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의 요건 요10:1~21 2006.01.08. 펀글, 정리
"저 사람, 참 선하다"(He is good)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상상을 하십니까?
제아무리 화를 돋구어도 “허허!”하고 웃고 마는 사람을 상상하십니까?
혹은 법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사람 을 상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부르시는데,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실 때,
적어도 두 가지의 뜻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첫째는 3절, 즉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둘째는 11절, 즉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두 가지 요소는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선한 목자는.. 나를 개인적, 인격적으로 알아 주신다
요10:3절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여기서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목자가 양들을 집단(collective)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individually), 인격적으로(personally)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각각의 이름이 특별하듯, 목자는 각각의 양들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6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나의 비유입니다.
목자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양은 우리 인간을 가리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마치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한 목자의 사랑과 같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반려견을 키우듯이, 당시 목자들은 양들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지금 지구 상에는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를 집단으로(collectively) 대하셨다면,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60억 분의 1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워낙 엄청나기 때문에, 그 사랑의 60억 분의 1만 가져도,
우리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이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집단으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한 명, 한 명을 특별하게 대하십니다. 한 사람에게 그분의 사랑 전부를 주십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신학자인 존 베일리 John Baillie는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 자비의 하나님, 마치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저 밖에 없는 것처럼
제게 사랑을 베푸시며,
저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또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짧은 기도문 안에는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되,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는데,
동시에 그 절대적 사랑으로 모든 인간을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랑의 비밀입니다.
예를 들면, 밤에 환한 보름달이 우리집 마당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보름달은, 우리 집 마당만 비추는 것 같습니다. 정말 환하고 푸근한 달빛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집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날밤 환한 달빛은, 자기 집, 자기를 향해서만 비춘다고요...
하나님의 선하심의 신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사랑이 있기는 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편애(favoritism)하시는 부모님도 계시고,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사랑을 등분하려고 애쓰시는 부모님도 계십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참되게 사랑하셨던 부모님들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알고 계신 것처럼 행동하시는 것을 봅니다.
자녀들이 여럿이지만, 자녀 각각은 “부모님은 나에게 전부를 주셨다”고 느낍니다.
한 자식에게 사랑의 전부를 주었다면,
다른 자식에게는 줄 것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참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압니다.
제 이성으로는 부모님께서 네 형제를 동일하게 사랑하신 줄은 알지만,
저는 “부모님은 나에게 전부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절대적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무한대의 사랑을 십자가에 달려서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 한 사람을 위해
당신 전부를 내어주신 선한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예수님이 무력하게 당한 폭력을 의미합니다.
원치 않는 죽음을 강요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십자가형은 가장 참혹한 방식의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분은 로마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처형 당했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여기서 ‘버린다’고 번역된 말은 ‘내어 놓는다’ 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어쩔 수 없이 당한, 피치 못할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표현된 그 무한대의 사랑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 이것은 설명되지 않는 비밀입니다.
어찌 2천년 전 의 한 유대 청년의 죽음이 나와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떻게 “나 한 사람을 위해 그분이 죽음을 당하셨다” 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성적으로는,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나 하나만을 위해 사셨다”고 말하는 형제를 향해,
“자식이 넷이나 있는데, 어떻게 부모님이 너 하나만을 위해 사셨다고 말할 수 있어?
너 제 정신이야?”하고 따져 묻고 싶어하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절대적 사랑을 경험한 자식은 논리를 초월하여
“부모님이 나만을 위해 사셨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나를 이름으로 불러내시고,
나를 자녀로 삼으셨음을 깨달을 때, 십자가는 바로 나만을 위한 사건으로 보이게 됩니다.
▲북한에서 온 탈북자 중에 북한에서 대학, 대학원 공부를 다 마쳤고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한국 땅에 와서 지금 탈북 청소년 교사로 있는 자매를 제(이삭 목사)가 알게 되었는데
정말 준비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되었어요.
근데 그 자매가, 제가 이스라엘에 가 있는 동안에 연락을 했더니 한동안 답이 없어요.
‘무슨 일일까?’ 궁금해 했죠.
서울로 돌아와서 제가 연락을 했어요.
