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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장, 믿음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아브라함

LNCK 2023. 9. 22. 21:56

◈믿음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아브라함         창21장        ☞ 창세기 설교모음

 

창세기12장부터 25장까지 이어지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행적을

<믿음의 성장=성숙=완전=온전>이란 실에 꿰어서, 일관성있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아브라함의 행적을 길게 기록한 ‘원래 저자의 목적’이라 봅니다.

 

직전 창20장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사건에서

'믿읨의 조상'에서 한 번 미끄러질 뻔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본문 창21장에서, 아브라함은 <언약을 성취하고(이삭 낳음), 하나님을 증거하는>

보다 성숙된 성도,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완전, 자기 구원의 완성의 단계로 더욱 가까이 다가간 모습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한층 더 성숙한 믿음, 온전한 믿음으로 발돋움했음을 본문 창21장은 보여줍니다.

 

◑창21장은 크게 아래의 3대지입니다.

 

-이삭의 탄생 21:1~8

-이스마엘을 내보냄 21:9~21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을 증거함 21:22~34

 

▲1. 이삭의 탄생

언약의 자손인 이삭을 낳는 것은.. 아브라함의 일생의 사명이었습니다.

노아의 사명이 방주를 짓는 것이었다면,

아브라함의 사명은, 이삭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낳음으로써, 일단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장 중대한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물론 이삭을 낳기까지, 내적/외적인 여러 훼방과 시험과 위기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으로(15:6),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자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삭은,

현실적으로 보자면 ‘여인의 후손, 언약의 후손’이지만,

상징적으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신약의 복음’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이름 뜻은 ‘기쁨, 웃음 joy’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언약대로 살고, 자기 사명에 충성할 때

그 삶에 웃음, 기쁨의 열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열매를 주시죠.

 

에덴동산의 ‘에덴’도 그 뜻이 즐거움 pleasure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에덴이 회복된 것입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 joy 이라’

 

신약 성도가 복음으로 살고, 자기 사명을 감당할 때는

반드시 ‘이삭’을 낳습니다. 그 삶에 기쁨, 즐거움, 희락이 넘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노년에 이삭을 낳았다는 점에 주목하십시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 21:6~7).

 

이를 두고 대부분, 인간의 능력이 무능해졌을 때, 비로소 이삭을 낳았다.. 라고 해석하죠.

맞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은

‘신앙의 성숙, 믿음의 성숙은.. 노년에 가서야 완성된다,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죠.

 

노벨 화학상, 노벨 무슨 상은, 젊은이도 받는데, 노벨 문학상 만큼은 늙은이만 받는다고 합니다.

‘깊이 있는 인생’ 문제를 다루는 ‘문학’은, 인생 연륜이 쌓인 노인만 다룰 수 있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신앙의 성숙, 믿음의 성숙, 즉 이삭을 낳는 일은,

(이스마엘은 금방 낳을 수 있습니다. 그냥 자기 능력으로 저지르면 됩니다)

오랜 인내와, 기다림과, 참음과, 자아 포기, 자아의 죽음 끝에.. 늙어서야.. 비로소 되는 거죠.

 

늙으면 저절로 다 이삭을 낳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고요,

이삭을 낳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얘기죠.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았으니.. 다행이라는 거죠.

세례 받은 성도 중에, 이스마엘만 낳고, 이삭을 낳지 못하고 노후를 마치는 사람도 수두룩할 것입니다...

 

▲2. 이스마엘을 내보냄

 

이스마엘은, 약속(언약)의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육신의 힘으로 생산한 자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육신(이스마엘)의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복음을 살아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스마엘이 더욱 ‘복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죠.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힘, 물질의 힘, 숫자의 힘, 세상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과 복음 사역을 감당하려는 유혹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게 이스마엘을 낳는 식입니다.

 

이삭을 낳기가 쉽다면, 빨리 이삭을 낳았을 텐데,

이삭을 낳기가 어려우니까, 너도나도 쉽게 이스마엘부터 낳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창21:9).

 

즉 세상 방식이, 언제나 복음 방식, 말씀의 원리보다 힘이 셉니다.

그래서 교회나 사역자, 선교사가 늘상 세상 (이스마엘 낳는) 방식으로, 사역을 전개해 나가려는 유혹을 받죠.

 

이스마엘을 낳는 방식이란, 세상 권세의 힘을 빌리고(영합하고),

물질의 힘을 동원하고, 세속적 방식으로...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것이죠.

