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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 P3

LNCK 2023. 11. 8. 11:24

◈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 P3         계7:9~10, 고전9:16      ☞ ▣ 데스티니 시리즈 보기

 

◑7장 거룩함을 지켜라              

▲죄, 데스티니의 파괴자 
데스티니를 이루어가는 세 번째 열쇠는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죄를 아주 미워하시는데, 그것은 죄가 하나님에게 어떤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죄는 그 죄를 지은 사람의 데스티니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이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데스티니를 멈추게 하고, 
왜곡되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다. 

아담의 데스티니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원래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던 '죽음'이라는 왜곡된 데스티니를 맞이하게 되었다.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에게 돈을 요구하는 죄를 범했을 때 
그의 데스티니에는 없던 저주가 그에게 임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의 데스티니는 파괴되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였을 때, 그들을 데스티니는 멈춰버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의 데스티니는 38년동안 지연되었고, 

유다가 예수를 파는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데스티니는 비참하게 멈춰버렸다. 

모든 죄는 데스티니를 멈추게 하거나 지연시키거나 또는 왜곡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반대로 거룩함을 지켰을 때는, 데스티니의 속도가 가속 된다.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함으로써 거룩함을 지켰을 때,
이것이 오히려 다니엘의 데스티니를 가속화 했고,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금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했을때 
이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르게 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데스티니를, 이 땅에서 100% 다 이루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 외에는 없다. 

왜냐면 우리의 데스티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만큼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다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10%, 어떤 사람은 20%, 사람마다 자기 데스티니를 
어디까지 이룰 것인지는 다 다르다. 

당신은 당신의 데스티니를 어디까지 이루기 원하는가? 
10% 에서 만족하는가, 아니면 50%, 70% 까지 이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거룩함을 지켜라.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데스티니를 
더 높은 곳까지 이르게 한다. 

다니엘도 모세도 엘리야도 모두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지킴으로써 
자기 데스티니에 더 높은 곳까지 이르렀던 사람들이다. 그 중에 당신도 있기를 축복한다. 

▲아뿔싸 논문이 꼬였다.
내가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 전공은 수학이었다. 

1999년 10월,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그의 12월에 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지도교수의 싸인만 받아서 본부에 제출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었다. 
싸인을 받으러 지도교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는데 문제가 생겼다. 

지도교수는 잠깐 앉아보라고 하더니, 내게 이메일을 하나 보여 줬다. 
스탠포드 대학의 엘리야시 버그 라는 교수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내 논문을 읽어보니 결과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한 단계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수학 논문은, 절대로 논리적 구멍이 있으면 안 되지만 
워낙 복잡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놓치고 지나가는 논리적 구멍들이 종종 발견된다. 
일단 논문이 발표되고 난 후에, 그 구멍이 발견되는 것은, 
고의만 아니었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논문이 발표 되기 전에, 누군가 논리적 구멍을 발견한다면, 
논문의 저자가 그 구멍을 해결하기 전에는, 논문을 발표할 수 없다. 
이것이 학계의 규율이다. 

그런데 나는 세상 쪽으로 말해서 참 운이 없었다. 
하루만 늦게 이메일을 받았다면, 그래서 지도교수의 싸인을 받아 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이메일을 받았다면, 이것은 학위와는 상관없는 건전한 학문 토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수의 싸인을 받는 바로 그날 아침에 이메일을 받다니...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졸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논문 수정작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뿔사 사소한 실수가 아니었다. 

나의 논문에는 생각보다 아주 큰 실수가 있었다. 
결국 졸업을 1학기 미루고, 문제 해결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 6년차 였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면 
여러가지 여건이 복잡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주제를 다시 잡아서, 다른 논문을 쓸 수도 있겠지만 
학교에서는 6년차 이상의 학생에게는 재정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 

더욱이 내가 전공했던 '위상수학' 이라는 분야는, 쉽게 논문이 나오는 분야가 아니었다. 

새로운 주제로 논문을 다시 시작한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재정 지원 없이, 기약없는 유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학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학위를 못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들이 거기 있었다. 

