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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살고 죽을 것인가?

LNCK 2023. 10. 27. 17:58

https://blog.naver.com/karamos/80055052653 정리

 

◈무엇을 위해 살고 죽을 것인가?      에4:10-17           2001.02.11.

 

☞호스피스, 웰 에이징 설교모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 일맥상통 합니다...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 현재가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유명한 시 한 구절을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국화 옆에서' 라고 하는 제목의 시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너무나 아름다운 시구입니다. 국화꽃은 가을에 핍니다.

그러나 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이 있었고 여름이 있었습니다.

비바람도 있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철이 지나고

그리고 가을에 비로소 한 송이의 국화를 보게 됩니다.

 

시인은 생각합니다. 이 시간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위하여 그 긴긴 여름이 있었다고.

그리고 소쩍새는 한여름 내내 울었던 것 같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 송이 국화꽃은, 가을에 국화 꽃을 피워내기 위해서

봄, 여름을 잘 살았고, 가을에 꽃 피우고.. 잘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에, 봄, 여름에.. 의미 없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게 모두 가을에 한 송이 국화꽃을 잘 피워내기 위한 수고였습니다.

가을에 잘 피워내고.. 또한 겨울에 잘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과거는 어떻습니까?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고, 실수한 일도 있고,

무엇인가 운명이 잘못된 것 같은 그런 과거가 있겠지만... 이제 묻지 마세요.

 

그 과거가 있어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를 그 과거가 만들어낸 것이요.

그 과거에 의해서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과거는 현재 속에 그 의미가 살아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각종 직업에 종사하는데

사실상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생의 비전이 없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 일은 그야말로 직업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직업이라 할지라도

크리스천으로 신앙적인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 때, 삶의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는 사람은

직업을 바꾸거나 혹 직업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미지의 목적지를 떠날 때 나침반을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인생의 여행을 떠나면서 먼저 자기의 소명, 사명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질병도 가난도 아닙니다.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허무'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미 상실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고,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지를 모르겠단 말입니다.

왜 내가 참아야 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의미상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곤 하기도 하고 절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현실을 무의미하게 하루 하루 소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의 대표이사가 얼마 전에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회의장에서

연봉 400만 불의 지위를 자진 사임해 버렸습니다. 회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연봉 400만불, 이 자리에 왜 자진 사퇴하는 것입니까?

 

그가 발표한 이유는 그저 "보다 더 활력을 찾아가기 위하여" 라고 말했습니다만

진실한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일에 대하여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월급은 넉넉하게 줍니다. 돈은 벌 수가 있었더라구요.

그런데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한다고 하는 그 회장자리를 대표이사 자리를 사표냈어요.

 

▲현대인의 불행은 ‘생의 무의미’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배가 고파서 불행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서 감사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욕심과 자기 교만으로 인해,

감사한 처지에서 전혀 감사드리지 못하고 삽니다.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데, 감사치 않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불행입니다.

 

삶의 의미와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거예요.

삶의 의미와 열매는, 하나님 앞에서 맺어지는 거예요. 상황하고는 관계없어요.

 

무슨 얘기냐면, 요셉은 평생을 감옥에서 죄수로 보냈어도 노 프라블럼 이었을 거예요.

물론 사람인지라, 나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생각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감옥에서 나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인생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하다면,

 

주변 상황과 환경과는 관계없이

사람은 의미 있고 충만한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의미와 성공을 어디서 추구하고 계십니까?

이거 다시 한 번 짚어보셔야 됩니다.

 

많은 경우 교회를 다니면서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삶의 의미와 성공을 어디서 찾고 있어요?

보상 salary 사람의 인정에서부터 찾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중요하지 않은 곳에 있으면,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낙심하고 억울해합니다.

 

아니요. 여러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는 그런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의미와 성공이 결정되는 거예요. 아멘!

 

또한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내가 감당할 때.. 생기는 거예요.

