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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장, 이삭 탄생의 교훈

LNCK 2023. 9. 23. 18:04

창21장에 관한 세 편의 설교 모음

◈이삭 탄생의 교훈 창21:1~8

◈이스마엘의 생애 창21:9~21

◈불신자 속에 사는 신자의 삶의 원리 창21:22~34

.......................................

◈이삭 탄생의 교훈         창21:1~8           2013.08.04. 출처

 

서론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인생도 있고 재앙이 되는 인생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위대한 탄생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이삭의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예수님 탄생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삭의 탄생입니다.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성경학자인 아더 핑크가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2).

아브라함이 앞으로 살아갈 날도 많은데 왜 하필 늙은 아브라함이라고 했느냐?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습니다.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100세에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이 낳는 것이 불가능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게 하셨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행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만천하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6).

사라가 이삭을 낳고 웃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권사님들 중에 80세에 아이를 낳아서 헌아기도를 받으러 나오면

아마 사람들이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90세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사라는 창18장에도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삭을 품에 안고 웃는 웃음은 행복한 웃음이고 기쁨의 웃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기적을 일으키셔서 약속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두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라를 방문(Visitation)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로 말미암아 사라가 복을 받고 웃었다(Joy)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Type)하는 이삭

 

이삭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비슷합니다.

 

▲첫째, 오래 기다리던 탄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고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중간에 애굽 여인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이스마엘이 약속된 자손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고,

아브라함이 집에서 기른 종 엘리에셀이 상속자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나서 이삭을 사라의 품에 안겨주시고,

이삭이 약속의 자손이며, 이삭으로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말라기입니다. 말라기가 기록된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지도 않으시고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400년 만에 침례 요한이 나오더니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이삭의 탄생 모두 오래 기다리던 탄생이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탄생이었습니다.

이삭이 탄생하자 사라가 웃고 기뻐했습니다.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죄를 용서해주시고 영생을 주시며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죄와 천국에 들어갈 칭의와

하나님과 화목하는 화친과 영생과 부활과 천국을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사람들 중에도 약 400만 명이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윈스턴 처칠 같은 사람도 우울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칠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울증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없고 술에 빠져 산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이삭의 탄생도 기쁨을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기쁨을 주었습니다.

 

▲셋째, 기적적인 탄생이었습니다.

이삭도 생리적으로 임신할 수 없는 90세의 여인 사라에게서 탄생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자연적으로 임신할 수 없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했습니다.

 

둘 다 기적적인 탄생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할 것 같습니까?

여자의 생리가 끊어지면 갱년기가 옵니다. 갱년기가 되면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사라도 생리가 끊어지고 갱년기가 와서 생리적으로 임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

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이삭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 탄생할 때 핍박이 따랐습니다.

이삭이 태어나니까 이스마엘이 그를 희롱하였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창 21:9).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으니까

이스마엘은 우리 나이로 15세인 것입니다.

중학생 나이의 이스마엘이 갓 태어난 이삭을 희롱하는 겁니다.

사라가 잠깐만 밖에 나가면 옆구리를 찌르고 한 대 때리고 꼬집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탄생했을 때도 큰 핍박이 임했습니다.

그 당시 헤롯 대왕에게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별을 보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헤롯 대왕이 깜짝 놀라 서기관을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고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2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 대왕에게 당하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요셉의 꿈에 현몽하셔서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셉가족은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죽자

나사렛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창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 했고

그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해두신 어린 양으로 번제를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이삭은 예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예수님은 실체로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방문(Visitation)은 어떠한 방문이었나?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사라를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벌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방문이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5).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삼사 대에 걸쳐 심판을 가지고 방문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일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방문하신 이유는,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친구가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듯이 하나님은 사라를 방문하실 때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이라는 아들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방문하심으로 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포로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방문하시니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 나오미라는 여자가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 중 한 명은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베들레헴을 방문하심으로 양식이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해방도 있고 물질의 복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하던 한나에게 하나님이 방문하시니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아들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되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방문하시니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해서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문은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미리 앞당길 수도 없고 뒤로 미룰 수도 없습니다.

이삭은 98세도 아니고 102세도 아니고 100세에 태어났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시 102:13).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인생에 몇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몇 번의 방문을 하시는데

언제 그 방문을 하실지는 사람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서 오늘은 내게 무슨 복된 방문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복 주시는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기다리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주님의 재림의 시간을 알려주시지 않는 것도 우리의 유익을 위함인 것입니다.

