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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3장, 사라의 죽음과 장례

LNCK 2023. 9. 26. 20:52

◈사라의 죽음과 장례             창23장              설교녹취, 정리

 

※아래 설교는 ‘사라의 죽음과 장례’를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는 데요..

 

사라는 죽을 때 나이가 127세였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고

175세에 죽었다고 창25: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뒤 38년을 더 살았습니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까, 사라의 장례식 때 이삭은 37세로 어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모리아 산의 시험으로부터 20년 전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개요

 

창12~25장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귀한 영적인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오늘은 23장을 살피겠는데, 이제 아브라함의 스토리에 진짜 막바지에 다다랐고

그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서 영적이고 깊은 교훈들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삶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게 되는데

아브라함에게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에게 근거하지 않는 영적 생명(이삭을 통해)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브라함은, 그 이전에 있었던 육적 생명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생명이 함께 주어진 자였고,

그래서 어떤 삶을 요구하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 속에서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이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육적인 생명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 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육적 생명만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 생명을 가진 자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은 무엇이냐면

우리는 육적인 생명도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란 말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같이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해요?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왜냐면 육적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이을 수 없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살아가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라...

 

즉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육적인 삶을 내려놓고, 영적인 삶을 사는 존재다... 이런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그 삶의 막바지에서..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어려운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데요.

그 교훈의 중심에 어떤 단어가 있냐면 바로 "(자아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다다르기 전에도, 아주 실천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이 '심히 갈등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롯을 떠나보내는 일,

이스마엘을 내어쫓는 일,

즉 자기의 육신적 삶과, 육신적 생명을 내어 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면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힘이 더 세거든요. 우리 육신적 본성이, 영적인 소욕보다 힘이 더 강하죠.

 

그러나 창22장에 넘어오면서, 오늘 본문인 23장까지,

이제 "(아브라함 자아의) 죽음"이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장은,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

죽음으로 넘기라.. 라는 '죽음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고,

23장은 또 그의 아내 사라가 마침내 죽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죽음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있어, 백세에 얻었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얻은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죽음에 넘겨서 드리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의 죽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영적인 단어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바꿔본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내 생명과 같은 이삭을 죽음으로 넘기는 것은,

곧 <자기 부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의 죽음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사라는 또 다른 객체가 아니에요. 사라는 바로 '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둘이 아니고 하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아내를 향해서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 라고 했죠.

 

그러니 사라는, 아브라함과 또 다른 객체가 아니라, 또 다른 아브라함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사라의 죽음이란, 결국 아브라함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라의 죽음은, '자기 죽음, 자기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징적 해석

 

먼저 이걸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받아왔죠.

 

아브라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모델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아브라함의 행적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이삭의 죽음

 

이삭의 죽음도, '아브라함의 자아의 죽음'이란 관점에서 볼 때

사라의 죽음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둘 다 상징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삭의 죽음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1)에 자세히 나옴

 

◑이어지는 창23장에는 사라의 죽음이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이죠.

아브라함 자기와 함께 약속을 받았고, 자기와 한 몸된 사라의 죽음은,

곧 아브라함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십자가이죠!

 

그것을 짊어지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시며,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가요?

 

그것은 바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짊(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 진다' 라는 거예요.

 

자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우리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순간,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이삭만을 키우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블레셋 세상 한복판에서 증인이 되어질 뿐만 아니라

브엘세바를 얻게 돼요. 그러니까 영적인 충만함을 얻게 되죠. *창20장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숫양을 보게 되고, 예수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보게 돼요. *22장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나아갈 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일 때에,

드디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23장

 

23:1~2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아브라함은 백세에 이삭을 낳았어요. 그로부터 37년이 지나서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아브라함이었던 사라가 죽었어요.

 

이 23장의 초점은, 23장 전체는 죽은 사라를 장사하는 거예요.

장례를 하기 위하여, 헷족속과 거래하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죠.

 

창23장 본문의 초점이 무엇인가요?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5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얼핏 보면, 아브라함이 장사하게 해달라고 말한 것 같고

헷족속도 '장사를 금할 자 없습니다. 장사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 본문의 초점은, 장례가 아니고

장례를 하게 될 매장지를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9절도 한번 보세요.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 약속받았어요.