단순히 돈을 버는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이 사람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이요.. 곧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의미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적어도 이 일, 내 사명, 직업적 소명 vocation 을 위하여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일이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어요.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느냐?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오늘 사는 것인가? .. 와 같은 맥락이죠.

 

어느 순간에 죽을는지 알 것이 아니지만은

적어도 내 생을 바쳐서 죽을만한 이유가 돼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충만하고 꽉 찬 그런 의미의 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사표를 내던진 것이죠.

 

◑무엇을 위해서 죽을 것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에스더가 중요한 결단을 해야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갑니다.

 

모든 유대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포로되어 가서

포로 되어간 포로 중에 사는 사람들이지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이 에스더라는 여자는

아버지 어머니도 안 계시고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자기 딸처럼 키운 그런 처녀였습니다.

 

그가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해서 발탁되어 아하수에로왕의 왕후가 되게 됩니다.

노예 신세에서, 고아 신세에서 왕후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좌우간 잘나고 볼 것입니다.

 

이렇게 됐는데 이 좋은 처지인데요 문제가 생겼어요.

그 하만이라는 못된 사람 하나 때문에

그만 그의 간계에 넘어가서 왕이 실수를 했어요.

왕이 잘못된 결정을 해버려서, 수산 성에 있는 온 이스라엘 사람이

하루아침에 몰살당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왕후로서 왕에게 들어가서 ‘그래서는 안됩니다’ 라고 간해야 되겠는데

이게 위험한 일이거든요. 왕의 실수를 바로 잡아야 되겠는데

이거 자기밖에 할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그러나 한없이 위험한 일이에요.

 

당시에 왕의 허락 없이 안뜰에 들어서면, 누구든 그대로 죽이게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허락 없이 불쑥 찾아오지만, 왕이 그를 기쁘게 보아서 홀을 들어주면 살지만,

만일에 그렇지 못하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고백하는 대로 벌써 30일 동안이나 왕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순간에 에스더는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는 것이죠!

 

모르드개는 그에게 강하게 말합니다.

"이 때에 바로 이 시점에서 네가 잠잠하면, 이 중요한 사명을 네가 기피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어찌하든지 다른 길로라도 구원해 주시겠지만

너와 네 집은 망하리라." 아주 강하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는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내가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를 결단했다는 것이죠!

 

앞서 말했지만

‘내가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는

똑같은 질문입니다.

둘 다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데요.. 우리가 평소에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니까요!

 

▲디시젼 피라밋(Decision Pyramid) 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학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결단을 하며 삽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선택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뭐 선택의 폭이 좁지만은 그래도 선택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먼저는 Ordinary everyday decision,

일상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여러분 많지 않은 옷이지만 뒤적거리면서

'오늘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그 결정해야 했어요.

그 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은 허영기가 높은 사람이에요.

 

‘또 무슨 음식을 먹을까? 그리고 오늘 누구를 만날까?’

뭐 이런 일상적인 것. 심지어는 여러분 교회에 나오시는 것도 이거 중요한 결단입니다.

 

그 등산가자고 하는데 갈까 말까?

그 굉장한 결단으로 물리치고 여기 나온 거예요. 이게 다 일상적인 결단이구요.

 

또 하나는 Middle level decision이 있습니다. 이것은 꽤 중요한 결단입니다.

그래서 비가 막 올려는데, 세차를 할까 말까?

전공과목은 뭘 택해야 하나?

나는 어떤 일을 위하여 기여하며 한평생을 살 것인가?

특별히 결혼, 아주 중요한 결단이요 선택입니다.

 

하고많은 남자 중에 이 남자, 하고많은 여자 중에 이 여자,

이게 보통 결단입니까? 이건 내가 선택한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다가 운명을 걸었습니다. 보세요, 이건 다 중요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Real important decision이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 결단.

이것은 생과 사에 대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좀 생각을 높이, 한번 깊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게 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리고 죽는 시점이 있습니다. 죽는 장소가 있습니다.

