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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5장,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LNCK 2023. 10. 13. 19:48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창35장     2009.01.17. 출처

※제일 마지막 단락(검은색 글자)이, 본문 해석의 새 관점입니다.

 

메디컬 드라마에 보면 심장발작을 일으킨 환자를 살려 내기 위하여 
'전기 충격 요법'을 쓰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다른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본 후에 
최후의 수단으로, 혹은 환자의 심장 박동이 정지되어서 
더 이상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때 비상수단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그때 사용되는 전기의 충격은 아마 정상적인 사람이 받게 되면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심장이 멈추어 버린 환자에게 있어서는 
그 '전기 충격 요법'이야말로 유일하면서도 효과적인 치료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바로 그런 '충격 요법'을 쓰고 계셨습니다.

애지중지하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두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대학살의 살인범이 되는 등 
야곱은 정말 '온 하늘이 자기 머리 위에 무너지는 듯한' 
충격적인 시련을 연이어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영적 중병을 앓고 있던 야곱을 
하나님께서 회생시켜 주시는 놀라운 특수 치료 과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시련이 닥칠 때 성도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없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억장이 뒤집히는 듯한' 역경을 주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가족을 향하여 적대감과 복수심에 불타게 될 가나안 족속들을 생각해 보면서 
야곱은 그저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고 망연자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야곱으로 하여금 그의 '서원 불이행'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기록하기를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이상한 말씀 같습니다.
지금 야곱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그는 인생 최악의 충격적인 시련들을 연타로 얻어맞으면서 
극도의 불안, 공포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을 찾아오시자마자 무슨 의례적인 위로 한 마디도 없이 
다짜고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야곱이 저지르고 있던 엄청난 잘못을 지적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지금 땅을 사들이고 장막을 세우고 살고 있던 세겜은 
결코 그가 영주할 땅이 아닌 것을 일깨워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벧엘'은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살기등등한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던 중 그는 쓸쓸한 빈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가 바로 그 밤에 그 자리에서 '사닥다리의 꿈'을 보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자기 혼자만 있게 되었다고 여기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동행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그 놀라운 체험으로 인하여 감격과 은혜가 충만해서 그 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하면서 "저를 축복하시고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제가 이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기서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의 기도를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해 주셨던 모든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처럼 금의환향하게 해 주시고 나서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토록 큰 거부가 되게 해 주시고 외삼촌 라반과 형 에서의 위협까지도 무사히 통과하여 
그야말로 '평안히'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후에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그 '벧엘의 서원'을 깡그리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사실 벧엘은 세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엉뚱하게도 세겜에 아예 땅을 사고 영주권까지 얻어서 눌러앉아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세겜에서 거주하기 시작해서 디나의 사건이 발생하기까지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 집에서 20년을 살았는데, 
그 첫 7년을 무료봉사한 후에 레아와 결혼했으므로 
그 직후에 르우벤을 임신하여 출산했다 해도 
그가 밧단아람을 떠날 무렵 장남 르우벤은 기껏해야 12살 정도였음을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 레아가 여섯 아들을 낳은 후에 디나를 낳았으니 
야곱이 가나안으로 올 즈음에 디나는 겨우 서너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디나가 '장성'하여 결혼할 나이의 처녀가 되었고 
그녀의 오빠들이 칼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장성했을 때 
창세기 34장의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 앞의 33장 마지막 절과 34장의 첫 절 사이에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긴 세월이 지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은 자기가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서원했던 그 벧엘을 
겨우 40~50킬로미터 남겨 둔 세겜에서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신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10년 이상을 참으신 후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디나의 사건'이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너는 여기 세겜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 벧엘로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네가 어려울 때에 나의 도움을 받고서 맺었던 서원을 도대체 언제까지 잊어먹고 살 작정이냐? 
이 세겜이 아니라 벧엘에 가서 거기서 단을 쌓고 이제는 그 약속을 지켜야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생 전체를 실로 짜릿한 고통의 충격으로 자극시키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야곱은 그 뜻을 당장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그는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여기서 야곱이 자기 가족들에게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한 것은 
'이제 세겜에서 살만큼 살았고 이런 불행한 일까지 생겼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이사해 보자'
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환난 날"에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으며 
그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피하여 
"가는 길"에서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 곧 '벧엘의 하나님'을 
자신이 이토록 온갖 '평안'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따끔한, 아니 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매를 한 대 맞고 난 후에야 
야곱은 비로소 '아, 그렇지. 내가 그때 분명히 하나님께 벧엘로 돌아와서 단을 쌓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었지.'라고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니 심장이 정지되었다가 전기 충격 요법을 받고 극적으로 소생하게 된 사람처럼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생활에 숨어 있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가족들 중에 남아 있던 '우상숭배'였습니다.  *첫번째는 ’서원을 잊어버림‘

