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단어 '재림'이 괜히 불편한 이유 - YouTube
◈'재림'이라는 말이 괜히 불편한 이유 벧후3:1~13 2023.10.22. ☞▣종말, 내세, 심판
'재림' 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내 생활 속에서, 재림이 갖는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림'을 찾고, 이야기하고,
재림 때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종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오늘 본문 벧후3장은, 거짓 선생과 거짓 교훈에 맞서서 베드로 사도가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이 거짓 선생님들과 거짓 교훈은 3절 이하에 있는 것처럼,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이, 그게 진짜 있을 수 있는 얘기냐?
조상들이 잔 이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고스란히
이 모양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 라면서 조롱한다는 거예요.
사실 베드로는 사도 살아 생전에,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서기 68년에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셨는데
그렇게 순교 하신 뒤로, 2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역시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말이 2천 년이지, 2백 년이 얼마나 길어요.
우리는 2백 년이라는 그런 연수를, 실제 생활 속에서 실감할 수 없이 살다가 죽습니다.
근데 2천 년이에요. 2천 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본문에서 거짓 선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지기 지정의에 따라) 행하면 조롱 한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이게 무슨 말이나 되느냐?' 라는 이런 태도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정말 재림 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재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구원도 못 받고, 하나님의 아들도 못 되고,
영원한 생명도 못 누릴 뻔 했다는 것이.. 아주 아찔한 얘기긴 합니다.
그런데 상황 자체를 보면, 도대체 '재림' 이라는 것은
실제 생활 현장에서 삶을 사는 우리로서는
붙 잡기가 마음으로 그렇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아요.
▲근데 재림 이라는 것은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거짓 선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요한계시록 을 해석할 때 말하는 것처럼
재림을 자꾸 "언제 재림이 일어날 것이냐?"라는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건 완전히 오류 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이 재림 사건을 우리가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시간적 관점에서 (우선적)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거예요.
'언제 재림이 일어나느냐?' 라는 시간적 측면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가 재림에 관심가지는 (올바른, 성경적) 측면은
인격적인 측면으로 재림에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사건이, 의미 있는 사건으로
오늘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실제 살아있는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있으려면
인격적으로, 지금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천국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언제 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재림이
실제 살아있는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 신앙의 핵심은, 지금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이에요.
왜 '재림' 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고, 내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실제 생활과 무관하게 느껴집니까?
지금 이 시각에도 천국보좌 우편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나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맨날 십자가 생활화를 해도, 재림은 썩 와 닿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사는데도, 재림 신앙은 솔직히 제 속에 별로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의 관계로 사모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 속에 바라보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 승천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의 영이죠.
공백을 가진 우리의 마음(영)이,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직면합니다.
이런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 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 이나 사도 베드로가 보였듯이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아버지를 모시며 사는 날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십자가를 생활화 해서,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을 따라가서
보좌 우편에 머물러서, 천국을 내 의식 속에 켜놓고 있다면,
진짜 그렇게 천국을 켜놓고, 십자가 생활화를 잘하고 있다면,
당연히 생기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천국에서 살 상황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입니다.
이 그리움이, 십자가 생활화가 잘 돼서,
늘 내 의식 속에 천국이 켜져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근데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재림에 대해서, 그 의미가 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천국이 켜져 있는 상태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켜져 있지 않으면, 재림 에 대해서도 켜져 있지 않아요. 의식이 꺼져 있어요.
천국이 켜져 있고, 그 천국에서 내가 신령한 몸으로 있고,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를 모시며 희락 가운데 영원히 살게 될 날을 기다리게 된다면
예수님의 재림처럼 간절히 그리워지고, 기다려지는 일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며 애타게 부르짖고 있을까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까 애인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타고 미국 갔을 때, 그 애인이 그리운 것처럼
구름 타고 천국으로 올라가신 그 예수님이 그리운 거예요. 지금 그리운 거예요.
지금 그리우니까(사랑하니까), 언제일지 모를 예수님의 재림을, 그렇게 간절히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천국에서 보좌 우편에 살아 계신 주님..
이게 사실이잖아요.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아내, 남편, 가족,
그리고 뉴스에 보이는 대한민국 사람들, 전 세계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엄연히 살아계신다는 게 사실이잖아요.
근데 그 예수님에 대해 그리움이 있습니까?
내가 신령한 몸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늘 아버지 모시고 살 날에 대한 그리움이 있냐는 거예요.
그런 그리움이 있는데도, 재림에 대한 기대가 없다 그러면.. 모순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거예요.
천국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면 (참 신앙이 있으면)
반드시 재림에 대한 기대가, 내 마음에 살아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시간 문제가 아닌 거예요.
언제 올 것이냐/ 안 올 것이냐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 재림과 관련된 세 가지 종류의 이단이 있어요.
1)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명백한 이단입니다. 본문의 거짓 선생들입니다.
