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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장,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

LNCK 2023. 9. 24. 05:59

60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        창22장          ▣ 김성수 목사 창세기 설교 모음 

 

김성수 목사 창세기 60강

 

저는 지난 달 브라질과 파라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 유학생들과 현지 1.5세들, 2세들이

모인 남미 코스타에서 아침 성경 강해를 맡아 매일 한 시간 반씩 나흘간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첫 번째 날 저의 설교 제목이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였습니다.

아주 원색적이고 공격적인 제목이지요.

 

그 제목은 전에 제가 한 번 설교 때 인용한 한국 불교계의 원로이신

휴암 스님의 글을 패러디한 것이었습니다.

 

휴암이라는 분이 한국 불교의 세 얼굴이라는 책에서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들의 스승은 진리를 찾겠다고

왕궁과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가난과 고행과 수행의 자리로 갔거늘

너희는 진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스승의 이름을 부르며

스승이 버린 것을 달라고 조르고 있구나.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조국 대한민국의 불교인 수가

1천3백 만에서 130명으로 줄어든다 해도 그 빌어먹을 불교의 기복사상은 깨져야 한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아, 내 조국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는가?’

 

저는 당시에 휴암의 이 글을 인용하여 읽으면서 누군가 영향력 있는 한국 교회의 원로께서

기독교를 향해서도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하고 외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목소리를 높여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에게 경을 쳐 주시지 않아

제가 먼저 목소리를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이 복에 환장한 기독교인들아’

 

그런데 전 세계 기독교를 잠식하고 있는 번영의 신학, 기복 신앙에 대해 목이 터져라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데 정작 알아듣는 사람들이 드물었습니다.

그만큼 작금의 기독교는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와 실용주의에 심하게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패러다임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 본문을 해석을 하게 되면

오늘 본문의 ‘여호와 이레’의 내용 또한 우리의 풍요와 성공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동분서주 하며 준비하고 다니시는 우리의 종이신 불쌍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치는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에피소드를 통하여 단순히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그러한 결단을 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성경이 이 이야기를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주에 걸쳐 공부를 한 창세기 22장의 모리아 산 사건은

시온 산에서 쪼개진 어린양 예수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교회의 탄생에 관한 상징적 그림이며(여호와 이레)

아울러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 속에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하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창22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죽음을 맞게 되는,

죽기까지 충성하는(2:8) 어린양이 담고 있는 내용과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난 이삭을 하나님께 순종의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삶은

정확하게 같은 맥락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로 말미암아 탄생케 되는 성도의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본문은 분명 우리 인간 쪽에서의 행위(순종)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이 가야죠.

 

그래서 저는 이 모리아 산 사건을 하나님의 열심과 주권의 측면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본 60강)

그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끌려가며 자연스럽게 격발되어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측면을 (next 61강)

여러분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의 측면에서 바라본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의한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약속의 후손,

즉 예수 안에 연합된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세상의 상징인 바벨론(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소명) 그에게 믿음을 허락하시고(신앙)

그를 의롭다 칭하신 후에(칭의)

그를 진정 의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성화, 영화)입니다.

(*젓가락 두 개처럼, 칭의와 성화는 항상 같이 가야 됩니다. 한쪽만 강조하면 극단이 되죠)

 

그렇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안에는 구원의 서정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론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여정 전체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찾아오신 것도 하나님이요, 그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40여 년간의 방랑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으로 그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를 시험하여 합격 판정을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창12장의 아브라함을

22장의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 백성으로 완성시키시는 방법으로

하나님 당신 자신의 쪼개짐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15장

아브라함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의 탄생은

하나님의 자해 사건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힌트 하셨고,

 

인간 쪽에서의 노력과 열심의 산물인 이스마엘을 등장시키심과 동시에 그를 기각시키시고, *16장

할례를 명하심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쪼개짐(할례)을 통해 탄생하게 될 것이며 *17장

그 쪼개짐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가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 17장의 할례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모리아 산)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은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어린양의 모습으로 살해당하는

하나님의 십자가 할례(쪼개짐)로 이루어지게 됨을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당신이 직접 쪼개져 죽으실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것은, 아브라함에게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움으로 기다리다가 보았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8:56

 

그래서 본문 모리아산 사건은 골고다 언덕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어지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이삭은 자신이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처럼

자신을 불태워 죽일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서 그와 연합되어

구원 얻게 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해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형틀을

짊어지고 올라가 처참하게 찢겨 죽어야 하는 죄인들 대신에

그 자신이 죄가 되셔서(고후5:21) 연약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죽으시는(쪼개짐, 할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모리아 산의 이삭과 어린양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로 연결이 되어, 구체적 실제 단계로 넘어갑니다.

 

죽어야 할 죄인 대신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

죄인의 죄를 대속하는 쪼개짐의 제사가, 바로 구약의 성전 제사입니다.