2절에서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4절에 보면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정말 놀라운 것은 야곱의 가족들 중에서 아직도 "이방 신상"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이방 신상'들 중에는 전에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날 때에 
아내 라헬이 자기 아버지 라반에게서 훔쳐 나왔던 '드라빔'도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야곱이 말하는 투로 보아서, 그는 자기 아내들이나 종들이 
그런 신상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대충 어정쩡하게 묵인하고 지내 왔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하지만 4절에서 야곱의 가족들이 "모든 이방 신상"뿐 아니라 
"자기 귀에 있는 고리" 즉 귀고리까지 빼어서 야곱에게 주었다는 사실은 
그 둘 다 무슨 장식품이나 장신구가 아니라 
어떤 '수호신' 혹은 '부적'과 같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야곱이 그런 명령을 내리면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라고 한 것은 
곧 '회개의 성결'을 뜻한 것이므로 
야곱은 자기 가족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것을 10년이 넘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에 살 때에도 분명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겜에 자기 가족의 정기예배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고 
그것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나님은 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명명했습니다.  33:20

하지만 그처럼 외면적으로는 만사가 형통하고 신앙생활도 착실한 듯이 보였던 야곱 집안에 
실제로는 '우상 숭배'라는 지극히 심각하고도 치명적인 문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의외인 동시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처럼 영적 방심에 빠져 있던 야곱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시기 위하여 '디나의 사건'이 터지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세겜'에서 그저 자기만족에 빠져 살던 그에게 
"너는 여기서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서 네가 나에게 맺었던 서원을 지켜라"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의 제단을 세워 놓고 겉보기에는 나무랄데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듯이 보였던 그에게 
"너는 네 집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우상숭배의 잔재부터 깨끗이 청산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아주 아픈, 그러나 그에게 꼭 필요한 충격의 시련을 
그것도 정말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신 끝에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35:5~7절에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디나의 강간' 사건과 '시므온과 레위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야곱은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벧엘'의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발행"했을 때 
아무도 그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세겜'을 청산하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의 자만을 회개하면서 "엘벧엘"을 찾게 되자 
그 모든 '시련과 역경'은 순식간에 다 해결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

◑적용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때로는 아주 따끔한 매를, 
정말 아픈 시련을 내리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깨끗이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게 하시기 위하여, 
지금쯤은 마땅히 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 있게 하시기 위하여 
그런 고통스러운 역경을 사용하십니다.

나태와 방심에 빠져 있는 우리를 참고 또 참으시면서 오랫동안 기다려 주셨다가도 
이제 더 이상 방치해 두었다가는 완전히 파선에 이를 것이 틀림없는 마지막 순간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틀림없는 '충격 요법'을 우리에게 쓰시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작은 개척교회의 목회를 하면서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인생에는 진짜 슬픈 일, 정말 아픈 일들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몇 십 명밖에 안 되는 교인들 가운데서도 
어쩌면 그렇게도 '불상사'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지 참 신기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당하게 된 사람들마다 
다들 자기가 겪게 된 고통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이라고, 
남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맛을 보아야 맛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직접 당해 보지 않으면 그 고통의 아픈 맛을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반면에 자기가 당하게 되면 마치 자기 혼자서 '욥이 당한 환난'을 겪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현실은 모든 사람이 평생을 통하여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최악의 역경'을 최소한 한두 번씩은 겪게 되기 마련입니다.

잘되어 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어서 말로만 듣던 '빚잔치'라는 것을 
직접 하게 되면 실제로 '하늘이 노랗게 보이게' 됩니다.

