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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공의를 세우리라

LNCK 2023. 9. 25. 17:42

https://blog.naver.com/karamos/80054658284

 

◈진리로 공의를 세우리라      사42:1-4       2006.06.25.

 

※하나님의 역사는, 조용히, 소리소문 없이 침묵 속에

표면적으로는 아무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어가고, 나타나지고 있다.. 는 주제의 설교문!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일도, 조용히 티안나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더디지만) 조용히 공의를, 역사속에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세계가)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일본의 크리스천 작가 중의 대표적인 엔도 슈샤쿠(遠藤周作)가 있습니다.

그가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여 쓴,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

유명한 소설이 「침묵」입니다.

 

이 소설은 일본 선교초기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였기에 더더욱 큰 감동을 주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본 교인들이 받는 극심한 시련과 박해에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주1)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티안나게 일하게 계신다는 복선을 깔고 있습니다.

 

▲북한에도 하나님은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서 50년간 이대로 지내온 것입니까?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한 마디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곳은 거대한 수용소와 같다."

 

평양은 조용합니다. 시골에 가면 시골은 더더욱 조용합니다.

다니면서 느끼는 건 도대체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용합니다.

 

교회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제 고향에 찾아가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 우리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마는

교회는 없고, 터마저 다 갈아엎어서, 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밭 한가운데 서서, 옛날 교회가 있던 그 자리에 서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그 마을의 공산당원과 이장, 그 두 사람이 -젊은 사람인데- 찾아와서

"선생님, 우리 어른들이 그러는데, 이 근방에 옛날에 교회가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래요? 동무, 용케 교회라는 말을 아누만.

내가 바로 그 때문에 여기에 서 있는 거요. 바로 이 자리에 옛날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교회는 없고 그렇게도 요란하게 들리던 새벽 종소리도 없습니다.

굶주림으로 인해서 1년에 수십~ 수백만 명이 굶어죽기도 하고,

어린이들은 영양실조로 인해서 키가 크지 못해, 젊은이들도 애처로울 정도로 키가 작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합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는 별 수 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갇혀있습니다.

지하교회에서 울부짖는 절절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고요한 침묵이 흐릅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조용히 침묵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가운데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이 고요함 이 무서운 침묵은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의 침묵,

그 속에서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음성을, 우리는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경 속에서도, 조용히 일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은 망했고

성전은 불타 없어져 버렸고, 쓸 만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사는

바로 그런 때를 내다보며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42:1

역사적으로 이는 고레스 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레스 왕은 메시야의 예표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신비로운 말씀이 전해집니다.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 그 어딘가에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을 보라!’ 이걸 볼 줄 아는 영적 지각, 영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조용하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은 역사하셨고,

요셉이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애굽으로 보내어 큰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광야로 보내서, 40년 동안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조용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2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가 고함치는 함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 우리는 그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영적 지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비롭게 역사합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복음의 역사는 겨자씨와 같이 이루어집니다.’

그 작은 씨앗 하나가 심겨져서, 그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낼 줄은.. 모른다는 거죠.

 

요새는 너무 떠듭니다. *2006년 설교

교회는 성명서 내는 거 아닙니다.

교회는 데모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혁명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조용하게 썩어지는 밀알처럼..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가고 그 속에서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요12:24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신비롭게 역사합니다.

소금처럼 녹아 없어집니다. 소금의 흔적은 없으나 소금은 녹아서 그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찰스 베어드(Charles A. Beard) 라고 하는 유명한 역사가가 있습니다.

그는 한평생 역사를 연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다.

아주 세밀한 하나님의 심판은 나타나고 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마다

나라던, 민족이던, 개인이건, 교만하게 만들었다가 꽝하더라.

교만해지기 시작하거든 하나님의 심판이 거기에 있는 줄로 알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너무나 천천히 돌아서

마치 맷돌이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확하게 돌면서 완전히 보드랍게 갈아버린다.

 

역사의 신비는 벌과 꽃의 관계처럼 나타나는데,

벌이 꽃에 들어가서 꿀을 빨아내는 것이 강도질 하는 것 같아도

벌은 수술을 옮겨놓으면서 꽃을 돕고 있다. 벌과 꽃은 묘하게 서로 상조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어두운 가운데도 빛은 있다.