한 마디로 결국 무너질 모래성을 쌓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눈물을 머금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냅니다. 21:12

갈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문제는, 믿음의 가정에, 아브라함의 집에

이스마엘도 키우고, 이삭도 키우고.. 둘 다 키울 수는 없다는 거죠.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되기 전에는, ‘이스마엘’이 잠깐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성숙된 후에는, 반드시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한 능력 되는 사역자가

무슨 거창한 사역을 론칭 할 수도 있고, 브렌치를 낼 수도 있고, 책도 쓸 수 있고,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양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원리는, 다다익선이 아닙니다.

거기서 이스마엘과 이삭을 구별해서, 이스마엘은 빨리 내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마엘이 자꾸 이삭을 핍박하니까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러죠.

 

그런데 내 신앙인격 속에도, 이삭도 있고, 이스마엘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내가 둘 다 키울 수 있습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갈5:17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보냈다는 얘기를, 바울은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내 속에 있는 이스마엘을 내보내지 않고는, 믿음의 성숙, 믿음의 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이삭, 복음)가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 되고,

내가 이삭보다, 이스마엘을 더 원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어린 거죠.

 

▲3. 아비멜렉에게 증거가 됨 (아브라함이 전도자가 됨)

이렇게 이스마엘을 내보내고, 이삭 즉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만 키우게 된 아브라함,

그렇게 믿음이 한층 성숙해진 아브라함은,

이제 그랄 땅, 블레셋(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은 스스로 찾아와서 화친을 청합니다.

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렇게 믿음이 성숙한 아브라함(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과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coldwater1cup (中 세 번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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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과 이삭, 옛 언약과 새 언약                  창21:1~21                출처     

 

김성수 목사 창세기 58강

 

우리는 창세기 20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것도 근거 삼지 않으시는, 완전한 은혜의 선물임을 확인 했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자손 이삭의 탄생을 교보재로 사용하여

그 약속의 자손이 의미하고 있는 참 약속의 자손인 예수와 *갈3:16

그 예수와 연합된 교회의 탄생은,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근거도 배제한다는 것을

성경의 수신자인 교회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그림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자손 이삭이 탄생하는 21장 바로 앞에서

아브라함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입니다(20장).

 

오직 이 세상에서의 자기 자신의 왕 됨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자손 이삭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 사라도, 하나님의 언약도

다 헌신 짝 같이 여겨졌을 뿐입니다.

 

그러한 불가능한 존재에게 외부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 바로 새 창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21장에는 바로 그 약속의 자녀인 이삭의 출생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의 추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공부하시면서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해

아무런 공로 없이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세상의 힘을 통하여

약속의 자손(구원, 행복)을 탄생시켜 보겠다고 하는 세상 사람들

이 땅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그들의 종국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성도 자신의 삶에서는

어떠한 분투가 나와야 하는가에 관해서도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창2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 짧은 두 절에 ‘말씀대로’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수고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며 탄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절에 ‘권고하셨다’라고 번역이 된 ‘파카드’라는 단어는 ‘방문하다, 보살피다, 지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사라를 방문하시고 보살피셨으며 지켜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의해 두 번이나 팔려간 그녀를 방문하여 보살피고 지키신 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약속의 자녀가 드디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절대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사55:10~11)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11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비와 눈이 내려 토지를 적셔 열매를 맺는 것이 변할 수없는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연의 법칙처럼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것을

이사야가 웅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 말씀의 성취에는 기한도 있습니다.

2절에서 ‘기한’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거듭 반복하여 언약의 후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12:7, 15:4, 17:6‐7, 18:10)

 

그런데 그 약속의 성취의 때가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우리 성도는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합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정해진 때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그 때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적어도 25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장구한 기간을 기다리신 이유가 뭘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그 기간 동안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도록 놔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 엘리에셀도 내어놓았고, 조카 롯도 내어놓았으며,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도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시고 기각시키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고 마른 막대기처럼 불가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히11:11‐12)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2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사라는 불임의 상태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와 방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가능의 상태를 약속 성취의 ‘기한’으로 미리 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 쪽에서의 모든 시도와 가능성이 기각되는 그 때를 기다리셨다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여주심으로

이삭의 탄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셨고

 

두 번째로 유기된 자들의 라인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서자 이스마엘이

독립해 나갈 수 있는 성장의 시간을 배려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은 구속사 속에서 유기된 자들의 역할을 맡아서

역사의 조기 종결을 막아야 하는 엑스트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이고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기다림의 시간은 성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다른 말로 하면 훈련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배우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들의 고통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의 행복에 대해 경험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우리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실수와 심지어 우리의 죄까지도

선용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주일이면 가능한 거리를 40년간 광야를 돌려서 들여보내신 이유를

‘훈련’이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신32:9‐11)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켜

새들의 제왕을 만들듯이 그렇게 훈련시키신 것이라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독수리는 폭풍을 즐기는 유일한 새입니다.

