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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성령의 임재

LNCK 2023. 10. 13. 20:35

https://blog.naver.com/karamos/80119581629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성령의 임재       요16:13, 마17:20         2007.09.09.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도입/ 어느 미국 간호사가 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침 8시 30분쯤 되었을까? 80 대의 노신사가 엄지 손가락을 꿰맨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 그는 9시에 약속이 있어서 매우 바쁘다고 하며 나를 다그쳤다.

 

나는 노신사를 체크하고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아직 의사들이 출근하기 전이어서 그를 돌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계를 연신 들여다 보며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내가 직접 돌봐 드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나는 노신사의 상처를 치료하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서두르시는 걸 보니, 혹시 다른 병원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신가 보죠?“

라고 물으니,

 

노신사는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내와 아침 식사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인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아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부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어르신이 약속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시면,

부인께서 언짢아하시나 보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신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지 5년이나 됐는걸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부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시지 못하는데도 매일 아침마다 요양원에 가신단 말입니까?"

 

노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몰라보지만, 난 아직 그녀를 알아본다오."

 

노신사가 치료를 받고 병원을 떠난 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내 인생을 걸고 찾아 왔던 "사랑의 모델"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

내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도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는 위 글의 노신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을 몰라보는 그 아내의 모습은, 마치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이미 곁에 오셔서 나와 늘 동행하고 계셨지만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채, 오래도록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성녀로 통합니다.

 

그 분은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임재를 볼 줄 알았으며,

초라한 형색을 하고 자신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믿음의 눈이 흐려지기도 하고, 믿음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가장 귀하신 주님, 오늘 그리고 매일,

앓는 이들에게서 (제가) 주님을 보게 하시고,

그들을 돌봄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 힘들게 하는 사람들, 몰상식한 사람들처럼,

주님이 매력 없는 모습으로 가장하고 오시더라도,

제가 주님을 알아보고,

"아프신 예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라고 고백하게 하소서.

 

주님, 이 믿음의 눈을 주소서. 그러면 저는 무뎌지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헛된 바람을 들어주며,

그들의 바람을 위해 일하는 것을 항상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환자여, 그리스도를 몸으로 보여 주니,

당신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요!

당신을 섬기도록 허락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내 가장 사랑하는 주님,

제게 맡겨진 이 소명과 책임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하소서.

 

(제가)냉정해지고 불친절해지고 참을성 없이 행함으로써

이 소명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소서.

 

오 하나님, 저의 환자로서 제 돌봄을 받으실 때,

제 결점을 참아 주시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저의 일념만을 보아 주소서.

 

주님, 제 믿음을 자라게 하소서.

저의 노력과 일에 복을 주소서. 이제와 그리고 영원히!」

 

이 기도문을 쓴 사람은

인도의 캘커타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려진 사람들을 돌보는 일로

전 생애를 보낸 테레사 수녀가 수 십 년 전에 쓴 기도입니다.

 

최근, 그분이 쓴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그분이 다시금 화제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 묵직한 얼굴 표정이 주는 인상처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바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처럼 느꼈는데,

그분이 때때로 잡히지 않는 성령의 임재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

그 편지를 통해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공격해 왔던 사람들은, 호재를 만난 듯이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가짜가 아니냐?

그만한 영적 인물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자주 의심해야 했다면,

기독교 신앙은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

 

반면, 테레사의 내면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위로와 용기를 얻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아무 의심 없이, 목석처럼,

또는 차가운 대리석처럼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똑 같이 번민하며 고뇌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정직하게 찾아가며

믿음의 길을 갔던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감동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분도 나처럼 ‘영혼의 어두운 깊은 밤’을 보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위로와, 동질감을 갖는 것입니다.

 

▲사실, 위의 기도문의 행간을 읽어 보면,

그 안에 이미 그분의 영적 고뇌와 씨름이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버려진,

온전한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접하면서,

그들을 통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을 섬기듯 그들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 힘들게 하는 사람들, 몰상식한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눈동자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기에 테레사 수녀는 이기도문에서,

항상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믿음의 눈을 주소서. 그러면 저는 무뎌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저는 그분의 내적 씨름을 봅니다.

그분은 믿음의 눈을 항상 뜨고 있어서,

자신을 지치게 하고 낙심케 하며 분노하게 하는 사람들을

주님 대하듯 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의 눈이 자꾸만 흐려집니다.

(빈자들 속에 임하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그분 자신의 말대로 "냉정해지고 불친절해지고 참을성 없이 행할 때"가 생깁니다.

