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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바다는 주님 아는 지식의 깊이

LNCK 2023. 10. 30. 10:37

https://www.youtube.com/watch?v=N8_-zkIUBU4

◈은혜의 바다는 주님 아는 지식의 깊이      벧후3:14~18          2023.10.25.

 

길어서 제목을 줄였는데, 원래는

"은혜의 바다는, 주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달려있다" 이런 제목이 되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우리가 한번 주의를 집중해 봅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3:18

 

'은혜와 지식에서 자란다'는 뜻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더 많이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하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더 깊어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잘 소화하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라는 것이고, 영적인 성장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기,

은혜의 바다속에서 헤엄치며 살기,

이것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얼마나 더 깊이, 얼마나 더 많이 가지느냐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를 제대로 받아서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쉽게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은혜를,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 인데도

내가 받아서 누르기가 쉽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일에 인색 하시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입맛 때문이에요.

 

우리 입맛이, 저주와 죄에 길들여져 있는 입맛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저주와 죄에 길들여진 이 입맛에는

은혜가 달지 않고, 도리어 쓰게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일어나는 일이,

죄와 저주에 길들여져서 이제까지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너무 그 맛이 쓴 거예요.

 

그래서 그 은혜가, 초기 단계에서는 너무 쓰기 때문에

거의 낭비되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은혜,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구하잖아요.

그런데 그 은혜가 오해 속에서 생겨나는 은혜인 것이에요.

 

'은혜'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어떻게 생각하냐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인격 상태에서,

자기가 좋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입맛이 길들여져 있단 말이에요.

(애들이 아이스크림과 초컬릿을 좋아하듯이요)

 

근데 은혜는, 이렇게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예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에 좋은 것은.. 그건 영적으로 독이지, 은혜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 모르는 모든 사람 80억이 모두 좋아하는 게

건강, 장수, 돈, 권력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형통입니다.

그럼 이것은, 저주와 죄에 찌들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맛있게 느껴지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저주와 죄악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의 입맛에서 맛있게 느껴지는 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은혜라는 걸,

그렇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맛있게 느껴지는 것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실 때

그걸 '은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건 정말 아니죠.

 

그래서 참 은혜가 공짜 선물인데도, 우리가 받기가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받는 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받는 내게!

 

▲저희가 운영하는 인터넷 복음방송을 듣는 가족 중에 한 분이

제가 건강 상태도 시원치 않고, 또 제가 알러지로 고생하고,

원래 체질 자체가 저는 건강한 체질은 아닌 것 같아요.

 

구독자님께서 그런 걸 염려하셨던지, 포도주를 몇 병 선물로 보내주신 거예요.

그래서 '잠들기 전에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시면, 건강에 좋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근데 영화 같은데 보면, 연인들이 고급 식당에 가서 포도주를 들이키잖아요.

얼마나 맛있게 마셔요.

 

근데 저는 포도주가 무슨 맛인지를 도대체 모르겠는 거예요.

포도주 말고도, 이런 류의 음식이 꽤 있어요.

 

평양냉면, 그거 처음 먹어본 사람들은

'아니, 이거 무슨 맹물에다 국수 말아놓은 거 아니냐?'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깊은 맛을 전혀 못 느낀단 말이에요.

 

그리고 홍어회, 그 암모니아 냄새 나는 홍어회 같은 것도

처음 먹는 사람들은 전혀 맛을 못 느낄 뿐더러, 오히려 고통스럽게 여기죠.

 

은혜가 그것과 똑같아요. 은혜의 맛을 느끼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그 죄와 저주에 길들여져 있는 입맛을 내가 의식하여

'이것을 죽여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제가 포도주 맛에 길들여지지 않고, 홍어 먹기가 그렇게 힘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닝닝한 그 평양냉면의 맛에 눈 뜨기가 어려운 것처럼,

 

'참 은혜의 맛'에 눈 뜨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끝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 교회를 다녀도, 진짜 참 은혜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 있다는 거에요.

