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5장, 금식과 결단의 능력 ☞ 에스더서 설교모음
◑1. 금식의 능력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금식을 하는 동안 에스더가 모르드개처럼(4:1)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는 등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해줍니다.
궁중 규례를 어기고 왕앞에 나아가기 앞서
에스더는 유다인들에게 금식을 요청했습니다.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벌써 에스더는 지난 30일동안 왕에게 불림을 받지 못했습니다. 4:11
그러니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각오할만 했습니다.
'제삼일에 5:1'가 바로 에스더가 금식을 요청한 마직말 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에스더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특징상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그 정황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돈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금식을 하면, 먹는 것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을 찾는 행동이 수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러 곳에 금식과 기도하는 것이 함께 나옵니다.
이것은 금식만 하지 않고 그와 함께 기도도 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에스라서가 이를 증언합니다.
스8:21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스8: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더가 없었다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없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에스더 때 유다인이 모두 멸절되었다면,
에스라 느헤미야 자신들이나, 혹은 그 부모들이 다 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그 후손의 목숨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금식’이라는 위대한 신앙유산을 물려 주었습니다.
에스라는 아하수에로 왕이 암살당한 다음에
그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아닥사스다 왕 때 활동한 인물입니다.
에스라의 2차 귀환은, 부림절 사건 (주전473)의 약 16년 뒤인
주전 457년에 일어난 것으로 볼 때,
에스더 때 부림절 사건으로, 온 유다인 가운데 큰 영적 대각성, 신앙부흥이 일어났으며
금식의 능력도 체험했으며,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다시 새롭게 깨닫고, 주앞에서 재헌신했으며
그결과 에스라의 2차귀환, 느헤미야의 3차귀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1차는 스룹바벨 귀환
에9:31에서 증언합니다. "정한 기간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명령한 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이와같이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먹는 것만 금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금식만 한 것이 아니라, 금식을 통해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회의사당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기 전에 ‘사흘간 금식’을 요청한 안이숙 사모
신사참배는 1935년부터 평양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박관준 장로는 ‘일본이 유황불로 망할 것이다’ 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요나 선지자처럼 니느웨(일본)로 건너가, 그 사실을 선포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관준 장로는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하나님은, 일찍부터 안이숙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안이숙은 초등학교부터 일본공립학교만 다녔고, 일본에 유학까지 하고 돌아와서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이숙의 일본어 실력은 ‘일본 사람도 감탄하는’ 그런 능력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고향 평북 박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안이숙은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고을 남산에 올라가서, 매월 1일에는 동쪽을 향하여 모두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으나
군수, 지역유지, 교사, 학생들이 모두 절을 하는 자리에서
오직 안이숙만 꼿꼿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안이숙은 평안북도 정주 등 깊은 산악지역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안이숙은 “평양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박관준 장로는, 자신의 선포를 일본어로 통역해 줄 사람을 찾던 중에
안이숙 이란 믿음 좋은 신실한 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약30세
그래서 수소문해서, 평양에 안이숙 모녀가 기거하던 집으로 찾아와서
함께 일본에 가서, 일본의 침탈에 하나님의 불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자고 요청했습니다.
박관준 장로는, 안이숙이 어서 결정 짓고 나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이숙은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떠나자. 떠나기만 하면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것이고, 불을 밝혀 주실 것이다'
이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떠나가는 안이숙을 위해
안이숙의 집에서 모여서 함께 기도하던 성도들은 (대부분 신사참배 반대로 도피자들)
모두가 삼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산과 굴 속에 숨어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연락해서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에스더도 왕 앞에 나아가기 전에, 사흘 금식기도를 부탁했었죠. 4:16
두 사람은 일본으로 함께 가서 일본에서 신사참배의 불합리함을 알리고
조선교회를 구하고자 하였죠.
그리하여 그들은 평양에서 일본을 향하여 떠나면서 순교를 각오했습니다.
최봉석(권능) 목사가 안이숙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무엇이오?”
안이숙은 에스더서 4장 16절을 인용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 도착하여 박관준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신사참배의 부당성과 조선교회의 현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전 조선 총독 우가끼와 문부대신 아라기 등 정치인들을 방문하여
신사참배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 달 후인 1939년 3월 24일 순교를 각오하고
일본 제국의회(충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의장에 종교 법안이 상정되는 날
세 사람이 중의원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박관준이 번개처럼 뛰어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라고 외치며 일본을 향한 경고가 담긴 진정서가 든 큰 봉투를
아래층 회의장을 향하여 던졌습니다.
회의장에선 큰 소동이 일어났고, 그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일본에서 40여 일 정도 갇혀 있다가 감시를 받으며 조선으로 세 사람이 돌아와서 계속 복역했습니다.
박관준 장로님은, 해방되기 얼마 전에 옥사, 순교하셨고
안이숙 선생은 해방으로 석방되었습니다. 해방이 1945년이니 6년이상 옥고를 치르신 것입니다.
