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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2장, 에스더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LNCK 2023. 10. 31. 19:33

◈에2장, 에스더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 에스더

 

※본문 에2장에 ‘십자가’ 또는 ‘그리스도의 예표’가 직접 언급되진 않지만

전체 <에스더서>의 서론으로 살펴봅니다.

 

▲서론 ‘에스더’ 이름의 뜻

에스더는 바벨론의 여신인 이시타르에서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이시타르가 사랑과 전쟁의 여신으로

책에서의 에스더의 역할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사랑을 받아 왕비로 발탁되었고,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에서는

수산 도성의 전쟁을 하루 더 연장하여

300명을 추가로 도륙할 정도로 '전쟁의 여인'으로 변모합니다.

 

그러기에 에스더가 실제 이름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별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에스더의 히브리어 이름은 하닷사이며 도금양 나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에스더서>에 예표된 그리스도

 

<에스더서>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아하수에로가 아니에요. 하만도 아닙니다.

물론 와스디도, 일곱 내시도 아니에요.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에스더입니다.

포로에, 고아에, 힘도 없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그녀를 주목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그녀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만(마귀의 예표)이 유다 민족을 멸하려고 하죠.

 

에3: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그러나 모르드게를 통해서 이 사실을 듣고

에스더는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로 작정합니다.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위 구절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고

자기 백성을 살리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를 보게 됩니다.

유대 민족을 향한 사단의 증오 속에서,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구원하십니다.

 

이 구원 사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에스더는

온 인류를 온갖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로 예표됩니다.

 

한나라의 왕후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 영화에 연연치 아니하고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죽을 각오를 한 채 *‘죽으면 죽으리이다’ 4:16

왕 앞에 담대히 선 에스더의 모습을 통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수 있죠.

 

▲7: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위 구절은, 에스더가 자기 목숨을 걸고

자기 백성을 구하려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간청하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자기 백성의 목숨을 살려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가 예표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결사적인 십자가 앞에

결국 사탄은 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를 죽이기로 준비한 자리에, 오히려 사탄이 죽게 되죠.

7: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이것은 십자가의 승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 모든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됨을 예표합니다.

 

▲8:5 '이르되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좋게 여기시며 나를 좋게 보실진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

 

결국 철회가 됩니다.

이 구절 역시 ‘나 Esther 를 좋게 보실 진대’

에스더의 살신성인적 십자가를 통해서

유다인 전체에게 내려진 사망과 저주가 철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분의 살신성인적 십자가를 통해서

이 세상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려진 사망과 저주가 철회될 것을 예표합니다.

 

▲8:9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백이십칠 지방 유다인과 대신과

지방관과 관원에게 전할새,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와 유다인의 문자와 언어로 쓰되'

 

8:14 '왕의 어명이 매우 급하매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고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라'

 

위 구절들은, 구원과 복음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될 것을,

구약 에스더서에서 미리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 역시 부분적으로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죠.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은 부분(3:2)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마귀에게 절하지 않으시고, 승리하신 모습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용 / 오늘날 우리도 에스더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에스더만 자기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도, 자기가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십자가’를 내가 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눅14:27

 

▲오늘날 변질된 복음, 물에 탄 diluted 복음은

성도들이 지고가야 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함구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믿음으로써

자기가 어부지리로 편승해서, 소위 ‘단물만 쪽 빨아먹고’

내 죄의 용서와 구원만 받으면 된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기겠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실 것입니다. 마7:23, 25:12

 

하나님은, 하만을 통해, 이스라엘이 몰살될 위기에 처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안은, 에스더를 준비시키신 것이었죠.

그 때문에 와스디로 폐위된 것입니다.

모르드개도 그 사실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4:14

 

그런데 하나님도 에스더를 준비시키셨고,

에스더도 무사히 왕궁에 들어가, 왕비도 되었고... 다 준비되었는데...

