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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 P1

LNCK 2023. 11. 6. 11:09

◈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     엡1:11, 출3:9~10    데스티니 : 하나님의 계획 YouTube

고성준 목사

◑1장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목사님은 왜 목사가 되셨어요?" 
내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심지어 어떤 분은 "목사님은 어쩌다가 목사가 되셨어요?" 라고 묻기도 한다.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만, 
미국 버클리 대학 출신의 수학 박사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익숙한 분야를 떠나서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 궁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가 보다. 

이 질문과 궁금함의 기저에는, 아마 진짜 궁금해하는 또 다른 질문이 있을 텐데 
그것은 '어떻게 그 길이, 목사님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나요?
라는 질문일 것이다. 

선택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그 두려움은 비례해서 더 커진다. 
그것이 무를 수 없는 결정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어떻게 목사가 되었느냐?'고 물었던 사람들의 진짜 궁금함은 
아마 '어떻게 이 두려움을 넘어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함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선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당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을 것이란 사실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이것이 아마 내게 던져졌던 질문들의 진짜 의미일 테고, 
그래서 이 책에서 내가 답해야 할 진짜 질문일 것이다. 

맞다. 16년 전, 나는 이 선택을 앞두고 지독하게 두려웠다. 
가장 큰 두려움은, 이 선택을 했다가, 나중에 나이가 50쯤 되어서 
'어, 이 길이 아니었네?' 이렇게 후회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킬 수도 없고, 나는 선택을 앞두고 며칠을 두려워 떨었었다. 

감사한 것은 작년에 드디어 내 나이가 50을 넘었다. 
그리고 둘러보니 나는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후회는커녕 오히려 행복하고 감사하다.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한 것은 물론 아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렇듯, 나도 교수로 살았다면 받았을 월급의 절반 정도 수준으로 산다. 

그런데 행복하다. 목사가 우리 사회에서 그리 존경받는 것도 아니다. 
목사들의 성추문이나 재정 비리가 보도될 때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래도 행복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선택한 것일까? 
왜 돈을 덜 벌어도 행복하고, 명예나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해도 행복한 것일까? 

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내 인생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인생설계도에 대한 이야기를! 

▲비규격 인생 
2000년 가을, 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에 '어느 대학으로 교수로 가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목회를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반, 걱정반이었다. 

'꼭 목사가 되어야만 믿음이 있는 건 아니잖니?' 
'목사 말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잖아?' 
'대학부터 15년이나 공부했는데,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아닐까?' 
'좋은 기독교 교수가 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야.. 생각해 봐. 
목사는 너 말고도 할 사람이 많아!' 

사실 돌아보면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주 내내 이런 이야기들을 수십 번도 넘게 듣다 보니, 나는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를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으로 보는 건가? 나도 생각이 있는데.. 
나름대로 따져보고 고민하고 계산하고 결정한 선택인데..' 

내 선택의 기준은 명확했다. 
그것은 첫째,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나의 인생을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자는 것이었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한 번은 연습삼아 살아보고, 두 번째 인생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생에는 연습 게임이 허락되지 않는다.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으며, 
그 기회를 놓치면 시간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내 선택의 첫 번째 기준은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준은 <내가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게 돌아오는 대답은, '남들은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아!' 라는 것이었으니까. 

글쎄 '아무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른 인생을 
내가 선택하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이전까지 나는 명문대, 해외 유학, 박사학위, 그리고 대학교수 이외에 
내 인생에 다른 선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내 주위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명문대, 대기업 취업, 안정된 직장, 또는 명문대, 각종 국가고시 합격, 안정된 직업! 
사람들은 이것이 인생의 진리이고 정답이라고 이야기했고,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들의 획일적인 성공관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인생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규격품 같이 느껴졌다. 

이 규격에 의하면, '목회자'라는 새로운 선택은 분명 불안한 길이자, 도전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비규격 인생을 살려고 할까?' 
'인생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까?' 