부모님과 지인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이며, 현실적으로 취업은 어떻게 할 것인지... 
당시 이미 30세를 훌쩍 넘어선 내 나이를 생각하면, 
박사학위 없이는 정상적인 취업이 어려워 보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비장학금이었다. 
학위를 받지 못할 경우, 정부에서 지원해 준 지난 몇년 동안의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반환해야 했다. 

내 인생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더욱 연구로 몰아 넣었다. 

▲흰옷 입은 주의 백성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정말 기적같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너무 기뻐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문제를 제기했던 엘시야시 버그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문제가 해결된 기쁨을 안고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한 가지 일에 너무 몰두하다보니, 뇌가 멈추지 않았다. 
머리 속에 수식들이 멈추지 않고 저절로 돌아갔다. 

'다 풀었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돼, 빨리 자!' 
아무리 스스로에게 선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발동 걸린 뇌는, 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는 자동차처럼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까지 멈추지 않았던 이 뇌는, 
급기야 해결과정에 또 다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해 버렸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나의 착각이었을 뿐! 
'에이, 그럼 그렇지.. 이게 풀릴 리가 있냐?' 그러고는 포기하고 잠이 들었다. 

오후에 느지막히 일어나서는 이메일을 확인하려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리야시 교수에게서 답장이 왔다. 
'축하한다!'고 말이다. 
이 분은 내 논문의 또 다른 오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냥 넘어가? 이제 시비 걸 사람도 없어졌잖아?' 
'아니야, 그래도 크리스천으로서 양심이 있지...' 

나는 고민이 깊어졌다. '뭐, 결과가 틀린 것도 아니잖아? 
설명 안 되는 논리적 구멍이 하나 있는 거 뿐이야. 
나중에 다른 논문에서 메꾸면 되지 않을까? 
이 정도의 오류도 없는 논문이 어디 있겠어? 
엘리야시 교수도 괜찮다고 했잖아?' 

졸업하지 못할 경우 감당해야할 상상 하기 싫은 결과들이 
'이 정도는 괜찮다'는 쪽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큐티를 하려고 성경을 펼쳤다. 그때 나는 <매일 성경>으로 큐티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본문이 요한계시록 7장 이었다. 

계7:9~10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질문이 하나 떠 올랐다. '왜 주의 백성은 흰옷을 입을까? 
검은 옷도 있고, 회색 옷도 있는데...' 

그때 그림 하나가 뇌리에 떠올랐다. 
흰색 와이셔츠에 잉크 한방울이 똑 떨어지는 그림이었다. 

검은 옷이나 회색 옷에는 잉크가 떨어져도 잘 안 보이지만, 흰 옷은 다르다. 
작은 잉크 방울 하나도, 흰옷에는 치명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나는 내 백성이 죄에 대해 이렇게 민감하기를 원한다.' 

그날 일어난 일들은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큐티 본문이 하필 요한계시록 7장이었던 것도 
어떤 것 하나도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속에 있던 일들이었다. 

나는 바로 일어나서 차를 몰고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지도교수는 자기도 엘리야시 교수의 이메일을 받았다고 하며, 내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사실은 착각입니다. 저도 착각을 했고, 엘시야시 교수도 착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전혀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실직고를 했다. 

방을 나오는데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논문을 통째로 폐기하고, 1~2년 시간을 재투자해서 새로운 논문을 쓰든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선택해야 했다. 

재정적 지원 없이 1~2년의 시간을 다시 투자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6년 만의 유학 생활을 접고, 학위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각오를 하면서..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내 안의 불안함이 사라진 것이었다. 

논문 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불안함과 두려움이 
아침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버렸다

대신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이 차 안에 계신다고 하는.. 새로운 임재가 느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가 차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였다. 
마치 차가, 하나님을 임재로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는 
그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경험해 보지 못하는 특별한 임재였다. 

하나님께서 내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계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속삭이셨던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창22:16~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내 안의 기쁨이 임하기 시작하는데 
집에 오는 내내 울다가 웃다가.. 혼자 부흥회를 했다. 