독수리는 폭풍이 불면 그 폭풍을 타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둥지를 어지럽게 한 후 아래로 떨어지는 새끼를 날개로 받아내는

어미 독수리로부터의 혹독한 훈련을 반복하여 받은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은 성도의 훈련의 시간이요 성숙의 시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심판의 때, 종말의 때까지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하여

하나님의 장성한 자녀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긴 기다림의 시간 뒤에 오는 것은 진짜 행복에서 오는 진짜 웃음입니다.

 

(창21: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긴 기다림의 시간, 훈련의 시간을 통하여 사라에게 주어진 것은 비웃음(창18:12)이 아닌

진짜 행복한 웃음이었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지만 기다림의 신앙은 웃음을 낳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신앙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예표이며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새롭게 탄생할 교회의 탄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갈3: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드리지요.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사람입니다.

 

(갈4:29)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출산되신 분이십니다.

 

(눅1: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성도는 어떻습니까? 역시 성령에 의해 탄생합니다.

그리고 사라의 경우는 경수가 끊기고 단산의 상태였고

마리아의 경우도 사내를 가까이 해보지 않은 가임 불가능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삭과 예수 둘 다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기한에 미쳐’(21:2) 태어났고 주님은 ‘때가 차매’ 태어나셨습니다.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뿐만 아니라 이삭과 예수님 모두 출생 전에 미리 그들의 출생이 예고되었고

양자 모두 출생 전에 이름이 주어졌습니다.(창17:19, 마1:21)

 

뿐만 아니라 이삭은 자신의 번제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고

주님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습니다.

 

죽어야 할 이삭은 어린양 때문에 살아서 내려왔고

주님은 자신이 어린양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산을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이삭의 탄생은

단순히 아기가 없던 늙은 노부부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기가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

구속사 속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속에서 함께 연합하여 출생하게 되는

교회의 탄생에 관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의 요구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 오신 것이 아니며

우리의 새 창조 또한 우리의 요구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여

인간들의 방식과 열심과 수고를 기각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부각시켜갑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이삭의 탄생과, 이스마엘의 추방이야기를 이렇게 풀어줍니다.

 

(갈4:21~31)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까?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여종에게서 태어나고

한 사람은 종이 아닌 본처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24 이것은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두 여자는 두 가지 언약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은 시내 산에서 나서 종이 될 사람을 낳은 하갈입니다.

 

25 '하갈'이라 하는 것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뜻하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주민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28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29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30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절대로,

종이 아닌 본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31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여자의 자녀입니다.

 

여기 보시면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인간이 자기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 하고 내어 놓은 인간 측의 산물,

즉 옛 언약에 속한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삭은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산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자들, 성도들은

자기의 힘과 지혜로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쌓아서 행복과 구원에 도달하려 했던

모든 육적 시도와 그 산물들을 다 쫓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마엘의 추방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실 때에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육적 애씀의 산물인 이스마엘을 사랑했으며

그를 후계자로 여기며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옛 언약의 산물인 이스마엘을 쫓아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창21:10‐12)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11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12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이렇게 은혜 앞에서 육신의 산물은 반드시 쫓겨나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에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옛 언약(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과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한 새 언약은 반드시 충돌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과의 삶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자손이 태어나자마자 충돌이 생겨났습니다.

 

옛 언약의 상징인 이스마엘과 새 언약의 상징인 이삭과의 다툼이 생겨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삭은 이제 갓 젖을 뗀 어린 아이의 모습이고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은 이미 사춘기의 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아이들은 보통 3살에서 5살에 젖을 뗍니다.

그러니까 그 때의 이스마엘은 이미 18살 가까이 된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인 이삭은 18세 소년인 이스마엘에게 조롱당하고 희롱당하며

약한 자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 18세 소년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 속을 살아가는 성도와 죄인들의 모습이며 구속사의 결론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잠깐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 측에서의 어떤 수고나 노력이나 자격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탄생합니다.

 

죄인들은 경수가 끊기고 단산의 상태이며, 이미 죽은 자와 방불한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 분의 능력이 임하여

혼돈과 공허 속에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과 노력에 근거하여 참 행복과 만족(구원)에 이르려 애를 씁니다.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가능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구원의 자녀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삭입니다.

 

그렇게 행위와 은혜로 대표되는 이스마엘과 이삭은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을 숭배하고 이 세상의 힘을 쌓아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이스마엘들과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이삭들이

어찌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마엘의 세력은 18살 소년임에 반해 이삭의 세력은 젖먹이 어린아이입니다.

상대가 됩니까?

젖먹이 어린아이인 이삭은 18살 소년 이스마엘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의 편을 드시고는

결국 이스마엘들을 광야로 쫓아내시는 것이

바로 이 역사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구속사라는 드라마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서 성취되어 나타날 때

그 모습은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되새겨 보십시오.