 

은혜? 뭐가 은혜입니까?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에서 자라가라' 벧후3:18

 

근데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육체로 살고 있으니까

육체로 사는 우리의 피부에 닿게 느껴지는 순서대로 얘기를 해보자면,

 

예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공짜 선물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게

-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근데 우리는 저주와 죄에 길들여진 입맛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을 이기기를 바라지 않고,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거예요.

우리 입맛은 그쪽으로 길들여져 있어요.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기 경쟁, 돈 많이 벌기 경쟁,

남들보다 높아지기 경쟁... 이런 경쟁이

우리 삶의 영역 모든 곳에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맛있어 하지,

그런 경쟁이 수십 개가 진행되고 있는 이 세상 자체를

이기는 일을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세상 경쟁'에서 이기는 것과, '세상'을 이기는 것의 차이는 뭡니까?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 세상 경쟁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가치들이 있잖아요.

그런 가치들이.. 나의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태가 되는 게..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이기는 은혜는,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우리 저주받은 입맛에는

도무지 맞지 않는 거예요.

 

제가 포도주 맛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평양 냉면의 맛을 모르는 사람처럼,

홍어 암모니아 냄새 나는 것에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을 이기는 은혜'에 대해서.. 성도인데도 맛을 거의 못 느끼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예수님 이름 부르고, 하나님 이름 부르고,

목사고, 장로고, 권사가 되었지만

 

전부 세상 안에 있는 경쟁에서 이기기를 원하다가 죽고 말지,

세상 자체를 이기는 이 공짜 선물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맛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

결코 눈뜨지 못한 채 그냥 인생이 끝나버리고 만다는 거예요.

 

▲사도 베드로의 걱정이 여기 있는 겁니다.

왜 거짓 믿음으로 흘러가게 됩니까?

왜 거짓 선생들이 각광을 받게 됩니까?

 

전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죄와 저주에 길들여진 입맛대로

당신들이 원하는 이 세상 것들을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우리에게 준다고 설교해 주기 때문에.. 신자들의 각광을 받는 거예요.

 

마치 포도주가 너무너무 입맛에 안 맞아서 목말라 죽겠는데

어떤 사람이 제게 콜라를 제공할 때,

그 콜라가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습니까! 그런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포도주 맛을 못 느끼고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신자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맛을 모른 채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거죠.

 

또 주님이 주시는 은혜 중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세상이 만족을 위한 채움과 기쁨에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은혜인데,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채움과 기쁨을 주시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채움과 기쁨을

저주와 죄에 길들여진 입맛의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아버지로 채움과 기쁨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 채움과 기쁨을 원하는 대신에

그 은혜를 내팽개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께 죄와 저주에 길들여져서 맛있게 느껴지는

이 세상 것을 구한단 말이에요. (애들이 아이스크림 달라고 하듯이요)

 

☞마7: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참 뜻 rfcdrfcd.tistory.com/15976961

 

그러니 어떻게 참 은혜를 받습니까?

은혜를 달라고,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설교하고 난리를 치지만

 

진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세상을 이기는 은혜,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한 만족과 채움으로 받아들이는 은혜,

이런 은혜는 다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내팽겨쳐 버리고, 등지고 멸시하고 경멸합니다.

전혀 내 입맛에 안 맞는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저주받았고, 죄 속에서 살다가 길들여진 (은혜의) 입맛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이걸 전제로 하지 않고, 그저 은혜만 구하는 거예요.

 

이게 시정되지 않으면, 복음으로 인한 모든 은혜와 구원과 은사는 다 무효화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니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입맛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요?

 

구원이 좋은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입맛이 없는데...

이론과 교리 속에서만 구원을 받는 거죠.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주님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짜 선물 중에.. 성령님이 계세요.

 

성령님이 오시면 내 몸을 장갑 삼아서

내 인생을 성령님이 다 살아버리시죠.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님을 구하는 것도

죄와 저주의 찌들은 입맛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뭔가 내가 일을 좀 거하게 하고 싶을 때,

내 능력으로는 부족하니까, 성령님이 오시라고 부탁해요.

 

그리고 거기에다가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사명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갖다 붙여요.

 

여러분, 선교 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묻는 거예요.

여러분 선교하세요? 그러면 선교가 진짜 주님의 일입니까? or 당신의 일입니까?

