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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0장, 요셉을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LNCK 2023. 10. 17. 18:18

◈요셉을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창40장       2020.09.06.녹취, 정리

 

▲구약도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창세기 족장들의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면 지루하고, 은혜가 안 되고, 메마르고 건조한 해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 .. 여기에 창세기도 포함됩니다.

이 말씀들이 '곧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죠.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구약)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교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그런 교훈들,

물론 이것도 중요합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위 구절은,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가르침 말고도

삶에 필요한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 더 원론적인 해석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 창세기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본론 / 요셉을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창37:2절 '야곱의 이야기는 이러하니라'

야곱의 이야기 속의 가장 핵심은, 거기에 유다 라든지, 르우벤이라든지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가, 12아들들 가운데 가장 길게 나오는 것입니다.

 

앞서 창39장에서, 요셉을 통해 비춰진, 예표된 그리스도는

-형통한 자였습니다.

-죄가 없는 거룩한 자였습니다.

-열방에 생명과 복을 흘려보내는 복의 통로였습니다.

-받으신 고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해내시는, 십자가의 구원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이어지는 본문 40장과, 그 뒤로 쭉 이어지는 41장 이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도덕적이고 실질적인 교훈도 찾아야 되겠지만,

 

더 중요한 우선순위는, 요셉을 통해 비춰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면서,

특히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요셉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

 

▲1. <겸손, 낮아짐>

겸손이란 쉽게 말해서 낮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낮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미덕은 높아짐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미덕은 낮아짐에 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사람인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요셉의 모습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약속의 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과 고통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내려간 것입니다. 낮아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내려오셨죠)

 

'보디발이 요셉을 사니라' 결국 그가 종으로 팔렸습니다.

채색옷을 입고 있었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

이제 채색옷이 벗겨지고, 종의 옷을 입고서 종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늘에만 계셨다면, 이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구원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들이, 선교사들이

낮고 비천한 곳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세상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39:20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이제 요셉은 가정 총무로서의 옷이 벗겨지고,

감옥의 죄수의 옷을 입게 되는.. 더 낮아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40: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그 후에'

이 말은 요셉이 감옥에 잠시 갇혔다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감옥에 들어간 지낸 시간이 꽤 오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어느 시간이 흘렀는데

그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옥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같이 옥에 있었는데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 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지 여러 날이라' 40:4

 

햇수로 몇 년이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관원장들이 들어오기 전에 벌써 요셉은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들과 함께 여러 날을 지났고,

 

그리고 41:1절로 넘어가면 또 절망적인 말이 나오는데

'만 2년 후' (요셉이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이후 만2년이 지나서)

 

그러니까 요셉은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와서 마침내 총리가 되었는데,

최소한 그는 3~5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요셉은 끊임없이 낮아지고 오래도록 낮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찢겨질 떡,

우리를 위하여 부어질 포도주이신 주님이, *요셉이 예표함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낮아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이란 단순히 비천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여기는 겸손의 자리가 아니야' 하고 내려오는 것, 그걸 겸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그곳에 가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요셉은, 그가 자의로 선택하여 낮아진 것도 아니요,

그가 스스로 선택하여 높아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계속해서 낮추고 계시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가 자기의 자리를 비천하게 만들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 라는 것을 의미하죠.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로, 우리를 낮은 곳으로 밀어내실 때가 있습니다.

요셉은 잠잠히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하나님은 그를 밀어넣었습니다.

또 감옥으로 밀어넣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난 당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구원, 영혼 구원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그를 낮아지는 곳으로, 수난 받는 자리로

섭리적으로 밀어넣으십니다.

 

△그래서 욥도, 자식 잃고, 병들고, 낮아지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펀 글)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녀도 많았고, 사업도 윤택했다.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사탄이 주님께 와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욥이 까닭 없이 잘 믿는 줄 아십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욥이 주님을 잘 믿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잘 해주고, 욥을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욥1:9~10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한 번 시험해 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욥이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욥이 축복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로 잘 믿는다는 것을 (순전한 신앙인 것을)

사탄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사탄에게, 일정 기간,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그 결과.. 욥의 자식이 다 죽었다.

비즈니스가 다 망했다. 자기 몸도 병들었다.

