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잠 시편 121:4, 127:1~2 200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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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축복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에서 1/3을 잠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는 날의 대부분은 잠을 자면서 삽니다.
이 잠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은혜를 받아야 되고, 잠자는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는 축복도 주시지만, 잠자는 축복도 주십니다.
잠자는 축복은 일하는 축복보다 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또 잠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축복을 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낮에 주는 것이 아니라, 밤에 주십니다.
낮에 일을 통해서 주시지 않습니다.
밤에 잠잘 때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는 안식이고, 하나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일에서 받지 못합니다. 잠을 통해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시127:2
▲사람이 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숨쉬는 것과, 잠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밥은 40일 안 먹어도 삽니다.
물도 두 주간 안 마셔도 삽니다. 그러나 숨은 4분만 안 쉬어도 죽습니다.
지금 숨쉬고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마지막 죽을 때 숨을 거둬서 죽지
안 먹어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숨쉬는 것이 생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데 밥 먹이고 물 먹인 것이 아니라 공기를 넣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코에 공기가 들어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셨다고 했습니다. 밥도 내 손으로, 물도 내 손으로 먹습니다.
옷도 내 손으로 입습니다. 그런데 코에 들어가는 공기는 내 손으로 넣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십니다.
먹는 것도 빈부격차가 있습니다. 물도 빈부격차가 있습니다.
그런데 숨쉬는 것은 빈부격차가 없습니다. 공기는 다 똑같이 들어갑니다.
전 세계에 있는 공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옷 입은 것 다르고, 학력이 다르고, 직장의 지위가 다르지만
코에 들어가는 공기는 다 똑같이 들어갑니다.
▲저는 어린시절에 너무 너무 가난한 집에 태어나 배를 채우지 못하니까
항상 허기졌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배가 고프면 물로 배를 채우고 잔디밭에 누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는 물로 채웠으나 가슴은 하늘로 채워다오.”
가슴을 하늘로 채운다는 것은 꿈이요 희망이지만, 또 다른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채우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요, 숨은 곧 하늘을 마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공기를 마시면서 하늘을 제 가슴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은 후에, 내 가슴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통하는 신비한 은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어렸을 때 잠 잘 방이 마땅치 않아서 친구들 집에 가서 잠을 잤는데
친구 집에 가서 잠을 자다가 어떤 때 문이 잠겨있으면
잠자는 사람들을 깨울 수 없으니까
집 주변을 빙빙 돌다가, 짚단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잠자리 하나 가지고 자는 것이 큰 복인데
나중에 예수 믿고 깨달은 것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되는데, 그 집은 뭐하는 곳이냐? .. 잠자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집으로 삼고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부모님께 늘 감사하는 것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배에 밥을 채워주지 않으므로
내가 하늘을 마시는 은혜를 받게 했고
집이 움막집이라 마땅히 잠잘 집이 없어서
하나님을 나의 집으로 삼아 큰 은혜를 받게 했으니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제가 효자가 되고 싶은 것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게 좋은 것을 주어서가 아니라 하늘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신비한 생명의 숨결을,
그리고 아버지의 안식의 집을 주셨기에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려고 고생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예정된 불효자라고 생각하고
나 때문에 우리 부모님 고생하시고 가난한 집에서 사셨나 하는 것 때문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많습니다.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①첫째는 건강해야 잠을 잘 잡니다. 병들면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할 때는
건강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신경이 쇠약하면 잠이 안 옵니다.
번민하면 잠이 안 옵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잠을 못 잡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을 잘 잔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②두 번째로 정신이 건강해야 잠을 잘 잡니다. 정신적으로 병들면 잠을 못잡니다.
우리 마음에 근심이 쌓이면 잠을 못잡니다. 남을 미워하면 잠을 못잡니다.
한 맺혀 있으면 잠을 못 잡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면 잠을 못잡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건강의 약속이 잠입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탄식하면 무슨 잠이 오겠습니까.
부부간에 서로 싸우고 밤에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마음에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③회개한 사람이 평안한 잠을 잡니다.
잠은 천국의 약속입니다. 내 영혼이 잠드는 세계가 천국인데
죄지은 자는 천국을 못갑니다.
그래서 죄지은 자는 밤에도 잠을 못잘 뿐만 아니라 천국의 잠도 못잡니다.
죄지은 자들은 괴로워서, 무서워서, 공포증 때문에 잠을 못잡니다.