그런데 75세에 부름 받아서, 175세까지 살았으니, 1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75세에 땅과 자손을 약속 받았으나,

거의 죽을 때까지, 막벨라 굴 외에는 한 평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행7:5

 

그건 당연한 거예요. 당시는 지금처럼 땅을 사고파는 개념이 아닙니다.

원래 땅이란 신의 거예요. 그리고 자연은 모든 자의 것이에요.

 

그런데 그곳에 대대로 뿌리내리고 있는 자들(헷족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은 사고파는 개념이 없어요.

그리고 헷족속이, 나그네에게, 자기 신을 배신하고 그 땅을 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사라가 죽었을 때, 한 평이라도, 조금이라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헷족속은 죽은 자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어요.

그러니 자기 조상의 대대로 이어왔던 땅이며, 나그네에게 주어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될 땅을

지금 사라가 죽은 순간, 비로소 처음으로 내어주게 됩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잠시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면 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라고 했는데,

 

KJV는 아브라함이 '와서' 슬퍼했다 라고 했습니다.

'And Sarah died in Kirjatharba; the same is Hebron in the land of Canaan:

and Abraham came to mourn for Sarah'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브엘세바 근처에서 아마 양을 치기 위해서

거기에 거주하거나 근처를 이동하고 있었고, *몽골 양치기들을 생각해 보세요. 계속 이동합니다.

사라는 헤브론(기럇아르바)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다가 사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헤브론으로 달려온 것이죠.

약 50킬로 정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헷족속 입장에서는, 자기들 거주지 주변에서

이웃사촌으로 오래 살았던 사라가 죽었는데,

매장지를 안 내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죠.

 

그러니까 거래를 통해서였지만,

결국 약속의 땅을 얻게 되는 시작점이, 여기서부터 (사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여러분 창17:17절에 보면, 아브함이 이때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때에요.

이때 하나님께서 그를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가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고, 구십 세 된 사람이 어찌 출산합니까?' 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사라에 대하여 죽음을 인정했을 때에요.

 

그 전에만 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식을 얻기 위해서,

엘리에셀도 쳐다봤다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도 낳아 봤죠.

 

그런데 99세가 되어서, '나는 안 됩니다' 하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인정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은 비로소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때 17:26절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죠.

남자의 생식기 끝 표피를 잘라내는 거에요. '내 생명은 끝났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죽음을 인정한 순간, 99세때 할례를 받은 후에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죽음(자기 십자가)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들 이삭을 낳게 되었고, 즉 후손을 주리라는 약속이 이뤄지게 되었고,

 

본문에 사라가 죽는 순간,

막벨라 굴을 처음으로 얻게 됨으로써, '땅을 주리라'는 약속이 이뤄지게 된 것이죠.

가나안 땅에 대한 교두보가 최초로 마련된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죽음,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이.. 신앙생활에 중요하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그것을

이삭을 번제단에 바침의 죽음을 통해서도.. 실천했고,

자기와 한 몸인 아내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도.. 그 삶을 살아내게 된 것입니다.

 

▲이게 아브라함만의 스토리가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 성도 각자의 스토리도, 신앙여정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내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 하나님의 언약(구원)을 이뤄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죠.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것,

믿고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은,참 즐겁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받고, 구원받고 끝난 게 아니에요.

 

75세 때부터 175세까지 100년 동안

하나님이 그의 인생 가운데 일하시고, 말씀하시고, 다듬어가시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성도가 어떻게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는가?'를 보여주고 있죠.

 

그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자기 아들을 드림을 통해서,

또한 자기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한 그 언약이 이뤄지더라는 거죠.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것은 크게 2가지, '후손과 땅'입니다.

그 약속을 받은 75세 때, 그게 즉시 이루어 진 게 아니라,

그 때로부터 약 25년간의 신앙성숙을 이루어,

아브라함이 할례를 통해, 자아의 죽음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후손 이삭을 받았고

 

다시 그때로부터 27년이 지나

아내 사라의 죽음을 통해, (아내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이라 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맛 보았던' 것입니다.