▲목사가 되기 전까지 35년 동안 내 인생은 
세상 규격에 의하면 꽤 성공적이었다. 

나는 1966년 서울대 수학과 교수이셨던 아버지와, 약사이셨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예수를 믿으셨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집에서는 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수학과에 진학했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나의 삶은 단순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울대에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성공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이 근거 없는 신화를, 나도 철석같이 믿었다. 

내 주위에서는 이 진리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생의 행복과 성공은 대학 진학에 달려있다'는 이 신화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 없이 믿었고, 나도 그것을 믿었다. 
아주 철석같이 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형성된 이 신화는,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거의 대부분 결정해 주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다. 
아니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하니까!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워졌다. 
1985년, 나는 바라던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에서의 생활은 생각과 달랐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던 1980년대 대학가는 
1년 내내 학교에서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고 
민주화를 열망하던 학우들이 주위에서 죽어갔다. 

대학에서 접하게 된 세상은, 내가 생각하던 곳과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장밋빛 행복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급도의 허무감이 몰려왔다.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용기도, 세상을 바꿀 신념도 없었던 나는 
내 안에 커져가는 허물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에이 모르겠다.. 실컷 놀아나 보자' 
그렇게 1년을 정신없이 놀면서 보냈다. 

놀다가 고통스러우면, 술로 생각을 잊고 
아침에 깨어나면 또 놀고... 

그런데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노는 것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놀이에도 만족하던 것이, 점점 큰 자극을 원하게 되었다. 
더 많은 술, 더 자극적인 놀이... 
장미빛일 거라 생각했던 나의 대학 초년이 이상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나는 이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 기대했던 그 자리에 
지금 서 있는데, 
그 약발이 고작 몇 개월이라면, 앞으로 나는 뭘 하면서 살아야 하지?'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가장 행복할 것이라 기대했던 그 행복이 고작 6개월짜리라면 
앞으로 또 원하는 것들을 성취한다 한들, 그 행복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나는 무척 허무했다. 마치 전도서의 고백을 보는 듯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2

▲소망의 빛
'밥 몇 공기 더 먹고 죽나, 지금 죽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심각한 허무 속에 허덕일 때, 나는 예수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감사한 것은 모태신앙인 덕택에 
그나마 교회에 계속 출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주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설교 말씀이 
내 마음 속에 깊숙이 남았다. 

저녁에 자려고 누웠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걸까?' 

나는 다시 일어나 앉아 무릎을 끌었다. '하나님, 정말 계십니까? 
정말 살아계신다면, 오늘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저는 제 안에 있는 어둠과 허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었다. 
눈물이 터지자,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통곡으로 변해, 나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내 안에 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끝없는 허무의 심연속에서, 뭔가 작지만 밝은 빛이 비추는 느낌이랄까? 

그것은 소망! 
그렇다. 소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소망이라는 이름의 빛이었다. 
이 소망의 빛 속에서, 누군가 나와 함께한다는 따뜻함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이 신비한 경험은, 내 속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함이 생긴 것이다. 

그때까지 나에게 '경쟁'이란 애증이 섞인 단어였다. 
경쟁을 통해 내가 원하는 행복과 성공을 하나씩 성취해 가지만, 
동시에 경쟁은 나를 피말리게 한다. 

경쟁은 한순간도 나를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쉼 없는 삶으로 나를 몰아간다. 

쉼 없는 삶의 피곤함을 알지만, 경쟁 외에 다른 길이 있나?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나는 경쟁 외에 내 인생의 행복과 성공을 가져다주는 
다른 길을 알지 못했다.                                                  

더 암울한 것은, 대학에 들어오면서, 이 유일해 보였던 경쟁과 성취의 길마저 
사실은 신기루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대학 1학년을 깊은 허무의 바다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내 안에 소망의 빛이 들어오면서,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길은, 경쟁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이 길은, 나를 창조하신 분께서, 나만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길이었다.