수소문해 보니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입원 사유는, 자기가 탈북민이잖아요.
탈북민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아이 중에 하나가 신장에 문제가 왔어요.
급하게 이식 수술을 하지 않는 한, 이 학생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탈북민 교사는, 자기 신장을 한 개 떼어 그 학생에게 이식시켜 줬어요.
근데 그렇게 신장을 떼 주고 나서 살다보면,
가끔씩 자기 몸이 약해지면서, 몸이 그냥 으스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서 '나는 그 상황에서 내 신장 한 개를 떼어서, 남에게 줄 수가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돼요.
제 친구 하나가 당뇨로 인해서, 병원에 다니면서 오랫동안 투석을 하고 어려워하던 형제가
'목사님, 제 아내가 (제게) 신장을 떼어주기로 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뭐라 그랬냐면
'내가 만일 내 아내가 신장에 문제가 되었을 때
내가 서슴지 않고 내 신장을 떼어줄 수가 있을까?'
나는 생각해 봐야 돼요.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그 탈북민 교사는, 탈북 학생을 위해서 자기 신장을 떼어준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했어?'
북한선교라면 한국에서 '이삭 목사'할 만큼 알려져 있는 제가
북한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다닌지가 벌써 33년이 넘었는데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탈북민 교사가 하는 말이 '내 것도 아닌데요. 뭐!'
자기 신장이 하나님의 것이란 얘기죠.
"나는 하나님께 속했잖아요. 내 몸도 하나님께 속했잖아요!
내 몸도 하나님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내 거 아니니까 준 것 뿐이에요.
자랑할 것도 없어요!"
그 말을 듣는 제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더라고요.
▲‘개인적인 사랑’의 사례
오래 전에 중국에서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서 빙 둘러 앉았어요.
성경공부를 해야 되니까
중국 사람들은 방에 침대가 있고요. 의자가 있고요. 밥상이 있어요.
그런데 침대 없이 온돌 바닥에서 살잖아요.
조선족들은 그렇게 살잖아요.
그래서 방바닥에 이불 펴놓고 화투놀이하는 듯이 화투를 펴놓고
성경은 그 밑에 깔아놓고...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그렇게 위장을 하고 모여서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펴놓고 있는데, 툭툭툭 하면서 누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
성경은 이불 속에 황급히 집어 넣고
화투를 펴서 손에 들고 한 사람이 나가서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아파트 집주인이에요.
'웬 일이세요?'
'경찰이 온대요'
중국 사람들은 웃겨요. 그냥 오지, 꼭 그렇게 알리고 옵니다.
이게 중국 기독교의 복음화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건이에요.
한국인들은 경찰이 그냥 들이닥치잖아요.
아니에요. 중국인들은 그렇게 안 해요. (지역마다, 연도마다 편차 있겠죠)
주인한테 얘기해서 '내가 갈거예요'
주인은 '알았어요!'
그러면 다 사람들 피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경찰이 와요.
그러면 아무도 없으니까 뭐라고 신고하냐면 '가보니까 아무도 없대요'
라고 보고하면
그 다음에 주인이 경찰에게 돈 몇 푼 집어 줘요.
이게 중국 복음화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어요.
제가 그걸 보고 '야 북한도 좀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근데 한국 사람들은 흑백논리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그걸 용납이 안 돼요. 그걸 할 수가 없어요.
그날 그 아파트 주인이 저보고 '주소를 줄테니까 거기로 택시타고 가세요.'
제가 그 주인에게 주소를 받아서 30분 거리에 있는 집을 찾아가서 머물렀어요.
열쇠를 받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또 역시 이불을 펴놓고, 성경을 이불 밑에다 놓고 위에는 화투를 펴놓고...
조금 있으니까 5분도 안 됐는데 누가 와서 또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오늘은 왜 이렇게 (유달리) 찾아오는 낯선 사람이 많지?'
하면서 문을 열어보니까
웬 피골이 상접한 여자 분이 거기에 서 있어요.
'누구세요?'
'여기 미국에서 온 성경 배달하는 목사님 계시죠?'
'전데요'
'성경 한 권만 주세요.'
'잠깐만,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오셨어요?'