 

당신의 그 선교가 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진짜 하나님이 원해서 하는 선교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만 하고 있는 겁니까?

목회하시는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진짜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에요, 당신의 일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왜 씁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이 세상 속의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든지 잘 해보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형통하고 싶어하는

그런 세상적 야망을 죽여버리십니다.

 

근데 죄와 저주에 찌든 우리의 인격적 체질은

자꾸 내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내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경향을 띄게 돼 있어요.

즉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성공하고, 형통하고 싶어하는 거죠.

 

그래서 자꾸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뜻하고, 내가 의지하고,

내가 계획합니다.

 

근데 성령이 오시면 완전히 내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성령님께 뺏겨버립니다.

말이 좋아서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사시는 것'이지,

 

그 의미를 그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성령님이 오시면, 내 인생을 성령님이 완전히 뺏어가는 거예요.

근데 이게 은혜란 말이에요.

 

근데 이 성령님의 은혜가, 죄와 저주에 찌든 내 입맛에는 너무너무 써요.

좀 내가 스스로 주체(주인)가 된 상태에서

내가 뜻하고 계획하는 것을 이룰 수 있기 위하여, 도와주기만 하시면 좋은데

 

아예 성령이 오시면, 내 인생에 대한 나의 주체성(주인됨)을 아예 박탈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불편해지죠.

 

은혜도 결국 영적인 수준이 있어야 받아요.

이게 공짜거든요. 무슨 대가를 지불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느냐?

 

우리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죠.

이거를 과거에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 때 제 모습을 보면, 그랬던 거죠.

 

늘 은혜를 구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구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참 은혜를 주셨다고 해도,

내가 그게 소중한 것인지를 전혀 모르니까,

다 낭비해 버리고 말았던 거죠.

애들에게 비싼 평양냉면 사 주면.. 다 물리치는 것과 똑같았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저주와 죄에 찌들은 이 입맛만 없다면,

우리는 은혜의 바다에서 사는 거예요.

 

은혜의 얕은 개울이나, 은혜의 얕은 웅덩이가 아니라

은혜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며 사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이놈의 '죄와 저주에 찌들은 내 입맛' 때문에

그 참 은혜의 맛을 전혀 못 느끼니까

자꾸 익숙한 대로 이 세상 것을 향한 저주스러운 입맛을, 따라가게 돼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런 습관과 익숙함을 못 버리니까

교인들도 그런 거짓 선생들에게 열광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십자가 복음'이 엄청 쓴 거잖아요.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던 삶의 체질과 기질을 생각하면,

하나라도 이제까지의 살아왔던 기질과 체질에 발맞춰주는 게 있습니까?

오히려 그걸 맨날 죽이라고만 얘기해요.

 

왜냐하면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그냥 다 공짜로 주시는 은혜가

하나도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요.

 

그냥 무한정으로 주고 계시는 그 은혜를

내가 (그 가치를 인식하고 공짜로)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생은 그걸로 (완성, 성숙) 되는 거예요.

뭘 더 하겠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말고 뭘 더 받아들일 게 있나요?

 

▲그래서 은혜에서 우리가 자라고 싶다면, 은혜의 바다에서 살고 싶다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깊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지식은 '그노시스' 입니다. 히브리어의 '야다'에 해당되죠.

근데 사전을 찾아보면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의 뜻에는

'지식'이라는 뜻이 있고,

알되 '경험으로 안다'는 뜻이죠.

 

창4:1절에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거기서 '동침'이 히브리어로 '야다'죠. *알다

그러니 '안다, 지식'이라는 뜻은, 경험으로 안다, 동침해서 깊이 인격적으로 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본문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3:18

라는 말씀도, 우리가 다 예수님을 알지만,

그 깊이의 차이, 깊이의 레벨, 아는 수준의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은 거에요.

 

그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만큼,

즉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아느냐에 따라서

내가 받는 은혜가 얕은 계울이냐, 아니면 깊은 은혜의 바다냐.. 이게 결정되죠.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받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자니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저주와 죄악에 찌든 입맛 때문에

자꾸 내 본성으로부터 참 은혜를 뿌리치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데, 공짜 선물인데.. 내 입맛이 그걸 못 받아들여요.