이 소망의 길 my destinty 에 들어설 때, 심과 자유가 임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뒤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임하는 쉼과 자유였다

창조주께서 나만을 위해 디자인하신 길이 있다
경쟁의 길에서 벗어나서, 안식하고 자유할 수 있는 길, 
삶의 의미와 행복을 무한히 누릴 수 있는 길, 
내 안에 임한 소망의 빛은, '내가 이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려주는 빛이었다. 

소망의 빛이 내게 속삭였다. 
'괜찮아, 네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해! 
규격에서 벗어나도 상관없어. 그건 어째서 어차피 사람이 정한 규격이야!'  

'비규격 인생이 되어도 상관 없어!
어차피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핸드메이드로 만드셨어. 

인생에 규격품이란 애초에 없는 거야. 
하나님이 기획하신 너의 인생을 살아!'  

나는 우리 부모님께 감사한다. 
부모님은 내가 어려서부터 항상 '너는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복음 안에 들어서면서, 이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경쟁에서 이기지 않아도 괜찮은 나만을 위한 길,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을 위한 길이 있다'는 복음과 함께 
나의 '비규격 인생'이 시작되었다.   *남들 가는 뻔한 길을 가지 않는 인생

그리고 나이 50을 넘어 돌아보니, 이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경험한 이 '비규격 인생의 축복'에 대해 나누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 목사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내가 나누고 싶은 것은 
꼭 세상에 정해놓은 '규격품' 만이 인생의 해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명문대-좋은 직장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인생의 길들이 
규격화된 인생 속에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만을 위해 예비된 길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았으면 좋겠다


◑2장 인생의 설계도 

영어 단어 데스티니 destiny 는 한국말로 번역하기 참 어려운 단어다. 
'운명, 소명, 부르심, 목적' 등으로 번역되지만, 모두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불교와 유교 문화 속에서 형성된 우리말에는 
'데스티니'에 해당하는 정확한 단어가 없는 것 같다. 

서구 기독교 문화 속에서 '데스티니'라는 단어가 획득한 의미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뜻이다. 

우리 삶에는 데스티니가 있다. 
엡1:11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향해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이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특별한, 아주 특별한 계획 destiny 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명확한 설계도 destiny 가 있고, 목적이 있다. 
우리 삶은 우연의 연속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연의 산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우리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넘치는 계획이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 각자를 향한 고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계획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기대이며 사랑이다. 

기억하시라.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자기의 데스티니가 있다. 
그리고 그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한한 지혜와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디자인하신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치 하얀 캔버스 위에 화려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생각한다. 
주목받고 환호를 받을 만한 화려한 그림을 그린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평범한 그림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정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생에는, 내 인생을 디자인하신 분이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성공은, 
사람들이 환호할 만한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창조주가 계시면, 
인생의 성공은 창조주가 계획한 대로 산 것으로 정의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인생에는 설계도가 있다. 창조주가 디자인하신 설계도가 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누가 이 설계도에 더 가까운 인생을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인생은 그림의 화려함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계도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로 평가되어진다. 

▲행복과 허무를 결정짓는 DNA 
데스티니에는 중요한 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데스티니를 이루어갈 때 
우리의 삶이 행복하며, 
반대로 거기서 멀어질 때는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데스티니 속에 행복과 허무를 결정짓는 DNA를 넣어 놓으셨다. 

내가 아는 분 중에, 음악을 정말로 좋아하는 분이 있다. 
음악이 좋아서 음대를 졸업했지만, 음악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이가 들어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다른 일을 하며 힘겹게 산다. 
그런데 이분이 얼마 전 교회에서 특송을 했다. 

그 행복해하는 모습이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돈을 잘 못 벌어도, 음악만 하고 있으면 행복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음악만 하고 있으면 행복하단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데스티니가 음악인 사람은, 음악을 하고 있으면 행복하고, 
데스티니가 미술인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행복하고, 
나처럼 데스티니가 수학인 사람은, 수학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돈을 못 벌어도 행복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도 행복하다. 
그것이 데스티니의 속성이다. 