사람을 죽인 자, 도적질 한 자, 악한 자는 잠을 못잡니다.
설사 잠을 잔다고 하더라도 쫓기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죄사함의 은총을 받아야 됩니다. 천국에 가기 위하여,
잠을 얻기 위하여 내 영혼이 안식을 얻기 위해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잠잘 때 어머니의 사랑이 극치에 이릅니다.
어린아이가 잠들 때 어머니는 곁에서 지극한 사랑을 보냅니다.
우리가 낮에 일할 때보다도 밤에 잠들 때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게 임합니다.
일할 때는 나 혼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어도 얼마든지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밤에 잠잘 때는 하나님 없이는 못잡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셔야 우리가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또 죄 지은 자는 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낮에 선하게 남을 도와주고 위해주고 사랑해 주어야 마음에 평화가 오니까
잠이 잘 옵니다. 지옥은 잠 못 자는 곳입니다. 천국은 편하게 잠잘 자는 곳입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잠을 잘 자십시오.
때린 자는 발을 웅크리고 자고, 맞은 자는 다리를 쭉 뻗고 잡니다.
양심에 가책이 없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잠은 엄청난 축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④여러분은 일하기 위해서 잠잡니까? 잠자기 위해서 일합니까?
일하기 위해서 잠자는 사람은 노동자입니다. 노예입니다.
그런데 잠자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잠자기 위해서 일합니다. 잠이 목적입니다.
돈 벌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장사꾼입니다.
잠자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이르는 것입니다.
낮에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잠을 잘 잡니다.
낮에 빈둥거리고 낮잠 자고 게으름 부리는 사람은 밤에 잠이 안 옵니다.
하나님께서 잠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세 가지 방법으로 잠을 주십니다.
▲1. 잠은 믿음으로 받는 은혜입니다.
잠은 전적인 신뢰와 의탁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 잠입니다.
그래서 잠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냥 자는 것 아닙니다.
잠잘 때 “주여, 믿습니다.” 하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풍이 휘몰아치는데 그 광풍이 메가톤급 파도였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 때 예수님은 배 난간 고물을 베개 삼으시고 주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어찌하여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때 주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풍랑 속에서 주무십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믿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지 못해서 잠 못 자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근심이 왜 잠을 빼앗아갑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믿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미래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데
하나님 손에 의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못자는 것입니다.
지금 근심, 걱정 있습니까? 다 놓으시고 편히 주무십시오.
나는 교회에 와서 조는 것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졸리는 설교는 자야 합니다.
저는 목사들에게 그럽니다. “설교를 잘하든지, 졸리게 하든지 둘 중 하나 하라”
괜히 열나게 하면 목회 못합니다.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은, 목사 안 건드립니다.
안자고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졸릴 때 자십시오. 걱정하지 말고 자십시오.
믿음으로 잠을 얻는 것입니다.
△옛날 초기 교회 때 장로님 한 분이 평양에 노회가 있어서
먼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며칠동안 평양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노잣돈을 좀 가지고 갔습니다.
잠을 청하려고 누워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무섭게 생긴 사람이 하나 들어와서
여장을 풀고 자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더 있으니까
장로님이 노자돈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밤새도록 ‘에헴’ 하면서 안 잔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도 ‘에헴’ 하면서 신호를 보냅니다.
같이 안자고 밤새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날 날이 새가지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그 분이 바로 목사에요.
서로 믿지 못해서 밤새도록 잠을 못잔 것입니다.
같이 잠자는 것 보통 믿음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머니를 믿기 때문에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 1977년도에 한신교회를 개척하고 목사님들과 같이 거제도에 가서
배를 타고 해금강을 가는데 갑자기 광풍이 휘몰아치는 것입니다.
저는 수영을 못하니까 배가 넘어지면 그대로 갑니다.
얼마나 파도가 심하게 휘몰아치는지 배가 파도 밑으로 가는 것입니다.
선장이 파도가 칠 때 배가 기울면 안 되니까
움직이지 말고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기둥을 꼭 잡고 얼굴이 노랗게 변해서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 하나는 엄마의 치마폭에 싸여서 파도가 치는데도
눈을 감고 잠을 잘 잡니다.
저는 그 아이를 보면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천국에 못 간다는데
네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무사했습니다.
우리가 밤에 부부간에 자는 것도 보통 믿음 가지고는 못잡니다.