 

그의 아내가 욥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 즉 혀깨물고 죽으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욥의 믿음이 순전했음이.. 만 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생활이 어려워지고, 개인 사업이 휘청거리니까,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잘못된 복음(기복주의)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한 말을.. 비슷하게 바꾸면 이렇다.

‘하나님,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은, 다 까닭이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업이 잘 되니까.. 사람들이 교회 나온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으니까 저들이 신앙을 가진 것이지요...’

 

놀랍게도 사탄이 한 말을 바꾸어

과거에 한국교회가 복음을 전했다.

‘잘 사는 선진국은 다 기독교국가라고’

 

이 말은, 선진국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다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저들을 풍성하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다...

(까닭이 있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라는 말도 된다.

 

정말 까닭이 있어서, 한국교회가 부흥되었던(1995년까지) 것일까?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저들을 한 번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실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잘 믿는다고 자랑해 온 것이

‘까닭 없이 잘 믿는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 성장의 복을 받아서 잘 믿는 믿음 때문인지’

하나님은 알고 싶으실 것이다. 욥의 속을 알고 싶어하셨듯이.

 

그리고 사탄이 계속.. 성도를 참소할 것이다.

‘하나님, 한국교회가 까닭 없이 부흥한 줄 아십니까?

다 이유가 있다고요. 저들에게 주신 복을 한 번 빼앗아 가 보십시오!’

 

여러분, 만약 우리 가운데 누구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식어서.. 주님을 떠난다면..

그는 정말 ‘욥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애당초,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기복주의 복음’에 혹해서..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기복주의 신앙’이 잘못된 것은

복을 못 받게 되는 환경이 올 때, 환경의 어려움이 엄습할 때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믿음이 아니었다.」

 

요셉은 자기 스스로 비천해지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성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그를 마리아의 태 속으로 집어넣어지셨습니다.

비천한 벌레보다 못한 인간, 그 여인의 태로

하나님이 들어가셔서, 죄인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비천하게 마굿간에서 구유의 누이셨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신 그 분이, 여인의 몸속에 잉태되시고, 태어나신 것부터가

한 없이 낮아지심 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도 안 되게, 빌라도와 같은 자의 법정에도 서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 억울한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지셨고,

무덤까지 내려가신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으로 예표되셨죠.

 

오늘날에도 세상 구원의 역사, 복음의 역사,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으려면.. 누군가 작은 예수의, 요셉 같은 자의

낮아짐이, 낮은 자리로 보내짐이.. 반드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낮아짐의 자리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2. 요셉을 통해 보여지는 그리스도의 성품 두번째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무엇입니까?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세상의 미덕은, 갚아주는 데 있고

하나님 나라의 미덕은 견디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미덕은, 행동, 실행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미덕은 기다림에 있습니다.

 

본문의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그리스도 모습은

'인내'입니다.

 

40:13~14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당신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요셉은 처음부터 악한 형들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는 인신매매를 견뎌내야 했고, 그 배신당한 아픔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이 조금 아물 때 즈음에

악한 보디발의 아내의 그 죄악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아마 요셉은 조속한 석방을 기대했을 거예요...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이것은 그가 진짜 잊어버렸다 라기 보다는, 무시했다는 거죠.

자기의 상황이 바뀌었고, 굳이 생각할 이유가 없고,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41:1절에 '만 2년이 흘렀고'

41: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4절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인내는

하늘을 향해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꿈을 꾸었어요. 그 꿈은 최종 결론을 말해 주는 꿈이었습니다.

땅을 배경으로 할 때, 이삭들이 자기에게 엎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할 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 앞에 엎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자가 되고, 통치자가 될 것에 대한 꿈이었죠.

그런데 그 꿈이 시작될 때부터

마치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때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그는 이제 그 꿈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단 번에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꿈을 주시고.. 그 후에는 인격적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시게 하십니다.

 

그 과정을 요셉은 지금 견뎌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요셉에게 결과를 미리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그 결과가 오기까지는 수많은 과정들이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그는 견뎌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그 결과를 본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그 형들로부터 자기를 지켜주시기를 기다려야 했고

이 억울함으로부터 풀어주시기를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관원장에게 꿈을 주셔서, 그를 통해 뭔가 하시나보다..' 생각했는데

그 관원장이 만 2년이나 잊어버렸어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견뎌야 했습니다.

 

지금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밀스러운 그분의 계획을 말하기 위한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계획(꿈)이 있으시면

그분은 반드시 그것을 실행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시더라는 것이죠.

