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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

LNCK 2023. 9. 26. 11:45

가시적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9월22일 아침기도회 - YouTube

*위 설교 30분 경부터 녹취

 

한국교인들이, 서구의 쇠락해 가는 교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식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거기도 몇 대에 걸쳐서 내려오는

소수이지만 신앙심이 깊고 성숙된 기독교인들이 있고... 앞으로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가시적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 행7:2~5, 히11:8~9 2023.09.22.

 

히11:8~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행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아브라함에게)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오늘 본문은 둘 다 아브라함에 관한 구절입니다.

 

▲간혹 가다가 교회 바깥에 있는 분이 '요즘 교회가 어때요?' 라고 제게 물어올 때가 있습니다.

아마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이상의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가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용인즉 '교인 숫자가 얼마냐?' 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가 어떠한가를 판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헌금이 얼마나 나옵니까?' 라고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를, 알기 원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숫자나 재정 등, 외적 수치로 쉽게 판단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회사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우리 기독교인들조자도, 하나님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영적인 진리를 말하지만

정작 우리가 교회나 교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지극히 이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적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기준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바로 '숫자'라는 함정이에요.

 

숫자가 영적인 진리를 보여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수치를 알면, 하나님 나라가 얼마만큼 진전되고 있는지를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결국은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교회재정, 헌금'을 언급하는 것도, 결국 숫자로 하나님의 나라가 진전하고 있는지,

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전2:13

실제로는 신령한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신령한 것을 육신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겠다..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물론 성경에도 숫자를 말할 때가 있지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얼마다..

지파마다 몇 명의 남자가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고,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였다 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오순절날 세례 받은 사람이 3천명의 달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성경도 숫자의 중요함을 인정했다.. 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숫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논산훈련소에 '집단 세례식'을 가보면

오순절 날에는 3천명이 세례 받았지만

논산훈련소에서는 5천명이 세례 받을 때가 있어요.

 

숫자로 승부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숫자가 질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논산훈련소의 집단 세례식에 가보면, '행사'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행사로 신병들을 동원하면, 5천명을 채우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5천명에게 세례를 준다고 해서, 논산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라고 말할 수는 없죠.

 

▲'유럽의 교회가 쇠락했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가 뭡니까? 숫자입니다.

'유럽의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을 보니

유럽 교회가 쇠락한다는 증거가 아니냐?' 라고 말하고, 판단하는 것이죠.

 

아마 유럽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거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할 것입니다.

거기에도 성경에 약속된 '남은 자'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 알곡' 성도들은,

'왜 숫자를 가지고 판단하느냐?

왜 숫자가 줄어드는 걸 가지고. 영적인 상태를 판단하려고 하느냐?' 라는

그런 한국인의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서 그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은 하면서,

'왜 신령한 것을, 육신적인 숫자가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질문에 대꾸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누가 한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코로나 이후에, 한국교회 출석이 줄어든 것을 보면 믿음이 쇠락한다는 증거가 아니냐?'

라고 어느 외국 사람이 말할 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전성기로 여기는 시대를 이미 겪어봤어요.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 1980년대~90년대 초의 놀라운 숫자의 부흥을, 우리는 겪어 봤습니다.

 

저도 성장하는 교회를 섬겨보고, 개척하고, 목회해 본 경험이 있어요.

그때는 문만 열어도, 교회로 모여지던 시절이.. 한 때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가마다 교회도 넘쳐났고요.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때가 지나고 돌아보니까, 그때가 전성기였어요.

숫자가 엄청나게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1980년대~90년대 초

 

그러나 "택시 기사들이 주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이미 오를대로 올랐다는 뜻이다"

라는 말처럼,

'교회마다 교회성장을 말하기 시작하면, 이미 오를 때까지 올랐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때는 지나갔고, 흥분하던 때는 지나갔습니다.

박서방이든, 김서방이든 교회 다닐 때는 지나갔고

이제는 '그 박서방, 김서방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느냐? 정말 거듭났느냐?

그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를 평가해야 될 시점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은, 숫자의 함정을 보여 주는 것이고

숫자에 미혹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숫자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사람들이 교회에 나갈 때, 덩달아 나가던 분들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한창 교회가 성장하던 시절에, 그렇게 덩달아 교회를 나갔던 분들이,

정말 거듭나서 신앙인이 된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정말 구원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겠지만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때 교회에 사람 숫자가 많아지고 부흥했던 것이

'과연 얼마나 실속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위의 것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늘 아래 땅의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땅의 것으로 판단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육신적으로 그것을 판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려는, 그런 유혹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가시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것을 확인하려는 속성이 있어요.

 

우리 모두에게 그래요.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믿음을 가늠하기가 어려우면

교회마다 이거, 이거, 이거를 제시해서

'여러분이 이것을 하면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에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든, 구원의 여부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든,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숫자, 재정, 가시적)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신뢰하게 한다면, 여러분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터무니없이 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않았다' .. 이 말은, 행7:5

 

아브라함이 사는 동안에, 그 아들과 손자가 사는 동안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는데

실제로는 발붙일 만큼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는 맞아요.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주리라'고 하셨어요. 아브라함에게 네 번 이상 약속하셨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는 동안에, 발붙일 만큼도 그 땅을 소유하지 못 했어요.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이 장막에 살았다.. 라는 말은 옮겨다녔다는 말이죠.

목축하느라 풀이 있는 곳으로 옮겨다녔기도 했겠지만,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 옮겨다녔던 것입니다. 주1)

즉 집을 사지 못한 사람이, 전월세로 옮겨다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그랬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땅을 주시기로 언약하셨는데, 왜 소유하지 못했는가요?