우리 일행이 지금 5분 전에 도착했잖아요.
그래서 그분을 집으로 들어와서 앉게 하고
이야기를,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는지 사유를 들었어요.
"7년 전에 저희 동네에 어느 선교사님이 지나가다가, 그 분께 복음을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제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그 선교사님은 성경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경 한 권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 기도 했어요.
7 년 만에 하나님이 뭘 주셨는지 아세요? 성경을 안 주셨어요.
그리고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극히 드물게 일어나지만,
절박한 상황에서는 환상이나 이런 기적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거 얼마나 놀라운 얘기인지 아세요? 성경을 그냥 읽었는데 변화되는 거에요.
여러분 '설교를 들어서 변화된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 때문이지, 절대로 그의 설교의 말 재주 때문에 변화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환상이 어떤 환상이었냐면 약도예요.
그 동네에 주소를 그려낸 약도 였어요.
이 아주머니가 그 환상을 보고 떠나기 시작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그 집으로 찾아오는 동안 일주일이 걸렸어요.
그 사건 일주일 전에 저는 서울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날 35분 전에, 저는 저쪽 동네에 있었죠. (처음 화투를 편 곳)
그런데 하나님은, 일주일 전에 이 아주머니가
내(이삭 목사)가 오늘 있을 자리를 아시고, 환상으로 주소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에요.
그 환상을 보고 찾아온 그 아주머니에게
제가 '원하는 게 뭡니까?'
'성경책 한 권만 주십시오!'
놀라지 마세요. 하나님이 7년 동안에 그 아주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가 그곳에 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셨고
그리고 성경이 제 가방 속에 들어가 있고, 그리고 성경은 전해집니다.
그 아주머니의 7년 기도가 그렇게 기적적으로 응답된 것이죠.
여러분 그냥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여러분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에요.
그 아주머니의 손에 들려주고 싶은 성경책 한 권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내용들을 보세요.
제가 서울에 있었잖아요. 그런 저를 중국으로 가게 하셔서
그 도시 저쪽에 머물렀던 그 집에서 나를 쫓아내서
이쪽으로 오게 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셨어요.
◑2.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려서 사랑해주신다
선함의 둘째 요소는 11절에 나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선하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 목자가 선합니까? 어떤 양치기가 밤에 자기 양을 물고 달아나는 늑대를
좇아가 싸우다가 그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고 칩시다.
이 사건을 두고 누가 “아, 그 목동은 참 선한 사람이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대신에 열의 열은 “참, 어리석기는!”하고 혀를 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기도 하겟지만, 목자도 양을 위해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제 마음대로 양을 대하는 목자는 ‘악한 목자’라고 규정합니다.
양이 행복해지도록 일하고 희생할 줄 아는 목자가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연장해 볼까요?
백성이 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가 선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제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이 주인을 위해 몸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직원이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직원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던
섬김과 헌신과 희생의 방향을 180도 완전히 돌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혁명적인 사고 방식 (revolutionary idea)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고 누리기 위한 것 아닙니까?
종업원은 사장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고,
부하는 보스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연구원은 교수가 시키는 일이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일한 후, 영광은 모두 교수에게 돌아가고
연구비 한 푼 받지 못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법칙이 아닙니까?
힘 가진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을 부리고, 힘 없는 사람은 힘 가진 사람을 위해 일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사는 것을 ‘악하다’고 규정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 인간을 착취하고 부리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가장 귀한 것까지 기꺼이 희생하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몸소 살아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룰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막 10:45)고 말씀하십니다.
▲구역장의 중보기도가, 이혼의 위기에 처한 구역식구를 살리다 (펀 글)
한 여 성도가 이혼을 결심하고 도장 찍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허탈한 심정이 되어 새벽예배에 나갔다.
다른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되어
새벽예배가 끝나는 시각을 선택하여 조금 늦게 가서 기도만 하고 나오려 했는데,
한 분이 예배실 앞좌석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를 위한 기도였다고 한다.
같은 목장에 속한 목자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였다.
“하나님, 제가 벌써 여러 날 금식하고 이 부부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이 부부를 이혼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그 순간 이 분의 가슴을 때린 생각이 이랬다고 한다.