저는 이발소에 가서 면도를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서 못 맡깁니다.
요즘은 부자간에도 잠을 같이 안자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노크하면 “누구냐?” “아들입니다.”
“밖에서 얘기해라”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인터폰으로 해라” 그럽니다.
아비 죽이는 자식이 너무 많으니까요. *2001년 경에 그런 뉴스가 있었죠.
부모님이 부자면 자식들이 돈이 탐나서 죽이는 살인 사건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요즘은 부모들이 밤에 문 잠그고 잡니다.
그러니까 같이 자는 사람들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신교회 개척하려고 청계산에 가서 6개월 동안 있을 때
목사님 두 분이 기도원에 올라와요. 다같이 개척교회 하는 목사인데
한 분은 오자마자 청계산 기도원 골방에 가서 그냥 자는 것입니다.
무사태평으로 잠을 자고, 다음날 일어나면 얼굴이 훤해져가지고 토요일 날 내려갑니다.
한 분은 오자마자 제 옆에 있는 바위에 올라옵니다.
와서 밤새도록 “주여” 하면서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철야하고
다음날 목이 쉬어가지고 내려갑니다.
6개월쯤 되었을 때 제 옆에서 철야기도 하던 목사님이 나한테 와서 그래요.
“목사님, 요즘은 실망이 됩니다.” “왜요?” 했더니
초저녁부터 잠을 자는 목사 교회는 굉장히 부흥이 되었는데
자기 교회는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도 부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럴 수 있느냐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주무시지요.
저렇게 ‘믿습니다.’ 하고 자야 은혜가 오는 것이지
목사님같이 못 믿어가지고 ‘주여’ 하고 소리만 치니까
‘야, 네 기도 소리 들으려면 내가 몸살 난다’ 그럴 것 아닙니까”
이 목사님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아도 속에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뢰성에서 약합니다.
초저녁부터 주무신 목사님은 개척교회 하려면 얼마나 근심이 많습니까?
그런데 근심을 다 잊어버리고 스트레스를 잠으로 푸니까
얼굴이 훤해져서 교인들이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 목사님 기도원 갔다 오시더니 얼굴이 훤해졌구나!”
목사님 얼굴 보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은 최대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체험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은총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사람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잠이 있습니다. 혼자 자는 잠은 믿음으로 잡니다.
그런데 같이 자는 잠은 사랑으로 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같이 잠자는 사람을 만날 때 행복을 얻습니다.
혼자 자는 것으로는 믿음의 신비를 얻습니다. 안식을 얻습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함께 자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함께 잘 사람을 만날 때 거기에 에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셨으나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한 여자를 만들었으니
그 여자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아담에게 잠 동무였습니다.
아담 혼자 에덴동산에서 밥 먹을 수 있습니다.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은 혼자 외로워 못잡니다. 외로운 것은 낮이 아닙니다.
밤입니다. 낮에는 일하므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밤이 오면 혼자 외로워 잠을 못잡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고 같이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에덴입니다. 에덴은 낮의 세계가 아닙니다. 밤의 세계입니다.
잠자는 사람을 만나고서야 에덴이 오는 것입니다.
부부는 잠자는 친구입니다. 잠자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일하려고 결혼하는 것 아닙니다. 출세하려고 결혼하는 것 아닙니다.
밖에 돌아다니려고 결혼하는 것 아닙니다. 둘이 잠자려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사람을 동거한다고 말합니다. 동사는 함께 일하는 자요,
동업은 같이 사업하는 자입니다. 부부간에 동사하는 것 아닙니다.
동업하는 것 아닙니다. 동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는 것을 낮에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낮에 활동하니까 사는 것 같지요.
그런데 동거하는 사람은 낮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에 잠자는 사람이 동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낮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활동하고 수고하는 것이고 함께 살고, 생명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행복을 나누는 세계는 밤의 세계인데 잠자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거하는 사람 하나 만나면 일생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잠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낮은 일하는 세계요, 밤은 잠자는 세계인데
낮은 수고하는 세계요, 밤은 행복을 얻는 세계입니다.
세상은 일하는 세계요, 성공의 세계요, 가정은 행복을 얻고 사는 세계입니다.
가정을 모르면 인생 살아 봤자 허사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1-2)
집은 가정을 말합니다. 건물이 있다고 집이 아닙니다.
