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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장,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

LNCK 2023. 10. 22. 07:02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9860997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      창44:30~45:5         2014.06.08.

 

서론

 

창세기 45장 1~5절의 내용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요셉이 드디어 자기 형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 45:4).

 

요셉은 이미 형제들을 만났을 때 여러 차례 울었습니다.

형들이 애굽을 1차 방문했을 때,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서 3일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형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울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24).

 

그리고 2차 방문했을 때, 형들이 데리고 온 아우 베냐민의 모습을 보고

그만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 홀로 울었습니다 (창 43:30).

 

그리고 세 번째로 운 것이 오늘의 본문 창세기 45: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더 이상 정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 45:1~2).

 

요셉은 방성대곡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요셉은 이렇게 방성대곡을 하며 자신을 드러냈겠습니까?

그것은 스스로 형들을 용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더군다나 요셉은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형들 10명에게 옷이 벗겨진 채로 구덩이에 던져졌고,

끝내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요셉이

험난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13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까지

요셉은 온갖 죽을 고생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오랜 기근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굶어죽게 되어 애굽으로 와서 요셉인줄도 알지 못하고

총리에게 양곡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형들을 장유 순서대로 세워놓고 속이 시원하도록 한 대씩 때려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7세에 팔아먹고 13년 동안 죽을 고생을 시킨 자들이 눈앞에서

양식을 달라며 엎드려 있습니다. 복수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용서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면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겠습니까?

원수가 괴롭혔다면 “원수니까 그렇지!” 할 수 있지만,

10명이나 되는 사랑하는 형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사지에 몰아넣었으니

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용서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일을 예표하는 사건이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용서하시고, 그 따르는 무리들에게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18: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참으로 큰 죄인인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인 사백구십 번이나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한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사도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7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선으로 악을 갚을 수 있습니까?

맞으면 맞은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보통인데

어떻게 때린 사람을 선으로 갚아줄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요셉은 그 가능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10명이나 되는 형들은

은 20개에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17세의 아우를 팔아먹은 자들입니다.

오늘은 요셉이 어떻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이토록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하다.

 

죄를 지은 사람의 진정한 뉘우침이 있을 때에야 용서는 가능해 집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용서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죄인을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를 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형들을 시험합니다.

형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장유의 순서대로 자리에 앉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막내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나 주라는 극진한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형들의 자루에 양곡을 가득 넣어 나귀에 싣게 하고

지불한 돈도 다시 자루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시험을 합니다.

그것은 은잔을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은잔은 점을 치는 데 사용한 물건이었기에, 애굽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은잔을 가지고 점을 쳤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형들과 베냐민이 길을 떠났을 때 청지기에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창 44:4~5).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의 분부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 하리이까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창 44:7~9).

 

그러나 은잔은 이미 베냐민의 자루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시험삼아 일부러 집어넣은 것입니다. 곧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다시 요셉 앞에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말을 합니다.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창 44:17). 형들을 시험한 것입니다.

 

어머니 라헬이 낳은 두 아들이 첫째는 요셉이고, 둘째는 베냐민 아닙니까?

그러니까 라헬의 첫째 아들인 나를 20여년 전에 은 20개를 받고 팔아먹은 형들에게

라헬의 둘째 아들인 베냐민마저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준 것입니다.

 

첫째도 팔아먹은 자들이 둘째도 팔아먹는 지 시험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형들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하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요셉의 시험에서 형들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44:13절에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 것을 본 형들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옷을 찢는다’는 표현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여년 전 요셉을 팔아먹었을 때 옷을 찢은 사람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내 베냐민이 노예가 될 형편이 되니까, 10명의 형들이 모두 옷을 찢습니다.

형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요셉이 베냐민만 노예를 삼겠다고 하니까

“그만 홀로 노예로 남겨둘 수가 없다. 우리 모두 다 종이 되겠다”

10명의 형들이 막내 베냐민을 보호하고 나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11명이 있는데, 1명이 노예가 될 위기에 처하니까

10명이 1명을 보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형들이 변한 것입니다.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창44:18~34절까지는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가 요셉 앞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한 사람의 말을 기준으로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아주 감동적인 연설입니다.

 

여기에는 ‘아비’ 혹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무려 17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심히 염려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왜 그렇게 아버지를 염려하였을까요?

 

그것은 유다 역시 엘과 오난이라는 아들을 잃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잃고 베냐민까지 잃게 되면

아버지의 슬픔이 얼마나 클 지 유다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대변인으로 나와서 요셉에게 말했던 창44:3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44:33). 이 얼마나 감동적인 말입니까?

