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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9장, 형통한 자 요셉

LNCK 2023. 10. 16. 20:01



◈형통한 자 요셉       창39장        2020.09.04.

앞서 창38장에서, 야곱의 족보, 야곱의 이야기,  *37:2
그리고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는 그 이야기에 불쑥 끼어든 
아주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38장의 유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또 하나님이 구원을 열방 가운데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구별하신 
야곱이 얼마나 지저분하며, 더러우며, 부패하며 죄인되었는지를 
우리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 유다를 통해서 (父子는 일심동체)

하나님이 구별하셨지만 
야곱 또한 세상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고 
육적인 이스마엘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으며 
약속이 없는 에돔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는 존재다.. 라는 사실을  
우리 자신을 확인시키십니다.

우리는 38장의 유다를 통해서, 야곱의 진면목과 (父子는 일심동체)
그런 야곱, 유다와 똑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본문 39장에서 그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면서 
야곱의 구원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내려가면서  
그리고 이 야곱을 통하여 열방이 구원받는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가게 만들어 주는 
그 아들 요셉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그 요셉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의 이야기와 
우리를 통해 열방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계속해서 써내려 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다음 아닌 그 아들 요셉을 통해서인데,   
다시 말하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전에, 
유다를 통해서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셨고, 

이제는 진짜 야곱이 야곱되게 하는, 
그리고 이 구원의 이야기가 열방 가운데 흘러가게 만들어 주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요셉을 통해) 이제 집중을 시키십니다. 

◑39장부터 이제 나머지 50장까지는 요셉의 이야기인데 
먼저 오늘 본문 39장을 통해서, 
이 요셉을 통해서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

요셉은 어떤 아들이며,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자인지.. 
우리가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그 첫 번째는, 요셉은 형통한 자입니다. 

39: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한마디로 그 아들을 '형통한 자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형통'이라는 단어가 너무 퇴색되어지고 왜곡되어진 세상 속에 살다 보니까 
'형통'이 많은 것을 가진 상태, 높은 곳에 있는 상태를 '형통'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딱 한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요셉이 형통한 자다. 그 아들은 형통한 자다' 왜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이기 때문에 형통입니다. 

그것도 어디에서요?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 
그러니까 지금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 자, 
그것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자, 그것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애굽이라는 죽음과 같고, 더러운 것과 같은 세상 속에서 
오직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한 존재, 그가 바로 '야곱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형통이란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위 구절을 잘 읽어야 됩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보면서, 요셉에게만 주목한 게 아니라  
결국 요셉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를 보았던 것입니다. 
요셉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시는 여호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형통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세상 사람들이 보게 되는..' 
'나를 통하여,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지는 자' .. 그가 형통한 자다..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은 형통한 자이고, 그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형통하신 분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그는 거룩한 자였습니다. 

7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그 후에'란, 17세에 팔려갔던 요셉이, 이제 한 20대를 넘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가 또 이 가정의 총무, 보디발의 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죠. 
안정되었단 말이죠. 안정된 후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이 있기 전 요셉의 용모를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고 했습니다. :6 
그러니까 지금 요셉이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시험은 그의 약점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강점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던, 하나님께서 주신 장점 때문에 
이 시험이 오게 되고, 

그리고 이 시험은 힘들고 어려울 때 온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을 때 시험이 온 것인데.. 이 시험은 아주 강력한 시험입니다. 

왜냐면 요셉에게 있어서 당시 가장 약한 부분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집에서 사랑을 받던 청소년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타국에, 그것도 종으로 팔려왔으니,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 외로운 자에게 여인, 특별히 보디발이 고위 관직에 있었으니까,
아내의 용모도 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외로운 그에게 안성맞춤의 시험, 그리고 그는 또 지금 20대 초중반이에요. 
한창 때란 말입니다. 가장 왕성할 때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왕성한 청년에게 오는 그런 시험이었죠.
 
