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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5장, 내게로 오라

LNCK 2023. 10. 24. 07:35

◈창45장, 내게로 오라                 2020.09.15.녹취

※너무 상징적 해석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잠깐 듭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다 보면, 이런 해석적 갈등이 있게 됩니다.

본문 창45장은, 우리가 기근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의 길을,

그 아들(요셉, 예수님 예표)이 요구하는 길을 걸어갈 때, *형들을 회개로 인도하는 요구

우리가 생명력을 얻을 뿐 아니라, 가장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

기근 속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말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내게로 오라" 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9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서, 영이 살아있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그 아들'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5:9~10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여러분, 우리가 '그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그래서 죽은 것 같은 삶이, 생명력을 얻어 진짜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그 아들'은 우리를 더 깊은 은혜의 바다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10

이것은 강조 명령형입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라' 히브리어 '레다'라는 이 단어는

내게 가까이 오라, 내게로 오라.. 라고 지금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로 가까이 와서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10절에 '내게 가까이 오소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이 말은, '나와 이제 동행하소서, 나와 동거하소서' 이 말입니다.

함께 가자, 함께 살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형들이)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기근 해결

우리는 지금 가장 아름다운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걸어가고, 나와 함께 거하자' 라고 하는

진짜 살아있는 생명의 삶으로의 초청을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 45장을 통해서, 우리의 영이 다시 살고,

이제 살아있는 삶을 그와 함께,

그래서 단순히 이것은 가나안 땅에서 애굽 땅으로의 이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적으로는) 하나님 없는 삶, '그 아들'이 없는 삶에서,

'그 아들'과 함께하는 영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으로 오소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그리스도 상징

'내게로 오소서. 나와 함께 동거, 동행하십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초청의 길, 동행, 동거하는 그 길에,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고서, 무엇을 가지고서 그 삶을 시작하게 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순간적인 은혜 뿐만 아니라,

그 살아난 영을 가지고 살아있는 삶을 살게 되는 그 축복을 누리게 되는지,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 번째는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요? 그 첫 번째는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열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한 내용을 붙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1. 첫 번째는 '그 아들이 용서했다'는, <용서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있어야

그와 동행하고, 그와 동거할 수 있습니다.

45:4~5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일은 당신들의 죄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그 뒤에 하나님이 계셨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으며,

하나님이 당신들보다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야곱의 가족들이 지금 애굽으로 옮기게 됐죠.

그런데 나를 먼저 보내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지금 실질적으로, 형들을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아들과 동행하고, 그 아들과 동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내가 죄인이다' 라는 명확한 인식이 필요해요.

내가 죄를 지었다는 명확한 인식이 필요해요.

그리고 지금 그 아들이 계속해서 그 형들이

자기 죄를 내려놓도록 계속해서 다루었단 말이죠.

그래서 명확하게 '내가 죄인이다' 라는 인식과, '내가 죄를 지었다'라는 믿음을 갖게 했어요.

그러나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자기들을 용서했다는 명확한 인식과,

사죄받음의 믿음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보면 참 겸손한 것 같은데, 맨날 자기가 죄인이래요.

늘 나는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건 우리에게 분명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용서하셨다는 그것을 믿지 못하면서

끊임없이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겸손한 것 같은데, 더 자세히 들어보면 '그 아들'의 속죄를 아직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형들은) '그 아들'을 향한 두려움이나 의심이 아니라

한없는 은혜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용서받은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

진짜 그분이 나의 죄를 용서했다.. 라는 그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그 이후로 빚진자 의식,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어있어요.

사실 이 형들은요, 창세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50:15절을 보면, '그 아들'의 용서에 대해서 명확하게 붙들지 못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50:15

무슨 말입니까? 형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요셉은 분명히 용서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바로도, 요셉도 했던 말을 번복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왕은, 통치자는 했던 말을 번복하는 자가 아니에요.

요셉은, 총리로서 형들을 용서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까이 오소서' 라고 했는데

사실 그 형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그 아들과 동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과 함께

그런 나를 용서하셨다..는 믿음! *이게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죠.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2. 그리고 또 하나 필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 라는 믿음, 그를 향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45:6~7절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지금 흉년 2년째인데도 거의 죽을 판이에요. 근데 아직 뭐요? 흉년이 5년이 더 남아있대요.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에 남은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당신들 앞에 세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은 나를 용서한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아들'은, 죽음 가운데서 나를 건져낼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오직 내 생명을 이어가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다.. 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이 넘쳐나는 홍수 가운데서,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방주다..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이 맹렬한 기근 속에서도, 그 아들이 유일한 방주(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믿음!

