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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9장, 신자는 죽어서 말한다

LNCK 2023. 10. 27. 11:25

102. 신자는 죽어서 말한다 (창49:8~12) (tistory.com)

◈창49장, 신자는 죽어서 말한다      창49:8~12, 요14:12      ☞ 창세기

 

*김성수 목사 창세기 102강 중에서

 

◑도입 / 기독교 신앙의 본질

 

제가 청년부 때 섬겼던 섬김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방문한 팽동국 교수가 대학원에 다닐 때였습니다.

섬김의 집에서 봉사를 하는 모든 교사들은 전부 우리 교회 청년부 지체들이었습니다.

 

교사들 모두가 힘들고 바쁘고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도

매일같이 난곡의 산동네로 모여 아이들 밥도 해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함께 놀아주기도 하면서 힘들지만 즐겁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뜨거운 물도 없고 변변한 난방장치나 냉방장치도 없었던 그 곳에서

우리는 돈이 모자라 양파와 당근밖에 들어있지 않은 엉성한 카레를 즐겨 해 먹으면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이 끝나면 밤마다 저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 촛불을 켜 놓고

부흥회를 하곤 했습니다. 최근에 경기도 안 좋고 해서 많이 힘들어졌지요.

 

지금은 우리 팽 교수 친구인 문식 형제가 전임으로 돌보고 있는데

저에게는 지금도 너무나 소중한 곳입니다.

 

▲그 곳에서 함께 사역하던 친구 중에 이영익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당시 고려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야말로 신실함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친구를 ‘이 바울’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청년부에서 연극을 한 편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연극에서 그 친구가 사도 바울 역할을 했었거든요.

 

그 친구는 마음이 참 따뜻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맛난 것을 더 먹여 주기 위해

새벽마다 신문이며 잡지 같은 것을 배달을 해서

그 돈으로 섬김의 집을 섬기곤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가 새벽에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나님 품으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섬김의 집 아이들이 ‘선생님 가지 마세요’를 외치면서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아주 극심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 때는 어리기도 했었지만 혈기도 왕성하여 ‘뭐, 이런 하나님이 있냐?’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앉기만 하면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익이를 사랑하신다. 영익이도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런데 사랑한다던 하나님이 그가 죽는 걸 막아주지 않으셨다. 그걸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왜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의 위험에 침묵하고 계셨을까?

그런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하나?’ 뭐 이런 생각들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의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그러한 하나님의 처사가 용납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저는 비로소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사랑하심의 진의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가시적 위험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상(의 위험)에 내어주신 후에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의 마음과 믿음을 지키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이 세상의 위험이나 상함으로부터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감내해 내는 그 신앙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우리 청년부 예배 때 설교 본문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그 본문 바로 뒤에

세례 요한이 세상의 권세를 상징하는 헤롯왕에게 잡혀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파송된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림이, 그 뒤에 붙어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 사람들의 대표적인 문학기법인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제자들의 파송(빵), 세례요한의 죽음(패티), 제자들의 귀환(빵)

 

따라서 그 전체 이야기는

이 세상에 파송된 제자들의 삶이 무엇인가를 규명하여 설명해 주는 그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을 드리자면

세상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권세에 잡혀서 죽는 자들로 파송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귀신을 쫓는 권세는 주시지만, 세상의 힘을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달랑 주시고는 양식도 못 가져가게 하시고, 돈도 못 가져가게 하시고,

옷도 한 벌만 가져가라 하십니다. 그건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만을 의지하여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마귀와 귀신의 세력이

하나님 백성들의 믿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는 권세가 주어짐과 함께, 세상의 힘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의 구체적인 삶이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잡힘과 죽음은

성도 전체의 삶을 작은 그림으로 요약하여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에게 잡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당당히 보여주고 떠나는, 바로 그 모습이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성도를 상징하는 ‘두 증인’이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부활의 몸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속사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세상에게 잡히고 결국 죽는 사건은

성도 모두에게, 제자들 모두에게, 공히 일어나게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잡힘’이라는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짚어보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막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여기에 보시면 요한이 세상에게 잡혔다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 ‘잡히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파라디도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잡혀서 곧 세상에 의해 죽습니다.

그 단어가 정확하게 로마서 4장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됩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에서 ‘내어줌’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바로 ‘파라디도미’입니다.

여기서는 그 단어가 예수님에게 쓰이고 있지요?

 

그러니까 제자들, 즉 성도들은 하나님에 의해 예수가 세상에 내어준(잡힌) 바 된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내어준(잡힌)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잡히다’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의 정확한 해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이 세상에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어주신 후에 당신의 권세와 능력으로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부으셔서

 

그 세상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는 성품과 인격과 됨됨이를

성도의 삶에서 확인 시키시고 세상에게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키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던 스데반의 예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보세요.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날아오는 ‘돌’을 막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믿음으로

‘용서와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를 잃지 않는 스데반으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으로 성도를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속에서 성도의 마음을 믿음으로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만을 보고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지켜보고만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그렇게 무력한가?’

하는 원망을 쏟아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그 마음을 지켜주고 계신데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기대와 만족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섣불리 하나님을 무능한 존재로 폄훼(貶毁)시켜 버리기 일쑤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기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원래 창조 시에 주어진,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자로 지어지고 완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신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광야 인생 동안에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돌아설 수 없다는 것과(2절)

 

아울러,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힘이나 가치 등의, 이 세상 떡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3절)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광야 인생길에서 자신의 뜻과 소원을

하나님에게 관철시켜 행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세상에게 당하는 모습은, 약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놓지 않고

소망의 나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강함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수시로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진리를 반복하여 강조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강함으로 자신을 증명해 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해주고, 용서해 주고, 안아주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하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을 증명해 내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처럼,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의 사도들처럼

우리를 세상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위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른 말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하여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 것이고,

수시로 ‘너희의 배만을 위해 살던 너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이제 새 사람으로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라’고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롬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시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가 명확하게 나오지요? 뭡니까?