 

성경에서 타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겠다는

‘대속’(代贖), ‘속죄’(贖罪)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유다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이상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더 이상 가혹한 말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유다는 진실로 회개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유다의 연설을 듣고 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방성대곡하고 형들 앞에서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20여년 전 당신들이 팔아먹은 요셉입니다”라고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용서하십니까?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쳐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죄악을 고집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모든 형벌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 목숨을 대신 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 죄인일지라도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진정한 회개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2.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가능하다

 

그러면 용서한 요셉의 입장에서, “그는 어떻게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인생을 살아갈 때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창 40:8),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 41:16).

 

그리고 아내 아스낫으로부터 2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므낫세, 둘째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그 동안의 고생을 잊게 하셨도다’라는 의미였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두 배로 내게 복을 주셨도다’는 의미였습니다.

 

전부 하나님과 연관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악한 일이 일어나도 선으로 바꾸십니다.

불신자들의 인생에서는 좋은 것도 나쁘게 되고 나쁜 것은 더 나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성도들의 인생에서는 나쁜 것도 좋게 되고 좋은 것은 더 좋게 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섭리 신앙’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죄를 변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고 노예로 만들어 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바꾸어 도리어 선이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요셉은 총리가 되었고, 기근의 때에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45: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45:8절에도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에게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섭리 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형들의 죄악 가운데서도

그것을 바꾸어 선으로 인도하시는 섭리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악까지도 요셉과 그 가족들에게 유익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고,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억울하고 상처를 받은 일이

모두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믿으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처와 그런 죄악 가운데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섭리를 행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기드론 시내를 건너 맨발로 도망갈 때에

사울의 집안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을 향해 욕을 했습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 16:7~8).

 

그러자 다윗의 신복들이 말합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삼하 16:9).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삼하 16:10).

 

이 다윗의 대답은 “내가 당하는 현재의 고통이 바뀌어 훗날 복이 될 줄 누가 알겠느냐”는

의미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요셉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이런 용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가능하다

 

용서에 있어 아주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향해서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택한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45:7

 

여기서 매우 중요한 두 개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큰 구원’이요. 다른 하나는 ‘후손’입니다.

 

‘큰 구원’은 히브리어로 ‘팔레이트’라고 하는데 ‘생존자’(The Survivor)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후손’은 히브리어로 ‘샤아르’라고 하는데 ‘남은 자’(The Remnant)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나를 당신들 앞서 애굽에 보내신 이유를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남은 자가 되게 하시고 생존자가 되게 하시려고

나를 애굽에 먼저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남은 자’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세상은 선한 세상이 아니라 악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득세한다고 해서 이상히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돈도 많이 벌고 득세하고 권력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하고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아무리 득세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세력이 커지더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악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저지른 악만큼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악이 크면 클수록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남은 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The Elect)라고 했고,

구약성경에는 ‘남은 자’(The Remnant)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후손’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 ‘샤아르’인데,

구약성경에 123번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남은 자, 택한 자에게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운행되는 목적은 악인들의 유토피아 건설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언젠가 초개같이 날아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 역사가 운행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남은 자, 신약의 택한 자를 용서하시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생하는 몸을 입고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건설에 있습니다.

이곳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영생하는 사람들이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병 고침을 받으려고 믿습니까?

부자가 되려고 믿습니까? 기독교는 그런 얄팍한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지출되던 술값이 나가지 않으니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 늘상 나가던 돈이 저축이 되니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선물은

죄 사함과 영생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지만 다시 살아납니다. 부활해서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 살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영생하는 나라,

하나님 나라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요셉은 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요셉과 형들, 그리고 야곱의 모든 가족이 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남겨두신 남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그들을 살려주셔서

그들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시대의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을 볼 때 단순한 인간들로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창세기 45장 4절에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Come close to me!” 구청장님도 제게 가까이 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가 형들을 가까이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울고 형들과 입을 맞추고 안고 울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분리 되었던 요셉과 그 형제들은 이제 가까이 와서 서로 안고 울고

서로 말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목한 관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나는 요셉이라”고 밝힌 것을 통해 신약성경의 다른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메섹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갈 때

예수님이 사울을 도상에서 만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물어보았을 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I am Jesus)는 대답입니다.

구약성경에 “내가 요셉이라”. 신약성경에는 “내가 예수라”.

 

우리가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택하시고 우리를 불러 가까이 오게 하시고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한 인생이 되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기본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 복을 받아 봐야겠다.’ ‘내가 한 개를 드릴테니, 하나님은 열 개를 내놓으라’

는 식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초가 아주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언제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대한 것만큼 오지 않으면 금새 배반합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타종교로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고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도 크고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이미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큰 죄악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확실하게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생활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남은 자만 받는 것입니다. 오직 택한 자만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남은 자의 일원입니까?”

Are you a member of the Remnant?

 

이 질문에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내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을 확신합니다!”

라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 은혜를 받았으니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과 기도가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