그렇게 비싼 포도주를 제 몸의 건강을 위해서 선물하신 분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제 입맛이 도무지 포도주 맛을 느낄 수가 없어요. 쓰기만 한 거죠.

 

포도주는 그렇다고 쳐도, 은혜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구원도 은혜고, 천국도 은혜고, 하나님도 은혜고, 예수님도 성령님도 다 은혜인데

은혜의 맛을 모르면 어떻게 돼버립니까? 아무것도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을 살면서, 참 은혜는 다 내팽겨쳐 두고

저주와 죄에 찌든 입맛을 따라서

이 세상 것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것도, 죽는 게 너무너무 두려우니까

미리 보험 드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천국을 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레벨이 그만큼 낮다는 거죠.

예수님을 알기는 아는데... 거의 유치원생이나 초등생 수준이죠. 영적으로.

 

▲예를 들면, 아마 전 세계인은 바이든 할아버지가 미국의 대통령인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 세계 사람이 바이든 할아버지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가 남편 바이든을 아는 것과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요?

이건 뭐 하늘과 땅 차이가 됩니다.

 

바이든 대통령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죠.

다 알지만, 그 아는 수준의 차이에는, 엄청난 스펙트럼이 있는 거예요.

 

그 영부인 말고는, 비서실장이나 측근이 또 대통령을 잘 알겠지요.

그 다음으로는, 그 행정부의 공무원들, 날마다 출입하는 기자들이

비서실장만큼은 못해도, 우리보다는 미스터 프레지던트를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마치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처럼,

예수님의 아내가 된 것처럼 그렇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건 예수님과 연합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서 같이 죽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갈2:20

 

그런데 세례받을 때 잠시 연합하고 말아 버려요.

그럼 그 아는 지식이 어느 정도일까요?

 

진정한 연합은, 부부가 한 이불 덮고 자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우편까지 가신 예수님 안에서

내 마음이 아예 머물러 버려요.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에요.

 

내가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해서

하루 24시간 중에 내 의식이 깨어 있는 동안

실제로 어느 정도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머무느냐에 따라

내가 예수님을 아는 깊이가.. 결정되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예수님이 계신 보좌 우편까지 가서 함께 머물려면

반드시 내가 십자가를 의식하는 중에 내가 죽고,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의식을 뺏기지 말아야 되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의식이 유지되어야 됩니다.

 

이 예수님의 지식이 점점 더 자라면 자랄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상하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입맛이 바뀌어 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을) 통하여, 내가 예수님과 연합하고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저주와 죄에 찌든 내 입맛이 함께 죽어버려요.

 

그리고 내가 보좌우편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짐으로써

하나님의 맛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맛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일이

이 세상에서 내가 주체가 되지 않고, 성령님이 주체가 돼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 라는 것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아는, 주님과 연합하는 시간이 길어짐으로써

주님을 아는 그 지식의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더 하나님과 성령님에 의해서 공짜로 주어지는 은혜의 바다의 깊이가

 

과거의 찰싹거리는 해변가의 깊이에서

100미터 나갔을 때, 200미터 나갔을 때,

1킬로 나갔을 때, 대륙붕을 넘어서 심연에 이르기까지

그 깊이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필요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면

점과 흠이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평강 가운데서 점과 흠이 없이 나타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새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 때

하나님 아버지와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라.. 는 거죠.

 

결혼을 하고도 3년 만에 이혼하는 부부의 비율이 1/3 이라고 그러죠.

그리고 나이에 관계없이 전체적으로 이혼하는 비율이면 1/2이라고 하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하나님과 이혼을 할 수 있는 소지가 없는 사람으로 준비가 돼야 됩니다.

 

그 하나님과 이혼하지 않을 수 있을 사람으로 준비되어서

영원히 새하늘과 새 땅에서 쭉 영원토록 같이 가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뭘 해야 되느냐?