 

근데 지금 요셉이, 사람들을 견디고, 사람들이 자기를 도와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에게 꿈이 주어지고,

바로의 꿈대로 이루어지기까지

그래서 그는 도합 13년이라는 시간을, 종으로, 감옥에서 죄수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또 두신 계획이 무엇이었습니까? 풍년 7년이에요.

풍년 7년을 또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면 20년이 지납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자마자, 곧바로 형들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어요. 또 시간이 지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최종적인 꿈을 이루시는데 모든 과정들,

그것을 고스란히 행하고 계셨고,

요셉은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인내하고 견디고

그 과정을 견디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인내하는 요셉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를 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아들이고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악인들을 견디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 그들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했고 죄스러웠는지

그러나 그분은 고스란히 그 제자들이 변화되고, 성숙해지기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 제자들!

성령이 오셔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기까지, 그분은 제자들을 기다리시고 견뎌내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이 기다리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내하고 하나님을 기다렸던 것이죠.

 

예수님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바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은, 참 짧게 이 땅에 계신 것 같은데,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제가 만약에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아들 보냈다면,

모든 과정을 좀 더 급하게 진행했을 것 같아요.

 

30년이라는 시간은, 예수님은 그냥 평범한 유대인으로 사셨어요.

공생애가 시작되기까지 30년 시간을.. 그냥 보내셨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리신 것입니까?

말씀이 예언된 대로, 앞서 엘리야가 선포하며 자기 길을 예비하기를

예수님은 계속해서 견디면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선포하기를 기다리시면서, 견디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 수많은 유월절 중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 유월절에, 그분은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말씀이 예언된 대로, 그 유월절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로마가 통치하기를, 빌라도가 그곳에서 통치하기를

그분은 인내하시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무덤에 누이셨을 때도,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으로 그에게 생명을 주시기까지

그분은 무덤안에서도 기다리고 견디시며 인내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겸손하신 분이에요.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서 인내로 살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보게 됩니다.

 

△지진아를 인내하며 변화시킨 탐슨 선생님

 

미국에 데일 겔러웨이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New Hope Community Church에서 일어났던 일로 소개되었습니다.

탐슨 선생님이나 테디 의사가 아마 그 교회 교인인 모양입니다.

 

탐슨 이라는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어느 해, 테디 스톨라드 라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가르치게 되었다.

 

테디는 학교에서 늘 왕따를 당하는, 전혀 매력이 없는 아이였다.

잘 씻지도 않는지 몸에서 냄새도 약간 풍겼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테디에게는 잘 접근하지 않았다.

 

시험을 보면, 테디의 시험지는 거의 X표로 도배되었다.

탐슨 선생님은 테디의 생활기록부가 한 번 보고 싶어졌다.

 

1학년 : 착한 아이임, 미래가 보임, 그러나 가정환경이 불우함.

2학년 : 조용한 아이임, 성격이 너무 폐쇄적임,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3학년 : 다른 아이에 비해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짐.

금년에 어머니 돌아가심. 아버지는 테디에 대해 무관심함.

 

4학년 : 이 아이의 미래는 없음. 아버지는 가출했음.

이모 집에서 양육 받는데, 이모로부터 구박당하고 있음.

 

테디가 커 갈수록 그의 삶이 파괴되어가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 생활기록부를 읽다가 탐슨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회개했다.

 

“하나님, 이 아이가 교육자들의 내팽개쳐 놔둬 버리는 마음 때문에

점점 더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 아이의 진정한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이 아이가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선생님은 부진한 테디의 학습을 돕기 위해 방과 후에도 과외로 돌봐주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 다가왔다.

성탄 시즌에는 학생들이 선생님께 작은 선물을 드리곤 한다.

 

탐슨 선생님은 학생들이 준 선물을 학생들 앞에서 한 개씩 개봉해 보았다.

(원래 미국은 선물을 즉석에서 뜯어 공개하는 것이 문화다)

이윽고 테디가 준비해 온 선물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가짜 다이야가 박힌 목걸이가 한 개 들어있었다.

그것도 알이 두어 개 빠진... 매우 형편없는 선물이었다.

그것과 함께 향수병이 있었는데, 먼지가 묻은, 쓰다 남은 향수병이었다.

 

급우들은 일제히 까르르 교실이 떠나 갈 듯이 웃었다.

