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창37장,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LNCK 2023. 10. 13. 10:34

86 -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창37:1~11) (tistory.com)

◈창37장,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다           ☞ 창세기

 

*김성수 목사 창세기 86강에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요셉의 꿈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이 이야기만큼 오해가 많은 구절도 드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의 비전과 꿈을 부추기는 설교의 본문으로 자주 사용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아주 유명하면서도 인기가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적어도 열 편 이상은 들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성도가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노라면

결국에는 그 꿈이 성취가 되고야 만다는 그런 얼토당토 한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이 요셉의 이야기는 그와 정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비전을 품고, 열심히 기도하며,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매진하라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꿈(언약, 계획)이 성도의 꿈을 박살내시면서

성도의 삶 속에 성취되어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본문 2절 앞부분을 보시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는 어구가 있지요?

(여기서 족보는, 통상 우리가 아는 족보가 아니죠. *히, 톨레도트

그래서 한글성경에 ‘약전, 이야기, 역사’ 이렇게 제각기 다른 말로 번역했죠.

‘야곱의 남은 일생의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족보가 아니라요)

 

‘야곱의 톨레도트는 이러하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이죠.

그런데 여기서 정작 야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대신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이유는

 

1) 야곱 생애의 중반 이후가 요셉을 비롯한 12아들들과 불가분의 관계속에 전개되기 때문이며

2)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사에서 결정적인 무대가 되는 입(入)애굽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도입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는 그 어구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요셉의 꿈 이야기를 푸는 중요한 열쇠인 것입니다.

 

왜 성경이 야곱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 놓고는 :2

요셉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일까요? :3~

 

그것은 바로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과 축복이

그의 자손인 요셉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요. 우리도 마찬가지죠!

 

(창27:28~29)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게 바로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이삭을 통해

그런데 이 축복이 요셉의 삶에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시면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할 것이라’고 하지요?

야곱의 형제라고는 에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복수를 썼을까요?

그 축복은 야곱에게서 성취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은

요셉의 꿈에서 알기 쉬운 그림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창37:6-10)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 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 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지금 이 모습은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게 된다’는 27:29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축복이 요셉의 때에 온전히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형들이 요셉 앞에 굴복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그저 모형으로서의 성취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 언약은 뒤로 가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으로 가면 야곱이 유다에게 하는 유언에, 그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창49:8~10, 야곱이 유다를 축복함)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 하리로다 *27:29참조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에 보면 야곱이 (이삭에게) 받은 축복의 내용과

요셉의 꿈이 그대로 반복이 되면서

나중에 ‘실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실로’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 ‘실로’가 오시면 만민이 그 분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받은 축복과, 요셉의 꿈은

실은 야곱의 것도 아니었고 요셉의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받은 축복과 요셉의 꿈, 그리고 유다에게 주어진 유언은

모두 진정한 약속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되어질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왕과 그 분께 온전한 순종의 삶을 드리게 될

그 분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자기의 꿈이 아닌 메시아에 관한 꿈을 꾼 것이고,

그 꿈 때문에,

메시아가 당할 십자가의 삶을 그대로 모형으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언약들은 언약 당사자에게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서.. 또는 다른 희생자의 희생에 의해 완성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후손의 끝에 메시아이신 진정한 약속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구약의 언약에 등장하는 후손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확실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이

요셉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성도들이 언약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그 언약의 완성 지점으로 들어가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를 낳는 장면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진정한 언약의 후손이 언약을 받은 교회를 위해 희생을 함으로 해서

언약을 받은 여자, 즉 교회에게 주어진 축복을 성취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언약을 받은 우리 모든 성도의 대표로 서 있는 것이고

요셉은 그 언약을 성취해 내는 예수의 모형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의 이야기는, 무죄한 자가 형제들에게 은 20냥에 팔려서 배신을 당하고,

모함을 당하며, 옥에 갇히기도 하는, 수난을 통과하여

결국 자기를 판 자 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되는 예수의 이야기인 것이지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요셉이 꿈을 꾼 뒤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절치부심,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그 꿈을 향한 집념을 버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성취를 해냈다는

그런 비전에 관한 이야기가 (1차적으로, 근본적으로) 아닌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지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절을 보시면 요셉이 채색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 채색 옷은 색동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권을 가진 맏아들이 입는 팔을 덮는 긴 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가 열일곱이고 장자인 르우벤의 나이가 스물여섯입니다.

그런데 왜 요셉이 맏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지요?