이 때부터 놀랍게도 내 안에 평안이 임하기 시작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내 안에 가득했다. 

주위 사람들은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문제가 잘 해결된 줄로 생각하고 축하해 주었다. 

"아니요. 문제가 최악으로 꼬였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유학생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는 주위 동료들은 
오히려 나보다 더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특별하고도 이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불안하고 심란해야 할 상황에서, 
인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큰 기쁨을 누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이후의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평강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때 내 상황은 최악이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평강이 있었다. 
평강은,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음에서 온다. 

불안 또는 두려움이란,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절대 평강'이 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절대 평강' 이다. 

▲그렇게 정직하게 내 논문의 실수를 고백한 후에   
며칠 후에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고, 마침내 해결책을 찾았다. 
잠을 깨고 보니 꿈이었다

보통 이런 꿈들은, 깨고 나면, 
꿈에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만 기억나지, 
구체적인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꿈은 달랐다.
꿈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대로 따라 해보니, 그것이 정말 해답이었다. 
이성으로는 불가능해 보일 것 같던 문제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풀린 것이다. 

박사논문 심사를 다시 받고 통과했다. 지도교수가 물었다. 
"참 기가 막힌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 했는데, 
그 복잡한 도형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냈나?" 

나는 간증을 했다. 사실은 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다고 말이다. 
지도교수는 웃으며 논문에 싸인해 주었고, 나는 Ph. D. 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거룩함의 비밀 
거룩함에는 비밀이 있다.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다. 
거룩함을 지키는 이유는, 정죄를 피하기 위한 율법적 의무감 때문이 아니다. 

거룩함을 지켜야하는 진짜 이유는 
거룩함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들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거룩함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한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단순히 우리에게 심리적 차원에서 평안을 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적인 문제를 돌파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룩함이 없어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우리 책임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어떤 단체가 김연아 선수를 초청해서 
그의 우아한 스케이팅을 보기 원한다면, 
거기에 걸맞는 환경을 조성해 놓아야 한다. 
잘 준비된 아이스링크도 있어야 하고, 음향 시설도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김연아 선수라고 해도, 아무 공연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초청해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은, 바로 우리 삶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잃어버린 곳에서는 일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흰옷 입은 주의 백성이 되시라!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 
우리 교회에서는 정직하지 않은 헌금은 하지 못하게 한다. 

▲검은 돈은 헌금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교회가 그것을 알던 모르던, 검은 돈, 정직하지 않은 돈이 
교회에 흘러 들어왔다면, 하나님이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으실까? 
검은돈으로 헌금 하지 마십시오! 부당하게 번 돈으로 헌금 하지 마십시오! 
세금 속인 돈으로 헌금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사업하는 교인 분들은 고민을 많이 한다. 
검은 돈, 하얀 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반이 회색 돈이라는 그 분들의 고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하실 환경인 거룩함을 양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행위를 통해 완전해진다는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구원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초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어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이야기다.

순종과 거룩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게 하는 통로임이 분명하다.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거룩함을 지키시라! 
말씀의 무게를 회복하시라! 
말씀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넘어, 그 말씀을 무겁게 대하는 삶의 태도 말이다. 
이것이 당신의 데스티니를 이루어 가는 열쇠다. 


◑8장 하나님께 들으라 

▲데스티니를 알 수 있는 방법 
사실 이번 장의 내용은, 5장 '우리를 만드신 분을 만나라'의 연속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을 통한 기계적인 들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청취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의 싸움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 듣는 훈련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 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는 태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설령 그 사람이 그것을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뜻을 안다. 

이와 같은 태도의 기초 위에, 이 장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것>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어떻게 나의 데스티니를 알 수 있나요?'
데스티니 설교를 하고 나면, 내가 자주 듣는 질문이다. 