진짜 데스티니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조차 데스티니는 
그 인생의 행복과 허무에 관여한다. 

반대로 데스티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공허하다. 
무엇을 해도 허전하고, 무엇을 성취해도 2 % 부족함을 느낀다. 

돈을 많이 벌어도 '이게 다가 아닌데..' 싶고, 
큰 성공을 거두어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하는 마음이 든다. 

내가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영적인 침체가 찾아왔다. 
뜨겁게 예수님을 만났던 처음의 열정은 식어졌고, 
그러다가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성공적이었다. 사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고, 
소망하던 버클리에서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았다. 

국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유학생활 중 감당해야 할 재정적 부담도 덜었고, 
군대 문제도 석사장교 6개월 복무로 해결되었다. 

고등학교 때 꿈꾸었던 계획들이, 일말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는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렇게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참 이상했던 것은, 이 완벽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내 안에 마르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닌데... 뭔가가 내 인생에서 빠져있는데...' 
이렇게 내 인생이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대학 입학 후 찾아왔던 깊은 허무, 그것과 같은 종류의 목마름이었다. 

▲다시 데스티니의 길로
하나님은 제가 미국에서 좋은 교회를 만나게 하심으로써 
나는 새로운 회복을 준비하고 계셨다. 

은혜로운 주일을 보낸 어느 월요일 아침, 책상 위에 놓인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저 부적처럼 가지고만 다니다가 
어느 순간 책상 위 장식품이 되어버린 성경이었다. 

'옛날에는 정말 많이 읽었는데...' 
성경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손 가는 대로 성경을 펼쳤다. 펼쳐진 곳은 이사야 55장이었다. 

사55:1~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날 성경의 이 부분이 펼쳐진 것이 과연 우연일까?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성경말씀이 그날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이 주신 데스티니에서 멀어진 인생은 
무엇을 해도 목마르다'고 말이다. 

'너는 왜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자기 데스티니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무엇을 해도 2% 부족함을 느낀다. 
무엇을 성취해도 목마르다. 
심지어 가장 완벽해 보이는 세상의 성공 속에서조차 말이다. 

왜냐면 우리 인생은 화려한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창조주의 설계도를 발견하고 이루어갈 때 행복하도록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창조주가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과 허물을 결정하는 DNA를, 우리 각자의 데스티니 속에 넣어두셨다. 

그날 성경은 분명히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나는, 다시 나의 데스티니의 길로 돌아오게 되었다. 
깊은 회개의 눈물과 함께... 


◑3장  데스티니는 생각보다 크다

데스티니의 두 번째 특징이 있다. 
성경 인물들을 관찰해 보면, 데스티니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 인물들이, 자신의 데스티니를 발견하는 순간 당황해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인생 보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나의 인생, 
즉 나의 데스티니가 훨씬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나이 팔십이 되었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창조주를 만난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창조주의 계획을 듣는다. 
그것은 오랜 이집트의 노예생활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 

출3:9~10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의 데스티니가 처음으로 드러나고 선포되는 놀라운 순간이다. 
그런데 인생의 데스티니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과의 역사적인 조우 현장에서 
모세의 반응이 흥미롭다. 
아마 '아, 나의 데스티니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나를 이 땅에 창조하셨구나! 할렐루야'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틀렸다. 

모세의 반응을 보자.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의 반응은 '내가 누구이기에' 였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내가 누구이기에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모세의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가 누구고, 바로가 누군가?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는.. 그것도 자기 양이 아니라, 장인의 양을 치는 이름 없는 목동이었고, 
바로는 기세등등한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 였다. 

오늘 날로 이야기하면, 처가에 얹혀 살며 장인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너는 시진핑에게 가서 조선족들을 전부 이끌고 한국으로 귀순하겠다고 해라' 
뭐 이런 말이다. 당신이라면 '할렐루야!' 했겠는가? 

