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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8장, 성경에 유다-다말 사건이 들어간 이유

LNCK 2023. 10. 14. 15:36

◈창38장, 성경에 유다-다말 사건이 들어간 이유                  2020.09.03.설교녹취

지금 창36장 이후, 창세기의 맥락을 잠시 정리하면, 
첫째 르우벤도 형편 없이 살았고, (서모와 동침) 
둘째, 셋째아들도 살인자들이고,
넷째인 유다도.. 아주 실망스럽고 수치스런 끝판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문맥은 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하고 시작되면서, 
이런 야곱의 이야기들이, 그의 자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은 야곱의 모습이다(37:2)' 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요셉(그리스도 예표)'도 나오고요.

그래서 형편 없는 구제 불능의 삶을 살고 있는 야곱이(그 아들들이, 교회가, 우리가)
요셉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예표) 구원받는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후반부, 야곱의 이야기의 맥락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손들의 타락한 모습과
또한 구원자 요셉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시작

본문 창세기 38장은, 쭉 이어가는 내용의 흐름으로 볼 때 
이 창세기 후반부의 흐름을 깨뜨리는 듯한, 그런 별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창세기 전체에서 빠져도 별 문제 없는, 
그냥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있어서, 없어도 별 문제 없는.. 그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창37장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37: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그 다음 본문 38장을 건너뛰고, 39: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37장에서 39장을 바로 연결하면, 문맥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창38장이 없는 것이, 창세기의 문맥 흐름에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38장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기도 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 38장은, 그 흐름을 깨고 쑥 삽입되어 들어왔단 말입니다. 
없어도 되는 말씀이고, 
심지어는 야곱의 이야기를 이어 가는데, 갑자기 이렇게 삽입 시킨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나 보다' 해서 살펴보니

그 내용을 보니까,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았을 본문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왜 갑자기 유다의 치부를.. 입에도 담겨 어려운.. 
성경에서 가장 더러운 본문 중에 하나인 이 부분을 여기에다 삽입시켰는가요?

그러나 하나님의 귀한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37장부터 살피면서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라고 말하면서  37:2 
야곱을 통한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 이야기를 이어가는데요.
 
그래서 은혜로 구원이 필요한,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과
구세주 형제인 요셉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팔려가고, 고난 받았던 모든 모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통해 결국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형제이신 구원자 예수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즉 야곱과 이스라엘인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를 통해 열방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아들) 요셉의 이야기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하나님은,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 아들 요셉에 의하여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야곱, 
그 아들 요셉에 의해서 열방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그 야곱이 어떤 존재 인지도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짚고 넘어가라고 
지금 38장의 유다의 이야기를 삽입해 넣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 야곱, 열방을 구원할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로) 보여 주기를 원하시고 

또 하나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받는 이 야곱이 어떤 존재인지를 
한 번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라고, 38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38: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그 후에' .. 지금 우리는 야곱 이라는 사람의 족보를 살펴보고 있어요. 37:2
그런데 야곱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그 아들의 행태들을 보게 되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니까요)

먼저 우리는 '그 후에'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의 기력이 시작인 첫째 아들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간통하는,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는 일을 보게 됩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이 이렇게 더러운 범죄를 저지른 '그 후에'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아들 레위는 
자기 여동생이 세겜에게 강간당한 것을 알고  
세겜족속 전체를 집단 살해해 버리는, 
그런 아주 잔인한 야곱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넷째 아들, '여호와는 찬송이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넷째 아들의 유다의 모습을 38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속적인 실망의 모습이겠죠.

넷째 유다도 보니까 '형제들, 가족공동체를 떠나 내려갔어요.' 38:1
아버지를 떠났어요.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떠난 상태입니다. 

2절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동침(결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 하지 말아라. 하나가 되지 말아라' 

그런데 유다는, 신앙공동체를 떠나고, 그리고 가나안 사람과 하나가 되는.. 
세상과 짝하여 하나가 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8절부터 보면, 유다는 가나안 여자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습니다. 엘, 오난, 셀라
유다는 첫째 엘의 아내로 다말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해서, 하나님이 엘을 죽였어요. :7
어떻게 악했는지는 성경에 설명이 안 나옵니다. 

8절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이것은 형사취수제, 또는 수혼제에 따른 것입니다.
모세시대에 이게 율법으로 고정되지만, 그 이전에도 이런 사회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인 오난이, 다말에게 씨를 주지 않았어요. :9
형 엘의 가정이 세워지는 것을, 오난은 원치 않았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를 악하게 보시고, 둘째아들 오난을 죽이십니다.

그랬더니 유다는 다말에게, '막내 셀라는 아직 어리니까 수절하고 있어라. 
장성하면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주겠다' 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마음에는, 셋째인 셀라도 형들처럼 죽을까봐, 유다는 겁을 냈던 것입니다. :11

그러니까 다말을, 자기 집안을 다 말아 먹는 여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거 잘못하다가 셀라까지도 죽이겠다...' 

사실은 엘과 오난이 악했기 때문이었는데, 
유다는 어쨌든 하나님이 주신 법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가정을 보존하기 위해서.. 셀라를 다말에게 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유다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었고 
나중에는 창녀에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가 죽었어요. :12
상을 치른 후에, 양털 깎는 축제 때가 되었는데, 
그는 축제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또한 아내가 죽어서 외로웠는지
창녀를 찾아서 들어가게 됩니다. 