 

그러니, 그분의 마음에는, "어떻게 하면, 한 순간도 믿음의 눈이 흐려지지 않고,

하루 종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님을 대하듯 대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고민이 이 기도에 암암리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에는 그 고민이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게도 그런 고민이 있습니다.

아니, ‘한 영혼이 온 우주보다 더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과,

‘지극히 볼 품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대로 실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고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외모나 삶의 형편이나 기질이나 말투나 행동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주님 대하듯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자기가 자신을 보더라도, 꽤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도 간혹 있습니다.

무슨 일로 어떻게 만나든 상관없이,

사람들을 주님 대하듯 정성을 다해 만나는 날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만남은 피곤하게 하기보다는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 믿음의 눈이 희미해져서,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

그 사람을 통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귀한 자녀를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평가하여

함부로 대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저도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 믿음의 눈을 주소서. 그러면 저는 무뎌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의 내면의 고민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적 편지가 공개되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그 내적 고민을 조금씩이나마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분 자신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대한 수녀회를 이끌고 있는 영적 지도자로서

그분은 늘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만,

그 내면의 고민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들은, 그동안 단편적으로 드러났던 그의 내면의 모습을 확대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더 테레사의 위대함은

아무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믿고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번민과 씨름을 통해 할 수 있는 대로 믿음의 시력을 유지하고

주님을 섬기듯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끝까지 섬겼다는 데 그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

잡히지 않는 성령의 임재를 믿고 살아가는 것,

또렷이 보이지 않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영적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쓰는 것,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어느 교우께서는 제게,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겨자씨만한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마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실 때,

제자들은 귀신들린 어린 아이를 기도로써 치유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아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마17:20).

 

이 말씀에서 ‘산을 옮기는 것’은 비유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Sugarloaf Mountain을 향해 "포토맥 강으로 빠져라"고 명한다고 해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과장법적인 표현입니다.

 

아무 일이나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허락하시는 일인 경우,

믿음을 가지고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느 만큼의 믿음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겨자씨를 비유로 드십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겨자씨’에 대해 제가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스라엘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서

성경에 나오는 물건들을 몇 가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겨자씨였습니다.

 

목사님은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교인들에게 보여줄 마음으로,

겨자 씨앗 몇 개를 하얀 종이 위에 올려놓고,

교인들로 하여금 일렬로 서서 강단 앞으로 나와 겨자씨를 보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씨앗이 너무 작아서 교인들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관찰을 하려고 했고,

그러는 동안 콧김으로 인해 하나씩 날아가 버렸습니다.

 

결국 교인들 중 절반도 다 지나가지 않았는데 씨앗이 다 날아가 버리고

빈 종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까지 다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다들, "겨자씨, 정말 작데!"라고 말하더랍니다.

 

▲왜, 예수님은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을 비유로 들었을까요?

커다란 바위나 감람산이나 거대한 나무를 비유로 들지 않고,

왜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을 비유로 들었을까요? 예수님의 심중은 이랬을 것입니다.

 

"큰 믿음을 원하느냐? 믿음이란 원래 그렇게 클 수 없는 것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믿음조차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좋은 믿음을 꿈꾸며, 높은 산을 생각하고 무거운 바위를 생각하지 말아라.

그런 믿음이란 아예 불가능하다. 반대로, 겨자씨를 생각해라.

믿음이란 그렇게 잡기 힘든 것이요, 그렇게 지키기 어려운 것이며,

그렇게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의도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클 수 없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없는 거대한 믿음은 불가능합니다.

 

육신을 입고 물질세계 안에서 물질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으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무 의심도 없는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해도,

그냥 두면 그 영적 시력은 점점 약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믿음’을 표현할 때, 명사로 하기보다는 동사로 더 많이 표현합니다.

믿음이란 한 번 가지고 나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 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충만했던 믿음이 내일은 약할 수 있고,

오늘 나약했던 믿음이 내일은 강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내 곁에 계신 것이 너무도 분명했는데,

내일은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지기도 합니다.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내가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 큰 믿음을 원하십니까?

믿음에 있어서 우리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십시다.

 

가장 좋은 변호사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중에 함께 계시며,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만만한 것은 아님을 인정하십시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에게 있어서,

보혜사 성령의 임재는 언제나 ‘잡을 수 없는 무엇’입니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아침 기도와 묵상이 깊은 날은, 하루 종일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갈 듯 한 자신감이 차오릅니다.

