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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1장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라

LNCK 2023. 11. 15. 21:31

https://blog.naver.com/karamos/80054112598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1:12~14        펀 글 정리

 

◑서론

 

하나님의 교회는 일 년에 두 차례씩 감사절기를 지킵니다.

전반부에는 맥추감사절, 후반부에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난 도시에 살고 있어서 보리 추수나 가을 추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감사할 제목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감사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성부 하나님을 지목하여 ‘그분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는 기독론에 관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스펄전 목사님은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에 착안해서 이 본문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골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13~14절에, 감사드릴 이유가 이렇게 나옵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본문은 왜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특별히 지목하여 감사드려야 하는지,

왜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은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바로 13절과 14절이죠.

 

▲성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서

특별히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잊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향해서는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대신 피를 흘려주셨고, 손발에 못이 박히셨으며, 몸이 찢기셨고, 심장이 터지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성자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우리의 입술에서는 감정적인 감사(emotional thanksgiving)의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또한 성령님을 향해서는 의지적인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면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보혜사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은사와 능력과 지혜를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해주시는 일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적인 감사를 통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자와 성령님에 비해 성부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대상에서 빼기가 쉽습니다.

 

찬송을 살펴봐도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송보다는

성자 예수님, 성령님을 찬양하는 찬송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지를 잘 아는데서 오는, 지성적인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성자 예수님을 향해서는 감성적인 감사를,

성령님을 향해서는 의지적인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의지적이란, 순종, 행동

 

▲성부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드려야 할 이유는

성자의 사역이나 성령의 사역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의미이며,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말씀은

‘성부 하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께 명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불러 모으신다’는 말씀도

‘성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성자 예수님께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모든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시지만,

이 중생의 사역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사역입니다.

 

성자는 성부께서 계획하신 일을 집행하는 분이요,

성령은 성자께서 집행하신 일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분이십니다.

성자는 집행자요, 성령은 적용자로서

계획자이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해야 할 최우선 순위에

성부 하나님을 올려 놓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성부께 감사할 이유 1.

우리를 ‘빛의 나라(천국)’에서 만유를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심 (12절)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2절의 ‘빛 가운데서’는 공동번역에서 ‘광명의 나라에서’로 번역되었습니다.

광명의 나라, 빛의 나라는 13절에 나타난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요, 천국입니다.

 

성도들은 지금도 천국 백성이요, 죽은 후에도 천국에 들어가는 백성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혹시 잠깐 지옥 길로 가다가는, 엄청 얻어터지다가 다시 천국 길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떠날 때 빛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천국 백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천국에 들어온 것만 해도 고맙지?

너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저쪽 구석에 있는 찌그러진 오두막에 들어가서

쪼그려 살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에는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권리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무리 부자집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들이 아닌 이상

종이나 하인에게는 별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저는 대학에 다닐 때 남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는데, 거기서 먹는 밥은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동그랑땡이 반찬으로 나왔는데,

마구 집어 먹고 싶은 마음을 삼키면서 어렵게 한두 개를 집어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눈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잣집에 가도 한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동그랑땡도 못 얻어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상속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종이나 하인, 일꾼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우리는 상속권을 갖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상속권을 가진 사람들인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아이가 초등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인데도

무슨 주식부자다, 빌딩 소유자다.. 하는 뉴스가 날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일찍 상속을 해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그 상속 지분은, 100년이 못 되어 사라지지만,

우리 성도가 받을 상속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상속이기 때문이고,

그 상속의 질이나 내용도, 그런 세상의 상속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6-17절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후사’란 ‘상속자(heir)’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공동의 상속권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엡3:6절도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후사가 되어서 상속을 받습니다. 상속을 받되 무엇을 상속받습니까?

 

히1:2절에 보면 ‘예수님은 만유의 후사가 되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유란 이 세상과 우주의 모든 것(everything)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만유의 공동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돈이나 명예가 우리의 영광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유를 상속하는 것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고난을 조금 당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고생할 때, 그것을 고생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혹시 땅 한 평 소유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인 분이 계십니까?