먼저 데스티니를 알게 되는 것과, 
그것을 살게 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바란다.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해도 
선택과 헌신, 
순종과 도전, 
믿음과 인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등이 없다면, 그의 데스티니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실 조금 과장에서 말한다면,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도 
나의 삶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 
성경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정, 
삶의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겸손이 있다면, 
나의 데스티니는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듣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을 디자인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외에 나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데스티니를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핵심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방법에 쉽게 주목 한다. 
'누구는 금식을 했더니 하나님이 말씀 하셨대..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서 금식을 따라 해야지..' 

'누구는 어느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대.. 
나도 그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를 해야지..'

그러나 단언컨데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금식이나 철야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그 사람들이 문제다.. 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따라한다고 해서, 똑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따라하는 당신에게는 그 방법이 유효하지 않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는 못 듣게 하신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방법을 좇게 될까 봐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방법을 통해 말씀하신다. 
심지어 발람에게는 나귀를 통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을 통해서이지, 
특정한 기술이나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내와 결혼한 것이 1992년 이니, 내년이면 결혼 25주년이 된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보통 아내는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부엌 일을 하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만 봐도 
대충 아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힌다는 것이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넘어, 뒷모습만 봐도 대충은 안다. 

내가 활기차게 집안을 휘젓고 다녀도 되는 날인지 
아니면 방에 들어가 조용히 있는 것이 안전한 날인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거의 알게 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비결은 단순하다. 나와 아내는 25년을 함께 살았다. 
그렇다. 25년을 함께 살면서 형성된 둘만의 친밀함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낄 수도 없는 두 사람 만의 깊은 친밀함이 있다. 
25년이라는 시간이 가져다 준 친밀함이다. 

이 친밀함은, 아내의 작은 행동이나 특정한 버릇까지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한다. 
그런데 이 무의식적인 인지가, 직관적으로 아내의 생각이나 감정까지 알게 해준다. 

 

그렇다. 아내의 마음을 읽는 것은 친밀함을 통해서다. 
이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전달되는 직관적인 지식이다. 

이런 것들이 한 마디 대화 없이도, 아내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비결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느냐고? 친밀함을 통해서 듣는다.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이 일 년, 이 년 쌓여 가면서 
그냥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간다. 
'아 이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구나.. 
아 지금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구나..' 그냥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친밀함에서 오는 직관적 지식이다. 

기도와 말씀 묵상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재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말씀 묵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이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를 통해, 친밀함이 형성된다. 

친밀함을 연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내가 아내를 아는 것은, 아내에 대해 연구해서가 아니라 
아내와 25년간 교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연구하여 그 분의 음성을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형성된, 친밀함을 통해 알게 되는  지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함께 하는 시간이 중요하다. 
친밀함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와 말씀 묵상은 양이 중요하다. 
얼마나 오래 기도와 말씀 묵상의 자리에 머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친밀함을 낳는다. 

하루 한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사람은, 한 시간 머무는 만큼 하나님을 알고 
두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사람은, 두 시간 머무는 만큼 하나님을 알고, 
세 시간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사람은, 세 시간 머무는 만큼 하나님을 안다. 

당신은 기도와 말씀 묵상을 위해 따로 시간을 떼고 있는가? 
학문적 지식은.. 연구나 공부를 통해 얻어지지만 
관계적 지식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과 함께 살아봐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시간을 따로 떼 두시라.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께만 신경을 쓰고 온통 집중하는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시간을 
따로 떼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많은 경우 이 시간에 주어진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 
항상 무시로 기도한다고? 
물론 항상 무시로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따로 시간을 떼지 않는 사람이 
하루 종일 무시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예수님도 시간을 따로 떼셨다. 
따로 시간을 떼놓으시라. 기도하다가 조는 한이 있어도 그 시간을 지키시라. 
졸아도 의미가 있다. 

내가 아내와 함께 보낸 25년 동안, 항상 의미있게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싸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통해, 서로 알게 되고, 친밀해진 것이 아닌가? 