인간의 시각으로, 인간의 가시적인 성과로,

즉 당장 나타나는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든, 하나님의 나라를 가늠할 수 없다.. 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엄청한 언약과 약속을 받았지만,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성과로는.. 숫자적 결과로는.. 그게 형편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았어요.

땅의 약속도 이뤄진 게 없고.. 후손의 약속은 이삭 달랑 한 명 뿐이었죠.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은 확실히 이루어졌고, 그것은 영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성과, 당장의 현실적인 성과를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요즘 교회 어때요?' 라고 물어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지금의 성과를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가늠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받은 땅을 발붙일 만큼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7: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이삭과 야곱이 언제까지 기다렸어요?

여호수아 때까지 기다렸는데, 그건 440년이 훨씬 지난 때입니다.

 

애굽의 노예생활 400년, 광야 생활 40년, 적어도 440 년 후에 여호수아가 들어갈 때

그때 그 땅을 소유하게 때까지는 기다린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여러분 믿음으로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인간의 성급해요. 얼마나 성급한지 몰라요.

그래서 가시적인 결과로 일희일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일희일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의 나라에 대해서도 그런 판단을 유보해야 됩니다.

남의 나라에 대해서도 섣불리 숫자만 보고.. 유럽의 기독교가 쇠락하고 있다든지..

나라가 저물고 있다든지.. 그런 말은 (반대로) '우리는 잘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별 일 없으면, 우리도 장차 저들처럼 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은

우리의 비교하며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라는 그런 생각이 농후한 것입니다.

그들이 반발하는 이유가.. 그걸 느끼기 때문일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잘하고 있다고... (숫자가 좀 늘어났다고 잘 믿는다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죠.

대한민국이 GDP 가 올라가고, 수출이 늘어가고, 반도체를 많이 팔고,

자동차를 많이 팔고 있다고...

그때부터는 우리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일본과 비교하기 시작하고, 유럽과 비교하기 시작하고,

 

영국이 경제적으로 쇠하고 있다느니..

독일이 유럽의 병자가 되었다느니...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은 뭐 관광으로 먹고 산다느니...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국이 한 때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는데,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이 몇%가 됐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 '한국은 신앙이 부흥하는데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할 때,

우리를 저으기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것 역시 일희일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깐 늘었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고, 잠깐 줄었다고 슬퍼할 것이 아닌 이유는

미래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잠깐의 결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주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기적인 패턴을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시대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시대를 볼 수가 없어요.

 

어떻게 시대를 봐요?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대가 눈에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아요.

지금 내가 잘 하는 줄로만 생각하죠. 지금 내가 있는 줄로만 생각해요.

 

1990년대에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지금은 뭐라고 말씀 하실지 참으로 궁금한 것입니다.

 

그때는 교회성장의 비법을 우리가 가르치고 했어요.

외국의 목회자들이 한국에 와서 배우고 했어요.

 

그러나 2023년인 지금은, 아무도 오지 않아요.

외국의 목회자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에 배우러 오지 않아요.

 

그건 둘 다 지혜로워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들도 지혜로워졌고, 우리도 지혜로워졌어요.

우리가 일희일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동안의 기독교인들은 너무 일희일비 했었는지 몰라요.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440 년 후에나 그 땅을 얻게 될 터인데,

지금 당장은 발붙일 만큼도 땅을 얻지 못 했는데,

그럼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허사라는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너무 성급하게 초조하고, 당장 눈에 무엇이 보이기를 원하고,

그러지 않으면 낙심하고...

눈에 무엇이 안 보이면 낙심한다는 말은,

(반대로) 눈에 보이면 교만해 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뻔합니다.

 

눈에 성과가 안 보이면 낙심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면 교만해집니다.

참, 인간은 이런 존재입니다. 속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이 성경 구절을 우리가 정말 제대로 읽어야 됩니다.

 

히11:9~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약속을 아브라함만 받은 게 아니고,

그 아들 이삭, 손자 야곱도 동일하게 받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행하시는 일은

적어도 3대 이상에 걸쳐서 (더디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를 40년으로 보면, 3대는 120년입니다.

120년 정도가 지나봐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볼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는 일을 보려면, 120년 정도는 기다려 봐야,

즉 3대 정도는 기다려봐야... 그 성취를 보게 된다는 얘기예요.

 

일희일비 할 수 없다는 거고, 속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기도 / '저희가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옳소이다. 내가 너무 성급하고 초조하고

당장 보이기를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낙심하고...

 

반대로 눈에 보이면 교만하려 하나

둘 다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고, 일희일비 할 수 없고,

속단 할 수 없고, 믿은 바를 붙들어야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게 되며,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저희에게 그런 길게 바라보는.. 영생까지 바라보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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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사라는 90세.

사라는 127세까지 살았습니다. 이때 이삭은 37세.

 

이삭이 40세에 결혼했으니, 사라는 이삭의 결혼을 못 보고 죽었죠.

이삭은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160세입니다.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으니, 아브라함이 소천할 때 *창25:7

이삭은 75세, 야곱은 15세였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15세가 될 때까지, 아브라함-이삭-야곱은 한 집에 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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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왜냐면 그 땅의 헷족속들이, 이방인인 아브라함에게 땅을 팔지 않았기 때문이죠.

사라가 죽을 때, 헤브론의 막벨라 굴 인근 땅을 매장지로 헷족속 마므레에게 구입한 것 외에는,

말 그대로 한 평 땅도 갖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랬던 이유는, 헷족속이 그 땅을 '조상이 물려준 신성한 땅'으로 여기고,

아브라함 부족에게 팔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