이것이 우리로(형들로) 하여금,

그와 동행하게 만들고

그와 동거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만이, 극심한 기근에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는,

생명이 있는,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죠

▲3. 그리고 또 한 가지, 그와 동행하고 그와 동거하기 위해서

사실 그들(형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무엇이냐면

<약속 자체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

오늘 보면 참 많은 약속들이 나오는데

그 전에 지금 그 약속을 받아들고 있는 그들 손에

현재적으로 들고 있는 것도 있어요.

21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요셉 때문에,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줍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충분한 길 양식을 주었어요.

그리고 22절에 보면, 그들에게 각기 옷 한 벌씩을 주었대요.

요셉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에서 옷은 참 중요합니다.

-채색옷,

-노예의 옷,

-가정 총무의 옷,

-감옥 수인의 옷,

-다시 그가 입는 세마포 옷, 총리의 옷

이런 것들은 그의 신분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에게 요셉이 '옷을 주었다'는 것은,

필요를 채워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고 의롭게 해 줬다는 뜻이 되겠죠.

지금 현재 그들은 옷을 얻었고,

베냐민은 옷 5벌과 은 삼백을 얻었고, :22

그리고 23절에도 보면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는 선물이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그러니까 형들은 지금 현재적으로 살 수 있는 무엇인가를 선물 받았어요.

내가 원하던 내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현재적인 선물들을 가득 받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보다 더 풍성한 것이,

약속이라는 형태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11절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형들은 지금 자기들이 받은 길양식, 새 옷, 암나귀와 숫나귀에 실린 물품들, 양식들..

이게 풍족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것은 금방 없어질 것들이예요. *현재적 삶 상징

그런데 앞으로의 나의 모든 삶, 남아있는 모든 삶을 책임질 요셉의 모든 복의 총량은

'약속'이라는 형태로 지금 그들에게 주어져 있어요.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삶 상징

요셉 때문에 또한 바로는 뭐라고 약속했습니까?

18절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건 이제 남아있는 그들의 삶 전체에 대한 모든 축복이

'약속'이라는 형태로 주어져 있어요.

그러니 그들을 초청하고 있는 요셉이

형들에게 남아있는 삶까지 모두 '약속'이라는 형태로 지금 보장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 형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지금 현재를 살게 하고, 몇 년을 살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을 살게 하고, 끝까지 살게 하는..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그 아들'과 동행하도록, 동거하도록 해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우리의 새로운 삶,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삶으로의 초청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용서와, 그리고 그 아들 안에만 생명이 있고,

그 아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음을 믿는 믿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죠.

이러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 살아있는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라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우리(형들)에게 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행함입니다. 순종이죠.

▲1. 신앙생활은 단지 '믿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자 요셉이 '내게로 오소서. 나와 동거하소서!' 라고 말했단 말이죠.

자 그러면, 그 초청에 대하여 마음속으로만 믿고 끝나는 것..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이제 가나안을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을 향해, '그 아들'을 향해 실제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7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자, 가나안에 있던 야곱이, 형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을 들었어요.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 기운이 소생 했어요.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7

복음이라는 것은, 듣는 순간, 보는 순간..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야곱이 소생하게 되었어요.

28절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야곱은, 그 아들이 살아있다, 그에게 풍성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믿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어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 믿음을 액션으로 옮겼다는 거죠!

그에게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아들'로 향한, 행함과 액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 스스로가, 요셉이 보낸 그 수레에 올라타서,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 분명히 필요합니다. 지.

마음.. 분명히 필요해요. 정.

그러나 내 의지를 움직이는 것까지가 진짜 나로 복음을 누리게 만든단 말입니다. 의.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에 만족해요(지). 그리고 족한 마음에 만족해요(정).

그러나 그 족한 마음이, 나를 움직여서, 수레에 타고

그 먼 길을 내가 직접 가게 될 때(의),

그때에 비로소 나의 의지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초청을 내가 누리게 되는 것이고

그 아들과의 동행과 동거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에서 잠시 멈춰져 있는 것 같아요.

구약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사를 통해서 누려지고, 유지되고, 동행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회당 중심의 교회가 되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사실 지, 정, 의가 다 들어가 있어요.

제사를 지낼 때도, 양을 잡는 것을 보면서

'이 짐승이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흘려진 피를 보면서, 자기 마음에 죄에 대한 끊임없는 안타까운 마음과 눈물.. (정)

이런 것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양이 죽고, 자기가 삶으로 돌아갔을 때

'나는 이제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았으니, 앞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

라는 의지적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정의가 다 있었어요.

신약시대로 넘어 와서,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회당 중심, 말씀 중심으로 변화되었죠.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구나라는 것을 알아요. (지)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감동시켜요. (정)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거기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의지)까지 연결되지 못하고 있어요.