기도도 그렇다. 우리의 기도가 항상 잘 정리되어 있고, 
일목요연하게 중보기도 리스트를 따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다. 
너무 피곤한 날은, 기도하려고 엎드렸다가,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한다. 
'에이 망했다. 기도도 못하고 잠만 자고 말았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과연 이게 정말 망한 것일까? 
친구 집에 가서 하루 자고 오면, 그 친구와 얼마나 더 친해 지는지 생각해 보라. 

자면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자면서 함께 오락을 한 것도 아닌데, 
같이 자고 왔다는 사실만으로, 친구와 친밀함은 말할 수 없이 증폭 된다. 

그렇다면 기도하다가 잠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잔 것 아닌가? 
단언컨데 친밀함이 측면에서는 망한 것이 아니다. 

나는 확신한다. 같은 잠을 자도, 집에서 이불 펴고 자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다가 잠든 것은 다르다.. 는 말이다. 

자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잠들라.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지키겠다는 이 간절함이 
사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형성하는 열쇠다. 

1년, 5년, 10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귀도 조금씩 더 열려 간다. 

예전에 전혀 모르던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순간 알게 되고, 
이전에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생각을, 이전보다 더 예민하게 감지한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들리는 목소리로 'OO야!' 이렇게 응답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도와 말씀묵상의 자리에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대부분의 경우 초자연적인 음성은 없다. 

어떤 분들은 기도하면서 환상도 보고 그런다는데 
나는 눈을 감으면 까만색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물론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말씀하신 것을 경험한 적은 있다. 

내 인생에 그런 경험은 딱 세 번 있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절대로 못 알아 들었을 것이기에 그러셨던 것 같다. 

말더듬이가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초자연적인 음성도 없고, 보이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예민해 진다. 

'아~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구나~' 
어떻게 하느냐고? 글쎄 설명은 하지 못하겠다. 그냥 안다. 

'아~ 이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어떻게 아느냐고? 설명은 구체적으로 못 하겠다. 그냥 안다.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이 30 년인데, 25년을 함께 산 집 사람의 뒷모습을 읽듯이 
30년을 함께 동행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당신의 데스티니를 알고 싶은가?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하나님께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당신이 데스티니를 찾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태도가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와 말씀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태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태도 말이다. 

내 기도 중 가장 많은 기도는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알려주십시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라는 기도다. 

이 기도가, 내 기도 시간에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라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바로바로 초자연적인 목소리로 응답하여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잠잠하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기도를 하면 할수록 생기는 거룩한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맞아?' 하고 
무의식적으로 묻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작은 선택 하나에도, 하나님을 의식하게 된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라는 기도는 
초자연적인 응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선물을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태도다. 
삶의 작은 선택 하나에도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 태도 말이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있어서,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태도다. 
'하나님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따르겠습니다' 라는 태도! 

행여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까봐 조심하는 태도, 
이 태도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다면 나귀를 통해서라도 말씀하실 테니까. 
나귀가 없다면, 어느 날 당신이 키우는 애완견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지 누가 알겠는가?

당신의 데스티니를 창조주로 부터 듣기 원한다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 
그 분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당신의 귀가 하나님을 향해 열리기를 축복한다. 
잠깐! 서두르지는 말라. 데스티니을 아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 말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 시작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갈망한다면, 
1년 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당신의 귀에 놀라게 될 것이다. 
데스티니의 놀라운 여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9장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초월적 조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하게 말씀하시는 순간들도 있다. 
모세가 광야 가시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조우하듯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하나님을 조우하듯 
그렇게 특별하게 하나님과 특별히 만나는 순간 말이다. 

매일 매일 이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말씀하실 수도 있다. 
적어도 이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2005년에서 2006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영적인 갈급함으로, 나는 교회에 한 달간 안식월을 신청하고 
미국의 한 도시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하루는 저녁에 기도를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귀로 들리는 음성은 아니었는데, 귀로 듣는 것보다 더 강렬하고 선명한 말씀이었다. 
초저녁에 시작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이 특별한 하나님과의 조우는, 이후 내 사역의 방향을 새롭게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 하셨던 말씀 중 하나는, 이슬람 사역에 대한 것이었는데 
비록 우리 교회는 한국에 있지만 
우리 교회에 주신 데스티니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었다.

