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4장, 유다의 모습을 통해 예표되는 예수 그리스도 2020.09.13.설교녹취
◑도입
지금 우리는 창37장부터 시작된 '야곱의 족보(톨레도트, 이야기)는 이러하니라' 하는
야곱의 이야기를 읽어가고 있습니다.
'이야기' 라는 장르는 참으로 독특한 장로입니다.
인류가 가장 마음 깊이 새겨야 될 교훈들,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에 전달해야 될 귀한 어떤 메시지들은
사람들은 '이야기'라는 형식에 담겨서, 그것이 후대에게 전달했습니다.
과거에 책이 부족했던 시절, 이야기로 이렇게 후대로 전승되었죠.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도 <흥부전> <심청전>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백설공주 이야기> .. 이런 이야기 들은 단순히 동화같고,
재미를 우리에게 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메시지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재미로만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게 중요한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고 또 전달해주는 것이죠.
그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그 안에 있는 중요한 메시지들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흥부전 같은 이야기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결국 흥부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권선징악이죠.
그래서 '착하고 선한 삶을 사는 자는, 결국 하늘의 복을 받는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가 대대로 쭉 이어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그 이야기를 듣고서, 잘못된 방향으로
그 이야기가 정말 우리에게 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다른 것들을 교훈받을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봐라, 자기(흥부)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왜 자식을 열 명이나 낳아서
그 형을 힘들게 만드냐?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다. 그리고 절제하는 삶이다.
자기가 책임지지 못할 거면서, 자식을 왜 열 명이나 낳느냐?'
뭐 이런 식으로 흥부전을 교훈받아서
'결국 우리는 절제하는, 책임감 있는 삶을 살자'
이렇게 만약에 결론을 내린다면, 흥부전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죠.
또 이럴 수도 있습니다. <흥부전>이야기를 듣고는
'동물(제비)을 잘 보호해야 된다. 동물을 보호하고, 동물을 사랑하니까
결국 흥부가 복을 받지 않았느냐?
결국 흥부가 부자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그 아픈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냐?
그래서 우리도 동물과 자연을 잘 보호해야 된다'
만약 이런 식으로 흥부전을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면,
그 말은 맞지만, 흥부전의 원래 주제, 원래 의도와는 아주 거리가 멀게 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창37:2절 이후의 '야곱의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37:2절부터 지금 계속 '이야기'에요.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그 형제들, 그리고 애굽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지금 계속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37장 부터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슴 깊이 새겨야 되고
오고오는 세대에 전해야 될 분명한 메시지 교훈을 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음에 새겨야 되고,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이 야곱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실까요?
-야곱과, 요셉과, 유다를 통해서 드러나고 예표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거 (예수 그리스도) 말고, 얼마든지 다른 각도에서 본문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흥부전을 왜곡하는 스토리처럼 되어버린다는 거죠!
아전인수 겪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인데, 우리가 대단히 조심해야 됩니다...
▲이제 드디어 (야곱의) 이야기의 클라이막스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자신을 밝혀요.
형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밝히는 그 장면 바로 직전입니다.
가장 클라이막스의 장면 직전에 서 있는 거죠.
그러니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 이어질 야곱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고,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반드시 보아야 하는지를 살피면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될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요셉을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주목해서 봐야 됩니다.
창37:2절 '야곱의 족보(톨레도트)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창37장부터 50장까지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이야기'라고 쓰고, 계속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요셉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누구입니까?
자기 가족을 구원하고, 애굽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아들 요셉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 속에 보여주는 요셉에게 집중해야 되는데
이 요셉은 어떤 자인가 하면,
바로 요셉은 '우리를 구원하는 아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요셉의 이야기를 '성공한 어떤 젊은 청년의 이야기'로
'경건한 어떤 사람의 복 받는 이야기'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 요셉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아들'을 보여주는 샘플이라는 것이죠.
▲37:35~36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위 구절에서 아버지 야곱의 피눈물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모든 자녀가 위로하지만,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요셉은 어떤 아들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팔려간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애굽, 즉 세상으로 내려가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비지를 연상하시면 좋습니다)
그래서 창39:1절은 그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그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는 아들을 보여주면서
먼저 그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눈물 가운데서 세상으로 내려가는 아들' 이라는 말입니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아들은, 우리는 구원하는 아들로서
세상으로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심하게 고난받는 아들입니다.