 

재림의 시간을 아는 것이 유익하다면 벌써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방문의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복을 가지고 방문하신 것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나님이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집에 방문하셔서

내년에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사라가 장막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라에게 네가 왜 웃느냐며 부드럽게 책망하시니까

그 다음부터 다시는 사라가 불신앙의 웃음을 웃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20장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오누이 사이라고 거짓말했다가

사라가 아비멜렉의 첩이 될 뻔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방문하셔서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다시는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창18장과 20장의 방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교정해주시는 방문이었습니다. 그 후 창세기 21장에 하나님이 복된 방문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저에게 복을 주십시오. 제게 물질의 복도 주시고

건강의 복도 주시고 자식의 복도 주십시오.” 보통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전에 죄를 고쳐주시는 방문을 먼저 하십니다.

 

매일 술 먹고 바람피우는 사람이 돈과 건강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네 술값 대주고 바람 피우도록 돕는 사람인 줄 아느냐?”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복된 방문을 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를 고쳐주시고, 교정하시는 방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방문하실 때 문을 두드리고 열어달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예배당 천장을 뚫고 내려오십니까? 그렇게 방문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귀신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방문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하니님의 말씀은 책망과 바르게 하는데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면 우리의 죄가 교정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살던 사람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보고

내일부터는 술을 줄이자는 생각이 들게 되고

바람 피우던 사람도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성경 한번 펼쳐볼 줄 모르고 “성경 보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이런 소리만 하는 분이 있는데

성경을 읽으면 떡도 나오고 밥도 나옵니다.

이번 주 금요 철야기도회에는 정진태 집사님이 간증하십니다.

그분이 대장암, 직장암 등 갖가지 암에 걸려서 의사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병원에 있으면서 성경책을 보고 “아버지, 절 살려주시면 제가 성경을 읽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2번씩 읽었는데 지금 7년째 살아계십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차량안내도 하고 계십니다.

 

이분이 용인대학을 나와서 운동도 매우 잘하십니다.

그런데 차량안내를 하니까 젊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욕을 먹어도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니까

자신이 젊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복된 방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방문을 기다려야 됩니까?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0:5~6).

 

군대에서 보초를 서 본 사람은 아침이 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를 알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이 방문하시는 것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방문은 사라에게 웃음(Joy)을 주셨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 21:6~7).

 

이삭의 출생은 사라에게도 기쁨이 되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

 

여러분,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쉽습니까?

저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쉽다고 생각합니다.

 

상을 당한 가정에 가서 유족들이 우는 것을 보면 저도 눈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남이 잘됐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목사들도 남의 교회가 부흥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왠지 배가 아픕니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함께 기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된 방문을 받으면 복 받은 사람이나 그를 보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론

 

창세기 21장은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사람에게 복과 기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문을 받으려면 먼저 불신앙과 죄악을 처리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떻게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믿는 자는 한강에 빠져도 안 죽습니까? 죽습니다.

믿는 자는 굶어도 살찝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삭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품에 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잘 될까?’ 하지만 이것에 대한 약속은 없습니다.

사업을 하면 무조건 잘 된다는 약속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까?’

이것도 고시에 분명히 합격한다는 약속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귀신에 들려서 물에도 뛰어들고 불에도 뛰어들고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는 아버지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들을 고쳐주신다는 분명한 약속은 없었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막 9:22).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He will” 그분이 하시리라고 믿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래도 “He can” 그분이 하실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사업을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잘 되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믿으십시오.

머리가 나빠도 공부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사법고시에도 합격할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저는 미국에서 1991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을 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지도교수를 포함한 다섯 명의 교수들이

구두로 질문하는 시험입니다.

두 시간 동안 질문하는데 전공분야 전체에서 아무 것이나 물어봅니다.

 

그래서 미국학생들은 이 구두시험을 'Intimidating'이라고 불렀습니다.

'겁을 주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미국학생들도 겁을 먹는데

한국학생인 저에게는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저보다 한주 전에 시험을 친 미국학생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물어봤기에 떨어졌냐고 물어보니까 '동방정교'의 역사에 대해서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방정교에 대해서 5장으로 써서 통째로 외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하고 저는 시험을 보러 갔는데

동방정교의 역사를 이야기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5장 외운 것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다른 것을 묻지 않고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구두시험에 합격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제가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니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복주시면 우리에게 기쁨이 옵니다. 그런데 이 복된 방문을 받으려면

먼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이 교훈을 받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복된 방문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이스마엘의 생애 창21:9~21 2013.08.11. 출처

 

서론

 

성경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있습니다.