‘아니, 내가 누구이기에 이 분이 우리 부부를 위해 금식하면서까지 기도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쉽게 이혼을 결심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너무나 쉽게 이혼을 결심한 자신이 뉘우쳐지면서
그분은 통곡의 기도 끝에 결심하고 남편과 화해했고,
지금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요, 목장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3. 목자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은, 감동받았기에
그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셨기에,
-즉 나를 개인적, 절대적 가치로 사랑하시고
-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기에,
‘선한’ 목자라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나는 그분 앞에 설 때마다 무너져 내려,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이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벅찬 감격이며 또한 도전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너희도 그렇게 살아보라”고 격려합니다.
그 부름에 응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가치로 대하며,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마치 목숨을 주고 생명을 나누듯이, 상대방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뒤집으면 악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상대적인 가치로 대하고,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려 하면
우리는 악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선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선한 양인 척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는 선한 양으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볼 때든, 아무도 보지 않을 때든, 어떤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있든,
무엇을 하든,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인격적으로 정성을 다해 대하고,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것이 선한 양의 삶입니다.
▲우리는 과연 선한 사람들입니까, 악한 사람들입니까? 금년 한 해를 반성해 보기를 원합니다.
내 자녀들에게 나는 과연 선했습니까?
하나 하나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부모로서 주어진 힘과 능력으로 그들을 위해 섬겼습니까?
나는 늙고 약해진 내 부모님에게 과연 선했습니까?
나는 내 배우자에게 과연 선했습니까?
그를 이 지상에 하나 밖에 없는 사랑으로 대하고 그를 위해 섬겼습니까?
나는 내 일터 직원들에게 과연 선했습니까?
직원들을 하나 하나 정성으로 대했고,
내게 주어진 권력과 능력으로 그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습니까?
나는 내 고객들에게 과연 선했습니까?
그들을 이익의 대상으로 이용하지 않고, 나를 찾아온 주님처럼 섬겼습니까?
나는 내 교우들에게 과연 선했습니까?
만나는 이들 하나 하나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들을 섬겼습니까?
▲믿는 사람으로서 살벌한 직업 세계 안에서 어떻게 선한 이웃으로 살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제 동생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예를 들 때, 그 예가 너무 생소하거나 특별한 이야기일 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동생의 동의를 얻어 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사람이 중간경영자로 일하고 있는 회사가 부도날 위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회사는 한국에서 벤처 기업의 대표적인 모델로 알려져 있는, 꽤 잘 나가는 회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회장이 재무 관리를 부정하게 관리했다는 혐의가 포착되어
갑자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우선 저는 제 동생이 걱정되었습니다.
40대 초반에 갑자기 실직하는 것은 심각한 위기입니다.
하지만 동생을 두고 기도하는 중에, 그 회사의 하급 직원들이 더 걱정되었습니다.
제 동생이야 웬만한 경력을 쌓았으니, 얼마간 어려움을 견디고 나면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급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부도설 앞에서 막막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을 가진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심란하냐? 할 말이 없구나.
오늘 아침에 너를 위한 기도만 했다.
기도하는 동안에 사도행전 27장부터 28장까지 나오는 바울의 항해 이야기가 생각나더라.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당하고 모두들 자포자기하려는 상황에서
바울이 일어나 "여러분, 내가 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배는 파선되어 없어지겠지만,
우리 모두의 생명은 보존하여 주실 것입니다"라고 위로하면서,
"그러니 힘을 내어 음식을 먹읍시다"라고 격려했었지.
신앙인 지도자로서 네가 그런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너도 경황이 없겠지만, 너보다 더한 사람도 많겠지.
그들을 위해서라도 네가 신앙으로 의연히 버티고 서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다.
이 위기에 너의 믿음을 시험하기 바란다. 너의 믿음을 입증하기 바란다.’
매일 기도로 함께 하겠다. "너는 잠잠히 있어 내가 너의 하나님임을 알라"는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하루 하루를 지내기 바란다.」
저는 제 동생이 부하 직원들을 내 몰라라 하고
자기 이익을 찾아 행동하는 지도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오히려 부하 직원들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로 행동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다음, 제 동생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내장에서 쓴 물이 날 정도의 많은 어려움을 거쳤습니다.