자식 유학 뒷바라지해 주느라고 어머니가 같이 와 있는 동안 
소위 '기러기 아빠'의 처지가 된 남편이 회사의 여직원과 바람이 나서 딴살림을 차리는 일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바로 본인에게 
현실로 닥치게 되면 정말 기가 막혀서 한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에 이민 와서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가게 앞에서 청소를 하고 있을 때에 지나가던 자동차가 갑자기 덮쳐오는 바람에 

한쪽 발목을 잃고 영원히 불구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소설 같은 사건이 
그 몇 만 명 되는 한인 이민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나 한 사람에게 벌어지게 되면 
그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예쁜 딸을 잘 키워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졸업시키고 
다들 부러워할 좋은 직장에 다니게 되는 등 그야말로 '일등 신부감'으로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런 딸을 시집도 보내기 전에 백혈병으로 잃게 되고 부모가 자기 자식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면 
그야말로 '현실이지만 거짓말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기독신자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저 땅바닥에 엎어져서 통곡만 하면서 자포자기에 빠져 버리시겠습니까?

불신자들처럼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면서 "에이, 이 더러운 놈의 세상!" 하면서 
욕이나 내뱉겠습니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런 순간에도 바로 야곱처럼 '너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시련이 강타해 올 때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해 놓고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온 일이 없는지 
자신의 '벧엘'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권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좋아하면서도 '약한 성도를 돌아보는' 
권사의 가장 기본적인 직무조차 지키지 않음으로써 
취임식 때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을 뻔뻔스럽게 어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직분자가 아니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되시는 교인이 계십니까?

여러분들 역시 세례 받을 때에 신앙고백 외에도 크리스천다운 '경건한 생활을 살기로', 
당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는 '교회중심의 삶을 살기로' 다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했습니다.

그런 서약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지키고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결혼하신 부부들은 다들 '상대 배우자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평생토록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지킬 것'을 서로에게뿐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남편을 멸시하거나 아내를 구박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 사랑이 신혼 때보다 더 식어졌기만 하더라도 
그것은 곧 하나님께 맺었던 서약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적지 않은 교인들이 그 과거의 서약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을 조금만 돌이켜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야곱이 세겜에 주저앉아 있던 십수 년'보다 훨씬 더 오래 참고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서원을 쉽게 잊어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미 '내버린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녀'라면 
그런 '사랑의 매'를 들어서라도 반드시 그 서원을 지키게 만드십니다.

세상에 나처럼 이런 모진 고통을 겪는 사람은 다시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역경이 닥치면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원망의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자신의 신앙생활에 '숨겨진 이방 신상들과 부적의 귀고리'들이 
아직 남아 있지 않는지를 솔직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 보기에는 꽤 은혜생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평소 엿새 동안에 세상 사회에 나가서는 신자의 표가 조금도 나지 않는 
'이중인격적인 외식자'의 생활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을 유아세례는 받게 하고 주일학교 때까지는 꼬박꼬박 교회에 보내었다가도 
고등학교에 입학만 하면 '잠시만 교회를 쉬고 대입준비에만 치중해라.'고 하면서 
주일에도 학원에 보내는 일을 명색이 교회의 중직자라는 부모가 
버젓이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이미 한 대 따끔하게 맞았으면 그런 '신상'부터 깨끗이 청산해야 할 것이고, 
만약 아직까지 그런 매를 맞은 경험이 없다면 '자기 눈에서 피눈물이 날 정도로' 
매섭게 아픈 매를 맞게 되기 전에 일찌감치 해결해 두는 것이 백번 더 낫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질적인 악습과 치명적인 구멍에 점점 습관이 들어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로 결코 끝까지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시련을 동원하셔서 자신이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도로 찾게' 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게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다면 우리 신자의 인생에 닥치는 역경이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고 계신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한순간에 내 인생을 끝내고 말 것처럼 보이는 충격적인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쓰러지거나 포기하지 말고 
그동안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스스로 자만하고 있던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서원의 불이행'이나 '불신앙적인 잔재'가 없는지를 찾아내고 
즉시 '엘벧엘'의 제단을 다시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전기 충격'이라는 것은 악당이 쓰면 최악의 '고문 도구'이지만, 
의사가 사용하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의 의술'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의 시험'은 성도를 괴롭히고 완전히 쓰러지게 만들려고 하는 
악한 핍박일 뿐이지만, '하나님의 시련'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살려내고자 하시는 재생 치료의 방편인 것입니다.

