덩이 광야'를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지난 거죠.
모세는요.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을 지냅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40년 동안 인도해요.
그 40년 미디안의 광야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할 수 있었던 거예요. 광야 생활에는 훤하니까요. 그죠?
하나님이 괜히 광야를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나안에서의 삶을 준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광야를 주신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자기가 회심했음을 고백하고
주의 제자들을 만납니다.
근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바울이 굉장히 껄끄로운 대상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기들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다는데
믿어도 되는지 어떤지.. 그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선뜻 달갑게 환영해 주지 못했어요.
결국 사울은 쓸쓸히 고향 다소로 돌아갑니다.
그는 고향 다소로 돌아가서, 13년 정도의 세월을, 거기서 그냥 묻혀 지냅니다.
사도바울의 존재를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런 진짜 '영적인 광야 생활'을 보냈던 거죠.
근데 그 다소의 영적 광야 생활 중에, 사도바울이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체험, 환상의 체험,
그리고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를 깨우쳐주시는 놀라운 기간을 보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과, 그 이후의 모든 사역에서의,
영적인 기초, 신학적인 기초가 다 그때 만들어져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면
여러분들의 광야가 또 다 달리 있을 겁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나 다 광야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이들은, 다 광야를 거칩니다.
그런데 그 광야가 굉장히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돼요.
그걸 모르면, 광야 동안에 어떻게 기도하게 되냐면
'빨리 끝나게 해주세요. 하나님, 이 어려움이 빨리 지나가게 해주세요.
좀 편안한 날이 오게 해주세요. 이제는 좀 마음껏 그렇게 지낼 수 있는
그런 풍요한 때가 좀 오게 해주세요.' 이렇게만 기도를 하게 돼요.
광야가 주는 진짜 유익을 모르니까, 광야에서 얻어야 될 영적훈련이 안되는 거죠.
절대로 그렇게 해서 광야가 지나가지지 않습니다.
▲민14:8절에 보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기뻐하시면' 이에요.
광야를 지내는 동안에 막 소리지르면서
'광야가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 이 어려움이 빨리 사라지게 해달라,
이제는 좀 편안한 날이 내게 좀 오게 해달라'고 철야하기도 하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금식기도도 하는데... 그게 아니고,
광야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즉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도록,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살면..
내가 겪는 모든 일 속에 말 한마디라도 성숙하게 하면,
지켜보시던 하나님이 '넌 어쩌면 그렇게 말이라도 그렇게 나를 기쁘게 하냐?'
'넌 어떻게 생각을 그렇게 내가 기뻐하는 생각을 하냐?'
'넌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때, 너도 힘든 광야기간인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냐?'
그게 가능한 빨리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막 소리소리 지르고, 어려움이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르짖기만 하고..
그러고 언제까지냐고 하소연하고... 그렇게 해서 광야가 지나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게 핵심인 거예요. 민14:8
애굽을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길면 2년이면 들어갈 수 있었어요.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제 바로 북진해서 넘어가면 가나안 입니다.
근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들이 갔다 와서 난리가 났죠.
'그 땅에는 엄청난 거인 거주민들이 사는데, 도무지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러면서 통곡을 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그러고
여기서 우리가 이제 다 죽게 생겼다... 그러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게 38년 광야생활의 시작이었죠.
민14:25절에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이제 막 광야를 지나왔는데,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되는데.. 준비가 안 된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원망 불평하고,
'괜히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내서 다 죽이는구나'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고..
하나님께서 '그러면 너희들은 다시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그래서 2년이면 마치고 졸업할 광야를, 38년을 더합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때 당시 있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가요.
이 기가 막힌 일이 실제로 우리들의 삶속에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광야는 언제 끝나죠?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면,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 수 있는 자가 되면,
광야든지/ 가나안이든지.. 사실 상관이 없어요. 살아보면 광야도 가나안일 수 있어요.
모세도 그랬어요. 모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지만
늘 주님과 동행하며, 늘 주님을 대면해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40년 광야가 모세에게는 사실 가나안과 같았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도,
그곳에서 싸워서 그 땅을 정복해야 되었고, 그래야 됐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환경이 어려우냐/ 편안하냐가 아닙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삶을 사느냐?'
