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야곱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 창27장
앞서 아브라함 스토리를 기록한 목적은 ‘영적 성숙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이삭 스토리를 기록한 목적은 ‘아버지의 유산 계승’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창25장 후반부~ 창세기 거의 끝까지 계속 이어지는 야곱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서 야곱 스토리 해석의 킹핀, 치트키는 짧게 간단히 요약하면 무엇일까요?
야곱은 위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특징, 이삭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크게 2가지입니다.
1) 첫 번째로 그는 모태로부터 선택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는 버리시고(선택하지 않으시고), 야곱만 선택하셨죠. election
창세기의 최초 수신자는 출애굽 이스라엘, 노예된 백성들이었어요.
그 노예들에게 모세가 가르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특권을 가진 백성이야!’
이런 선민의식이 나중에는 ‘우월주의’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만
당시에 자존감이 낮아 있었던 노예 출신들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복음이었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들을 세상 여러 민족들 중에서 우리만 뽑으셨데..’
물론 아브라함도 선택받았고, 이삭도 선택받았죠.
그런데 야곱은, 그 선택이 에서와 대비되어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식의 설명을 ‘계시의 점진성’이라 그러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하게 설명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해서 살던 때,
선지자 말라기는, 다시 한 번 ‘선택’을 예언합니다. 같은 목적이었죠.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말1:2~3
우리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은, 어떤 잘/잘못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는,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셨기 때문이고,
이것은 자신의 출신과 배경과 행위에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도의 특권임을 알게 합니다.
2) 야곱 해석의 두 번째 열쇠는, 그의 깨어짐 brokenness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차별되게, 야곱에게 나타난 신앙적 특징은 ‘깨어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이삭도 깨어졌겠지만,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그가 깨어집니다. 창32장
깨어지기 전과 이후로, 모태(못해)신앙인이었던 그의 삶은 180도 변화됩니다.
그러니 구약성도들도, 신약성도들도... 깨어져야 한다는 거죠,
즉 자아의 죽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야곱으로 지어지는 그 과정을
창세기 저자인 모세가 장장 22장을 할애하여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교회)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깨어짐’을 현대적 언어로 바꾸면 ‘회심 conversion’입니다.
‘회심’이란 국어적 의미로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인데,
마음의 방향이 바뀌니, 행위의 방향도 따라서 바뀌는 것이죠.
야곱은, 깨어짐과 회심 이전의 모습과, 깨어짐과 회심 이후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여전히 육신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던 야곱이,
그후로는 당당히 하나님의 사명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받은 사명, 즉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그의 12아들 중에는 못난 아들도 있었고, 모난 아들, 문제아도 있었지만
그들을 다 품고, 다 다독거려서
결국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만들어내는.. 자기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야곱 스토리의 빅 픽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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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창27:1~40) (tistory.com)
◈교회로 흐르는 야곱의 축복 창27장
김성수 목사 창세기 74강
◑도입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복음을 설명하는 데에 이런 이야기가
꼭 성경에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내용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본문 창세기 27장의 내용입니다.
차남이 장남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고,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는가 하면,
장남은 자기 동생이 가로챈 아버지의 축복은 무효라며
다시 자신에게 축복을 하라고 방성대곡을 하는,
마치 주말 연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1) 첫 번째는 ‘과연 그렇게 속여서 받은 축복도 효과가 있는 것일까?’였습니다.
저는 혼자서 답을 내리길 그렇게 도둑질로 얻은 축복은
하나님도 무효로 처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속여서 가로챈 그 축복으로
꽤 험악한 삶을 살았다고, 야곱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야곱이 보여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념을
하나님이 기특하게 보셔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면
그의 삶이 그렇게 죽기까지 험악하게 이어지면 안 되는 것이잖아요?
2) 두 번째 질문은 ‘만일 제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유효한 것이 아니라서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다가 간 것이라면
왜 이삭은 야곱에게 한 축복을 무효라 선언하고
장자인 에서에게 다시 축복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두려워했을까?’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한 번 입 밖으로 내 뱉어 지면 절대 번복이 불가능한 것인가요?
사실 성경은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항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러한 작은 질문들은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그리고 교회로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본론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가 왕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나있던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아마 누군가에 의해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일 겁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완전히 무시당했을 때,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고픈 인간들은
가장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라는 말을 잘 수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하는 복음을
인간들에게 제시하셨을 때,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처럼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무시당하고
자신들의 무력함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27장에도,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 증명에 혈안이 된 4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어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별미를 사냥 해다 주는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한 이삭이고,
역시 쌍둥이가 복중에 있을 때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들었음에도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꾀를 동원하여 장자권을 도득(盜得)하도록 시킨 리브가이며,
그 어미의 말을 듣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광분하는 에서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렇게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열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네 명의 등장인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를 염두에 두고 보시면
오늘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본문 창27장에,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주는 축복의 내용이 나옵니다.(:27-29)
잘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은
‘땅에 관한 축복’ 과 ‘열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축복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당신의 언약을
이삭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땅에 관한 언약
창15:18~21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외 창17:1~8, 창22:17~18절을 찾아보십시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땅을 약속하고 계시고,
그와 그 후손이 그 땅에서 승리자로서, 왕 노릇하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언약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이 점진적 형태로 지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로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무작정 그가 머물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목적지를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 아주 애매모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셔서 어떤 땅으로 옮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뽑아내신 인류 최초의 갈대아 문명은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자기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만들어낸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문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진짜 복된 땅으로 인도하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을 힌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최초의 계시로 주어졌을 때에는
아주 모호하게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그가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도 가르쳐 주시지 않은 채 그를 끌어내시고는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에 ‘여기가 그 땅이니라’하고 그 땅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오늘 본문에서는 기름지고 풍요한 땅으로 좀 더 명확하게 계시되는 것이고,
그렇게 점점 밝히 계시가 되어지다가
요한계시록에 이르러서는 그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임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땅은 기름진 땅이며 포도주와 곡식이 풍성한 땅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8
출애굽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창세기의 어떤 부분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대 반전의 모습입니다.