 

(사53:2‐4)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영락없는 젖먹이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원수를 살리기 위해 당해주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그들을 대신하여 징벌을 받느라 연약한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세상은 그러한 이삭을 밟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젖먹이 어린 아이는 오히려 자신의 약함으로

원수의 머리를 밟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규범입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뱀의 후손인 이스마엘이 여자의 후손인 이삭을 큰 힘으로 희롱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스마엘의 머리가 깨지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의 자손인 성도는 이 땅에서 어린 아이처럼 약한 모습으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거들먹거리는 이 세상은 그렇게 당해주면서도 사랑해주고,

용서해 주고, 참아주는 우리를 조롱하며 바보라고, 약한 자라고 놀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약함으로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역설을 이해하고

그 역설을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골리앗 같은 장수를 들어 쓰시지 않고 어린 아이와 젖먹이를 들어 싸우실까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라는 군주에게 모든 주권이 다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과 능력으로 움직여지는 곳이고

모든 백성은 철저한 순종으로 그 분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어린 아이처럼 자신의 약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으로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마18:3‐4)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의존하여 순종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여 사는 삶이 천국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오직 아버지의 은혜만을 구하는 삶을 사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바로 그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처럼 되었다(창3:5)고 착각하는 이 세상은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실제로 점점 거대해 지고 있고 끊임없이 강해지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강함을 추구하는 그들은 다른 이들을 적으로 경쟁자로 간주하여 사는

공격적인 자들이 됩니다. 20절에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창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육신의 자녀 이스마엘은 활 쏘는 자, 즉 공격적인 자로 점점 커졌고 위대해 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 강함을 추구하는 이스마엘에게 늘 얻어터지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들의 ‘nothingness'를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함 속에서 당신의 능력으로 대적들을 지옥으로 쫓아내심으로

당신의 강함을 인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후12:9~10)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미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상태의 과학 기술의 수준과 발전 속도를 고려하여

2020년에는 어떤 것이 발명되고, 2030년에는 어떤 것들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문입니다.

 

물론 나름의 과학적 근거와 기준, 통계를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예상한 사건의 실현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이미 실현된 것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화상전화, 홈 네트워크 서비스, 각종 로봇, 인공장기 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미래학자들이 미리 예견한 것들입니다.

 

모든 미래학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의 극복입니다.

미국에서는 노화를 더 이상 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질병'이라고 전제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늙는 것과 결국 죽는 것이 인류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치료할 수 있는 단순한 질병일 뿐입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영생이라는 꿈을 실현시켜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 지면서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죄와 구원 등

그동안 인간을 미혹했던 절대권위의 단어들이 거짓말로 들통날 것이며,

새로운 생명 관과 가치관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위에 펼쳐지리라 예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궁금한 것은 과연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될까?

라는 부분이겠지요.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눅12:54~56)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이렇게 인간의 행위는 더욱 인간을 유리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는 행위 절대주의가 더욱 견고해져

"은혜"라는 말은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벨탑을 쌓아 올라가며 어린 이삭들을 조롱하는 이스마엘들은

때가 차매 지옥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만큼은 그렇게 힘을 추구하는 그 거대주의와 거인 숭배 사상에서

얼른 빠져 나오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골리앗 앞의 작은 소년 다윗처럼 보이게 될 것이지만

언젠가 그 세상의 골리앗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보기 좋게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 자율성 발휘에 대한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기 자율성 발휘에 대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그걸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몰차게도 아브라함의 장남 이스마엘을

그 어미와 함께 쫓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가능성과 힘을 의지하여 행복에 이르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가 경수가 끊어지고 단산하여 죽은 자와 방불하게 된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참 행복의 자리로 인도할 수 있음을

올바로 자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린 아이로 살라고 하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스마엘이 되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의 산물입니다. 이스마엘은 반드시 쫓겨나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리 성도 안에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존재하며

은혜의 산물인 새 사람 이삭을 공격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세상의 행복을 쟁취하겠다는

옛 사람 이스마엘을 자꾸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오직 주님에 대한 순종의 삶 속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를 이 세상의 왕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서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어린 젖먹이 이삭으로 사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약한 자로 살다 가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며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이스마엘들도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그 지킴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지키심과는 완전히 다른 지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온전한 성숙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한시적으로 지키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이 되었을 때 그들은 지옥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자손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이 광야로 쫓겨난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힘을 좇아 떵떵거리며 이 세상을 살다가, 이스마엘처럼 쫓겨나시겠습니까?

 

어린 아이 이삭처럼 약한 모습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으시겠습니까?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