그게 광야에서도, 빨리 광야가 끝나는 길이고
가나안 땅에서도, 거기서 복되게 사는 핵심인 거예요.
그 점을 훈련하기에 좋은 곳이 광야입니다.
가나안 땅은 오히려 시험이 많아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지 / 안 계신지... 광야가 훨씬 더 알기가 쉽습니다.
왜냐면 거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먹을 게 생기면,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광야는 진짜 대책이 없는 곳인데,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덮어주시니까
사실 살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기에는 매일이 기적이에요.
오늘 살았다고 생각되면.. 오늘이 기적인 거예요.
하룻사이에 죽을 수도 있는 곳이니까요.
가나안은.. 농사지어서 저장해서 먹고 사는.. 집 짓고 거기서 사는 곳이니까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때때로는 막연해요.
하나님이 꼭 공급하셔야만 먹고사는 건 아니니까,
일단 집에 저장해 놓은 양식 가지고 먹으면 되니까..
'이게 하나님이 주신건지/ 내가 농자지어서 거둔건지' 헷갈릴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쉬워요. 영적으로 더 위험한 곳이죠.
그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엄청나게 할 수 있어요.
▲근데 문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러면 다시 광야로 내쫓깁니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이라도 구원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됐어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성공과 부유함만 추구하고
그래서 바알신을 섬기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광야로 내쫓습니다.
그 광야가 '바벨론 포로' 광야예요.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오는 동안에 40년 동안 걸렸는데,
바벨론에 포로로 가서는 70년이 걸립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던 거죠.
가나안에서 올바르게 살았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광야에서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믿고,
자기가 농사지어서 거둔 곡식이지만, 이거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믿고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를 드리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잘 했으면
그러면 그 가나안 땅에서, 정말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의 통로가 되는 그런 삶을 살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결국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빨리 광야가 끝나기를 바라는 조급함만 가지시면 안 됩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 죽겠어요. 하나님 이거 빨리 끝나게 해주세요.
하나님 빨리 벗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만 기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광야가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이 광야를 통해서 도대체 뭘 어떻게 저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뭘 배워야 됩니까? 무슨 훈련을 해야 됩니까?'
그러면 기도도, 벌써 하나님의 마음에, 느껴지는 게 다르지 않겠어요?
'하나님 제가 뭘 배우면 좋겠습니까? 제가 이 광야를 통해서 뭘 깨달아야 되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빨리 해결해 주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쫓겨나서 이번엔 '바벨론 광야'로 끌려갑니다.
정말 이방 민족, 우상섬기는 갈대아 민족의 종으로 거기서 살아요.
근데 다행히 그들이 거기서 회개합니다. 돌이켜요.
성전에 갈 수가 없어요. 성전은 이미 다 무너졌고
또 포로로 바벨론까지 끌려갔으니...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회당을 세웁니다.
성전 제사는 못 드리지만, 거기서 예배 드릴 수 있는 공간(회당)을 만들어서
요즘 우리 식으로 보면 이렇게 예배당인 거죠.
(오늘날 예배 형식의 최초 기원이 회당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번제 같은 제사를 못 드리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그러니까 율법서를 읽고, 기도하고, 시편을 읽고 노래했던 거죠.
그 회당 예배를 드리는 형태가, 지금 우리들이 드리는 이런 예배 형태와 비슷한 거죠.
중요한 것은 성경인데, 그전에는 성경이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읽어주면
백성들은 귀로 들은 거예요. 구전으로 전해진 겁니다.
근데 이제는 성경이 핵심이 되었습니다. 제사가 핵심이 아니고.
그래서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경을 기록하기 시작해요.
구약성경의 대부분이 언제 기록됩니까? 바벨론 포로 시절에 기록이 됩니다.
기가 막히죠? 이 구약성경이, 바벨론 포로 시절에 대부분 지금처럼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이 돼요.
바벨론 포로가 없었다면, 구약성경이 없었을 수도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걸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걸 모아놓은 게 탈무드예요. 유대인들이 지혜의 책이라고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탈무드!
안식일마다 그들은 회당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듣고, 공부했어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살 때는, 하나님 앞에 제사들이 있는 곳조차 소홀히 여기고
그리고 아주 병들고, 제대로 상품 가치도 없는 것들만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벨론에 가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거기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배우고, 그리고 성경을 전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던 때가 언제냐면, 바벨론 포로 시절이에요.