성경의 주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유다의 아들 중에서도 다윗,

다윗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만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있고 나중에는 후처 그두라를 취해 많은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제외한 많은 아들들은 전부 비주류입니다.

 

비주류의 대표는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주류가 되지 못하고 비주류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인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이스마엘의 출생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연령에 도달하였고,

그로인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속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창13장에는 조카인 롯을 상속자로 생각해보기도 했고,

창15장에는 집에서 기른 종 가운데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롯도 엘리에셀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는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자신의 몸이 아닌 애굽출신의 여종 하갈의 몸에서

상속자를 얻고자 했고 하갈이 잉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종 하갈은 자기가 잉태함을 깨닫고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하갈을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하갈은 잉태한 몸으로 집에서 내쫓겼고 광야를 방황하다가 샘물 곁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샘물 곁에 있는 하갈을 방문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 16:9~10).

 

하갈은 그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사자가 자기를 만나주셨고 지금도 보고 계신다는 것에 감격해서

그 우물을 ‘브엘라헬로이’(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아브라함에게 돌아가 사라에게 복종하였고 때가 되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자식의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입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

사래라는 것은 왕비라는 의미이고, 사라는 열국의 어미, 많은 나라의 어머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8).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마엘은 14살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기뻐했습니다.

14년 동안 이스마엘과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정당한 상속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이스마엘은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내년이 되면 아들을 낳으리라.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이삭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로인해 아브라함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스마엘을 향한 자신의 부성애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고 순종해야 되는 감정적인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맏아들을 낳아서 14살이 되었는데

“저 아들은 네 상속자가 아니다. 저 아들은 내쫓아라.

그리고 내년에 태어날 그 아들이 너의 상속자다.”라는 말을 듣게 된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14년을 좋아했던 맏아들을 쫓아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문제점입니다.

 

◑2. 이스마엘의 성품

 

샘물 곁으로 쫓겨난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이스마엘이 어떤 성품의 사람이 될 것인지도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창 16:12).

NIV성경을 보면 “형제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살리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고 도와줘야 할 형제들을 향해 항상 적개심을 품고, 다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창 21:20).

이스마엘의 직업은 궁사였습니다. 활 쏘는 사람들은 주로 사냥을 하고,

전쟁이 나면 적군의 심장을 쏘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활 쏘는 사람은 공격적인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공격적이고 적개심을 품으며 다투고

공격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이런 성품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창 21:8~9).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서 1년이 지나면 돌잔치를 해줍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1년을 살면 자생력이 생겨서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을 기념하여

돌잔치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잔치를 하지 않고, 대신 젖을 떼는 날에 대연을 배설해줍니다.

하지만 아무나 젖을 뗄 때 대연을 배설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대연을 배설해준다는 것은 이 아이가 우리 가정의 정식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것입니다.

 

젓을 뗀 이삭이 약 3살 정도 되었을 때 이스마엘은 17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3살짜리 이삭을 상속자로 공표하니까

이스마엘의 마음속에 쓴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인데도 나한테는 대연을 배설해준 적이 없고

나를 상속자라고 공표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니까 상속자라고 공표해주고

대연을 배설하는구나. 이삭이 우리 집에 태어남으로 인해서 나는 찬밥신세가 되었구나.”

그래서 17살짜리 이스마엘이 3살짜리 이삭을 희롱한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갈 4:29).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태어난 이삭을 이스마엘이 핍박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상속자의 위치에서 탈락된 이스마엘이 상속자의 위치로 올라온 이삭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희롱함으로써, 이삭을 통해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적대적이고 투쟁적이며 공격적이고 하나님을 향해서 반항하는 성품과 행동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 아들 이스마엘은 바람직하지 않은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훌륭해도 자식 가운데 나쁜 사람이 나올 수 있으므로

자식이 잘못한 것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버지에게 내어쫓겼어도 항상 자기편을 들어주는 어머니 하갈에게는 순종했습니다.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창 21:21).

 

어머니가 애굽 여인을 취하여 주니 순종해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대로 이스마엘은 그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늘어났습니다.