절대로 기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만유의 상속자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나중에 받을 상속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우리가 받는 영광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면서 조금 배고프다고, 땅도 없다고, 조금 가난하다고 기죽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지분이 위대한 줄 알고 용기 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상속의 지분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습니다. :12

‘합당하다(fitness, suitable, sufficient)’는 말은 ‘적합하다,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어른과 같은 힘은 없어도

인간으로서 모든 기능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장성하기만 하면 완전한 어른이 되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다 갖췄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팔이 세 개로 자란다거나, 다리가 다섯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이 되어도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도 두 개, 귀도 두 개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장성하지 못했을 뿐이지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합당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영생을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젊을 때는 죽음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이가 들어서 70세, 80세가 되면 죽음이 가까움을 느낍니다.

 

물론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죽음이란 빛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도 빛의 나라의 백성이긴 하지만

지금은 흑암의 나라와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연약하여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오직 축복과 사랑과 감사와 은혜와 감격만이 가득한

빛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을 떠나더라도 언제든지 천국에 들어갑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되,

이번 추수감사절은 특별히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상속’을 생각할 때, 물론 물질적인 것도 되겠지만, 영적인 것이 더 우선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영생’ .. 죽음 이후의 천국에서 영원한 삶.. 그것도 상속물이고요,

그 외에도 ‘하나님의 성품’ 이것도 상속물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니’ 벧후1:4

 

자기 밖에 모르고 살던 우리가.. 이제는 이웃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늘 남의 탓으로만 돌리며 살던 사람이.. 이제는 ‘내 탓이요!’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늘 남을 이용만 하려고 눈을 번득이던 사람이.. 이제는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늘 자기 욕심만 차리던 사람이.. 이제 남을 챙겨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신의 성품’들이.. 다 성도의 상속물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저 천국에서만 상속물을 받아 즐거워하지 않고,

이 현실 세상을 살 동안에도, 이 현재천국에서도, 상속을 받아서 부유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7월 9일 나라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국제 공항 이름은 벤구리온(David Ben-Gurion)입니다.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은 이스라엘 초대 수상이었습니다.

그는 13년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수상직을 마치는 날 그는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차를 네게브 사막으로 몰아라.”

 

벤구리온은 네게브 지방의 키부츠 스데 보케르(Sde Boker)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키브츠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77세 때였습니다.

키브츠에서 그에게 베푼 특전은 4평짜리 방 하나였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그는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희망은 사막 개척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사막을 개척하여 이스라엘에 쓸모 있는 땅을 한 평이라도 늘리겠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광야에서 우리의 창조능력과 개척정신의 유무를 테스트 받을 것입니다.”

 

그는 87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사막을 농토로 개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재산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입었던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밀밭으로 그가 개간한 사막의 토지만을 남겼습니다.

그는 개척정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여 국제공항 이름을 벤구리온이라 부르며

영원히 영원히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가 죽고 나니

5억불 (약 6천억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미국 타임지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는 아무 유산도 남기지 못 하였다.

조그만 기념비가 될 만한 일 하나 한 적이 없다.”

 

▲‘15분’ 이란 제목의 연극이 있다. (펀 글)

내용은 이러하다.

 

결혼을 앞 둔 30대 유망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박사 학위논문을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만 불치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이 나서

의사로부터 15분 후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게 된다.

 

연극에서, 청년은 불안한 마음과 초조 속에 떨면서 몸부림친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15분에서 14분, 13분, 12분, 11분으로

자꾸 흘러만 간다.

 

그 때 “편지요!” 하는 소리와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봉투를 열어보니 내용은, 억만장자인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고,

그 삼촌은 가족이 없어서, 삼촌의 상속 재산이

모두 자기에게 물려졌다는 변호사의 통보서였다.

 

그러자 청년은 즉시 “몇 분 남았느냐?”고 물어보는 시간에도

시계바늘은 청년의 생명이 10분, 9분, 8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며

계속 흘러갔다.

 

이 때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 안에는 박사 학위논문이 통과되었다는 통지서가 들어있었다.

