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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LNCK 2023. 11. 12. 21:45

<공지> 다음 블로그를 2005년부터 써 왔는데,

2022년 7월부터 다음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전하더니

어제부터 링크가 다 깨졌습니다.

링크가 4만 개라서 일일이 복구하는데 약 6개월 내다봅니다.

그러나 컨텐츠는 깨지지 않고 남아 있는게 감사하죠. 불편하시더라도 기다려주세요.

 

급하게 사용하실 분은, 예를 들면

2022년 7월까지의 과거주소 http://blog.daum.net/rfcdrfcd/15975828에서

맨 뒤에 8자리 숫자만 떼서,

tistory가 들어간 새주소 뒤에 붙이면, 페이지가 열립니다. rfcdrfcd.tistory.com/15975828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1:24        출처, 정리        ☞ 골로새서 설교모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지극히 높으시고 충만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면서,
이처럼 성도들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말한다(24절).

 

이 말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그리스도께서 다 고난 받지 않으시고

남겨 놓은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에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역을 '다 이루셨다'(요 19:3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못 다 이루신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남은 고난’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바로 같은 24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몸에 채우노라." 1:24

 

따라서 교회가 고난을 받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 고난 받는 것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주님의 교회가 고난을 받으면,

머리 되신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며 아파하시는 것이 된다. 이게 ‘남은 고난’이다.

 

왜냐면 주님과 교회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지금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계신다.

 

▲그럼 이게 왜 사도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사용된 '채운다’ 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 사용된 '안타나플레로오'라는 희랍어 동사는

단순히 가득 채우다. 보충하다 라는 동사가 아니라

그 앞에 '안티' 라는 전치사가 덧붙은 복합동사이다.

 

전치사 '안티'의 개념은 맞은 편, 혹은 반대편에 있는 그 무엇'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고난받으시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또한 '자기 편에서' 고난 받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울의 고난사이에 평행성, 연합성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바울이 회심 전에 주님의 교회를 핍박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행 9:4)

 

교회 역사상 많은 충성된 순교자들이, 주님 때문에 핍박받고 고난받을 때에

주님 자신이 아파하시고 핍박받으신다고 증거하지 않았던가?

 

(예수님과 순교자 사이에 어떤 평행성이 있는 것이다. 마치 아바타처럼.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으로 인해서!)

 

따라서 우리는 여기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고난받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사도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자기 편에서' 고난받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 ’채우노라‘ 참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C.S.루이스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위로하는 말로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왜 이 세상에는 이렇게 고난이 많은 것일까요?'

 

그때 C.S.루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만한 우리인데,

만일 그 고난마저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교만해졌을까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인을 사랑했었던 C.S. 루이스였지만,

아내 잃은 상처의 슬픔속에서, 그가 한 가지 발견했던 고난의 의미,

그것은 바로 자기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고,

자기 편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음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신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된 것이지요...

 

 

▲회복탄력성

에미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터득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따뜻한 어른’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준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습니다’.

 

주로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할머니가 될 수가 있었는데

결손가정이었으니, 당연했겠지요.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로부터 참다운 인정을 받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세상 많은 고난을 잘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지만,

즉, 회복탄력성이 높지만,

 

그러나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버리는 약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고난에서 금방 떨쳐버리고 일어나는 것은

그와 같은 ‘회복 탄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 현실에서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라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자기와 함께 그 (마음으로) 고난을 당하고 계시며

(주님은 지금 천국에 계셔서 실제적인 고난을 당하실 수 없으니)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되는 셈입니다.

 

이런 인식이 있는 성도나 사역자는,

‘회복 탄력성’이 아주 높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또 그 고난의 시간에 자기와 동행하시며 은혜와 감동을 주시니

‘회복 탄력성’이 아주 높게 나타나,

금방 그 고난의 슬픔과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