10절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니'
여러분, 아름다운 여자가 날마다 자기에게 동침을 청하는 이 시험, 
그러니까 이 시험은 아주 강력한 시험이고, 요셉에게는 가장 안성맞춤의 시험입니다. 
사람마다 다 시험이 달라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험은, 나의 장점을 통하여 들어오고, 
내가 안정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오는 것이죠. 

모세에게 이런 시험이 오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넘었는데 
여인이 동침하자.. 이런 일들은 없었어요. 모세는 모세에게 합당한 시험이 있고, 
요셉은 요셉에게 합당한 시험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그에게는 아주 강력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의 본질은 무엇이냐면, 치명적인 시험이에요. 
이 시험은 결국 목표를 뭐로 두고 있느냐면, 관계 단절, 그리고 죽음에 두고 있는 것이죠. 

9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지금 요셉이 이 시험에 만약에 넘어지게 된다면 
그에게 은혜를 주었고, 그에게 안정을 주었던 그 주인 보디발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납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아무것도 금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금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자기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건드린다.. 이것에 넘어진다 하는 것은 
보디발과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는 그런 시험이었죠.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9

이 죄는, 자기에게 은혜를 준 주인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죽음을 가지고 오는 죄요, 시험일 뿐만 아니라 
이 시험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였던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지었던 선악과를 따 먹은 죄, 
그 본질과 딱 일치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주인이었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금한 것이 없었고 
단 한 가지, 선악과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악가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또한 부부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그 한 가지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나에게 준 이 여자가' 라고 말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분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관계는 계속해서 단절되어지는 것이죠. 

이 선악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됩니까?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져 버리는 시험이었던 것이죠. 

자 그런 시험 가운데서, 요셉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요셉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거룩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자이고, 죄와는 분리되어 있는 자였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죠.

▲3. 세 번째로 "그는 복된 자"였습니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야곱의 아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로 말미암아서 보디발과, 보디발의 집과, 보디발의 모든 소유에 
하나님이 복을 허락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그 아들(요셉, 예수 그리스도)은 어떤 아들입니까? 
세상에 복을 흘려보내는 자, 생명을 흘려보내는 자, 결국 복된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진짜 성취시키는 아들이 바로 요셉인 것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가 보디발의 집에 있으면서, 보디발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더 넓게는 어떻게 됩니까? 
그결국 그로 말미암아서 형제들이,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형제들의 집, 아버지의 집에 복을 흘려보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됨으로 말미암아, 애굽 전역에 복을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그 기근 속에서, 그가 열방에.. 
열방의 중심에 있는 애굽으로 말미암아, 열방에 복을 흘려보내는 자가 됩니다.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요셉, 혹은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죄와는 분리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을, 자기 안에 쌓아두는 자가 아니라, 복을 흘려보내는 자! 
그가 있는 모든 곳으로, 땅끝으로 땅끝으로 복을 흘려보내는 복된 자였습니다. 
이 점을 보여주고 있죠. 우리 모두가 이런 21세기의 요셉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4.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고난받는 자"입니다. 
처음부터 그의 삶의 특징은 고난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가장 큰 주제도 고난입니다. 

그가 원래는 어떤 자였습니까? 
37: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요셉은 아버지의 집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채색옷을 입었죠. 
그러니까 왕과 같이 대접받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채색옷을 벗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실수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 그는 채색옷은 벗겨지게 되고,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채색옷을 벗고 노예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안정을 되찾아 보디발의 가정 총무의 옷을 입고 있었죠. 

39: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그는 다시 가정총무의 옷이 벗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옷이 벗겨진 이유, 그가 그 옷을 벗은 이유도 
그에게 있지 않고, 이 음란한 여인에 의해서 고난이 시작되어서 
그는 더 깊은 곳, 옥에 갇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의 삶에는, 자신의 죄와 전혀 상관없는.. 
그는 거룩한 자였어요. 
그런데 그는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하여 고난받는 자,  *그리스도 예표
애매한 고난, 억울한 고난, 다른 이들의 죄로 말미암는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한> 고난이기도 하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 <의한> 고난을 받아요. 
다른 이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아요. 