적어도 위대한 사람은 자기 죽음을 자기가 선택하는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이건 사실이요.

 

보세요, 순교자는 누구입니까? 얼마든지 안 죽을 수 있어요. 내가 결정을 하는 겁니다,

죽기로. 그렇지 않습니까?

 

▲생과 사의 결단

여러분 잘 아는 유명한 <쿼바디스>라고 하는 영화가 있죠?

베드로가 로마성 안에 핍박이 있을 때 도망을 갔습니다.

로마 성을 빠져나갈 때 예수님이 딱 길을 가로막습니다.

깜짝 놀라서 예수님이 로마쪽을 향해 가는 걸보고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버린 로마를 향하여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내가 가노라."

베드로가 깜짝 놀라 "아니올시다 제가 가겠습니다."

자진해서 제 발로 들어가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자, 안 죽을 수 있었잖아요. 죽음의 장소와 시간을 자기가 결정한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제가 목사로서 많은 임종을 봅니다.

그것도 거 좀 뭐 그저 웬만하면, 이젠 끝났다 싶으면 잘 정리하고

좀 곱게 가 줬으면 좋겠구만 끝까지 말이에요

 

아이들에게 뭐 수술 안해준다고 그러고 의사를 욕하고...

이렇게 발악 발악하다가 그야말로 심연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죽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 참 안됐어요.

여러분, 굳게 결심하세요. 마지막 시간은 내가 (결단)해야 되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실례가 돼서 이름은 안댑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은 그랬어요. 제가 보았어요.

위암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피가 좌악 빠져나가서

그만 몸이 약해지면서 기진해가지고 실신을 했어요.

 

정신이 나갔는데 이제 수혈을 했어요. 다른 피를 넣어주니까 다시 깨어났어요.

깨어나서 딱 보니까 아, 이 붉은 피를 넣고 있거든요.

 

목사님 빙그레 웃으시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노? 나는 어차피 가야할 사람인데,

저 피가 없어서 젊은 사람도 죽어 가는데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주사기를 뽑으라!"고

자기 손으로 다 뽑았어요.

 

수혈하던 거, 산소마스크 다 뽑아놓고, 다 모이라고 딱 붙들고

한 사람, 한 사람 위해서 숨이 차지만은 기도하고 그리고 딱 눈을 감는 걸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장례식에 그 장로님이 광고를 하시면서 그랬어요.

오신 손님들에게 인사 하면서

"우리 목사님은 명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교를 하고 가셨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해서 많이 울었고요 굳게 결심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한다'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단 1분이라도 좋아, 단 한시간이라도 좋아, 내가 결정하세요.

시시하게 끝까지 살려달라고 몸부림. 그거 왜 이러는 겁니까? 이거 아니죠.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선택적으로 죽는 것이 바로 순교라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번 생각해 보세요. 행복, 불행, 이게 뭡니까?

오래 살면 뭘하고 행복하면 뭘하고 가지면 뭘합니까?

어느 순간에 소중한 일을 위하여 행복도 차버리는 거예요. 명예도 차 버리는 거예요.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 결단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에스더는요, 자 이게 생각해 보세요.

노예로 끌려왔다가 왕후가 됐어요. 이게 웬 복입니까?

아 이거를 그래 차버려요? 이거를 내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그가 왕에게 들어갈 때, 오늘 보니까 자기도 사흘동안 기도하고

‘수산 도성에 있는 모든 유대사람은 다 금식기도하라, 나를 위하여. 내가 들어가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시간 다 포기했습니다. 명예고 지위고 행복이고 뭐고…….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때를 위하여 나는 존재한다. 이 시간을 위하여 나는 세상에 있다.

이 시간을 위해서 나는 가노라, 그러한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여러분 모세를 아시지요? 모세가 80세에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광야에서 호렙산 기슭을 지나가다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는 명령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합니다.

이 순간이 있으므로 해서 그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생각하면 그가 여기에 80세가 되도록 유리방황한 이 생은, 그가 한때에 살인을 했거든요.