벧후3:4~5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A집사님이 지금 자기가 하는 사업에 너무 마음을 붙이고 있다면,
그 집사님은 '세상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만물이 그냥 계속 있다'는 마음을 갖기 쉽죠.
사업을 하더라도, 자녀를 양육하더라도, 뭘 하더라도
'이 세상은 언젠가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하는
재림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해야 하는데,
신자들이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부족하니,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도 애타게 기다리지 않고, 재림에 대해 무감각하고,
그러니 뭘 하든지 '이 세상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처럼' :4
즉 재림의 약속을 전혀 기다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거죠.
2) 두 번째로 재림을 인정은 하되, 그 시점을 자꾸 특정 하려는 이단들이 있어요.
하여간 재림에 대해서 '언제쯤이 될 것이다' 라는 얘기를 자꾸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단자들입니다.
(재림이 가까웠다, 임박했다는 말을 할 수는 있는데, 몇 년 몇 월 몇 일을 특정하는 것)
재림의 의미를 그렇게 (날짜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단(극단)인 거예요.
'재림'이라는 것은, '십자가 복음'신앙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재림만 따로 독단적으로, 따로 떼서 취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복음신앙으로 생활하는 중에, 재림에 대한 삶도 결정이 되는 겁니다.
다 연결이 되어 있죠.
근데 십자가 복음신앙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재림에 대해 자꾸 어떤 특정한 시간대를 맞추려고 싶어하는 유혹이 걸려 있다면,
이건 극단입니다. 올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고, 예수님도 그걸 모른다고 하셨죠. 마24:36
3) 재림에 대한 세 번째 부류의 이단, 또는 극단은
재림을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는 잘 알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재림의 시간도 정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재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만 하지,
실제로 재림 사건에 담긴 의미가, 전혀 자기 실생활 속에서 반영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죠.
왜 그렇습니까? 왜 재림을 말만 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 재림의 의미가 반영되지 않습니까?
지금 현재 천국에 살아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그의 그리움의 방향이 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거예요.
성도이면서도, 세상을 무척 사랑하다 보니까, 재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거죠.
그리고 복음에 입각해 세워진 교회를, 뿌리부터 잠식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인 거예요. 본문에 뭐라 그래요?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위 구절은 다른 신약성경 사본에 보면
'모든 일이 불타 버릴 것이다.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더 맞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불에 타서) 풀어지리니
너희가 도대체 이렇게 때가 되면 불에 타서 풀어질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동안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11
'모든 게 풀어져 없어질 건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재림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이 맞는 얘기지.. :12~13
불에 타서 없어질 것들인 세상 속에 살면서
그 세상에 불에 타서 없어질 것들을 향하여, 그리움과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느냐?'
▲그래서 여러분, 심판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 마음은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요.
이렇게 영원한 속성을 지닌 이 마음으로
때가 되면 다 불타 없어져 버릴 것들에 마음을 두었던 때,
불타 없어질 것은 일시적인 것들이잖아요.
근데 그런 것에 자기 마음을 쏟아 부은 자들...
이들은 구원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아니 왜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불타 없어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두느냐는 거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재림 때 없어질 것이 뭔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돈, 여러분의 몸, 이 세상의 건물들과, 직책들..
또한 우리가 몸으로 살고 있을 때,
남편, 아내, 자식, 이웃들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내느냐를 가지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자꾸 자식 자식 하지 마세요. 자식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식 자식 해요?
불과 몇 년 같이 살았다고 '자식 자식' 노래를 부르면서
영원한 속성을 가진 내 마음(=영혼)을, 자식에게 쏟아 붓다가
심판 대 앞에서 결국은 없어질 자식 관계에 휩쓸려서 심판을 받을 것을..
지금 그렇게 애쓰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풀어질 없어질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돼야 되는가요?
왜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하는 일에 쓰지 않고
없어질 이 세상 것들에 쓰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들이 드러나리라 (없어지리라)' 라는 말씀은 :10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살면서 대단하다고, 굉장하다고, 좋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입니다.
예를 간단히 들어보면, 유럽에 가서 볼 수 있는 로마의 바티칸 성당,
그리고 수많은 웅장한 돔, 화려한 성당,
그리고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살아온 유적들,
예를 들어 그런 유적들이 많이 소장 되어 있는 영국 왕립 박물관 소장품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모든 소장품들,
바티칸 지하실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보물들,
유네스코가 정하는 세계 유산들...
이게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다 때가 되면 없어질 거라는 겁니다.
근데 이런 것에 마음을 뒀다, 영원한 속성의 자기 마음을 두며 살았다 그러면,
유네스코 세계의 유산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품을 아까워 하고 있느라고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니 지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도록 기회를 제공 받은 사람들이
무슨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 따위에...
아니 정신 없는 사람들이지, 뭔 로마의 바티칸 성당 같은 걸 짓 짓느냐는 겁니다.