그런데 그는 결국 다른 이들을 <위한>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채색옷을 벗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집에 생명과 복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디발의 집에 총무의 옷을 벗음으로써, 죄수의 옷을 입음으로써 
애굽의 집에 생명과 복을 흘려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복을 흘려보내는 복이지만 
그러나 그 복은,
다른 이들의 죄로 말미암는 고난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한 고난을 통해서 
그 복이 흘러가고 있다.. 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는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기념식을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만찬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주님을 기념하는데, 샤론의 꽃으로 기념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주님을 기념하면서 성만찬으로 떡과 포도주를 대할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떡과 포도주는, 먹는 자들에게 생명과 복을, 
떡을 먹고 잔을 대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적인 복이 흘러가는 복의 통로이지만, 
그 복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고난을 통해서  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반찬할 때, 떡을 찢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찢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잔도.. 포도주 자체가 찧어져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포도 열매를 질근질근 으깨고 깨트려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그 성만찬은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찢겨진 빵이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어진 포도주가 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의 모습을 통해서(38장)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면 
오늘 이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39장), 
우리를 위해서 
형통하신 자이시지만, 거룩하신 자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이지만, 
죄와 상관없는 자이시지만, 

우리에게 복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찢겨진 빵이 되시고,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을 보고, 
이 요셉을 통해서 예수를 보면서 
'그가 어떤 자인가?'를 설명하시는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한없는 감사의 자리, 찬양의 자리, 예배의 자리로 불러들입니다.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그가, 죄없으신 그가, 하나님이신 그가 
유다와 같이, 야곱과 같이, 그 부패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복주시고 생명 주시기 위하여 찢기셨고, 고난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를 한없는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 은혜는, 또한 우리를 사명의 자리로 보낸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제 찢겨진 빵이 되시고, 부어진 포도주가 되신 그 아들 때문에 
우리 또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형통한 자가 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진,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 
그래서 우리를 보면, 하나님이 보여지는 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동시에, 이제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이 찢겨지시고, 포도주로 부어지신 것처럼 

이제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형통한 자 된 우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열방을 위하여 찢겨진 빵이 되게 하시고, 부어진 포도주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열방을 복주기 위하여, 열방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거룩의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바로 거룩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난 가운데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열방의 복을 위하여 찢겨지는 고난,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찢겨진 빵, 부어진 포도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지금도 열방 가운데 성만찬을 베풀고 계시는, 

우리 가운데 성만찬을 베풀어 주셨던 그분이, 
이제는 열방 가운데서 성만찬의 상을 펴시고 
우리를 찢으셔서 열방의 입에 넣어주고 계시는 거예요. 
열방의 입에 포도주(피)를 부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되는 
사명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열방에 펼쳐놓은 그 성만찬의 자리에서 
거룩한 그리고 찢겨지는 빵이 되어 있습니까? 

그분의 모습을,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한국이라는 이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곳에서 요셉을 사용하셔서 애굽을 살리셨던 것처럼 
이제 한국이라는 곳에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구원을 흘려보내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고난 앞에 의연한 요셉처럼, 
죄의 유혹 앞에 거룩한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를 진 요셉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서 
지금도 열방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찢으시고 자신을 부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을 예배하고 

그리고 그분처럼, 
이제 우리도 열방 앞에 상을 펴놓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시고, 우리를 (포도주로) 부으셔서 
열방에 생명을 흘려보내신다는.. 
이 사명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다른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사명의 자리에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요셉의 거룩함, 
그리고 찢겨진 떡과 포도주가 되는 (요셉처럼 고난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야곱이라고 37장에 쓰고, 39장에서 요셉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유다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38장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요셉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집중하면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감사하고, 그리고 그분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이 시대에 우리가 요셉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시대에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게 해주십시오. 

먼저 예수를 보고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가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