만약 에스더가 십자가를지지 않았다면,

만약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화룡점정’이란 말이 있습니다.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일을 마침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끝부분을 뜻하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마치 화룡점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어떤 일이 완성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21세기의 ‘에스더 후보자’들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이런 헌신도 하고, 저런 봉사도 하고

가정도 잘 꾸리고, 직장에도 모범적이고

성경도 많이 알고, 꾸준히 성실하고...

 

그런데 마지막 2%가 부족한 것입니다.

화룡점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아서!’

 

만약 그게 안 되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앞서 잘한 98가지가 다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미완성 인생’으로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저지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등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치셨죠.

 

오늘날 ‘에스더 후보자’들은 많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꼭 한 두 사람만 예비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에스더’로 뽑히는 사람은 *미인대회를 가정하면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 - 그것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 자기 전에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곰곰이 묵상해 봐야 됩니다.

‘나는 오늘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주시는 감격, 위로, 평안,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기도하면서 곰곰이 묵상해 봐야 됩니다.

‘오늘 내가 지고 갈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과제가 어렵고, 힘들고, 몹시 수고스럽겠지만,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

신기하게도 그 날 저녁에 ‘십자가 짐을 마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또 감격하게 되는 거죠.

 

▲헨리 마틴 선교사의 자기 십자가 (펀 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로 헨리 마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인도에서의 오랜 기간에 걸친 고난 많은 섬김의 삶을 산 뒤,

그는 페르시아(오늘의 이란)로 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신약 성경과 시편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도에 머물러 있으면 더위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페르시아는 인도보다 더 덥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페르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페르시아어를 배운 다음

9개월 만에 신약 성경 전체와 시편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 그는 페르시아 국왕의 재가를 받기 전에는

성경을 인쇄하거나 배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812년, 그는 인도에서 테헤란까지 960 Km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왕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국 대사를 찾기 위해 다시 640 Km 를 여행했습니다.

대사는 그에게 소개장을 주며 다시 그를 640 Km 떨어진 테헤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마틴은 이 긴 여정 내내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밤에는 길을 떠나고 낮에는 겨우 삼베 한 조각으로

찌는 듯한 사막의 태양 빛을 피하며 휴식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테헤란으로 다시 돌아와 왕을 알현했고

페르시아에서 성경을 인쇄하고 배포할 수 있도록 왕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그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과수원에 앉아 감미로운 위로와 평안을 누리며 나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고독 속에서 나의 벗, 나의 친구, 나의 위로자이신 그분을 생각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Hard to Believe』

『값비싼 기독교』에서 가져 왔습니다. 이 책의 일독을 강하게 권합니다.

 

헨리 마틴은 분명히 편안한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헨리 마틴의 영혼은 진정한 제자도의 핵심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목표 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람 가운데

편안한 삶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실 때는

분명히 우리를 편안한 삶으로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꼭 고난 주간만이 아니라,

평생에 이 십자가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살게되기를 기도합니다.

 

▲편한 길과 어려운 길이 앞에 있으면, 그 중에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종말이 될수록, 교회가 환난과 핍박을 당할 것을 예고하시며

거기서 교회와 성도는, 승리할 것을 또한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힘겹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후일에는 좋은 길,

당장은 힘들지만 후일에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작은 목숨을 버려 후일에 큰 목숨을 얻으라고

그 길을 기필코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 큰 자식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면 좋겠느냐?’고 수시로 묻습니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매번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마다

 

나는 편안하고 쉬운 쪽보다는 조금은 어려운 길,

조금은 힘든 길,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에 도전해 보길 권합니다.

즉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조언합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는 것,

이는 하나의 내기(betting)와도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내기 같지만..

이기면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현재 삶에서도 평안과 만족을 포함함)

 

누구든지 마지막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버릴 때,

진실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며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기쁨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신을 어필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여건에 성실하게 살아간 에스더

그런 사람이 나중에 십자가도 지게 됩니다!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이미 판세가 결정되고 있는 거예요. 2:15

특별한 일인 것이죠.

이것은 그냥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2장의 흐름을 여러분, 파악하셨지요?