테디가 또 바보짓을 했다면서, 그를 왕따로 만드는 비웃음이었다.

 

순간 탐슨 선생님은, 테디가 선물로 가져온 목걸이를 목에 두르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감탄하셨다.

 

그리고 향수를 몸에 뿌리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냄새야!” 하면서 도리어 테디를 추켜세웠다.

 

그러자 테디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선생님에게서 엄마 냄새가 나요!”

 

테디의 어머니가 쓰시던 향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끼시던 목걸이를 선생님이 끼시니까

선생님이 우리 어머니처럼 보여요!

 

초등학교 5학년 테디는 그 때부터 점점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테디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한참 시간이 지났다.

 

6~7년이 지나서 탐슨 선생님도 테디를 거의 잊어버릴 시점이었다.

 

그 때 탐슨 선생님은 테디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사랑하는 탐슨 선생님,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소식을 선생님께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우리 반에서 2등으로 졸업합니다...”

 

4년이 지난 후 탐슨 선생님은 또 다시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탐슨 선생님,

(중략)

제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데, 과에서 일등으로 졸업합니다!”

 

또 4년이 더 지난 후 탐슨 선생님은 또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탐슨 선생님

제가 닥터 스톨라드 (테디의 family name)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사실을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은 분이

바로 탐슨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달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제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죠?

탐슨 선생님이 결혼식장에서 제 어머니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선생님은 제 어머니이십니다.”

 

테디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의대를 졸업하고, 당당히 의사가 된 것이다.

그 기쁜 소식을 탐슨 선생님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을 만큼

탐슨 선생님은 테디에게 어린 시절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이었다.

 

다 파괴되고, 다 깨어지고, 다 무너진 한 아이가

한 선생님의 인내와 사랑으로 인해서

인격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이것이 바로 인내의 능력, 사랑의 감격이다.

인격의 변화, 인간성의 회복은

오랜 시간 진정한 사랑에 접촉될 때 일어난다.

 

미국에 데일 겔러웨이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New Hope Community Church에서 일어났던 일로 소개되었다.

탐슨 선생님이나 테디 의사가 아마 그 교회 교인인 모양이다.

<이 단락, 인터넷 설교 중 발췌

 

▲3. 요셉의 모습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의 성품, 그분의 삶의 태도 세 번째는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도,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보다 군인이나 다른 곳에서 더 많이 쓰입니다.

'충성'은 결국 무엇입니까? 사실 쉽게 말하면

충성은, 지금 주어진 주인 앞에, 지금 주어진 상황 속에

나 자신을 전부 드리는 걸 충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덕은 사실 성공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미덕은 충성에 있습니다. __ ___

이루었나/ 이루지 못했냐가 아니라

거기에 나를 드려서 충성했느냐/ 충성하지 못했느냐... 에 있다는 것입니다.

 

창39: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채색옷을 입었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아들 요셉에게.. 주인이 생겼어요.

그런데 그 주인 앞에서 그가 해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보디발 가정의 총무로, 그 주인의 소유를 맡았어요.

그런데 보디발 앞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집안의 일, 그 집을 다스리는 일에

자기 자신을 전부 드리고 있는, 충성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39:21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이때도 요셉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그 일과, 자기 앞에 서 있는 그 사람 앞에

자기 자신의 전부를 드려 충성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모습 속에 나타나는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그러나 이 충성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이루신 것입니까?

 

겨우 17세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소년 같았던 요셉이

결국은 가정총무로서, 감옥의 총무로서,

그는 통치하고 다스리는 법을, 거기서 사실 훈련 받고 배웠던 것입니다.

 

사실 요셉이 가정총무로서 그 일에 충성했던 그가,

자기는 몰랐지만 그 일 때문에, 다스리는 일에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는.. 그 감옥은 잡범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고위 관직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과 세상을 알 수 있는, 나라의 통치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 모인 고위 관직자들을 통해서요.

 

그래서 그는 정확하게 준비 되어서, 13년이란 시간 동안, 총리로 준비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현실 앞에, 육신의 주인들 앞에 바쳤던 <충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 눈앞에 보이는 상황과 주인.. 이 아니라

보이진 않지만 그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충성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 증거는, 아래 구절입니다.

39:7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지금 아주 강력한 유혹이 왔습니다.