 

예수님을 통해 약속된 은혜를 얼마나 맛있게 잘 받아 누리며

은혜의 바다에서 삶을 사느냐.. 가 결정을 해준다는 거예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은혜의 깊은 바다를 살아 본 경험이 있다면,

은혜 웅덩이나 은혜의 개울이 아니라

은혜의 깊은 바다 속에 완전히 빠져서 살아 본 경험이 있다면

 

이 사람은 새하늘과 새땅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때, 하나님과 결별하거나, 갈등을 느끼거나

헤어질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준비된 사람이 되는 거죠.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 늦어지는 이유도

성도가 바로 그렇게 준비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금 재림이 늦어지고 있는 거예요. 나 개인을 봐도 그렇죠.

 

여러분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시면

지금부터 은혜의 바다에서 살아야 됩니다. 은혜의 바다인데 왜 거부를 해요?

 

'지금 내가 세상에서 됐으면 좋겠다.. 가졌으면 좋겠다.,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내가 죄와 저주의 찌든 입맛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가 뭡니까?

이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는 입맛을 맛있게 여겨지는 이 상황을

신자들이 그대로 따라가 버리는 거에요. 그 잘못된 입맛을 더 강화시켜 주는 거죠.

 

그래서 참 은혜가 쓰게 느껴지는

저주와 죄의 찌든 나를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을 깊이 아는 삶을 이어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필코 은혜의 바다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재림은 늦어질지라도

내가 은혜의 바다 속에서 살게 되는 단계는

여러분들에게 하루 빨리 오게 되기를 바라며

 

늘 제 기도 속에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

 

▲아퀴나스는「신학대전」을 써서, 중세 기독교 신학을 총 정리한 인물이다.

아퀴나스의 친구 레귀날드는 말년의 아퀴나스에게 일어났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전해 준다.

 

어느 날 아퀴나스가 성전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제단에 걸려 있는 십자가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에 대해 참 좋은 책을 썼구나,

너는 나에게서 어떤 보답을 원하느냐?"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단 한 줄이었다.

"주여, 오직 당신만을!(Only yourself, Lord!)"

 

 

벙어리 황소 토마스 아퀴나스 Dumb Ox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에 태어나 1274년에 돌아가심으로 49세까지 사셨으니,

현재의 저는 그 분보다 무려 17년을 더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성인은 49세까지 인생 숙제를 마쳤으나,

저는 아직 마치지 못해 17년 이상 계속 연장되는 나날 같습니다.

이런 묵상이 더욱 자신을 분발, 겸손하게 만듭니다.

 

성인의 말년에 대한 삶의 묘사가 독특하고 아름다워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나눕니다.

 

"아퀴나스는 매일 가르쳤고, 글을 썼고, 토론을 했으며, 강의를 했다.

참으로 그는 부지런했으며 위대한 작품인 신학대전을 작업했다.

그는 대주교로 또 아빠스로 초대되었을 때도 모두 거절했다.

 

그는 당대인들에게 사고의 깊이는 물론 '순수한 사람, 소박하고 단순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관상가, 온건한 사람, 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그는 한 때 어눌하여 '벙어리 황소(The Dumb Ox)라는 별명도 지녔다."

 

얼마나 매력적인 인품에 대가의 풍모인지요.

얼마전 현대의 영성가라 일컬어지는 안셀름 그륀에 대한

인터뷰 때의 묘사 와도 흡사합니다.

 

'안셀름 그륀은 예상만큼 입담이 좋거나 말주변이 좋지 않았다.

말보다는 글이, 글보다는 삶이 돋보이는 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대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적용되는 묘사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스승 성 알벨토는 이를 강력히 반박합니다.

 

"너희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 dumb ox'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 앞에서 선언하마.

그는 머지않아 교의로 크게 명성을 떨칠 것이고, 그의 소리는 온 세상에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성 대 알벨토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이어 계속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퀴나스의 외관을 보면 어둔 안색, 큰 머리에 약간 대머리였고 몸은 몹시 비만했다.

그는 품위있고 온화하고 사랑스러웠으며 식성 또한 단순했다.

생애 말년 그는 자신의 작품에 깊이 불만을 지녔다.

1273.12.6.일 그의 마지막 말이 전해진다.

"이런 비밀이 나에게 계시되었다.

내가 썼던 모든 것이 지금 보니 많은 지푸라기들(much straw)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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