창39:20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요셉이 옥에 갇혔습니다. 채색(왕자의) 옷을 입고 있었던 그가,
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그 옷을 벗고, 노예의 옷을 입고서 애굽으로 내려갔죠.
그러나 그곳에서 또 어떻게 됩니까?
그 옷까지 벗겨진채 죄수의 옷을 입고 깊은 옥에 갇혀서
그는 도합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생하고 수고하고 고난받는...
그 아버지와 자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고난받는 아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받는 아들을...
우리는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또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높아지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다스리는 자가 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중보자가되는 아들입니다.
41:40~41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죄인이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감옥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그 날 그는 총리가 되어서 높은 이름, 다스리는 자가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지금 우리는 요셉을 통해서 무엇을 보는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눈물 가운데서 세상으로 내려와, 자신의 피물속에서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고..
그러나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의 뜻 가운데 아버지의 능력을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입신양면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온 땅을 살리기 위하여 높아진 그 아들,
구원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요셉을 통하여 그것을 봐야 되는 것이죠.
▲그러나 또 한 가지, 우리가 보아야 될 것이 있는데
그거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아들이에요.
자꾸 요셉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자꾸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가요?
요셉은 왜 이렇게 자꾸 이런 형들을 애먹이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가요?
그는 이해하지 못한 행동들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에 총리가 되었다면, 그날 바로 저는 뭘 했을 것 같습니까?
보디발의 아내부터 데리고 와서 일단 손을 좀 보고,
그러고 난 이후에 형제들에게 바로 찾아갔을 것 같아요.
일단 형들을 무릎 꿇여놓고 '다시는 그러지 마라' 라고 말했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는 총리가 되고 난 이후에 어떻게 합니까?
7년에 풍년을 지나요. 그리고 흉년의 2년을 지납니다.
형제들이 자기 눈 앞에 나타났음에도 더 불구하고
요셉은 과거에 꾼 꿈을 생각하고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연속적으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요셉을 오해하면
'요셉은 뒤끝이 있는 사람이네... 치밀하게 형들에게 뒷통수 치는구나. 정탐꾼으로 몰고...'
'밥 한 끼 잘 먹여 놓고, 그 다음에 또 도둑놈으로 몰고...'
그러다보니 우리는 주님도 그렇게 생각해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는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아들은 우리를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아들이기도 하다.. 라는 것을
오늘 야곱의 이야기(톨레도트)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위에서 흥부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그 이야기의 목적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해야 하죠)
그래서 이제 형들이.. 결국 회개하게 됩니다. 성화되고 있는 거죠.
12지파의 족장이 되는 준비를 착착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창41:21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지난 22년동안 꽁꽁 숨겨 두었던 꼭꼭 숨겨 두었던 그들의 죄를
지금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로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그래서 그 아들(요셉)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표
구원하는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죄를 버리게 하는 아들,
형들의 죄를 생각 나게 하고, 가장 깊숙히 숨겨 놓은 그 죄를 자복하고 죄를 버리게 함으로써
'거룩하게 하는 아들이다' 라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죠.
그리고 또 그 아들은 42:20절에 보니까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막내 베냐민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요셉을 대신하는 '그 아들' 입니다. 요셉 같은 아들입니다.
요셉의 자리를 대신 하고 있는 그 아들을 데려와라.. 내려놔라 얘기합니다.
지금 그 아들(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에 깊이 잠겨 있는 그 죄를 내려놓으라, 드러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죄를 내려놓는 것이 거룩함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 안에 베냐민을 내려놓는 것, 그게 거룩함 입니다.
그래서 지금 요셉이 계속 이렇게 끌고 가고 있는 거죠.
'너희가 정탐꾼이다' 얘기해 놓고,
또 '동생 데려와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또 그 아들(요셉, 예수님의 예표)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결국 형(성도)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걷게 만들어요.
그들이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입에서 지금, 야곱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샘플인 유다의 입에서
무엇을 받아냅니까?
43:9절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니리'
유다는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그 옛날, 그들이 그렇게 미워했고 그래서 팔아버렸던..