마치 중동 땅 한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했던 다니엘처럼 
하나님은 '중동이 네게 주는 유업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내게, 다니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다니엘이라 부르시는 신기한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런 특별한 체험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목회를 시작할 때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 이후, 
5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나님, 이런 경험이 제게 익숙하지 않아 혼란스럽습니다. 
죄송하지만 확증을 구합니다. 
며칠 뒤 미국에 사시는 말레이시아 목사님 한 분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 분을 통해서 저를 다니엘 이라고 불러주시면, 그것을 확증으로 삼겠습니다.' 

물론 그 목사님은 나를 성준으로 알고 계신 분이었고, 그 만남이 첫 만남이었다. 
며칠 뒤 목사님을 만나 식사를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제를 마치고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사님의 첫 마디는 '주님, 이 사람은 당신의 다니엘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셨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어!' 

그 분의 기도는 계속 되었다. 
'비록 그의 교회는 한국에 있지만, 그의 유업은 무슬림들입니다.' 

그 목사님의 기도는, 며칠 전 내가 들었던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때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도 말씀하신다. 

모세의 가시떨기 나무처럼, 엘리야의 세미한 소리처럼, 
바울의 다메섹 도상처럼, 또 발람의 나귀처럼, 하나님에게는 제한이 없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그 무엇이라도 사용하실 권한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을 제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조우는 언제 주어지는가? 그것은 모른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기도와 말씀 묵상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그분을 경외하는 태도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다. 

솔직히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초월적인 조우를 가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초월적인 조우가 하나님과 친밀해지고자 하는 갈망을 일으키는 것인지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의 결과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확신하는 것은, 친밀함이 초월적인 조우 divine encounter 는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주께서 축복 하실 것이다. 

▲이슬람의 정체성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다니엘이라 부르던 이름대로 
다니엘과 같은 세대를 키우기 위한 대안학교인 <다니엘 아카데미>가 시작되었고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선교훈련원인 <다니엘 훈련학교>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이슬람 사역은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이슬람 선교에 대한 자세한 것을 나눌 수는 없지만 
난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잠깐 나누고 싶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몇 번 경험이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차라리 돌멩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쉽다. 

이 사람들은 마치 예수를 안 믿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렇게 강경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7세기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할 때, 그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역을 하던 그는,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많았으며, 
자신을 기독교의 새로운 한 분파라고 생각했다. 

AD 622년, 세력을 확장한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는데 
이 사건을 '헤지라 hejira' 라고 하며, 이 해를 이슬람 원년으로 삼는다. 

두 가지 이유로 헤즈라가 중요한데 
첫째는 메디나로 옮기며 움마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둘째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슬람의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다. 
기독교의 한 주류가 아닌 전혀 새로운 종교로 말이다.

*움마 Ummah : 아랍어로 '공동체' 를 뜻하는 말이다. 
주로 이슬람 공동체를 의미할 때에 쓰이며, 쿠란에서 자주 언급된다.
이전의 부족적 결함에서, 이슬람 신앙공동체로의 결합으로 변화를 의미한다.
 
이후 1400년 동안 이슬람은, 
왜 기독교가 틀렸고, 자신들이 옳은지를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정체성을 키워 왔다. 
기독교의 한 지류에서, 새로운 종교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절차였다. 
이 과정 속에 필요하다면, 역사까지 왜곡시켰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로, 서구 기독교 진영에서 역사를 왜곡했다고 가르치며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기독교 인과 대화할 때 
자신들의 문화와 교육을 통해 전수된 '1400년 동안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이 
자연스럽게 발동 된다. 

생각해 보라. 상대는 우리를 1400년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는데 
우리는 그동안 상대방의 존재조차 별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말로 그들을 설득 시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이 돌멩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쉽게 느껴지는 이유다. 

또한 움마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 
이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다. 
무함마드가 선포했던 것은, 이슬람 이라는 범용 종교가 아니라 
이슬람 국가에 대한 신념이었다. 