몇 번의 위기를 거치고 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정상화되고
회생의 길을 찾았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연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전해 왔습니다.
사적인 부분을 제거한 대강의 내용입니다.
「형님께서 일이 발생했을 때 보내주신 메일을 힘들때 마다 열어보면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 메일을 다른 리더들과 나누었고, 그분들도 마음에 새기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교도소에 계신 회장님께도 전해 드렸습니다.
그동안, 신앙인 지도자로서 큰 모범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다행히 남들에게 크게 손가락질 받고 욕 듣는 행동은 안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3개월 반 이상 동안, 정말 수도 없는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모두다 기적같이 일이 해결되어 이제는 당분간 정상화의 길로 접어들것 같습니다. ……
불행 끝, 행복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출발, 새로운 국면 전환 정도 일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쓰러져 가는 회사를 살렸다는 것이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고, 정말 크게 성장하고 성숙했다는 것입니다.
며칠을 두고 말씀드려도 다 못할 일들이 있었지만,
형님께서 보내주신 말씀에 근거하여 살려고 노력했던 덕분이었습니다.」
생존경쟁의 투쟁이 극심한 기업 현장에서
한 사람의 신앙인이 ‘선한 리더’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기독교인 리더는 “더 좋은 직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자신만의 살 길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이 복 주셔서 더 잘 되었다”고 자랑할지 모르나,
오늘 말씀의 기준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진실로 아는 선한 리더라면,
자신의 위협을 무릎쓰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이 메일을 받고 마음 깊이 감사했던 이유입니다.
▲요즈음 굿스푼 선교회와 기타 다른 선교 단체를 통해 한인 교회들이
라티노 (중남미계) 사람들에 대해 선교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중보기도팀이 이 사역을 돕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적극적인 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선교 활동에 앞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일하는 한인 업소에서 그분들이 인간 대접을 받고
선한 이웃으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부터라도
그분들을 선하게 대하는 변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만일 주말에 그들을 찾아가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자기 가게에서 일하는
라티노 형제를 냉대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하나님 앞에 낯을 들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라티노 형제 자매들에게 더 적극적인 선교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교회 교우들 모두가 자신의 직장에서 일하는 라티노들에게
더욱 ‘선한 주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니 라티노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에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실줄로 믿습니다만, 더욱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잘 해 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더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소용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어떻든지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큰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찌 ‘자격’을 따지고 ‘소용’을 따지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오직, 아무 조건 없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끝까지 전심을 다해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정에서, 직업 현장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의 한 복판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사랑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이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처럼,
지금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보내시기 원합니다.
저는 오늘 예배에 ‘평신도 사역자 파송 예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이름을 보고, “오늘 파송받는 평신도 사역자가 누구야?”하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전부를 오늘 ‘평신도 사역자’로 파송하기를 원합니다.
‘사역자’라는 말이 생소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하자면, ‘평신도 목사’라고 하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목사(목자)입니다. 모두 영혼들을 돌보는 자들입니다. 모두 제사장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 신학의 가장 위대한 선언 중 하나입니다.
모든 직업은 성직(holy calling)입니다. 모든 직장은 예배당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여러분이 섬길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파송받은 분들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 파송받아 섬기는 목사입니다.
여러분은 가정 주부로, 병원의 자원봉사자로, 학교 교사로, 세탁 봉사자로, 법률 봉사자로,
의료 봉사자로, 차량 봉사자로, 또는 식당 봉사자로 여러분의 직장에 파송받은 성직자들입니다.
오늘 ‘평신도 사역자 파송 예배’를 통해 여러분 모두가 이 의식을 가지고 돌아가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전심을 다해 와싱톤한인교회의 목사로 섬기려 하듯,
여러분도 전심을 다해, 목사가 예배를 섬기듯, 여러분의 일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섬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움 받기를 기도합니다.
2006년도 새해에 여러분의 목회에 주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
생명을 다 바치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 큰 사랑에 감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구원받았으니
저희 또한 그 사랑을 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