그 기가 막힌 어려웠던 때, 나라를 다 잃어버리고, 성전은 다 무너지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그 시절에.. 그들에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기록이 되고, 그리고 회당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그러고 난 다음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 광야 생활 중에 어떻게 해야 되는 거구나..' 하는 감이 잡히죠?
지금 내가 완전히 광야로 내몰린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이 드시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도 말고,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보채지도 말고,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나를 기뻐하실까?'
그 삶만 제대로 살면 되는 거죠.
▲지금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서, 사실 온 세계가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22년 설교
코로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많고, 특히 우리 교인들의 어려움은 예배당에서 못 모이는 거예요.
지금도 성령 집회에 300명 등록한 분들만 오시기로 했는데 (인원 제한)
나머지 분들은 영상으로 참여하시는데
우리가 지금 가장 곤혹스러운 일을 겪고 있는 거죠.
전에는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힘은, 모여서 찬송하고,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은혜 받고...
거기서부터 왔거든요. 근데 이제는 모일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정이 다 교회가 되어버렸어요. (바벨론 포로시기와 유사해요)
이 어려움이 아마 두고두고 앞으로 교회 역사에 굉장히 중요하게 언급될 것 같아요.
전에는 신앙생활이 다 예배당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집마다 다 예배당이 됐습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서 변화가 생긴 거죠.
전에는 거실에서 지내고, 식당에서 밥 먹고 그러던 집안이
예배 시간이 되면 갑자기 거기가 예배당이 되어버려요.
이런 일이 2000년 전에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또 무너집니다. AD70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이 무너지니까 얼마나 당황스러워요? 다 끝난 것 같았죠.
근데 참 놀랍게도 그로 인해서 수천 수만의 성전이
유대인들 가정을 통해서 세워지게 돼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와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집니다.
유대인들 각 가정이, 자기 가정에서
이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드리는 처소가 돼요.
안식일 저녁(금요일 저녁)이면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서
거기서 찬양 드리고 기도하고.. 그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고..
제사장이 없으니까, 이제는 회당에서 랍비가 성경을 풀어주고, 성경을 가르쳐요.
그리고 집에서는 가장이 제사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유대인들은 2000년동안이나 신앙을 어디서 지켰냐면.. 가정에서 지켰어요.
지금 있는 이스라엘 나라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가지고, 가정에서 신앙을 지키고, 가정에서 예배드리고,
가정에서 성경 읽고, 가정에서 기도하고,
성전이 그대로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가정으로 다 옮겨졌어요. 정말 기가 막힌 일이죠.
정말 말할 수 없는 그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2,000년 동안이나 나라 잃어버린 세월을,
우리는 36년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극복이 잘 안되는데
2,000년 동안 나라 잃고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그 유대인들이
가정이 성전이 되는 그 전통 하나로,
그들은 너끈히 신앙을 지켰고, 오히려 더 강해졌죠.
▲지금 현재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지만..
또 하나의 광야가 온 거죠.
근데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도 없고,
하나님이 모르는 일이 닥친 것도 아니고..
그러면 '반드시 무슨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거다..'
'지금 이 코로나19로 이렇게 모여서 예배 드리지 못하는 것만 걱정하고, 한숨 쉬고
이거 빨리 회복되기만 이렇게 구할 문제가 아닌 거다... 뭔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진짜 와~ 하나님 정말 놀라우신 분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우리도 갑자기 '예배 드리는 장소가 예배당만 아니었구나,
내가 일하는 직장, 거기도 얼마든지 예배 드리는 장소가 되고,
집도 예배 드리는 장소가 되고, 심지어 지하철, 버스 안에서도 예배 드릴 수 있구나!'
모든 곳이 다 예배당이 되어버렸어요.
물론 예배 드릴 수 있을 때, 다시 또 모이긴 해야 되는데
그때 안 모일까 봐 걱정하는 분들도 꽤 있긴 합니다.
실제로 코로나19가 끝나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점은 큰 기도 제목이기는 해요.
근데 예배당에 다시 모이는 은혜의 역사는, 그대로 하나님은 하실 것 같아요.