이슬람은 어느 사회, 어느 나라에나 포교가 가능하고, 적용 가능한 그런 종교가 아니다. 
한 나라가 샤리아(종교) 법이 적용되는 이슬람 국가가 되지 않는 한 
그 안에 이슬람 이라는 종교가, 다른 종교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슬람은 국가 시스템이며, 사회 시스템이다. 
사실 코란이 주장하는 이슬람을, 정말 액면 그대로 적용 한다면 
IS(ISIS)야 말로 가장 코란에 가까운 진짜 이슬람이다. 

움마 공동체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명예 살인 같은 현상들을 보라. 
이들에게는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서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겠지만 말이다. 

그 결과, 무슬림 개인이 개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본인은 개종할 마음이 있어도, 공동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족이 허락하지 않고, 친족이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가족과 친족을 무시하고 개종을 강행한다면, 
추방이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이 등장한 이후 1400년 동안 
무슬림이 복음으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선교적 관점에서 이슬람은 난공불락의 견고한 진이었다. 

▲복음에 반응하는 난민들 
앞서 나눴듯이 이슬람에 대한 데스티니가 있는 우리 교회는 
중동의 몇몇 국가들에 선교사들을 파송 했다. 
그 중 하나가 시리아 였는데, 열매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고, 우리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난민 행렬에 섞여 
시리아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이것이 무슨 사건인지 잘 몰랐다. 

난민과 섞여 (터키, 요르단 등) 근처 국가에 정착하게 된 선교사들은 
자연스럽게 시리아 난민과 가깝게 지냈다. 

곧 다시 시리아 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는,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내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리아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리아에서는 전혀 미동도 없던 사람들이 
남의 나라에서 난민이 된 이후에, 복음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였다. 
첫째, 움마 공동체가 붕괴된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는 더 이상 가족의 압력도, 친족의 위협도 없다. 
그냥 개인이 선택하고 싶은 대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둘째, 난민이 된 고통과 불안이, 복음에 대한 수용성을 높였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매주 난민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일들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우리 선교사들 뿐 아니라, 난민 사역을 하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부흥이었다. 

단언컨데 1400년 이슬람 역사 속에, 이와 같은 일은 없었다. 
1400년 만에 찾아온 기회인 것이다. 
성경 말씀 그대로 정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
난민들을 주목하고 섬겨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이것이 1400 년 안에 찾아온 유례 없는 기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셨다. 지금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문은 곧 다시 닫혀질 것이다. 

난민들이 정착한 곳에서 게토 화가 시작되면, 
이들은 다시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것이고, 
그 때는 복음의 문이 다시 닫힐 것이다. 

둘째,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했다. 
난민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고아와 과부들 아닌가? 
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은, 성경의 명령이고, 교회의 책임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아는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전사들은 
고아를 버려두지 않고 엎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길러진 이 전쟁 고아들이, 훗날 탈레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10여 년 전, 이라크의 전쟁 고아가 3백만 명이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가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근본주의 무슬림들의 손에 키워진 고아들이 
10년 뒤 전 세계를 혼란 속에 몰아넣을 것이라는 말들이 있었다.
정확히 10년 후 이라크 북부에서 IS 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떨까? 유엔 난민 기구 통계에 의하면 
2015년 말 기준, 난민과 난민 신청 대기자, 
그리고 자국 영토 내에서 피신 중인 국내 실향민을 합친 강제 이주민의 숫자는 
6530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정확한 통계조차 잡히지 않지만 
이라크에는 여전히 3백만 명 이상의 고아들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들 중 태반이 아이들이다. 
교회가 지금 이들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과연 10년 뒤에 우리는 어떤 세상을 보게 될까? 

나는 두렵다. 바울의 음성이 소름끼치게 들리지 않는가? 
고전9:16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0년 전, 이라크의 고아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지금 난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럽과 터키와 요르단과 레바논에 퍼져 있는 난민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도울 수 있다. 

만약 지금 교회가 이들을 돕지 않고 모른 채 한다면 
10년 뒤에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