교회 밖을 나가버리면, 내 의지가 나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의 맹점인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의 말을 들었습니다. 지.

그 마음이 자기를 족하게,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정.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몸을 움직여서, 그 아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죠. 의.

130세 가까이 된 야곱은, 사실 거동이 불편한 나이였고,

또한 그 아들이 있는 애굽까지는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야곱은 행하는 믿음, 믿음의 액션을, 그 발걸음을 옮기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2. '그 아들'과 동거하려면, 버려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20절 말씀 한번 보십시오. 바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동거하려고 하다보니

내가 지금 '그 아들'과 동행과 동거를 위하여, 내버려야 될 것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그 땅의 기구들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뭐라고 말합니까? '너의 기구를 버리기를 아끼지 말아라!' :20

가나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곳에는 삶의 터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정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맺어놓은 인간관계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가구들과 기구들이 있습니다. 내 모든 안정이 거기에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왕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거 아까워하지 말아라.

여기에서 더 좋은 것들이, 여기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이 이미 다 준비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들을 향해 달려갈 때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아들의 초정에 응하겠다' 라는

그러한 대가지불의식이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바울은 많은 것들을 버렸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요셉이 주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이제 그와의 동행과 동거를 위해서

내려놓아야 될 것들을.. 다 버리더라도, 그것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야곱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가겠다.. 라는 그 의지,

그 행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3.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살펴보면

24절에 요셉이 형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요셉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지금 상황이 다 정리가 됐지 않습니까?

요셉은 용서도 했죠. 그리고 요셉이 오라고 얘기했죠.

그러니까 형들이 다툴 이유가 없잖아요. 누가 누구 때문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어요.

베냐민을 뺏긴 것도 아니에요. 지금 풍성하게 다 가지고 있는데

형들이 싸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근데 왜 요셉은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여기서 '다투지 말라'는 단어는 '라가즈'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단순히 형제들끼리 다투는 말이라기 보다,

'요동치 마소서, 흔들리지 마소서, fall not'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형들이 가나안으로 내려가다가,

지금 내 손에 양식이 풍족한데..

그리고 지금 자식들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이미 장성한 한 가정의 가장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들이겠죠.

그런데 '굳이 우리가 애굽까지 내려가서 살 필요가 있겠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또 우리 아버지한테, 22년 전에 우리가 요셉을 팔았다는 얘기도 꺼내야 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라고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초청에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드리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곳에 가겠다는 의지를 사용해서

그곳에 가기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요동케 만들고, 흔들게 만드는 것들이 계속 역사해요.

'굳이 그런 삶이 필요할까? 굳이 그렇게까지 대가 지불을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애굽에 내려간다는 것이 말이 되나?'

이런 요동케 되는 일들, 흔들리게 되는 일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 길을 내려가다가, 혹은 다시 올라오다가

너희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에 흔들리지 마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거예요.

한번 정했던 그 마음, 요셉의 초청에 응했던 그 마음을 따라서

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기근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의 기운이 소생하는.. 그 영이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생명과 생명력을 가질 뿐 아니라

이제 그 아들과 동거하는 삶으로의 초청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놀라운 축복이 있는 거예요.

그때 우리에게 뭐가 필요하다고요? 믿음과 행함이 분명히 필요하다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가 방금 찬양했던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찬송의

가사를 보시면

그 아들 안에 있는 그 큰 은혜와,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그 놀라운 축복들은

'저 큰 바다보다 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닻줄을 끌러서 깊은 데로 가야지만, 누릴 수 있는 은총들이죠.

그런데 많은 인생들이 거기 물 가에서,

그냥 기근이나 겨우 면하고 살아갈 수 있는..

옷 몇 벌, 은전 얼마.. 그것에 만족해서

그 큰 바다 물결을 보고서도 그 밑(깊이) 모르는 깊은 바다 속으로 한번 헤아려 보지도 않는,

그 은혜로 나아가 보지도 않는,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큰 바다로 나아가려다가, 또 요동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해서, 요동해서 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 가사를 보면,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우리가 저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저어서 은혜의 망망한 바다로,

그 아들에게로 가고 있다.. 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창파에 배를 띄워서, 그 아들을 향해 걸어가야 됩니다.

그 찬양처럼, 우리가 주님의 그 아름다운 초청에

나의 믿음과, 나의 감정과, 나의 의지를 들인 행함을 통하여서

그와 동거하고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쩌면 야곱의 진짜 삶은 이때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130세쯤이 된 이때부터, 그 아들과 동거하고 동행하는

이때부터가 그의 영이 소생하는..

이때부터가 진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그런 살아있는 삶을 살아있는 삶으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