애굽사람을 쳐 죽인 죄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산 게 아닙니까.

 

그가 왜 바로의 궁전에 40년 있었는지 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쳤는지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자신으로 볼 때는 자기 무능이요 자기 실수입니다.

자기 죄 때문입니다만은 이제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과거, 이 모든 잘못된 해석을 다 지워버리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기 위하여 오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있기 위하여 지난 80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내가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그는 응답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보세요. 3년밖에 일하신 바가 없습니다.

뭐 봉사 봉사 하지만 예수님이 봉사했다는 건 물량적으로 볼 때

도대체 몇 사람이나 고쳤습니까? 몇 사람이나 먹였습니까?

 

제자들이라는 건 지금 한심합니다요. 이걸 놓고 어떻게 눈을 감습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결단을 합니다.

비상한 결심, 비상한 결단, 그를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 때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버려진 과거도 없고, 의미 없는 현실도 없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십니까?

 

나의 과거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실수와 죄로 얼룩져 있습니다만은 잊어버리세요.

그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저 밝은 미래를 위해서, 오늘 이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내 모든 의견과 인간적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크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저 하십니다.

 

에스더는 이렇게 헌신함으로 인해서 민족을 건지고 크고 놀라운 영광을 얻었습니다.

에스더 뿐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같은 중요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이때를 위하여 이 시간을 위하여 나는 존재한다.

 

기도/ 의로우신 아버지여, 미련하고 우매해서 그 많은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삶의 참 의미를 모르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오늘 처한 이 귀한 시간을 우리는 의미없이 쓸모없이 버려진 생처럼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고 주께서 오늘 구체적으로 나를 부르심을 알게 하시고

오늘 이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또 이루고저 하시는 큰 뜻이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한 위대한 결단과 함께 헌신함으로써 주의 손에 붙들리어

참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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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죽음의 연습 (펀 글)

 

저희 수도회 오랜 전통 가운데 ‘착한 죽음의 연습’이란 것이 있습니다.

 

월말이 다가오면, 자신의 생활공간과 주변을 깨끗이 한번 정리정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불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공동체 앞에 내어놓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잘 정돈된 모습으로 떠날 수 있도록

외적, 내적인 준비를 한 달에 한번 실시하는 것이지요.

 

최근 새 학기를 맞이한 저희 공동체에서도

‘착한 죽음의 연습’을 실시했습니다.

 

각자 사용하던 방도 서로 바꾸었습니다.

원장인 저도,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침실을 바꾸었습니다.

 

한 방에 오래 지내다보면, 그 방이 마치 자기 소유인양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방도 서로 자주 바꿉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침실을 바꾸기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는 형제들,

그 짐을 옮기느라 낑낑대는 형제들을 저는 그냥 두지 못합니다.

저는 인정사정없이 혼냅니다.

 

“수도자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으냐?

달랑 가방 두 개만 양손에 들고 갈 수 있어야지”

 

그러면서 저는 보란 듯이 폼을 잡지요.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만

이불에 뚤뚤 말아서 어깨에 메고, 단 한 번에 침실을 비워버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 실감하며 삽니다.

 

하나님 나라가 약속된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는지 생각해봅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 사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 집착 때문에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께서 자리할 여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매일 그 소유로 인해 부대낍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영혼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렵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상 천국 체험은 요원합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라고 하는 유명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는 '주의'라고 하는 말을 싫어하지만은 또 '주의' 일수가 없지만,

왜냐하면 신앙은 이념이 아니니까 말이죠.

 

그렇지만, 부득이 만일에 기독교에게 어떤 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현실주의일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세를 지향하지만,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뜻인 듯)

 

여러분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피안의 세계만을 바라보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 의미와 그 목적을 알고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 자세로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대하며 변화시키고 개척해 나가는

파이오니아적(개척자적) 종교란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오늘 현실에서 그 삶의 의미를 찾으세요. 현실을 무의미하게 허송세월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