아무리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허락 받은 자들이
어떻게 수백억 ~ 수천 억을 들여가면서 이 땅에 예배당를 짓느라고
그렇게 자기들 마음을 다 쏟느냐 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
▲재림 이라는 것을 실생활에 적용해야 된다는 거예요.
없어질 것들에, 영원한 속성의 마음을 갖다 붙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다 지금 실제 생활 속에서 지옥으로 들어갈 사람으로 보장 받는
도장을 계속 찍어가는 겁니다.
무슨 뭐 바티칸 성당이나, (유럽에서) 뭐 수백억 ~ 수천 억 짜리 예배당을 짓느라고
사람들이 마음을 쏟은 것만 문제가 됩니까?
하여튼 이런 일들이 지금 다 재림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는 거예요.
이게 본문에 나오는 거짓 선생들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노골적으로 부인하는 자들보다
어쩌면 더 예수님을 모욕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인정하는데, 그 재림의 갖고 있는 의미가
실생활에서 전혀 반영이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참 우리 모두가 과거에 그랬어요. 저도 과거에 목회할 때
뭔 프로그램을 그렇게 많이 돌려가며,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교인들의 영적인 에너지를 다 교회행사와 프로그램을 쏟게 만들었는지...
지금 돌아보니, 그때 제가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해야 되는데,
왜 예배당에 모여서 프로그램에 집중합니까, 행사에 목을 맵니까?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 누구도..
지금, 현재,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그리워 하지 않아요.
예수님과 하나님과 더불어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되는 그 상황을
뼈에 사무치게, 사도들 처럼, 초대 교인들 처럼.. 그리워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그렇게 많은 행사와
그렇게 많은 프로그램들을 돌려가며
교인들의 마음을 쏙 다 빼버리고 마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 2천 년 동안 일어나지 않고 있는 중에
(재림 소망 신앙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지금의 실 생활과 관계 없어 보이는 재림!
2천 년이 지나도 침묵하고 있는 재림!
이 재림이..
재림 사건에 대한 기대가 내 속에서 살아 있을 정도로,
지금 Now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이 그립지 않으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재림은.. 언제 일어날 것이냐를 관심하며 대할 사건이 아닌 거죠.
내가 지금 예수님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고,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영원한 삶,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얼마나 간절히 기대하고 있느냐?
이것을 알게 해주는 지표가,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가
내 속에 살아 있느냐 ...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일어나지도 않았던 재림이
이렇게 교인들의 신앙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 해 주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도 그렇고...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의 재림의 대한 신앙을 활성화시키기를 권면하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8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으면,
지금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싶다는 이런 소망과 그리움이 없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이..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다고, 견고하다고 느낌을 갖게 됩니다. :4
그래서 이 현실 세상을 신뢰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림, 천국에 대한 그림, 의식 속에 천국이 켜져 있는 상태가 유지되지 않으면,
반드시 무의식 중에 이 땅 위에서,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견고하고 영구하다는
무의식적인 신뢰 갖게 됩니다. 그러면 참 신앙은 끝난 거예요.
왜 재림이 늦춰지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안 일어나고 있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재림이 먼저 일어났다면,
우리는 태어나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영원한 나라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조차 받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예정가운데 선택하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태어나서, 그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는 이 역사,
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게끔까지... 지금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존시키고 계시는 거예요.
예정 가운데 있는 마지막 사람,
그 사람이 그의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들여보낼 때,
그래서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올 때,
그 순간 재림은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사람이 누군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재림이 더딘 이유가 그렇다는 거예요.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실제로 재림의 약속이 더딘 게 아닙니다.
원래 재림이 일어 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그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재림의 타이밍을 정하는 하나님의 의도 속에는, 어떤 심리적 취지가 들어 있느냐?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인간이, 예수님 안에 들어와 구원이 확실시 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대로 유지시켜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재림이 임하든지, 그 시점 이라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이 그리우면,
천국에 가서 함께 영원한 삶을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간절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내 의식이 켜놓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재림은, 내 안에서 살아있는 소망이 되고,
살아있는 기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이
여러분의 일상적인 생활 현장에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불에 타 풀어져 없어질 이 세상 일들에 대해
영원의 속성을 가진 내 마음을 갖다 붙이거나,
그 가운데 내 마음을 쏟아붓거나 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일을 중단하고,
내 마음은 한 방울도, 한 조각도,
이 세상.. 가족이든/ 사업이든/ 직책이든 그 무엇을 막론하고
단 한 방울도 흘려 보내지 않기로 작정 하는 신앙심이
이것이 바로 재림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재림이 살아있는 사건으로, 재림의 기대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재림 신앙이 내 속에서 살아있게 되는 거예요.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이 올라가신 천국이, 내 의식 속에 켜져 있음으로써
'아 내가 진짜 천국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는구나' 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