요셉하고 똑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요셉인데
근데 그를(베냐민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려놓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또 43:14절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가장 소중한 아들 내놓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걷고,
가장 소중한 자기 생명을 넣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지금 유다가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아들은, 이 기근 속에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그들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거룩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 라면,
거룩이란 하나님의 조치속에서 나 자신을 드릴 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이란, 내가 여기 앉아서 예배드리고 말씀 알아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
내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죄를 내려놓을 때 그걸 거룩이라고 하고,
그 죄를 내려 놓음과 동시에, 내 안에 있는 베냐민을 내려놓을 때, 그걸 '거룩'이라고 하고
동시에 내 목숨까지 내려놓은 것, 내어놓는 것,
하나님은 지금 그것까지도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거에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셉을 보게 하시고,
그 요셉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아들,
그리고 우리를 성화 시키는 그 아들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에서 요셉이 했던 두 가지의 고백을
우린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애굽(세상)에 내려와서, 거기서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 하리이까?' 39:9
그래서 그는 '죄를 억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또 그의 고백속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가 정을 억제하여' 43:31
방에 몰래 들어가 울고 나왔지만, 다시 그 눈물을 씻고서
그 형제들을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그는, '죄를 억제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들이 되셨고' (구원자의 자격을 갖추셨고)
그는 정을 억제하여 형들을(성도들을) 성화시키는 아들,
그것을 이야기를 통해서 명백하게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예표되는 그리스도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이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요?
오늘 본문이 이제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데요, 유다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요셉을 계속해서 집중해서 봤습니다.
본문 특별히 44장에는 유다의 고백, 유다의 액션, 유다의 대사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마치 주인공이 유다인 것처럼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유다는 어떤 자입니까? 38:1절에 유다가 등장하죠.
'야곱의 족보(톨레도트)는 이러하니라' 라고 말해 놓고, 요셉 이라고 우리가 읽었어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함
이렇게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불쑥 38장에 유다가 쑥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이야기는, 기억하고 싶지 않고, 입에 담고 있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 준단 말입니다. 역시 야곱의 이야기 중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라면,
유다는 부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표, 저와 여러분들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본문 창44장에, 유다가 이 이야기 속에서 중심에 나오면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예표하는 유다를 보게 하시면서
그 유다의 어떤 모습, 무엇을 보게 하시는가요?
또 유다의 모습 속에서 첫 번째 우리가 봐야 될 것은
바로 '거룩하게 변화된 아들'입니다.
유다가 38장에서는 아주 극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나오지만,
(그 사이에 변화된) 유다는, 본문 44장에서는 스포트라이트로
하나님이 유다를 조명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38장에서 유다의 얘기를 끝내지 않고
본문 44장에서는 유다를 집중적으로 우리에게 조명해서 말씀하십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어요. 아름다운 식탁 교제를 나눕니다.
그리고 요셉이 안부를 묻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평안하십니까?'
베냐민을 보면서 음식을 다섯 배나 더 줍니다.
이렇게 멋진 저녁 식사를 하고, 요셉의 집에서 편히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풍성한 자기들을 살릴 양식을 자루에 가득 채우고,
그리고 그 양식을 사려고 가지고 왔던 돈까지 그대로 채우고
거기에다가 걱정했던 베냐민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해돋는 그 아침에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향하는데... 형들이 도둑으로 오해를 받는 거예요.
갑자기 요셉의 청지기가 다가오더니, 자기들을 붙잡아 세우는 거죠.
그러면서 '너희들이 어떻게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느냐?
왜 내 주인의 은잔을 훔쳤느냐?'
'우리는 절대 그런 사람도 아니고, 그런 일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 증거가 우리에게서 나오면, 그 사람은 죽고, 우리 모두가 종이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조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44:12절 '그(청지기)가 나이 많은 자에서 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더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랜덤으로 조사하지 않고, 나이 많은 르우벤부터...
그렇게 시므온, 레위, 유다... 그렇게 7~8째 아들까지 내려갔을 때,
형들은 아주 의기양양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근데 베냐민은 누구입니까?
20년 전에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고 요셉의 분신입니다.
또 다른 요셉이었죠.
형들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면, 형들은 속으로 '잘 됐다, 이 녀석!'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된 형들은, 이제 과거 22년(추정)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17절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니라
잔이 그 속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임이니라'
형들은 베냐민을 볼 때마다 평소에 누가 생각났겠나요?
요셉이죠. 내 죄가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들!
(베냐민 체포에) '야, 이참에 잘 됐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22년이 지난 시점에, 변화된 유다의 모습을,
그리고 달라진 그 형제들의 모습을.. 성경은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가니라'
청지기는 '베냐민만 빼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 라고 말했는데,
형들은 자기 발로, 애굽의 성으로 전부 되돌아옵니다.