두 사람의 갭이 커도 너무 크다. 
'그런데 이것이 나의 데스티니라고?'
당황스럽고 황당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
모세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였다. 

삿6:11~12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기드온이 살던 때,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 있었다. 
어느 날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락하고 있었다. 

원래 밀 타작은, 넓은 타닥 마당이나 들판에서, 소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왜 기드온은, 좁디 좁은 포도주 틀속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미디안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들 몰래 좁은 포도주 틀속에서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심한 기드온과,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용사 기드온'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는가? 
하나님이 소심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큰 용사여!'

기드온이 이 소리를 들을 때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하필 이때 적군이 무서워 좁은 포도주 들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 
수치스러운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신다. 
이 당황스러운 자리에서 기드온의 놀라운 데스티니가 선포 된다. 

삿6: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그런데 기드온의 반응도 모세와 다르지 않다. 

6: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데스티니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이 본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나의 모습 사이의 갭이었다. 큰 갭이었다. 

이것이 기드온을 당황스럽게 했다. '내가 그 일을 한다고? 오 마이 갓!'

▲사랑이 크면 기대도 크다. 
모세와 기드온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다윗도,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데스티니를 깨닫고 나서 처음 보인 반응은, 당황스러움과 황당함이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데스티니가, 내 생각보다 너무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당신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예언할 수 있다. 
당신도, 당신의 데스티니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면, 
모세와 기드온처럼 당황하고 황당해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당신의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커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 데스티니의 특징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데스티니는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대는, 항상 비현실적으로 크다. 
내 아이는 뭔가 특별한 것 같고, 내 아이는 정말 특별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모든 부모의 공통된 기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아주 컸다. 기형적일 만큼 컸다. 
하루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아버지 친구분들이 우리 집을 방문 하셨다가, 
나의 큰 머리에 충격을 받으셨다.

그 중에 한 분이 조심스럽게 아버지께 말씀하셨다. 
'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말에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고 한다. 
'병원은 무슨 병원? 이렇게 잘 생기고 완벽한 아이를 보고, 다들 눈에 뭐가 씌었나?'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달라 보이게 한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께서 옛 사진을 보시면서 
'네가 어렸을때 내 머리가 정말 크기는 컸구나..' 라고 인정하셨지만 말이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대는 항상 비현실적이다. 
이것이 때로는 훗날 내적 치유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만 
또한 이것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기도 하다. 

'너에 대한 기대? 나는 전혀 없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라' 
만약 이런 부모가 있다면, 정상적인 부모는 아닐 것이다. 

기대는 사랑에 비례한다. 사랑이 클수록 기대도 크다. 
물론 인간 부모는, 타락한 인간 이기에 
그 기대가 비현실적인 수 있고, 
비현실적인 기대로 오히려 자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시다. 
하나님의 기대는 비현실적이지도 않고,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있는 기대이다. 
하나님의 기대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기대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신다. 
출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삿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는 듯 하리라 하시니라' 

당황해 하는 모세와 기드온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로, 우리의 데스티니를 반드시 이루신다. 

당신의 데스티니가 너무 크다고 당황하지 말라. 
당신의 데스티니는 이루어질 수 있다. 당신의 능력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의지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불행한 것은 이 데스티니를 충만하게 살아간 사람이 생각보다 소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데스티니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인생을 다른 곳에서 낭비하며 산다. 

사회가 정해놓은 규격을 따라, 규격품 인생이 되려고 애쓰는 사이에 
자기 데스티니는 지나가 버린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 인생이 불행한 진짜 이유이다. 
만약 누구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해 가지고 계신 데스티니를 깨닫고 
그것을 취하면 산다면, 그 인생은 놀라운 삶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규격을 벗어나 보고 싶지 않은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비규격 인생! 
거기에 놀라운 인생의 비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