 

죄인들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 주어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그 것을 실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쪼개짐의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은

바로 죽어야 할 이삭 대신에 어린양이 죽어서 이삭을 살려낸 모리아 산,

즉 시온 산에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리아 산에 세워진 성전에서 드려지던 성전제사도, 원형은 아닙니다.

(*원형은 예수님의 몸이 성전, 십자가가 성전 제사) ↙

 

(히9:9~12)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 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 모리아 산에 선 성전에서의 제사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의 본체이시며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그 모형인 성전과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그 모리아 산에 지어진 성전 앞에서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는(요2:19)

장담을 하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성전이시니까요.(요2:21)

 

실제로 주님은 이삭이 올라갔던 그 모리아 산,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이 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진짜 성전, 진짜 제사, 진짜 모리아 산의 정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제사이며, 진짜 제물이시며, 진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자연스럽게 모형을 파괴하고 기각해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의 이야기가 모두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여호와 이레)어린양에 의해

죄와 사망에서 건져지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 이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 이레’ 하면 으레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두 미리 준비해 놓으신다는 식의 아전인수 격 해석을 하곤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이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생에 (1차적으로)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며

우리가 도달하려하는 참 행복과 만족의 고지도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고지하는 어구가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의 사건은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대단원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엉터리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을 만드신 것이

자신의 쪼개짐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탄생과 완성도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것임을

모리아 산 사건이 결론지어 강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오늘 본문의 요절을 한절만 고르라면 8절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창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게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온 것일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음에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정말 이삭을 죽이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아들을 살려 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지요?

아브라함은 40여년 이상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까지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나님,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자기 부부에게서 새 생명을 탄생케 하신 하나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밀어 올리시는 하나님,

그렇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 아브라함은

이삭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또한 실패치 않고 지켜질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떤 약속이지요? (창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마엘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직접 그 약속의 자손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장가도 못간 이삭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나긴 신앙의 여정 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과 신실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백세에 낳은 자식, 즉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참된 순종의 예배자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며, 그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항복하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모리아 산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항복과 순종의 자리,

다른 말로 예배의 자리를 향해 성숙되어져 가는 것이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에 멋지게 통과하여

영화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한 마디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예배의 삶을 배우고 참 예배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그 분께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예배의 삶을 배우고 익히며 경험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후략

 

...................................

 

♣나의 이삭은?

그런데 내가 ‘집착’하는 것을 주님은 들춰내십니다.

 

부자 청년은 (막10:17~22)

*부를 지키는 능력이 있었죠.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잘 지키는 것도 상당한 능력입니다.

 

*겸손했습니다. 보통 부자라면 예수가 도리어 자기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용기가 있었죠.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숨어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는 백주에, 예수를 찾아와 그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이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10:20

참 성실하고 남이 부러울 만큼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었죠.

 

그런 흠잡을 데 없는 이 청년에게는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집착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하늘 보화만 바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막10:21

 

아브라함에게는 물질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질에는 강하고 물질적인 집착이 없으니까...

대신 그가 집착하는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방해되는 한 가지(나의 집착, 우상)는 무엇인가요?

물질, 교만, 사람.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인가요?

 

나는 과연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가요?

성경은 통 털어 그것을 강조하는데 말입니다.

 

인간에게 적당한 명예, 재산, 가정... 이런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들추어내시고

결국에는 그것을 빼앗아가실 것입니다.

 

오늘 밤, 내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한다면... 아무 집착이 없다는 증거요,

내 마음이 뭔가 불만족스럽다면... 내가 집착하는 우상이 있다는 증거죠.

 

믿음과 신앙은 한 번 믿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믿은 이후로 계속 성숙해가야 하는데..

그 성숙은.. ‘내 구세주 주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단계로

끊임없이 자라가는 성숙입니다!

 

 

♣자신을 죽여서 용서하신 하나님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려지는 장면은,

하나님이 아들(즉 자신)을 드려서, 죄인들을 용서하실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유명한 <벤허>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마지막 부분에 보면, 어떤 사람이 벤허(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일생동안 억울하게 학대를 받으며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칼을 쓰지 않고 무저항주의, 박애정신으로 일관하며 그렇게 희생적으로 살다가

최후에 승리를 했습니다만.. 어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벤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골고다 언덕 그 자리에 저도 곁에 있었습니다.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가시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말이 제 귀에 들려올 때, 나는 가슴이 무너지고

내 손에서 검이 떠나가는 것을 내가 느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일생동안 검을 손에 쥐지 않고 살았습니다."

 

최고의 승리, 그것은 ‘용서’입니다.

최고의 강자, 그는 용서의 사람입니다.

 

프레드릭 러스킨 교수의 <용서>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용서 못하면, 그 사람은 과거에 묶여서 사는 사람이다.

용서함으로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2. 용서하지 못하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약속된 미래,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용서하고야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용서하고서야 자유인이다.

아직 용서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인이 아니다.

깨끗한 자유인은 용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