 

우리는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통간을 함으로 해서

장자권을 상실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은 그 장자권을 요셉에게 줘 버린 것입니다. (대상5:1-2)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요셉이 형제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신

하늘의 장자 예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은 30냥에 팔려 결국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육신적 형제들이었습니다. 한 민족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형제들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한 아들을 은 30냥에 팔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법적 맏아들 요셉을 시기하여 은 20냥에 팔아서 죽이려고 했던

요셉의 형제들과 요셉의 삶이 정확하게 그 예수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앞에 완전히 항복을 하고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으려 하는

아담적 죄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희들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칠게 반항을 한 것입니다.

 

요셉의 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형들의 곡식 단들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맏아들인 요셉에게 절을 하는 그 꿈은

하나님의 양자인 성도들이 그들의 공동 상속자인 진정한 장자, 하나님 아버지의 맏아들이신

주님의 은혜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 때에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죄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복음의 계시를 이야기 한 자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삶이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적 맏아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그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건 정확하게 예수를 배신하고 그 분을 로마에 팔아버린 예수의 민족적 형제들인

유대인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고한 수난을 통과한 요셉이 애굽의 치리 자가 되어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버린 형제들을 아사(餓死) 직전에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들에게 팔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만물의 주로 등극하여

자기를 판 자 들을 살려내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 말미에 보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말이 나오는데 아주 감동적입니다.

 

(창50:20~2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요셉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버린 형제들에게

‘당신과 당신 자녀들을 내가 기르고 보호 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원수들과 그의 후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모습을 요셉이 그림자로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맨 마지막 장에 기록된 창세기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 노아 시절의 교만, 바벨탑의 치기,

아브라함의 실수, 이삭의 불순종, 야곱의 꾀 등으로 폭로 되었던 인간의 죄를

무죄한 하나님의 맏아들이 수난을 받고 죽으심으로 그들의 생명을 구해내는

위대한 십자가 복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하면 이런 말입니다.

성도는 진정한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지만

그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작은 예수가 되어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바로 그 작은 예수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창세기의 결론이 이미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그 언약의 당사자들은

반드시 예수의 십자가 삶을 이 땅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서 요셉의 채색 옷을 입은

하늘의 장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12: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보세요. 성경이 교회를 가리켜 ‘장자들’이라 칭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와 연합되어 하늘의 장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늘의 장자들은 요셉처럼, 예수처럼 이 땅에서 세상에게 배신당하고,

그들에 의해 팔려가고, 모함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 거리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지기도 합니다. (계11:7~11)

 

(시105:17~19)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

 

(창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위 두 구절은 모순으로 들립니다. 시편은 음지의 모습을, 창39:23은 양지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의 두 가지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분명 시편 기자는 요셉의 감옥 생활이 족쇄에 묶이고 쇠사슬에 매였는데,

창세기는 그 삶이 ‘형통’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난이 여러분의 거룩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면

가난이 바로 ‘형통’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병이 여러분의 하나님 자녀다움을 완성하고 있다면

그 질병이 바로 ‘형통’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과 비전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내 꿈이 무산되고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꿈을 좇아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러브 상을 모두 휩쓴 ‘Slum dog Millionaire’라는 영화,

어떤 영화 평론가가 ‘당신이 오늘 밤에 무엇을 계획하고 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다 멈추고 이 영화를 먼저 보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참 잘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요셉의 삶이 떠 올랐습니다.

 

그 영화는 인도의 슬럼가에서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자말이라는 한 소년이 백만장자 퀴즈 쇼에 나가 당당히 1등을 해서

백만장자가 되고 첫 사랑도 찾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소년은 인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지폐에 누구 사진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소년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백만장자 퀴즈쇼에서 1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그는 부정행위를 의심받고,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놓고 경찰에 잡혀가서

엄청난 취조를 당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그 문제들을 맞출 수 있었는지가 밝혀집니다.

 

슬럼가에서의 그의 고단하고 지저분한 삶의 경험이

그 문제들의 해답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함께 붙들려서 갇혀 지내던 눈이 먼 앵벌이 친구에게,

엉터리 여행 가이드를 하며 고생고생 해서 번 미국 돈 100달러짜리를 전해 주면서

그 지폐에 그려진 사람이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바로 그 문제가 나옵니다.

 

그 사건은 그 소년의 인생에서 정말 가슴 아프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그 100불짜리 미국 지폐에 그려진 사람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픈 경험들과 기억들이, 결국 그가 백만장자가 되는 데에 열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영화에 나오는 그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우연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끌려 가는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삶은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백만장자 퀴즈쇼에 앉아있던 인도소년 자말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 그때 그 사건은 이런 유익이 있었군요.

그 때 그 고난은 이런 의미였군요.’하며 무릎을 칠 날이 올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 위해 형제들의 배신과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거쳐야 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단련과 성숙의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인도의 슬럼가에서의 경험이 백만장자 퀴즈쇼의 우승자 자말을 만들어 내었던 것처럼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과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반드시 여러분을 영광의 자리에 앉히는 거름으로 쓰여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