모여서 받는 은혜는 워낙 크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모든 우리의 삶의 영역이 다 예배당이 되게 하신 이 일은..
이거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가 온라인.. 교회 안에 소모임, 속회가 금지될 때
<예수동행 일기나눔방>이 기가 막힌 성도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동행 속회'로 다 바뀌었죠.
그동안에 '온라인 기도사이트'가 만들어졌는데
교회와서 마가다락방 기도 못하게 되니까 어디서 기도하나? 했는데,
그런데 온라인 기도원이 생겼잖아요.
이제는 교회까지 와서 마가다락방에 올 필요도 없어요.
온라인 기도원에 들어오면 되니까요. 휴대폰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기도원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어요.
온라인으로 전도도 되고, 온라인으로 제자훈련도 되고, 온라인으로 양육도 되고,
온라인으로 심방도 되고... 그러다가 작년에 '온라인 교회'가 만들어졌는데
아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에요.
아마 교우 여러분들이 온라인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상상도 아마 잘 하기가 어려우실 텐데
진짜 엄청난 일이 지금 교회 안에 일어났어요.
교회가 하나 새로 생겼는데, 온라인 교회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광야 시절에 이루어진 일들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광야가 내 삶속에 왔을 때
그때 꼭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이 광야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제가 훈련받아야 될 게 뭡니까?' 하나님께 물어봐야 됩니다.
그게 광야를 빨리 지나가는 길이에요.
우리가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코로나19가 이제 다 종식되고
다시 옛날처럼 다시 모이게 되겠죠. 그럼 그 옛날은 무조건 다 좋았나요?
코로나 전에, 교회 모여가지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음 안 맞아서 싸우고..
별의별 어려운 일도 생기고 그랬어요.
사실 코로나19 이전에 한국교회는 문제가 많았어요.
교회들마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시험거리도 많았고요. 그대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No
아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코로나19 터지기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우리는 코로나로 생고생만 한 거죠.
이제 다시 모일 수 있게 될 때는, 그 전하고는 달라져야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겠어요?
우리에게 괜히 코로나19를 주셨을까요? 이제는 모이면 정말 사랑하고
그리고 이제는 정말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서
주님의 임재를 진짜 알고, 이제는 은밀한 습관적인 죄에서 우리가 벗어나고,
이제는 정말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말씀의 사람이 되고, 순종의 사람이 되고,
그래서 저 북한도 이제는 복음으로 통일해 낼만하고,
사회적으로도 교회와 성도들이 이제는 정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고,
집안에서든지, 바깥에 나가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면, 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다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이렇게 변화되어야
코로나19로 인해서 고생한 보람이 있는 거죠.
그걸 깨닫고 2020년, 2021년 성령 집회 때, 우리가 코로나19가 끝나기만 구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어떤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합시다.
그래서 이제 말씀을 전하고, 그게 지금 책으로 두 권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그 기간 동안에 있었던 설교가, 또 책으로 나올 가능성도 있지만
우선 두 권 책이 있어요. <이기지 못할 시련은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빨리 이 코로나19가 끝나기만을 구하지 말자는 거죠.
우리에게 지금 믿음의 눈이 열려야 되고,
이제는 코로나의 모든 상황이 다 끝났을 때는
정말 제대로 살아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 각자가 성숙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여러분의 어려움 속에 절대로 조급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려움만 지나가기를 자꾸 안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어려움을 없애주지 않으세요.
우리에게 유익하니까 어려움도 주신 거거든요.
그 대신에 하나님은 약속하셨어요.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절대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
그냥 '너만 광야를 한 번 지나가라'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끝까지 광야를 지나가도록 우리를 지켜주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죽을 거 걱정하지 말고, 내가 이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바뀔 것만 생각하라는 거죠.
본문 이사야 43:1~3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광야로만 내몰지 않으시고, 더 가까이 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제가 1984년 6월에 한쪽 다리를 다치고, 군목 임관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리도 치유되어야 하지만, 당장 제가 섬길 교회가 없었어요.
군목 간다.고 다 사임을 하고, 임관을 못했으니
수원에 계시는 아버님 집에, 제 아내와 큰 딸과 얹혀 살게 된 거죠.