아들을 12명이나 낳았고 딸도 1명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야곱도 아들 12명, 딸 1명을 낳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주류이고 이스마엘은 비주류이지만 자녀를 똑같이 낳은 것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오늘날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을 그들의 선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에 묻혀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 교도들은 이슬람 월력으로 12월이 되면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순례합니다.

순례를 하게 되면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례하다 죽으면 그 즉시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메카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아랍이라는 것은 나라가 아닌 민족 이름입니다.

아랍 민족들은 지금 현재 아랍 연맹을 이루어 22개 국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2개 국가를 총칭해서 아랍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랍은 민족 이름이며 이스마엘 후손들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마호메트가 조상이기 때문에 아랍 사람들은 다 이슬람을 국교로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모두 아랍 족족은 아닙니다.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족속은 이슬람을 종교로 삼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조용한 부류의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이슬람 국가의 공격적인 분파들이 행하고 있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평생 활 쏘는 사람으로 살다가 137세에 죽었습니다.

 

◑3. 이스마엘의 추방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자기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말합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창 21:9).

 

사라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말에 아브라함은 걱정이 됐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창 21:11).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지금까지 17년 동안이나 맏아들로 키워왔고 온갖 사랑을 부었는데

사라가 내어 쫓으라고 하니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머리로는 이삭이 상속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삭도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아우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서에게 복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장남에게 향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음은 이스마엘에게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창 21:12).

 

▲창21:6~7절에 이삭이 태어났을 때 사라는 좋아서 웃었지만

아브라함이 웃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태어나므로 내 맏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되는구나.”

하나님과 사라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맏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감정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이스마엘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창 21:13).

여종의 아들인 이스마엘도 너의 육신의 씨가 맞으므로

그로 내가 한 민족을 이루도록 복을 줄 것이니 걱정 말고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매어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갈은 쫓겨나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러다가 떡과 물이 다 떨어지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은 마주보고 앉아서 방성대곡 했습니다.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창21:16).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방성대곡을 들으시고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시어 물을 마시고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어 22개 국가의 조상이 되게 하셨으며

물질적인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에 불과하지, 영적인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현세의 복은 받았어도 영혼구원의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지만 그것은 영적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물질의 복은 주셨어도 영혼구원의 복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한 사건을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비진리를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갈 4:22~24).

 

하갈과 이스마엘은 시내 산의 율법언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라와 이삭은 예루살렘의 은혜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율법을 지키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명백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노력하여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말은 비진리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하고 죄가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말씀은

율법구원설과 같은 비진리를 하나님의 교회에서 쫓아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론

 

하갈과 이스마엘은 율법구원설 같은 비진리를 예표하기도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 안에 남아있는 옛 성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그러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말씀은

오랫동안 친숙했던 우리의 죄악 된 성품, 옛 성품의 죄악들을 내어버리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는 아닙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7~8).

 

아브라함과 육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께 구원의 약속을 받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비진리를 쫓아내고 진리를 따라가며

육체의 소욕을 쫓아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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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속에 사는 신자의 삶의 원리 창21:22~34 2013.08.18. 출처

서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아비멜렉은 그랄 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신자의 대표이고 아비멜렉은 불신자의 대표인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세상 속에 섞여 살 때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관계가 좋은 모범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창 20장과 21장에서 두 번 만납니다.

창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이 하마터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창 21장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했습니다. 책망을 주고받아 일대일로 비긴 것입니다.

 

창 20장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큰 선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 21장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선물도 주고받아 일대일로 비긴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Respected Person)

 

창21장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합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1:22).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며 좋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 20장과 21장 사이에는 6년의 간격이 있는데

6년 전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주시고 그와 함께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신자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41장에도 애굽 왕 바로는 요셉에 대해서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38~39).

 

요셉은 17세에 구덩이에 갇혔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살이하는 중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을 통치하는 동안 애굽은 복을 받았습니다.

흉년이 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요셉의 지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좋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다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서 B.C. 539년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메대의 왕이었던 다리오는 다니엘을 높이 평가합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단 6:3).

 

메대 왕 다리오가 다니엘을 높여서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니까

메대 사람들이 다니엘을 시기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우리가 점령한 나라의 포로가 어떻게 총리가 되느냐며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해서

흠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서 아무 허물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단 6:4).