처음에 집에서는 모르드개의 인정을 받고 → 궁에 가서는 궁녀들과

그들을 주관하는 헤개의 인정을 받고 →  이제 드디어 왕의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2:7 집에서 모르드개의 인정을 받음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주1) 모르드개의 나이

 

2:15 궁녀들과 헤개의 인정과 사랑을 받음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이 말은 그녀가 단순한 외모의 아름다움만 갖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

깊은 신앙심에서 오는 인격의 미, 성품의 미까지 겸비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경건에서 오는, 기도에서 오는 인격과 성품의 아름다움 입니다.

 

2:16~17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여기서 뭘 보여주느냐면, 에스더는 자신이 더 돋보이려고 어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허세를 보이지도 않았고, 어떻게 보면 경쟁심도 없었어요.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살아갔어요.

 

다니엘도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시니라' 단1:9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죠. 그게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가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천신만고 끝에 경쟁을 뚫고 올라간, 입신양명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나 그런 이야기안에는 반드시 나오는 것이 있는데

'인간 승리'라는 것입니다.

소위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자화자찬이 넘칩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이야기는 달라요.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이야기는, 성공 스토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왕후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왕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걔는 성공 이후에, 자기 성공에 도취됩니다.

그러나 왕후의 자리야말로 매우 위험한 자리입니다.

 

얼마 전 와스디의 폐위 과정을 본다면

앞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요.

 

변덕스러운 왕의 마음, 그 신하들의 들끓는 그 경쟁심과 충성임,

이 왕실 안의 구조를 본다면, 왕후는 결코 안전한 자리가 아닙니다.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것은, 바사 제국의 역사보다

유대인의 역사에 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방의 제국 안에 살아가는 유대인 공동체의 운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는.. 사람에게도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핍박도 겸하여 받지만요.

 

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잠3:3~4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이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과 여건 속에서 매일 매일을 성실히 살아간 에스더,

그렇게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다가

어느 순간에 맞딱뜨린 십자가도.. 성실히 지고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관련글 / 고통은 숨어있는 은총 (꼭 좋은 일만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착하고 무죄한 이들이 일찍 죽는 모습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20여 년 전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그 죽음을 제가 함께 지켜보았는데

 

그렇게 일찍 데려가실 것을 왜 태어나게 하시고

가족에게 고통만 남기고 떠날 걸

왜 태어나게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은 꽤 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죽음의 의미가 바뀌고 나서, 다시 말해서

죽음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무죄한 어린이의 고통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남은 가족의 고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통이 곧 불행’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던 제가

고통은 사실은 숨어있는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가족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이해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우리는 보통 생각합니다.

 

그런데 天壽, 이 천수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숨 수

오래 사는 것이 천수입니까?

그리고 한 90은 살아야 천수를 누리는 것입니까?

 

天壽란 말 그대로 하늘의 수명, 하나님이 정한 수명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천수를 누리다가 때가 차면, 하나님께 가는 것이 행복이고,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하나님께 가는 것이, 천수를 누리는 것임을 압니다.

그거시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무죄한 어린이가 주님이 하실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는 것은

그래서 불행이 아니라 복이고, 영광이라고.. 교회는 얘기하는 것입니다.

 

........................

 

주1) 모르드개의 나이, 난제 풀이

 

2:6절에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모르드개가 여고냐(여호야긴, 2차포로, BC 597) 때 바벨론에 붙잡혀 온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부림절 사건’이 BC 480년으로 볼 때,

이때 모르드개 나이가, 1살 때 붙잡혀 왔어도 벌써 117세가 된다.

 

이런 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1) 혹자는 모르드개가 아니라 모르드개의 선조가 포로로 잡혀간 것을 가리킨다라고도 이해한다.

2) 그러나 관계대명사 절이라고 할 수 있는 본절 전체의 선행사를 '모르드개'가 아닌

'기스'로 보면 한결 문제 해결이 간편해진다.★

 

즉 본절은 '그런데 그는(기스는)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함께 사로잡혔더라'로 번역될 수 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었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