베냐민을 두고는 못 돌아간다는 거죠.
22년 전에, 자신들의 눈에 가시 같았고,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 했고,
눈에 걸림이 되었던 그 아들이 옷을 찢었던, 요셉의 옷을 찢었던 그들이
이제 동생을 위해서, 자신들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유다는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옷을 찢고 있는 거룩하게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
비록 아직 완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22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6절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지금 유다의 표현을 가만히 보십시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대단히 신앙적인 표현입니다.
사실 유다와 그 형제들은 매우 억울합니다.
그러면 이런 궤계를 꾸민 자들을 저주한다든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도 있는데,
그의 항변의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 죄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그러니 달게 받겠습니다!' 하는 자세입니다. 신앙적으로 매우 성숙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살았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응이라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마땅히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야곱이라 쓰고(37:2) 요셉이라 읽고,
요셉이라 읽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은 유다를 끼워넣어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유다가, 그렇게 부패하고 그렇게 추잡하던 유다가 어떻게 됐다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변화되었고, 지금도 변화되어가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야곱의) 이야기다.. 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혼연일체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하이라이트로 비춰서 유다를 보게 하는데,
그 아들(유다)은 거룩하게 변화된 아들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37장에서 26~27절을 보면, 유다가 어땠는지를 보여 줍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들이 청종하였더라'
르우벤은 유다를 구하려고 했는데, 르우벤이 없는 사이에
요셉을 미디안 대상에게 인신매매로 팔아버린 장본인이 유다입니다.
누굴 닮았으니까?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유다도 닮았고,
그 유다안에 역사였던 사탄을 닮았어요.
변화되기 전 자연인 유다의 모습은, 부패한 정도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모습은
단순히 38장에 나오는 유다의 부패한 모습 정도가 아니에요.
37장에 야곱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사탄을 닮아있어요.
예수가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 아들을 팔아버리는 사탄을 닮아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탄을 닮은 그 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18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30~31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22년 전에는, 아버지에게 생명과 같은 그 아들(요셉),
그 아들을 잃어버려도,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 형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럼 지금 형들의 대표인 유다는, 아버지의 슬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아들(요셉)이 있었고,
또 하나 그 아들 만큼 소중한 또 다른 아들(베냐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소중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저와 여러분 같은, 또 다른 소중한 아들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오늘 이 일이 만약에 일어난다면, 내 아버지의 슬픔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32절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유다가 아버지에게 했던 약속, '내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유다는 '그 죄 지은 자기 동생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어놓겠습니다'
유다에게도 자식과 가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다 내려놓고, 이 죄 지은 형제(베냐민)를 위해서 자기를 내어 놓고 있는 모습!
지금 우리는 37~38장의 유다를, 22년 후에 만나면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유다를 읽고 있는데 예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슬픔, 그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아들에게 마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리고 그 아버지와 했던 약속에 초점이 맞춰져서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만약에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스러운 가운데서
아버지 음성도 들리고,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했던 그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승천하셨다면,
그분은 멋진 영웅은 될 수 있었겠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못 했을 거예요.
그냥 주님은, 그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골고다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승천하실 때는
모든 하나님을 백성들을 함께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중보의 길, 생명의 길을 여셔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셨죠.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또한 유다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죄를 억제하여 우리를 구원하고
그 정을 억제하여 우리를 성화 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도 봐야 되지만
그러나 유다를 통해서, 그 부패한 자가 거룩으로 달려가고 있고,
사탄을 닮았던 그(유다)가 예수를 닮아 있는 모습 앞에
하나님은 성경을 읽는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의 이름을 '요셉'으로 짓기를 좋아요.
참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요셉의 거룩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요셉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가문을 일으킨 자다' 라고 말하며
요셉의 거룩과,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의 경건이
결국 그를 하나님 앞에서 높은 자가 되게 했고
세계 속의 높이 우뚝 선 자기 되게 했다. 그러니 우리도 요셉처럼 살자!
라고 말하며, 성경 이야기 초점을 흐리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과 그 아들을 통해서 변화되어지고,
그 아들을 닮아가는 우리를..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그런 우리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그 야곱과 같이 우리도 이 시대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야곱으로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라고 말한 것처럼 37:2
여러분 각자 'OOO의 이야기는 이러하니라'
그러면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는 무엇이 보여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삶 속에서는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지는 인생입니까?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변화되어져 가고,
그 분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다른 메시지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