빨리 저도 어느 교회에 가서 부목사라도 사역을 해야
그래도 저도 가정을 꾸려나갈 것 아닙니까?
한 달 동안 목발을 짚고 서울에서 수원 왔다 갔다 하면서
제가 섬길 교회를 찾아 다니다가, 한 달 정도 좀 지나니까
'내가 갈 교회가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사람들은 다 저보고, '유목사가 갈 수 있는 교회는 틀림없이 있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해주는데 그분들도 사실은 '아휴, 당신 같은 사람이 갈 교회가 어디 있겠어?'
그렇게 생각을 했더라고요.
실제로 목발 짚고, 군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건강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그런 사람을 어느 교회가 부목사로 받겠어요?
'아~ 이게 안되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제가 깨달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는 갈 데가 없구나, 나를 받아주는 데가 없구나..'
서울에서 수원의 아버님 계시는 집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내내 울었어요.
그때 마음에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하나님, 제가 더 이상 사람 찾아다니면서 내가 일할 교회를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면, 제가 기도만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음에 나름대로 굳게 결심을 하고
그때부터 기도만 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제 평생에 진짜 기도만 하면서, 응답을 기다려본 첫 번째 케이스에요.
그 전에는 기도를 하긴 했었지만, 사실 진짜 기도를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근데 문제는, 기도가 실제로 해보니까, 기도만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작정을 하고 '오늘은 기도만 하리라' 그때까지는 좋았어요.
근데 이제 하나님 앞에 정말 제가 갈 교회를 인도해 달라고,
뭐 그렇게 기도할 제목들을 놓고 기도 다 끝났는데.. 시계를 보니 5분 지났어요.
자 하루 종일 어떻게 기도해요? 열 번을 똑같은 기도를 했는데도 한 시간도 안 돼요.
하루 종일 기도한다는게 어렵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더라요.
그게 그때 제 수준이었어요. '그럼 이걸 어떻게 하루 종일 기도하나?'
그때 하나님이 제게 깨우쳐주신게 성경을 읽으라는거에요.
그래서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이 같이 가는 것을, 그때 배웠어요.
그래서 장세기부터 펼쳐서 성경을 읽고, 기도가 안되면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기도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상하게 깨달아지는 게 많았어요.
성경을 읽으면서, '야 이런 내용이 있었구나, 이런 뜻이구나'
근데 그걸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어서, 그것을 옆에 노트에 쓰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두 달을, 석 달을 보냈어요.
그때 만들어진 기도에 대한 공부 노트가,
사실 성령으로부터 성경 공부를 받았던 참 놀라운 경험이었고, 그리고 기도 훈련이었고,
저와 제 아내가 함께 믿음으로 사는 정말 실제적인 훈련을 했고
(마치 바울의 고향 다소의 기간이었죠)
그게 모체가 되어서, <예수님의 사람> 제자훈련 교제가 만들어지게 된 거예요.
그리고 3개월 뒤에, 정말 하나님만이 하셨다고 하는 방법으로
서울광림교회 부목사가 됐어요. 그때 제 나이가 27세였습니다.
요즘 보면 27세 나이에 그렇게 부목사로 간다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냥 이루어진 거예요.
광야를 지날 때, 빨리 광야가 끝나기만 기도하지 말고
그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뭡니까? 내가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쪽으로만 초점을 맞춰서 가보면, 광야 생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엄청난 은혜가 있어요.
절대로 조급해하지 말고,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광야는 언젠가 끝난다.
그리고 그렇게 가나안에서도 (광야와 같은 정신 자세로) 사는 거다.
그 훈련이 안 되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쫓겨난다...'
기억해야 돼요.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은 반드시 포기하지 않게 하세요.
이사야 49:14~16절, 광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잊어버리지, 포기하지 않으세요.
우리 스스로가 포기하는 거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세요. 0
여러분을 광야로 내모시고, 그렇게 끝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캐더린 마샬이 쓴 <기도의 모험>이라는 책에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데, 그렇게 평안한 성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이분이 어려운 문제에 앞에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마음에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그런 응답을 주시더래요.
지금 자기는 조급해 죽겠고, 당장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응답은 천하태평 같이 그냥 '기다리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니까,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염려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대요.