 

안타깝게도 시계 바늘은 7분, 6분, 5분, 4분... 남았음을 가리키면서

계속 흘러가는데...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뜯어보니 청년의 애인이 편지를 써 보냈는데,

드디어 자기 부모님이 결혼을 승낙하셔서,

이제 마침내 우리는 결혼할 수 있다는 행복한 소식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시계는 아무리 멈추려고 발버둥쳐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그 청년이 숨이 멎는 것으로 그 연극은 막을 내린다.

 

그 청년에게는 억만장자의 상속권도, 내로라는 박사학위도,

아리따운 여인과의 결혼승낙도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15분은 모든 인생들에게

15개월도 될 수도 있고

15년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50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원하는바 물질, 명예, 정욕도

그 축복을 받기도 쉽지 않지만,

설령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 땅에서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계를 아예 꺼버리고 살든지,

아니면 애써 시계를 쳐다보니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외면하든지,

물질, 명예, 정욕 때문에 심지어는 영원도 하나님도 보지 못한다...

 

 

◑성부께 감사의 이유 2.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심 (13절)

 

1: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기에서 ‘그’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본문은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옮겨 주셨다(rescued and translated)’는 이 말씀을

과거에 완전히 끝난 일로 묘사합니다. 과거에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미 옮겨주셨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처해 있던 세계는 흑암의 세계였습니다.

이 흑암의 세력도 권세(the power of darkness)를 가졌는데,

이 권세는 영적인 흑암, 도덕적인 흑암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무엇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은 무엇인지, 전혀 분별할 수 없는 어두움입니다.

미신과 악령과 귀신과 거짓된 종교와 철학에 이끌리고,

자신의 악한 정욕과 탐심에 이끌리어, 어둠의 권세자들이 조종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세계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런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누구라도 몇 시간 정도는 어두움 속에서 머물 수 있습니다.

날이 너무 밝으면 눈가리개로 일부러 어둠을 만들어서 자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도 어두움 속에 있고, 내일도, 다음 달에도, 내년에도, 10년 뒤, 100년 뒤,

억 만년 뒤에도 어두움 속에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빛을 보게 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아마 미쳐버릴 것입니다.

 

“빛을 달라! 반딧불이든, 성냥불이든 조금이라도 빛을 보기를 원한다!”

실제로 죄수들을 캄캄한 독방에 오래 가둬 놓으면 결국에는 정신병동으로 옮기게 된다고 합니다.

외로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두움이 실제적인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두움의 권세 속에 처해 있던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고 편안한 세상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본문에 나오는 ‘옮겨 주셨다’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노예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옮기신 사건과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시고 예루살렘으로 옮겨주신 사건을 기록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출애굽 백성들의 해방과 옮겨짐의 감격,

바벨론의 포로신분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로 다시 옮겨짐의 감격,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그 옮겨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3

 

이 단어는 완전히 옮겨서 더 이상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갈 필요도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 소년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된 한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철부지 아들 하나를 끌어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싹수가 노랗다"는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 물건에 슬슬 손을 대기 시작하던 아이는 점점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조직의 일원이 되어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결코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사고를 친다고 해서 결코 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사건 뒷수습을 위해 밥먹듯이 파출소와 경찰서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소년원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이튿날 보따리를 싸서 소년원 근처에 방을 얻었고,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몹시 추웠던 그 날도 어머니는 가장 일찍 소년원에 도착해서

면회를 신청을 했습니다.

 

"애야 오늘 날씨가 많이 추운데, 혹시 감기 걸리지는 않았니?" 하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감기 기운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져 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던 아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철창 안에서 아들이 바라다본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추운 겨울날 감기가 들려 콜록대면서까지 자신을 찾아오신 어머니,

오랜 뒷바라지로 인해 나이에 비해 훨씬 늙고 초라해진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진 아들은

갑자기 대성통곡을 터뜨렸습니다.