(창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어느 곳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온통 저주를 받은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땅이 아닌
기름지고 복된 땅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구이언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침투해 들어오게 될 것임이
미리 예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받은 땅이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저주받은 땅 갈대아 우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의 땅으로 창세 전에 택해진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옮기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을
성경이 점진적으로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게 땅에 관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 중에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에 관한 언약은,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2. 후손에 관한 언약
두 번째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담 안에서 마귀의 종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머리를 밟고 결국 열국의 왕으로, 통치자로 만들고야 마시겠다는 것이
지금 야곱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언약인 것입니다.
그 약속 또한 창세기 3장에서 미리 힌트 되어있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게 될 모든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승리는, 바로 교회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신학의 백미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계승되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자체가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저주와 사망의 땅에서 죄의 종으로 살다가 죽어야 할
자들 중에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셔서, 죄의 머리를 밟게 하시고
하늘의 풍요가 충만히 넘치는 약속의 나라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이 탈취한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과 축복의 수혜자는 그 자신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장자인 에서가 아닌, 차자인 야곱에게 장자 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야곱이 도둑질해서 그의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이 유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롬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는지 그 이유가 명확히 나오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수혜자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채도 그 축복이 유효한가/ 아닌가?’라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야곱의 기특한 집념’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될 수 없으며
그 분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됨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교회에게 설명하시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에게 계승되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좀 더 점진적 그림으로 보여집니다.
◑지금부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탈취하여 취한 축복의 내용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거쳐 예수에게로, 또 예수에게서 나와 교회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축복이 계시록에서 완성이 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의 새 이름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시작이 되었지요.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적용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삶을 살다가
그 복을 아래로 흘려보냈던 것처럼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삶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가나안 방백들을 모두 몰아내는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들로부터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도록, 복의 근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역시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 왕 때에 만개합니다.
다윗 왕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일경이 모두 이스라엘의 땅이 되고
그 땅에는 은과 금이 길에 구르는 돌처럼 흔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축복이 거기서 모두 성취가 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수시로 가나안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적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로 몽땅 내몰기도 하셨습니다.
마치 야곱의 험악한 삶과 방불하지요?
그러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의 인생과 역사도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언약은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삼하7:12-15)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창3:15절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는 ‘후손’에 관한 예언이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그 후손에게서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이라는 약속의 후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다른 어떤 후손에게로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아래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말씀 중에 특이한 것은, 그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랍니다.
계시가 좀 더 명확해 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창3:15절에서 처음 등장한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한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나타난 그 후손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사무엘하의 다윗의 언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시고 가르치시면서
기필코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두 이야기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삼으시겠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하신 분이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그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사무엘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사람 채찍,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셔서 아들을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킴과 동시에
또 다른 어떤 존재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지요?
(롬4:16~17)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여기서는 후손이 누구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교회를 ‘후손’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 연합되어 구원받게 될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아들을 삼으셔서 죄를 밟아 뭉개고
하늘을 통치하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생애가 담고 있는 내용이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도득한 축복의 내용인 것이며,
창3:15절부터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인 것입니다.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명확하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지는 하나님이 우리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후손’ 즉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 분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승리’라는 이름을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그 ‘승리’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어졌지요?
하나님이 죽어야 할 야곱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승리, 이김’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마치 주말 드라마의 내용 같은 어처구니없는
이 내용은,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과 구원의 과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의 여인의 후손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등장하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언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질 후손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받은 교회가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되십니까?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은 그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또한 그들의 자격과 조건과 열심을 근거로 택해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신명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신7:7)
마찬가지로 교회의 선택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욕심에서 형의 축복을 가로챘지만
결국 빈손으로 아버지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재산에 손도 대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풍성한 소산과 기름진 땅은커녕 아예 고향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약속된 기름진 땅과 풍성한 소산은 이 땅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수시로 가나안 땅을 비워주어야 했고, 수시로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고자 했던 땅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소산을
그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데에 야곱의 공로가 전무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하심과 죽으심의 은혜만이 유효했습니다.
야곱이 험악한 삶을 살았지만 그로부터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자손들에게로 계승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과 나라로부터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유익을 이렇게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롬9:4-5)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계시와 언약과 율법과 제사 제도와 성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부터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어졌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유효한 것처럼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10:5~6)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5:22~26도 참조하세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는 복음의 적용 대상이 예루살렘 뿐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장됩니다. (행1:8)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지는 복음의 통로,
즉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은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개인을 지칭할 뿐 아니라
2)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4) 그 분 안에서 탄생하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