근데 한 3일 정도가 지나니까, 그 문제가 많던 것들이 그냥 싹 해결이 되어버린 거예요.
'참 신기하다..'
근데 그때 딱 깨달아지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3일 동안을 계셨어요. 그때는 진짜 다 암울한 것 같아요.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무덤에 묻히셨어요. 이제 끝난 거죠.
그 3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부활하신 거예요.
이분이 엄청난 영적인 진리를 깨달은 겁니다.
'아, 주님의 부활 역사 전에 3일 동안의 죽음의 기간이 있었구나'
그때는 그냥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된거에요.
어떤 문제가 생기고 시험이 생기고 그러면, 진짜 주님께 맡기고 3일을 기다려요.
불평하는 은혜를 뒤집지도 않고, (반항하는) 행동으로 뒤집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정말 맡기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제스처를 주실 때까지, 내게 어떤 싸인을 주실 때까지,
3일을 기다리면... 그러면 지나고 나면 정말 부활의 역사를 경험한다는 거죠.
'아, 주님이 역사하셨구나, 주님이 일하셨구나!'
그 내용이 그 책 속에 참 감동적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광야를 지날 때 꼭 가져야 될 원칙이에요.
조급해하지도 말아야 되고, '언제 끝나나요? 언제 끝나 나요?' 보채지도 말아야 돼요.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아야 돼요.
▲우리가 겪는 우리 광야 중에, 가장 힘든 광야가 '사람 광야'입니다.
진짜 나를 광야 생활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까 많이 공감을 하시네요.
진짜 그 사람이 내 인생을 지금 광야처럼 살게 만드는 거에요.
이 '사람 광야'가 참 견디기 어려워요.
정말 이 사람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요. 근데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게 광야거든요.
자, 그럴 때 어떡하죠? 이번에 임동수 선교사님이 책을 하나 출간했습니다.
<녹슬지 않고 닳아 없어지길 원합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그 중에 한 부분을 읽어드리고 같이 기도하려고 합니다.
「주님, 제가 양이 되게 하소서!" (2017년 3월 15일 예수동행 일기)
파라과이엔 집마다 기르는 가죽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대부분의 가축들은 낮 동안 자유롭다 못해 거의 자기 마음대로
여기저기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도 어둠이 찾아오면
하나 둘씩 꼭 집으로 돌아옵니다.
너무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인데
밤에는 어김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단 하나, 양만 제외하고 그렇습니다. 양은 가축 중에서 단연코 제일 미련합니다.
자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이 해를 당하고 있어도
소리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양과 같다'고 표현한 것은, 어쩌면 가장 정확한 비유일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비슷하게 생겼는데도,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염소입니다.
염소는 매우 영악하고 못된 성격이라서, 양이 얌전히 풀과 잎을 먹고 있을 때
염소는 굳이 올라가지 않아도 될 나무에 올라가거나,
잎을 놔두고 나무 몸통을 갈아 먹어서 기어이 나무를 죽이고 맙니다.
하지만 이런 못된 염소도 한 가지 쓸모가 있는데
그건 움직일 줄 모르는 양무리 속에 섞어 놓으면,
활발한 염소가 들쑤시고 다녀서 양들도 제자리에만 있지 않고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염소가 만약 없다면, 양은 제자리에서 맴돌며 그 근처의 풀만 뜯어먹게 됩니다.
살아가다 보면, 양과 같이 순한 사람도 있지만, 염소같이 못된 사람도 적지 않게 만납니다.
심지어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염소같이 나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염소가 없다면, 나는 그저 현재의 삶에 안주하여 굳어져 썩어져 갈 것입니다.
때로는 그 염소 같은 사람이, 나를 말할 수 없이 괴롭게 하고,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상황이 있기에, 그 상황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떨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 사람의 염소됨이 지나쳐서, 내가 감당하기 힘들 때도 있지만
그 일을 통해 그 상황을 주님의 이름으로 이겨나갈 때
나의 삶과 신앙도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한가지는, 나는 내가 양이라고 믿고 살지만
누군가에게 나도 양이 아니라, 염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근신하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더욱 주님께 간구합니다.
'주님, 제가 염소가 아니라 양이 되게 하옵소서!
염소를 만날 때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만 집중하여 분노하기만 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그 일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