아니 역사는 빛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베어드의 유명한 역사관입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조용히 일어났던 중국교회으 부흥

저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일본 선교역사 200년이 넘었습니다만, 아직도 기독교인이 1%가 안 됩니다.

선교가 참 힘들며 선교가 안 됩니다.

 

반면에 중국대륙이 얼마나 큰 대륙입니까마는 벌써 기독교인이 10%가 되었습니다.

13억중에 1억2천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이 교회 문을 닫을 때

교회마다 아주 문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습니다. 출입을 전혀 못하게 했습니다. *문화혁명 1966~76

 

그리고 세월이 흘러갑니다. 30년이 지난 후에 이제 교회는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1966년 교회의 문을 닫을 당시, 정부 통계가 기독교인이 300만 명입니다.

기독교인 300만 명, 얼마 안가면 다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에 교회가 없을 줄 알고, 기독교인이 없을 줄 알고

세계가 하도 몰아치니까 ‘까짓 거 뭐 교회 문 열어보자’고 열었는데 놀랐습니다. 6천만 명!

 

교회는 없는데, 건물도 없고, 종소리도 없으나

조용하게 그 핍박 속에 그 많은 순교자들 속에서 6천만 명의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사역하는 중에, 지금 (2006) 1억 2천.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상한 갈대는 심판받은 갈대입니다. 그러나 꺾지 않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다 없어진 것 같으나 있습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북한은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

간혹 제게 이런 질문하는 분들 있어요. 아주 애매하고 맹랑한 질문이예요.

"목사님 북한에 지하교인이 얼마나 됩니까?" 아니, 지하교인을 어떻게 숫자를 셉니까?

지하교인이 얼마냐고요? 이건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여러분, 탈북자들을 만나보신대로 그분 가운데에 신앙 있는 분들은 놀랍습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 왜 또 그럴 것이,

(다른 책 말고) 성경만 읽었으니까 많이 알 수밖에. 얼마나 성경을 많이 외우는지요.

여러분, 그걸 잊지 마셔야 됩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하나님은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그 가운데 나타나고 있어요.

 

그리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 :3

모순 속에서 공의를 나타내고 불합리한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고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쪽이던(남) 저쪽이든(북) 역사 어느 구석에서든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로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일 대학의 역사학교수인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책에서

지난 인류역사 3421년을 연구해보면 전쟁 없는 해는 268년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인류역사에서 전쟁이 없는 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 전쟁은 있느냐?

 

그는 ‘잠재적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얻은 사람들이, 지금 이 권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잠재적 적에 대한 공포심으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정복욕으로 인해 자기 영광을 위해 전쟁이 생기고

때로는 명예와 체면 때문에 엄청난 전쟁은 일어난다고 역사가는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자존심대결이에요.

이 긴장관계가 알고 보면 자존심 대결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요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나,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와 함께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비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영의 눈을 들어 바라보면서,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도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헌신하는

6.25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귀중한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

 

주1)

기독 교인들의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잔인하게, 아주 잔인하게 사람들을 처형을 했습니다.

화산의 불이 펄펄 붓는 그 활화산 위에 기독교인들을 매달아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고,

바닷가에서 썰물 때에 뭍이 드러났을 때 그곳에 십자가의 형틀을 만들어놓고서는

거기에다가 교인들을 비끌어 매놓고 물이 들어오는 밀물 때에 점점 물이 들어오면서

서서히 물에 잠겨 비참하게 죽도록 했습니다.

 

이런 잔인한 처형 방법과 당시의 일들이 일본 사람의 기억에 그렇게 오래오래 남겨져 있었고,

그것이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아, 어느 날 두 교인이 또 체포돼서 그 밀물 있는 그 바다의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있습니다.

 

밀물이 점점 차 올라옵니다. 물이 목 위로 머리위로 올라오면 이제 세상을 떠나가겠는데

바로 그 순간에 이것을 지켜보던 포르투갈 한 신부가 그 비참한 장면을 보면서

구원의 기적을 위해 목이 터져라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기적을 보여 주시옵소서, 기적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나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 신부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나이까?

이 비참한 장면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은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외칠 때에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침묵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저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음성. 여러분, 침묵을 느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