9절 ‘이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입니까?

 

곧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관자가 되셔서, 죽어도 주를 위해 살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사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어줌의 삶에서 많은 생명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삶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던 그 이기적인 자아에서

자신의 욕심과 야망과 비전과 목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내시고야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게 당하여 죽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너희도 하게 될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죽음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강력을 증명해 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이나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 내 의견을 따라주지 않느냐고, 왜 내가 편한 쪽으로 일을 진행시켜 주지 않느냐고,

왜 나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느냐고’ 따지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한 번 견뎌 보겠습니다,

이겨 보겠습니다.’하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여러분을 평가하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조롱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젊은 나이에 스데반을 죽여요?’라든지

‘왜 그 신실한 친구를 교통사고에서 건져주지 않으셨어요?’가 아닌

‘하나님, 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믿음과 성품과 됨됨이를 지켜주신

그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깊이 신뢰하며 찬양합니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마저도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그리고 망하지 않고 번영하는 것이, 그리고 자식들 출세하는 것이

참된 가치요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그 분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 분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의 삶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가치이며, 그게 진짜 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에 쏟아지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을 잘 분별하고

그것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오랜만에 만난 우리 동지 팽동국 형제와 과거 우리가 청년부 때 함께 공유했던

여러 가지 은혜롭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의 그리움이 동일하게 어떤 시점에서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1993년 남서울교회 청년부 산상 수련회 때 일어난

엄청난 revival의 경험이었습니다.

그 때 수백 명의 청년들이 그 산 위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를 모두 체험하고

거기에서 변화된 사람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거기에 있던 청년들 중에 많은 목사들이 나오고, 선교사들이 나오고,

사모들이 나오고, 사역자들이 나왔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그 때와 같은 부흥의 경험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다시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한 통 걸려 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John Piper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절대적으로 지지를 한다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내용인즉, 그 분과 그분의 선교 단체가 Korean community 에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대형 영적대각성 집회를 지원해 줄 테니, 우리가 한 번 해보라는 그런 전화였습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 지금 생존해 있는 설교자들 가운데

세계 4대 설교자 중의 한 분이 John Piper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그 분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저의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많은 빚을 진 그런 분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의 정서>라는 어려운 책을 집대성하여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으로 요약을 해내실 만큼 실력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LA 구석에 있는 작은 교회의 신학과 교리에 관심을 갖고,

우리와 무슨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 작은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말씀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세계 94개국의 동지들에게 우리를 알려주셔서

그들이 매주 우리 교회 웹사이트를 방문하게 하시고

John Piper 라는 걸출한 설교자와 연결도 시켜주셨습니다.

 

▲성도의 본무는 ‘자기부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야망과 우리의 소원으로 우리의 배를 불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 살던

우리 옛사람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부인하고 세상의 힘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오롯이 소망하며 이 세상에 던져지고 내어진 삶 속에서도

그 나라와 우리 아버지에 대한 소망만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하늘의 장자이신 실로, 즉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의 예언에서

참된 장자이신 예수가 오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본론 / 왜 하늘의 장자 예수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일까요?

 

유다에게서 예수가 나와야 하는 개괄적인 이유만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서 순서상으로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예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창43:8~9)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려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유다는 애굽에서 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당당하게 애굽 총리 앞에서

자신이 종으로 남을 테니 동생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창44:32~34)

 

어떻게 유다가 이런 희생과 헌신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유다는 원래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리며 자기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며느리 다말이 약속의 후손의 탄생을 위해 자신이 창녀가 되는

희생과 헌신의 사람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 다말이 창녀가 되어, 망해버려야 하는 유다의 집안에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

그 집안이 축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유다는 십자가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수가 축복을 받는 그 하늘의 축복의 원리를 유다가 터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배운 유다가 아버지와 애굽 총리 앞에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 유다를 향한 예언에 등장하는 실로에 대해서도 다음 시간에 설명을 해야겠네요.

아무튼 이렇게 우리 성도는 예수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에게 내어줌이 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세상에게 맞아서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지키고, 성도된 성품을 다하며,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는 자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 백성들의 삶을 통해 또 다른 열매들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며 원리인 것입니다.

 

보세요. 인간의 성공과 인간의 기쁨과 행복이 주체가 되면

그 나머지는 모두 그것들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전락을 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겸손과 낮아짐과 섬김과 헌신도 결국 자신의 위신과 행복을 위한

알량한 도구가 된단 말입니다.

 

성도는 세계관과 가치관과 신앙관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대 전환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나머지를 객체로, 방법으로, 도구로 쓰며 살던 그 삶에서 돌이켜

자신이 객체가 되고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대 전환이 없이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완벽하게 보여주고 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라는 길로 열심히 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의도하신 많은 열매들이

그 죽은 나무인 십자가에서 주렁주렁 맺힌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 내리 꽂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유다의 후손으로 그 분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으세요. 놓으십시오. 비우세요.

아브라함의 가나안 땅 점령이 막벨라 굴이라는 무덤에서 시작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은 무덤이었습니다.

영적 가나안, 즉 하나님 나라는 우리 옛 자아의 죽음과 무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죽읍시다.

 

거기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성도는, 신자는 죽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죽어짐으로 많은 이웃들을 살려 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