완전한 성취는 여호수아 때, 그리고 다윗 왕 때 이루어졌지만, 맛을 보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창12~25장의 아브라함의 스토리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즉 아브라함은 넘어지고 실수해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여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의 구원(우리의 구원)을 실패 없이 이루어가신다...라고

장로교에서 과거에 해석해 왔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관점이죠.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자칫 소홀하기 쉬운 것은 '인간의 책임, 인간의 반응 response' 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넘어지고 자빠져도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간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언약 이행'이 극단적으로 오해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위의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 수행에 신실하시고,

아래의 땅에서는, 사람들이, 영적 성숙과 성장을 이루면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 response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

 

주1) 사라의 죽음과 유사한 이삭의 모리아 죽음 사건

그리스도인이란 결국 어떤 자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이스마엘, 즉 육적 생명을 쫓아내고

이삭이 상징하는바 영적인 삶을 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즉 자기를 부인하는 자다.. 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죽음을 짊어지고 가는 자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삶은 이제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 막바지 사건들을 통해서, 가장 어려운 교훈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부인(이삭 바침)과, 자기 십자가(사라의 죽음)입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명이, 우리를 근거하지 않은 채 찾아왔기 때문에

이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예배하고 있는 것이고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며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며,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생명을 위하여 순종하는 그런 삶으로 부름받았고,

또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존재이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치고 하나님을 좇는 존재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본문 이삭과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가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번째는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인생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22: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정말로 순종하기 어렵고 힘든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것을 아브라함의 상황에서만 듣지 마시고

우리 자신의 상황으로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아브라함이 노년에 그의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번제로 드리라.. 이렇게 말씀했어요.

 

근데 우리는 이걸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만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가끔씩, 혹은 하나님께서 한번씩, 이런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에 대하여, 혹은 내가 생각하는 건강에 대하여,

혹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죽음으로 넘기라!' 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하나님께서 막으셨기에 망정이지, 만약 막지 않았다면

이삭은 거기서 죽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죽음으로 넘기는..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하나님은 숫양을 예비해 주십니다.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주셨던 숫양을, 이삭의 생명을 대신할 무엇을

그제야 (이삭을 바칠 때에야) 비로소 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참 원해요.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주신 것을 참 보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이 언제 보여지는가요?

 

아브라함이 실제로 자기를 부인하여서, 이삭을 잡으려고 했던 그 순간에,

그의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그를 위한 축복, 숫양이 그제야 보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축복들을 예비해 주신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과 저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숫양이 가득한 줄로 믿어요.

 

근데 그것을 언제 보게 되냐? 그것을 보는 순간은 언제인가?

내가 내 사랑하는 내 아들, 내 독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무엇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드릴 때,

 

내 생명과 같은 그것을, 나를 부인하고 드리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의 눈이 열려 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그 숫양이 비로소 보여지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인생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인 숫양을 보게 된다...

이것이 모리아산 번제 사건의 첫번째 교훈이죠.

 

▲2. 두 번째는 더 놀라운 사실인데,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인한 그 순간,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인 숫양만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 숫양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사실은 예수그리스도를 보았어요.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였습니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머리에 떠오르지요.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죽음을 향해 가는데, 등에 나무를 짊어지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곳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갈 때

십자가 나무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아들은 어떤 자입니까? '어린 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 라는 것은, 전부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전부를 쏟아내는 희생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누가 생각하십니까?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시며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떠오르지요.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지금 아브라함은 백세가 훨씬 넘었어요. 한 120세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이삭은 10대 후반이에요. 17세 이상이 됩니다.

 

그러면 백세가 훨씬 넘은 아버지를, 이삭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곳에 제단을 쌓아요.

나무를 벌여놓고 그 나무 위에 아들을 올립니다. 근데 이삭이 어떻게 됩니까?

가만히 결박되어 있습니다.

 

그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손을 내밀어 칼로 자기를 치려고 하는데도,

이삭은 그대로 자기 생명을 아버지께 바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한 아브라함이, 장차 미래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금 보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 순간 보았던 것은, 이삭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삭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삭의 모습 속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니라, 숫양이 아니라,

희생양이 될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는 거죠.

 

여러분, 주님을 내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싶으시죠?

자기를 부인한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 속에서 보는 은혜가 있단 말이죠.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은, 내 속에 오직 한 주인만 있는 것이 청결입니다.

불결이란, 내 마음에 두 주인이나 세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자아가 둘 다 살아서 역사하는 순간.. 이것은 불결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부인한 채,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께만 자기 자신을 드리는 순간을

하나님은 '청결하다'고 말해요.

 

그래서 내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만 남아있고,

내 마음속에 나(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거죠.

 

그러므로 오늘 설교 말씀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실천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 가장 마지막 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거예요.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야 했던, 이삭에게 올인해야 했던 ...