 

우리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에게 욕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된 이유를 찾아보면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칭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저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가 칭찬을 받으니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좋은 평판을 얻은 것처럼, 좋은 평판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이 ‘저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저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라는 평판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신앙에 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비판하는 것은 잘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예수님이 인간을 이렇게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는 비교적 정확합니다.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서 알아 봤더니 강남중앙침례교회 권사님이네.

그럼 나도 그 교회에 나가봐야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평소에 얌체 같고 못된 사람이 강남중앙침례교회 집사라면 교회에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불신자들에게 칭찬받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2.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평화를 유지하며 살고자 했다(Peace Maker)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할 수 있거든 평화롭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8).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8).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과 싸우려는 자세가 아니라 항상 화평하게 지내려는 자세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추구한 평화는 정의를 희생시키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상태에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2).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의의 왕이시고 그 다음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착하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능력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먼저 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과도 평화를 누려야 됩니다. 북한이 우리의 동족인데 매번 전쟁이나 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형태로 이루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평화이기 때문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거짓된 평화인 것입니다.

 

평화는 언제나 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부싸움이 일어난다면 화해해야 되겠지만

그전에 불의가 있으면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의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제안한 평화조약을 받아들입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창 21:23~24).

아브라함도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냥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아닙니다.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먼저 해결해야 될 불의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창 21: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평화조약은 좋지만 당신 종들이 나의 우물을 늑탈해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중동지방에서는 우물이 제일 중요한 재산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물은 문자 그대로 생명수입니다. 사람의 몸도 약 8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는 땅은 그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리 땅에서 판 우물이니까 우물도 우리 것이라며 늑탈한 것입니다.

 

하지만 창 20장 15절을 잘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그랄 땅 일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창 20:15).

 

땅을 주면 땅 속에 있는 물도 준 것이지 땅은 주었지만

그 속에 있는 물은 안 주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옳게 따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불의한 일을 당했을 때 가만 당하지 마시고 가서 따지십시오.

아무리 불신자라도 불의한 일을 마음대로 행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평화조약이 체결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자기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돌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을 찾아가 일대일로 직접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창 21:26).

 

아비멜렉이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평화조약을 받아들이고 언약을 세웁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창 21:27).

 

언약을 세울 때는 양과 소를 둘로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언약을 체결하는 사람이 지나갑니다.

만약 언약을 어기면 둘 다 쪼개진 짐승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이라는 것은 생명을 걸고 맺는 것입니다.

 

▲결혼도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목숨 걸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조금 살다 싫으면 헤어집니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아가서

또 그 사람이랑 결혼했다가 또 싫어지면 처음에 같이 살던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결혼도 언약임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지키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아비멜렉에게 선물까지 줍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창 21:28~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체결했는데 일곱 얌양 새끼는 왜 따로 놓았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 20장에 받은 것이 있으니까 21장에서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불렀습니다.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이고 ‘세바’는 ‘일곱’ 혹은 ‘맹세’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가보면 가장 꼭대기가 ‘단’입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 ‘브엘세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로운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아비멜렉에게 선물까지 주면서 불신자들과 평화롭게 지낸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자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사람임을 증거하였다(Worshipper)

 

우리가 세상 사람들 속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불교를 믿는 사람인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믿고 교회 올 때도 몰래 오고 성경책도 신문지에 싸가지고 오고

식사할 때 기도도 아무도 모르게 하면,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천국에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 21:33).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에셀나무는 상록수인데 5m 높이로 크는 나무입니다.

에셀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기념식수를 한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이것이 영구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기념식수를 하고

그곳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과 얽혀있는 관계를 풀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관계가 나쁘면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가 응답이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내도 남편을 멸시하고 교회 와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기도가 막혀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잘해야 됩니다.

물론 아내들도 남편에게 잘해야 합니다. 남편이 불신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평소에도 안 좋은데 교회 가더니 더 나빠졌다고 생각이 들면, 교회에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하늘이고 나는 땅이라고 하면서 끼니마다 따뜻한 밥 챙겨주고

남편 나갈 때 신발도 갖다놓고 그러면 ‘교회 다니더니 저렇게 변하는구나’ 하면서

‘나도 한 번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갈등이 없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관계를 잘 풀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불신자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영생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영원한 복을 주십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는 종교입니다.

진시황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영생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시 103: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자손의 자손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마땅히 예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섞여 살면서 아브라함처럼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평화로운 사람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여호와를 예배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는 좋은 평판을 듣고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