안이숙 선생과 박관준 장로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처럼, 둘 다 평신도였습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 보통 사람들이, 한국의 수 만 기독교인이 못하던 일을 해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위상과 용기와 담대함을, 한국과 온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마귀와 흑암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담대한 용기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뒤로 물러가야만 했습니다.
◑2. 결단의 능력
에스더는 기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철저히 행동으로 옮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신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죽음을 무릎쓰고,
자신을 부르지 않은 왕 앞에 나아갑니다.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에스더가 왕이 앉아 있는 어전 집무실 안뜰로 나아간 것입니다.
규례를 어긴 것이었죠.
금속음 소리를 내며 시위대장이 칼을 칼집에서 뽑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저벅저벅 다가갔을 것입니다.
단칼에 에스더를 베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잠시라도 왕궁 안뜰 어전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을 것입니다.
아무도 이렇게 에스더처럼, 규례를 어기고 나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 역사책에도 보면, 밤에 여인이 왕에게 나아갈 때는
상궁들이 옷 없이, 대신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아가게 했다고 합니다.
여인이 아무런 무기도 숨겨서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죠.
에스더가 이 자리에 자의적으로 들어선 것 자체가 이미 규례를 어긴 것이었므로
이제 왕의 처분에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4:11).
이때 왕은 규를 에스더를 향하여 내밉니다. 5:2
시위대장에게 칼을 거두라는 신호이며, 에스더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다가가서 왕의 규 끝을 만집니다. 5:2
그리하여 에스더의 목숨을 일단 보존되게 되었습니다.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 에스더를 통해서 우리는 큰 교훈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합니다. 기도하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없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훌륭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를 듣고서 결단하게 하는 설교다’라는 말이 있죠.
설교를 듣고 나서도, 아무런 결단도 없이 교회당을 나서게 된다면..
또한 그런 일이 여러 달 계속 된다면.. 자기 영혼을 위해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거 작심삼일로 끝나버릴 것을, 결단을 해서 뭣하나?’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삼일마다 계속 다시 결단하고, 작정하면 됩니다.
▲에반 로버츠의 결단, 길선주의 헌신
웨일즈 부흥의 소문을 들은 미국의 하워드 존스톤Howard A. Johnston박사는
웨일즈로 배타고 가서, 그 부흥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가 1904년이 끝나갈 무렵부터~1905년초 즈음입니다.
존스톤 박사는, 1906년 9월 한국에 찾아와서,
먼저는 주한 선교사 집회에서 웨일즈 부흥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이어서 그는 10월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자기가 영국 웨일즈 지방의 부흥을 목격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러면서 설교로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이 웨일즈의 부흥은, 에반 로버츠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온전한 굴복을 결단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한국 땅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하십니까?
여러분 중에, 에반 로버츠처럼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조선사람 중에서 에반 로버츠처럼
주님께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시간, 손을 들어 보십시오!’
이 때 손을 든 사람이, 길선주 장로(다음해 목사가 됨)였습니다.
이 때가 1906년 10월이었습니다.
이날 밤, 길선주 장로는, 주님 앞에 진정한 헌신을 결단합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1907년 1월초,
드디어 그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3. 왕과 단 한 번의 만남이, 여러분과 공동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왕의 은총을 구하십시다 Tommy Tenney
◑4. 아하수에로 왕의 질문에, 두 번 응답을 미루고
세 번째 비로소 응답한 에스더의 지혜
......................................
<에5장 절별 해석>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아하수에로 왕의 이 같은 반응은, 자신의 호출도 없이 이처럼 갑자기 나아온 에스더에게
어떠한 긴박한 사정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갈 이유가 없었다(4:11).
본 문구의 문자적 의미는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이다.
'나라의 절반이라도...주겠노라' 이는 고대 중근동의 군왕들이 상대의 소원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서 흔히 사용했던 상투적 어구이다(막 6:23).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에스더가 이처럼 잔치 참여만을 소원한 것은,
자신의 본격적 요청을 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마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만일 느닷없이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면서 유대인들의 구원을 간청할 경우,
왕의 반발을 사서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유대인 대학살이 실행될 날짜(3:7, 13)가 무려 11개월 씩이나 남아있음을 알고 있었던
에스더는 결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본절과 같은 에스더의 요청은,
그녀의 소심성을 말해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신중함과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러면 에스더가 '하만'도 함께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란 까닭 무엇일까?
이는 '하만'이 있는 곳에서 '하만'의 음모를 왕에게 폭로함으로써
나중에 그가 다른 소리를 못하게끔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왕후가 베푸는 잔치에 왕 이외의 오직 한 사람,
즉 '하만'만이 초대된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만'이 그 당시 아하수에로 왕에 의해서 특별히 총애받는 신하였음(3:1)을 감안한다면,
오직 그 만이 초대된 데 대하여 이상한 눈으로 볼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하만을 급히 부르라'
왕이 이처럼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의 참석을 서두른 것은,
에스더의 자신에 대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빨리 알고 싶었던 마음에서였음이 분명하다.