그렇게 아브라함이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갈등을 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그제야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계속 보십니까?

설교자는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야 될 말씀과,

그리고 나에게 하고 있는 말씀을 함께 받아야 돼요.

 

그런데 누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받을까요?

목사든, 성도든.. 이 성경을 통해서,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계신데, 누가 그것을 볼 수 있을까요?

성경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그게 작은 도움은 되겠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을 부인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노년에 (이삭을 바침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그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줬던 것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순간, 내 삶 속에 깊이 살아계시는,

그리고 나를 붙들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 (여러분 아멘 쉽게 하지 마십시오. 오늘 상당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도 보게 된다> 라는 거예요.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지금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삭은 무엇입니까?

한번 마음속에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막 사회로 진출하는 내 자녀입니까?

아니면 이제 막 결혼을 하고, 태어난 손주입니까? 아니면 내 사업체입니까?

아니면 내 건강입니까?

 

그게 무엇이든.. 지금 내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면, 과거에 제가 중등부 예배 인도하다가,

중등부 학생 핸드폰 잠시 빼앗았다가, 그 아이에게 뺨을 맞을 뻔 했어요.

그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핸드폰이었던 것이에요.

 

여러분들 삶 속에, 하나님께서 뭐를 하나 빼앗아 갔을 때

여러분의 감정이 뒤틀리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게 아브라함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서

지금 하나님께서 '그걸 번제로.. 싹 다 죽음으로 넘기라' 라고 말씀하는 그 순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9절에보니까, 하나님이 일러 주신 그곳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리고 아들을 칼로 내리치는 순간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죽이는.. 그런 일을 했던 것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너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바쳐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장차 멀리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한 산에 준비시키시고

자기 아들을 잡아 죽이시는 그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요8:56

 

자 그 순간에, 이제 아브라함이 느꼈던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독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감정이입으로, 이심전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 아파 본 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주실 때,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그걸 미리 보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큰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거는 자기 아들(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보지 않은 자가,

다른 말로, 자기를 부인해보지 않은 자가... 절대로 알 수 없는 거예요.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가서 위로를 하겠죠.

그러나 그것을 함께 경험해보지 못한 자는, 그 마음을 사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바쳤던 아브라함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냐? 바로 자기를 부인한 자리다... 라는 것이죠.

 

▲4.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의 마음만 보았습니까?

아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도 보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실제로 그는 아들을 잡았습니다. slaughtered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연거푸 불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도 급하셨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어쩌면 나의 신념일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해요. 인신 제사잖아요.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40년 이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갔어요.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꽤 많았겠죠. 실제로 경험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드려라' 라는 말씀이 자기에게 들렸을 때

아마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에게는 신념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지..

내가 잘못 들었나봐...'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념(개념)'이에요.

 

근데 아브라함은 이해되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사실 믿음으로 나아간 거예요.

사람을 죽이라는 것도 감당이 안 되는 말씀인데,

그것도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 말씀에,

도대체 아브라함은 무슨 마음으로 순종해서 나아갔겠냐는 거예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상황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갔어요.

그런데 아들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잡아 세우셨어요.

그리고 나서 숫양을 통해서 이삭을 대신했죠.

 

자 이걸 통해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이삭을 잡아 죽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믿음과 마음을 전부 드리는,

살아있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마음을 받고 싶어 하신다... 는 것을, 그는 보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참 힘듭니다.

'하나님이 왜 내게 이걸 요구하시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들었다'라고 말할 만큼

하나님이 우리가 '나 자신을 부인해야 되는 자리'에 이르게 할 때가 있단 말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되지? 이삭을 바치라고?

아니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인데,

독자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인신 제사를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셨다고?

이건 말이 안 돼...'

 

우리 삶 속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순간에,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모르는,

그러나 실제로 자기 자신을 부인해보면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했을 거에요.

 

그런데 그가 자기를 부인해서 끝까지 갔을 때에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은 이삭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죽이라'고 하시는 줄 알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받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삭을 드려본 자만이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이삭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드리는 아브라함 자신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감당치 못할 어떤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까?

그걸 하나님께서 내게 받으시기를 원하시는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요구가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한 번 순종해 보십시오 단순한 순종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인가 '하나님이 나의 죽은 이삭이 아니라

나의 살아있는 믿음으로 드리는 내 마음을 받기를 원하셨구나' 라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