고위관직자의 부인, 그 집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와 동침하자고 매일 자기를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순히 보디발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충성했고, 그 분의 말씀 앞에 충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선포합니까?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39:9

 

그는 사람에게도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뜻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고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40: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절망인데,

절망의 순간이 찾아왔지만, 그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 하거나, 원망,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점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온지 10년이 넘어간 시점입니다.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죠.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절망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거죠.

'아 이제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겠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이 밀려왔을 수도 있고,

삶에 대한 포기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합니까?

그 가운데서도 이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 때 잠잠이 기다리는 것,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39~40장)에는,

요셉의 대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대부분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말이 들려집니다.

 

그 속에서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충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디발이 아니라, 감옥의 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요셉을 통하여 보여지는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충성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라는 놀라운 예언을 듣고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쳤다고 할 만큼 너무나 평범한 유대인으로 30년을 사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율법 아래,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율법 아래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우리의 대표로 모든 순종을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 아래 순종, 충성하셨습니다.

그 분은 어린양으로 드려지기 위하여, 잠잠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잠잠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노벨상의 어떤 심사 규정 (펀 글)

‘종교적 목적으로 하는 어떤 헌신은 노벨상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사가 해외에 나가 봉사하지만, 노벨상은 면제된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시라. 무엄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천국에서 주실 상을, 노벨상이 앞서 가로채서 딱 줘 버리면...’

그런 깊은 겸손함이 노벨상의 의미에 감춰져 있어서 좋다.

 

요지는, 구제와 남을 돕는 일은 충성하되, 하나님께만 철저히 충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소록도에서 57년 정도 봉사한 마리안느, 마가렛 두 천사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서한다는 뉴스가 있던데.. 노벨상 심사규정도 종교는 제외하고,

또한 두 분도 그런 이 세상에서의 상은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면서

그분을 한량없이 찬양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과 복을 흘려보내기 위하여서

자원해서 찢겨지고 부어지는 그 떡과 포도주가 되셨습니다.

(떡 맡은 관원장, 술 맡은 관원장과도 연관 있습니다)

 

38장의 유다같은 더럽고 추악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찢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면서

그분을 한량없이 경배, 예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 40장 말씀은, 그런 존재이신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분의 성품을 통해서도, 우리는 한량없이 그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그분이 한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겸손,

-한없이 견디시고 참아오신 인내를 감사, 찬양하게 됩니다.

-그분의 충성, 그 성품을 보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니까)

우리는 한량없이 그분을 감사 찬양하고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최고의 예배, 가장 최선의 경배는

바로 우리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을 가장 높이는 것이요, 그분을 가장 높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냥 주님의 겸손, 인내, 충성을 찬양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진정 주님의 겸손, 인내, 충성에.. 우리 인격이 깊이 감명, 감동, 은혜 받은 성도는

반드시 주님을 본받아 겸손, 인내, 충성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낮추시는 곳으로 계속해서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를 비하하고 비천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강한 손으로 밀어내시고 있는 그 자리로

우리는 그분이 명령하시는 곳으로 기꺼이 순종해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비천한 자리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이 비천한 자리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경제적인 수준이, 미래에 대한 전망이, 모든 것들이 계속 낮아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에 서는, 겸손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가운데서 인내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악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아주고 견뎌줘야 될 성도들,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 견뎌야 되고, 기다려야 될 사람들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도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에게 칼을 겨누고, 총을 겨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향하여 함께 칼을 들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 처럼

악한 자들을 견디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하기를, 요셉처럼, 예수님처럼

그렇게 나아가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 다짐에 조금 힘을 보태줄 수 있는 말을 한다면

그 결과를 우리가 기억하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지만,

자기를 낮추는 자는 분명히 높아진다는 주님의 말씀,

그 결과를 우리가 기억하기 바랍니다.

 

요셉은 감옥까지 밑바닥으로 내려갔지만

왕 아래 2인자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 낮아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시고

높아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다.. 라고 기억하십시오.

 

인내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겠죠.

그러나 인내하는 자, 견디는 자에게만.. 거룩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겸손으로 높아질 것이요, 인내함으로 거룩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충성하면, 누구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다 쓰임 받게 돼 있어요.

충성하는 모든 인생은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악한 사단에게 쓰임 받든지/ 선한 도구로 쓰임 받든지

충성하는 사람은, 다 쓰임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 하나님께 충성함을 통해서

요셉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받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