 

그 눈물을 계기로 아들은, 조금씩 어둠의 생활을 청산해나갔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거듭했지만, 지금은 운전기사로 있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새 출발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끊임없는 방황과 타락 앞에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죽음으로 향해 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은

아마도 그 어머니의 마음과도 흡사했을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하셨죠. 눅23:28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갖은 고통이나 끝없는 방황이

너무도 안타까워 찢어질 듯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하나님께, 예수님께 죄를 지었다고 가슴 저리게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의 첫 발자국입니다. 그 전엔 그저 사람에게만 죄 지은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진정한 회개의 첫 발자국을 뗄 때, 비로소

어두움에서 빛으로... 서광이 그의 인생에 비추기 시작하는 거죠!

 

▲성도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은은한 등불이 이미 된 사람입니다.

 

등불은 어떤 것입니까? 어두운 방 한가운데, 등불을 켜놓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켜기 전과 후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입니다.

 

등불을 켜놓으면 왠지 분위기가 포근해집니다. 부드러워집니다.

따뜻해집니다. 행복해집니다. 거룩해집니다.

 

성도로 사는 길은 은은한 등불처럼 사는 길입니다.

불꺼진 집이나, 시가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칠흑 그 자체입니다.

 

등불처럼 사는 성도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존재 자체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등불 같은 성도에게서 그리스도의 자취를 찾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지친 사람들은,

그 등불 같은 그 성도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래 빛이십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내 속에 모셨으므로, 내 몸 자체가 등불이 된 것입니다.

 

등불은 침대 밑에 감춰두거나, 그릇으로 덮어 두어야 할 존재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나를 통해- 한줄기 빛이 되셔서

집안 가운데 높이높이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활활 타올라야 할 세상의 등불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면 너무도 볼품이 없습니다.

한없이 부족합니다. 지극히 나약합니다. 형편없습니다.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볼품없는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란 촛불 한 자루가 켜짐으로 인해, 완전히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부족한 우리 삶이지만, 우리 각자의 등(랜턴)에 그리스도가 점화됨으로 인해

우리는 의미있는, 매우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그런 동네 아저씨, 동네 아줌마가 아닙니다, 결코!

(설교문 아래에) 우리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들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가 흑암의 권세와 전투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빛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흑암의 나라가 여전히 존재하여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지상의 교회를 일컬어 ‘전투적 교회(militant church)’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전투적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피곤하거나 지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이후에 갈 나라는 ‘승리적 교회(triumphant church)’요,

마귀와 흑암의 권세가 찾아올 수 없는 승리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의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성부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부께 감사할 이유 3. 속량해 주심을 감사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속량 redemption 이란, 한자어인데,

'값을 치르고 (노예에서) 풀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패배하면 포로가 되고, 그 사람은 노예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된 사람한테, 돈을 지불해서

그 노예 상태에서 풀어주는 것이 바로 '속량' 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값이 치러지고

이제는 우리는 해방되어 졌다'

 

어디에서 어디로?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속량, 무슨 값을 지불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셔서

우리가 치러야 될 대가를, 그의 아들이 자기 핏값으로 다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속량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재밌는 것은 14절 '얻었다'의 시제가 현재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었느냐?

속량, 곧 죄사함을 우리는 얻고 있습니다. *헬라어 현재 시제는 현재진행 시제도 됨

 

이 세가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상속자로 삼아주셨고

-어둠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고

-예수님, 그 아들 안에서 우리는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다..

 

하는 것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깊이 깨닫게 되면

우리들의 삶 속에 감사가 넘쳐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도소에서 누가 제일 기쁜 사람인지 아십니까?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이랍니다.

 

사형수는, 내일이 보장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Dead man walking! 이란 말이 들리면, 그 날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기수로 감형되면,

이제는 편히 잘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감방이긴 하지만, 당장 내일 죽지는 않으니까요!

 

예수님의 피의 값으로 속량받은 성도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살게 됨’에서부터

무기수가 아니라

‘천국, 새 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걸 먼 미래에, 죽어서 천국가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오늘 내가 사는 현실 가운데서, 현재 천국의 맛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3가지를 깊이 묵상하면서,

풍성한 감사가 넘치는 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