찬송가 503장을 작사한 톱레이디(A. M. Toplady) 목사 역시 
그런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한 성도였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순풍을 주실 때에는 두말할 것 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의 역경을 통과하게 하실 때에도 참된 성도는 
바로 그 세찬 바람 때문에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성화의 항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하소서" 
비록 지금 당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근심이 곧 사라지게 하시고 어둠에 빠졌던 심령을 더욱 밝혀 주실 것이 틀림없음을 말합니다.

"이 세상 고락 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내 삶에 좋은 일이 생길 때뿐 아니라 괴로운 일이 닥칠 때에도 
오로지 주님의 깊으신 뜻을 따라가게 되고 
이제 자신의 인생에 아무 의지할 데조차 없어 보이는 그 최악의 순간이야말로 
더욱 큰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축복의 기회가 된다는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항상 순경 중에서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경을 통하여서 당신께로 더욱 가까이, 더 빨리 이끌어 주십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질 때에 오히려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고 할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 놀라운 요령은 두 가지, 바로 '감사'와 '회개'입니다.

비록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는 비명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극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바로 그럴 때일수록 지금까지 내게 베풀어 주신 '순경의 은혜'들을 먼저 돌이켜 보면서 감사드리고 

또한 여태까지 내가 잊고 있던 '벧엘의 서원'과 숨기고 있던 '이방 신상'이 없는지를 
겸손히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세겜의 역경' 뒤에 예비해 두신 
'엘벧엘(35:7)의 완전한 평안과 더 큰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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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편애, 하나님의 뒷배  

창35장, '벧엘로 올라가라'는 사건,
그 사건의 계기가 된 '야곱의 딸 디나의 겁탈 사건과 그로 인한 세겜 성 학살 사건'  *34장

이 본문이 보여주는 '주제'는 무엇이며, 이 본문을 성경에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위에서 우리는
-야곱의 신앙적 나태로 인한 충격요법,
-야곱이 언약을 잊어버림에 대한 대가,
-야곱의 가속들의 우상숭배의 회개
등등의 이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들 말고도, 중요한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12:1~3절의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12: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지금 세겜 족속은, 야곱의 가문과 통혼해서, 야곱의 가문을 도와주려는 게 아닙니다.
세겜 족속은 자기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었습니다.

34:21~23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을 축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신약적 표현으로 하면 그들이 '전도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되게 하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의 목적과 의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야곱 족속의 가축과 재산을 모두 빼앗는, 소위 '흡수 통합'이었습니다. 34:23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물과 그의 아들 세겜은, 그 목적과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야곱의 아들들에게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세겜 성이 이렇게 학살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그것은 아니죠. 
야곱은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아들들을 책망을 합니다. 34:30 
또 야곱의 유언에서도 시므온과 레위는, 이 일로 인해서, 책망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목적 중 하나는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이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겜 성 사람들이, 야곱 족속을 흡수통합해서 집어삼키려고 하다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언약이 자기들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야곱이 벧엘에 올라가서 재헌신한 이유도 있지만)
야곱 집안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세겜 성 사람들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는 야곱의 딸 디나를 강제로 취해서 .. 위해를 가했고,
다음으로는 야곱의 집안 전부를 .. 통혼으로 홀라당 집어삼키려다가
하나님의 보복을 받은 것입니다. 남자 어른들이 다 죽게 되었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대적한 행동의 최후 결과는, 
파멸과 죽음과 멸망이라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시므온과 레위가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복수심에 불타 올랐습니다.
그건 명백히 잘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나쁜 목적으로 사용한 것도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시므온과 레위가 나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천재지변을 일으키시든지, 혹은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야곱 가문과 세겜성 사람들의 통혼을 막으셨을 것이며,
야곱 가정을 해치려는 세겜 성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12:3절의 언약 때문에요!

이런 것을 <하나님의 편애, 하나님의 뒷배>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창35장 말고도, 
하나님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밤에 몰래 도주해 나올 때에도
라반에게 현몽하셔서, '선악간에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고,

창31: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블레셋 왕 아비멜렉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갔다가, 
하나님께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창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비슷한 일이 20여년 전에 애굽에서도 일어났는데, 
그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이 모든 것이 창12:4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라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이며,

그걸 줄여서 말을 만들면 "하나님의 편애, 하나님의 뒷배"를 봐주심인 것입니다.  <인터넷설교 정리
    ☞ <뒷배, 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