가구를 사들였다고 집이 아닙니다. 둘이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파수꾼들이 성을 지키는 것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잠잘 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잠을 잘 자게 만들어져 있는 세계가 바로 행복의 세계이며, 보금자리이며,
에덴이며, 거기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는 곳이요,
거기가 바로 행복의 센터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 낮에 공부시키고 밤에는 시키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밤에는 잠을 자야 합니다.
아이들 공부시키다가 이 나라 교육이 어떻게 되어갔습니까?
경쟁만 있지 교육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정상적인 인간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낮에 학교 공부로 충분합니다. 밤에는 잠자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신랑 신부 여러분, 신랑은 신부가 있어야 잠을 잡니다.
신부도 신랑이 있어야 잠을 잡니다. 부부는 잠자도록 만난 돕는 배필입니다.
잠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잠자는 것을 제일 중요시하고
잠에서 행복을 얻어야 됩니다.
그래서 남편이 밤늦게 들어오는 것은 자기 아내에 대하여 굉장한 상처입니다.
잘못입니다. 또 들어온 남편에게 마음을 상하게 한다든지,
바가지를 긁어서 잠 못 자게 하는 아내는 악처입니다.
이런 아내는 평생에 살기는 살아도 편하지 않습니다. 부부는 잠을 도와주어야 됩니다.
잠자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입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 7:3)
의무는 둘이 잠자는 데 도와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 생활도 잠의 신비입니다.
잠자게 하는 과정입니다. 사랑의 극치는 잠자면서 완성됩니다.
잠 안자는 사람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좋아하는 것입니다.
짝사랑도 잠 못 잡니다. 둘이 사랑하는 사람만 잠을 잡니다.
‘나에게 입 맞춰 주세요. 숨 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임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
사람들은 임을 쏟아지는 향기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아가씨들이 임을 사랑합니다.
나를 데려가 주세요, 어서요,
임금님, 나를 데려가세요, 임의 침실로’ (아 1:1-7)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솔로몬이 쓴 시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솔로몬이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편안한 잠으로 유도하세요.
남편을 편안하게 잠들게 하세요. 남편이 잠을 잘 자도록 도와주세요.
남편도 자기 기분대로 살지 마세요. 아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런 잠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잠은 천국에 이르는 소망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잠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는 잠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 ‘스데반이 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영생에 이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내가 잠들 때 천국에서 깨어나기를 소원하십시오.
이것이 소망인데 내가 잠들 때는
내일 아침 깨어날 것을 기대하고 자는 것처럼
내가 죽을 때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새로운 세계를 약속받고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밤도 잠을 잘 때 죽는 연습을, 아침에 깨어날 때는 부활하는 연습을,
죽음과 부활을 계속 되풀이하다가 마지막 날 깊이 잠들어
나중에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의 나팔로 깨어날 때 모두 다 깨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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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 글) 돌아가신 존경하는 이중표 목사님께서 한번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함을 절감하고
“주여, 나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던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어떻게 능력을 주면 좋겠냐?” 하시더랍니다.
당시 유명한 신유 은사자가 있었는데,
”그와 같이 수많은 병든 자가 좀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을 주시옵소서.”하였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하는 말이
“그 능력을 받으면 병든 자하고 날마다 산다.
날마나 고름 짜내어야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
(바빠서)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밥먹어. 그래도 받겠느냐?”하시더랍니다.
그 순간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 안 받으렵니다.”했답니다.
그 때부터 마음 정리하고 설교자라도 바로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데,
설교도 그저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답니다. “예수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평생 자아의 죽음을 증거하는 별세 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사소한 실패로 인해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영적 침체는 점점 무겁게 중첩이 되어, 심한 좌절감으로 자기 목을 죄어 옵니다.
급기야 그는 “나는 위선자다” 하면서 자학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게 분명해. 나를 떠나신 거야!”
하면서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84년 9월 새벽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버리신 게 분명해, 제발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도로 몸부림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느니라.
네가 나를 배신하여 등을 내 보일 때도,
나는 너의 등을 바라보면서,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느니라.
맹세코 너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느니라.
언제나 너를 밀어 주었느니라.
언제나 다시 일어서라고 했느니라.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너를 항상 바라보았느니라.”
그는 영적 음성과 더불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바로 최용덕 집사입니다.
그가 영감을 받아 적은 시는 <나의 등 뒤에서> 라는 곡으로 태어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