'왕이 하만과 함께...잔치에 나아가니라'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서 잔치 참석을 요청한 일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이미 잔치배설(排設)을 시녀들에게 준비시켰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더는 잔치 참석을 요청한 그 당일에
왕과 하만을 잔치 자리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이것은 왕이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후를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잔치 상에 앉아 술을 먹기 시작할 즈음에'의 뜻으로 이해하면 좋다.
아하수에로는 잔치에 참석하기 전부터 에스더가 자신에게 어떤 소원이 있는지를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했던(5절)터라 잔치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에 들어갔을 것이다.
'곧 허락하겠노라'
에스더의 소원을 처음으로 질문하는 3절에는 없는 문구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 같은 말을 추가함으로써,
에스더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의지가 더욱 굳어졌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유대인을 구출해 달라는 에스더의 본격적 요청이 받아들여질 만한 기회가
점차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에스더가 왕에 대한 간청을 다시 뒤로 미룬 것은 소심했기 때문이 아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 대한 금식 기도(4:16)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지혜에 따라서,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적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할 만한 방법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이같은 방법의 터득은 왕에게 최초로 나아가기(2절) 전의 일이었다.
에스더는 이처럼 사전에 준비된 계획과 방법에 따라서,
왕에 대한 자신의 요청을 다시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에스더가 이같이 함으로써 에스더에 대한 왕의 애착과 염려는 더 깊어졌고,
모르드개를 위시한 유다인의 운명과 하만을 비롯한 대적들의 운명이
더욱 극적으로 반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6장).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그 다음의 잔치에서 자신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밝히겠다는 뜻이다.
사실 에스더가 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왕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지 않은 채
계속 차일 피일 미룬다면 결국 왕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에스더는 바로 그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왕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게 될 그 다음날, 유대인을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왕에게 하려고 한 것이다.
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이와 같은 하만의 '즐거움'은 많은 신하들 중
오직 자신만이 왕후로부터 잔치에 초청을 받은 연고였다.
'모르드개가...일어나지도...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
여기의 '일어나지도'는, '모르드개'가 자신의 고유한 직무와 관련하여
대궐문에 앉아 있었음을 시사한다(2:19, 21, 3:2).
아무튼 이것은 앉아있던 사람이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취하는 최초의 동작이다.
한편, 움직이지도'는 원래 '두려워하다' 혹은 '떨다'의 의미이다(전12:3).
모르드개는 유다인 학살 계획의 원흉인 하만과 대면하고서도
조금도 두려운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심히 노하나'
3:5에서도 '하만'에 대하여 이 관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금번에 하반은 오직 자신만이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초청을 받음으로써
극도의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상황에서
모르드개의 불경한 태도를 목격했기 때문에 그 분노가 이전(3, 5)보다 더욱 컸을 것이다.
10 참고 집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그의 친구들과 그의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
'참고 집에 돌아와서'
이것은 그때 하만이 어쩔 수 없이 취했던 태도였다. 비록 모르드개가 하급 관리였지만(2:9),
왕의 승락도 없이(14절) 그를 죽이는 일은 곧 자신에게 오히려 화(禍)를 초래할 수 있었다.
즉, 만일 하만이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은 일로 모르드개에게 감정적 보복을 할 경우,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질 것이고, 왕은 이에 따라 하만의 유대인 대학살 제안(3:8, 9 )이
모르드개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간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만은 극심한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에 대한 사형(私形)을 자제해야만 했다.
'그 친구들과 그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
하만도 왕처럼(1:14) 자신의 주변에 모사들을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3:7).
'그 아내 세레스'도 하만의 모사 역할을 했던 것 같다.
14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오십 규빗' 약 23m 정도이다.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고'
왕에게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모르드개를 처형시키도록 하라는 조언이다.
그런데 이처럼 '모르드개'를 무려 23m나 되는 높은 나무에 매달아 놓으려고 한 까닭은,
모든 사람에게 '모르드개'가 거기에 매달아(2:23) 비참히 죽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로마 십자가 형틀이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못은 박지 않지만 ‘잔인한 방식으로’ 나무에 매달았다)
물론 하만은 '모르드개'가 비참히 죽어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던 자신의 잔학성을 만족시키려한 것도 분명하다.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 이것은 하만이 잔치에 참석한 후 기분 좋게 대궐 문을 나오다가(9절)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아니한 모르드개로 인하여 그 좋았던 기분이 잡쳐졌던 사실(9, 13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명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하만이 이처럼 모르드개의 일을 왕에게 알리기도 전인 그 당일에 '나무'를 세운 것은,
모르드개를 죽이겠다는 자신의 뜻이 왕에 의해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