15~16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의 인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 있어서, 넷째인 유다 역시도
아버지를 떠나 가나안 세상과 하나 되고, 
하나님과의 법과 상관없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세속에 찌든 유다의 모습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창세기 후반부에 '야곱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이유는 37:2
야곱의 모습을, 그의 아들들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2가지 그림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는 르으벤, 시므온, 레위, 유다의 타락한 본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요셉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세상으로부터 구별 된 자, 
이스마엘로부터 구별 된 자(이삭), 
에서로부터 구별 된 자 야곱이긴 하지만, 
그러나 세상 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유다의 모습, 

그리고 이스마엘, 에서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전적타락한) 유다의 모습, 
이 야곱의 모습,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 받은 이스라엘이 
그리고 구원을 이어가는 이 야곱이 
얼마나 범죄하고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를, 구원이 절대 필요한 존재인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위해서, 세상과 아브라함을 구별하셨죠.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을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에서와 야곱을 구별 하셨어요. 

그러나 이렇게 구별된 자도, 
세상보다, 이스마엘 보다, 에서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받아, 그들의 구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그들을 통해서 구원이 열방으로 흘러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다말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가 전적인 타락한 자들 안으로 들어오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죠.

예수로 예표되는 요셉이, 어디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까? 
타락한 야곱의 족보 안데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지금 38장의 유다의 타락과       *타락한 신자를 예표
37, 39장의 요셉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대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표

아주 충격적인 본문이지 않습니까? 사실 설교하기도 좀 민망한 본문입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에게도 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것도 메시아의 조상인 유다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18절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그래서 다말이 임신을 했어요. 근데 리브가처럼 쌍둥이를 잉태했어요.

29~30절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지우고 싶은, 족보로 따지고 올라간다면 가장 지우고 싶은 이름이 지금 등장합니다. 베레스 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자 우리는 하찮은 야곱의 족보를 보았어요. 창37:2절 이하.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게 됩니다. 

마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그러면 지금 가장 영광스러운 왕의 족보에, 
차라리 지웠으면 좋을 것 같은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족보에 여자를 넣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서두에 등장하는 이름이 누굽니까? 
가나안 여자 다말입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 입니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자 예수가 어디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족보 안에 지금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문이 있는데, 주님은 야곱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레스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야곱이 구원을 받고, 또 야곱을 통해 구원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이유는 
히7:9~10 '또한 십 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 말미암아 
십 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멜기세덱의 높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높은 지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때 레위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족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와 야곱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야곱의 후손이니까)
야곱 (허리) 안으로 들어 오셨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께서 이 하찮은 야곱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이 더러운 야곱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야곱이 구원을 얻게 되고, 이 야곱을 통하여 구원의 이야기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충격적인 이야기는 
유다가, 하나님께서 구별 하신 그 유다가, 또는 야곱이 
이런 낯 뜨거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유다가 그의 며느리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어쩌면 정말 충격적인 것은, 
예수가 유다 안으로, 예수가 야곱 안으로 들어가셨다.. 라는 것이고 (야곱의 후손이라서)
그 이유 때문에, 야곱이 구원을 받고, 
야곱을 통해 구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야곱이 구원을 받고, 또 이런 죄악되고 부패한 야곱을 통해서 
이 구원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아들 안에, 그 안에 있음으로 되어진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구원 받은 자의 상징이죠. 
이스라엘.. 구원 받은 자죠. 

야곱, 이스라엘은 저와 여러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을 말할 때마다
신약성경의 '믿음'이라는 단어 보다 더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야곱은 
구원받은 모든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 오셨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3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중에 가장 더럽고 부패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셨다는 데 큰 의미가 있어요. 

아주 부패한 그런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그래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3장에, 이제 족보를 뒤집어서 볼까요.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 쯤 되되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살펴봤던 족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어요. 
근데 누가복음의 족보의 특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예수 위에는 요셉, 
요셉 위에는 헬리..

자 우리는 예수 안에 있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요셉, 헬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31:32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입니까? 
그 위로 위로 위로 위로 위로, 결국은 하나님 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아들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이고요. 

또 우리가 구원을 받고 구원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서 
열방의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예수)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야곱의 족보는, 그 야곱을 구원하고, 그 야곱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 하시는 키가 되는 
그 아들을 보여주는 족보 예요. 
그래서 창세기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족보 입니다. 

그 동시에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유다의 이야기를 삽입시킴 말미암아,
그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이야기를 써 내라는 야곱이 
얼마나 부패하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8장은, 아주 충격적인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유다가 며느리 에게 들어간 것도 충격이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 유다안으로, 야곱 안으로 들어오신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열방의 구원을 이루어 갑니까 ?
우리 안에 누가 오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거예요.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가 
오늘 창세기 38장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족보에 나오는 유다를 보면서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가 세상보다 낫다고요?
우리가 이스마엘보다, 에서보다 낫다고요? No

유다를 보십시오 결코 우리는 나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38장에 나오는 유다를 보면서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향하여 손가락질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계속해서 펼쳐지는.. 
이제 39에서 계속 이어지는 그 아들 요셉을 보면서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천하게 여길 수도 없습니다. 

왜요? 야곱 안에 누가 있습니까? 
야곱 안에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와 같은 더러움도 있지만 
야곱 반에는 그 아들 요셉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누구도 우리에게 손가락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스스로 교만하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비하하지도 아니하며 
하나님 앞에 그저 은혜로 살아가는 야곱, 은혜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족보를 기억하면서,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오셨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 아마 그 위는, 그 위는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
라는 것을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