하지만, 때로 그 믿음은 두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흐려집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눈을 감고, 믿음의 시력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자주 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사는’ 삶에 빠지고 맙니다.

그렇게, 보는 것에만 묶여 살다 보면, 하나님의 존재는 거짓처럼 느껴지고,

그 동안 믿고 살았던 것은 거대한 착각처럼 느껴집니다.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마치 콧김에 겨자씨가 날아가듯,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믿음 생활에 있어 진지해질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말하고 행동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의문(의심)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했듯, 의문(의심)은 믿음의 일부입니다.

 

겸허하게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반대말은 과신이요 맹신입니다.

믿음은 의문과 번민과 고뇌를 통해 깊어지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성 생활에 더욱 마음을 다해서 진지해져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우리가 이를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유약한 것이라면,

그러나 그렇게 유약해 보여도 일단 그 믿음에 사로잡히면

불가능한 일을 이룰 능력이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가 되었든지,

그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의 영적 생활에 진지해지고,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기도한 것처럼,

믿음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봉사하는 영성 생활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위대하다고 알려지면

그 사람을 완전한 인간으로 미화하거나

그러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어떤 면으로든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유혹에 직면했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실수를 범하기도 했을 것이며,

때로 혈기에 압도되어 믿음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을 흠모하며 사랑하는 분들이 이 말을 들으시면 불쾌할지 모르지만,

실상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상 숭배입니다.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인간인 이상,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실제로 테레사 수녀는 매스 미디어에 의해 상당히 미화되고 과장되어 알려진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에게 커다란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고, 내면적인 고뇌를 더 깊게 했을 것입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런 질문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분의 영성 생활에 무슨 결점이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분의 번민과 고뇌와 의문이 고매한 영성가의 그것과 비교해서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그분이 성령의 임재를 더 분명하게 경험하며 지낼 다른 방도가 있지 않았을까?

혹시나, 병든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만 너무 몰두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나, 침묵 기도에만 너무 몰두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영광을 강력하게 경험하게 해 주는 공적 예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그분의 영혼을 고양시켜 줄 찬양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나, 그분이 대중에게 너무 많이 노출되고, 유명세에 마음이 분산되었던 것은 아닐까?"

 

저는 테레사 수녀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폄하하려 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영성 생활도 완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테레사 수녀에 관한 질문이기에 앞서, 저 자신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의 경우도, 테레사 수녀처럼, 때로 믿음의 눈이 흐려지고,

때로 마음이 무뎌지며, 때로 성령의 임재가 흐려집니다.

 

때로 목사라는 직책으로 인해서 받는 기대감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 ‘기도의 사람’이라는 허울로 인해 저만이 느끼는 고뇌도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완전히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랄 일이 아닙니다.

그런 헛된 바램을 가지고 있기에, 때때로 그러한 ‘영혼의 밤’이 찾아올 때,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바랄 것은 그 같은 ‘영혼의 밤’이 더 드물게 찾아오고,

그 밤의 기간이 더 짧아지고, 어둠의 농도가 더 엷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되어 있는

이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대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결국 도달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성령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영감과 지도를 받고 살아가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며 또한 가장 바르게 사는 길이며,

이렇게 살아 영생을 누리며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낙오하지 않고, 오락가락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뚜벅 뚜벅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의 편지들이 이 진리를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 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겨자씨처럼 그렇게 작고 유약하며 흔들리기 쉬운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걸어간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의 귀를 열고, 여린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임재가

얼마나 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지, 인정하십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대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께서

좋은 변호사처럼 우리 곁에, 우리 앞에, 우리 위에, 우리 뒤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분과 사귀면서 그분께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복되며 바른 길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이 작은 믿음을 지키는 일에 더욱 정성을 다하십시다.

 

그 일을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일에 예배에 참여하는 일 외에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믿음의 눈을 더 밝게 하기 위해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더 분명히 보고 살기 위해,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자신의 영성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기대합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잡을 수없는 성령의 임재를 더 분명히 보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어떻게 할지를

깊이 성찰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잠잠히 앉아 저희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희 안에 있는 믿음이 얼마나 작은지, 그리고

그 작은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능력을 가졌는지를 깨닫게 하소서.

 

작고 유약한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저희를 도와주소서.

 

잡히지 않는 성령을 잡으려고 몸부림칠 것이 아니라

성령께 우리 존재 전체를 맡길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더욱 밝혀 주소서.

 

그 시력을 유지할만한 영적 생활로

저희를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