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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에 비쳐지는 영성

LNCK 2023. 11. 20. 00:06

목소리에 비쳐지는 영성        12:19         큐티묵상 스크랩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공동번역)

He will not quarrel or cry out (NIV)……

 

목소리가 크면 무시당하는 세상

간혹 보통 사람보다 목소리가 더 큰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표현으로 우렁찹니다.

군대서 군가를 부를 때 좋겠고, 남들과 말다툼을 할 때도 쬐끔 이익이겠습니다.

 

특히 옛날에 마이크, 전화 이런 것들이 없었을 때는 큰 성대가 매우 유리했을 것입니다.

들판에서 농사짓다가도, 전장 터에서도... 큰 목소리는 사회에서 우대받는 ‘확성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큰 목소리가 남들에게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핸드폰으로 통화 할 때, 작은 목소리면 양해가 가능하나 *2006년 글

큰 목소리는.. 매우 귀에 거슬립니다. (코비드19 이후로 이런 문화도 변했죠)

 

식당 옆 테이블에 큰 목소리가 떡 버티고 앉아 있으면..

그 날 식사는 인내심 훈련소, 인격 훈련장으로 바뀝니다.

 

큰 목소리보다는 묵묵히 행동으로

예수님은 말이 많으셨을까요? 말 수가 적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목소리가 크셨을까요? 작으셨을까요?

 

그런 어리석은 질문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100% 인성을 가지신 보통 사람과 같으신 분이셨다”가 정답이다.

 

그런데 위 성경 전후 문맥(마12:20)을 보면,

예수님은 큰 목소리보다는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

 

다른 성경 구절에서는 또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예수님은 평소에 조곤조곤하게 사셨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12:19

 

오늘날 내 목소리에는, 과연 어떤 영성, 어떤 믿음이 비쳐질까요?

 

때로는 간략한 말이 더 효과적입니다.

(이랜드 박성수 사장의 칼럼 ‘질문경영’에서 인용)

 

「“내가 준비를 덜 했을 때 말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

준비가 잘 되면 더 간략하고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렇다. 완성된 것은 단순해진다.

복잡한 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과정이라는 뜻이다.

 

앞으로는 내가 던진 질문 하나가

나와 만나는 사람에게 화두(말의 머리, 시작)가 되어

그가 밤이고 낮이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지혜의 사람이 되고 싶다.」

 

해외에서 특히 조심합시다. 중국분들도 평소에 목소리가 크신데,

한국인도 목소리가 선진국에 비하면, 큰 편입니다.

 

동남아 여행지에서도 보면, 주변 테이블에 앉은 서구인의 대화는 거의 들리지 않는데

두세 테이블 건너에 앉은 한국인의 대화는 왜 그리 잘 들리는지...

 

어떤 한국인 회사에 근무했던 어떤 동남아 직원이

한국인 사장이 자기에게 소리지르고, 고함질러서 자신을 학대(verbal abuse)했다고

그 사장을 고소하겠다고 합니다.

 

글쎄, 소리지르고 고함지른것도 고소가 성립되는지는 변호사에게 물어봐야 되겠지만

한국인의 소리지르고 고함지르는 버릇이

외국인들에게 상당히 당혹스럽게 비쳐졌던 것만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예수님을 본받아 너무 큰 목소리로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툰다’ ‘들레다’는 말은, 서로 비슷한 말인데, 큰 목소리로 고함지르는 것을 뜻합니다.

 

목소리에서도 우리의 영성이 묻어납니다.

예수님을 본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너무 큰 목소리로 기선제압 하거나, 남을 누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펀 글)

「나는 20대 와 30대 초반까지 YFC(십대 선교회)운동에 관련되어 있었지만

당시 민족 복음화를 외치며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예수 그리스도의 푸르고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는 목사님의 외침에 크게 감전되어 있었다.

 

나는 CCC회원은 아니었지만, 1971년 그가 민족 복음화를 선언하던 현장에 있었고,

그가 주관한 1980년 세계 복음화 대 성회에서도 통역 강사로 섬기면서

그분의 사역에 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김준곤 목사님에게 크게 영향을 입은 것은

우선 나는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를 큰 목소리로 고함치지 않아도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처음 그 분의 설교를 접하면서, 작은 낭만적인 목소리로 호소함에도

그의 설교는 마치 내 세포의 깊은 구석 구석을 터치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한 확신과 열정이 있으면,

굳이 목소리를 크게 키우지 않아도.. 그 확신과 열정은 충분히 전달됩니다.

 

그렇지 못하고 뚜렷한 신념과 열정이 없는데도

누가 목소리만 크게 높이면

회중들은 은근히 ‘톤이 시끄럽다,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김준곤 목사님의 열정은, 민족 사랑의 외침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과학, 예술 모든 삶의 영역에 그리스도를 심어

이 민족을 그리스도의 민족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외침은

아마도 그가 이 땅에 남긴 가장 위대한 로망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펀 글)

 

▲[성서조선 창간사, 1927年 7月]

 

...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 말이 또 있으랴?

 

... 드디어 눈빛은 빛났고 그 초점은 하나로 명확해졌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그 어떤 무엇’ 을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꾀할까?

오직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에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구약 성서’ 한 권이라고.

 

그리하여 같이 모여 걱정하고 같은 소망을 가진 어리석은 친구 대여섯 명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마을(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마다 모여서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 온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

누군가가 그 동안 스스로 연구했던 것의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할 것을 제의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좋은지 나쁜지, 그 시기가 적절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소원하기는 이를 통해서 뜨거운 사랑의 순정을 전하려는 것이며,

정성을 다한 선물을 그녀(조선)에게 드리려는 것이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말로는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말빨이 아주 센 초로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 며느리는 이제 죽었다라며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어머니가 조용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며느리를 처음에 꽉 잡아 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생으로 트집을 잡고 일부러 모욕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며느리는 그때마다 시어머니의 발밑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느닷없이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냐?”

하고 트집을 잡았지만 며느리는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하고 겸손히 대응하니,

시어머니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 한 번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나냐?”라고

시어머니는 공연히 며느리에게 모욕을 줬습니다.

 

그렇지만 며느리는 도리어 웃으며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

 

매사에 이런 식이니 시어머니가 아무리 찔러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대꾸라도 해야 큰소리를 치며 나무라겠는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인지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저 시어머니 밑으로 기어들어가니

불안하고 피곤한 것은 오히려 시어머니 쪽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저쪽에서 내려가면 이쪽에서 불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내려가면 반대로 저쪽에서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결국 이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먼저 올라가려고 하니까 서로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좌우간 나중에 시어머니가 그랬답니다.

너에게 졌으니 집안 모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시어머니는 권위와 힘으로 며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며느리가 겸손으로 내려가니,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겸손에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겸손보다 더 큰 덕은 없습니다.

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올라간 것입니다.

 

아니, 내려가는 것이 바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은 행복합니다. ('좋은 글' 중에서)

 

안수받은 지 10년이 된 어느 성직자가 이런 고백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의 종으로 생활하는 동안 주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사무실에서 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하던 선배 종 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회의 대상이..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점점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가면 으레 가장 좋은 자리에 먼저 앉습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내가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의나 설교도 쓸데없는 말로 자꾸 길어집니다.

 

회의 때는,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바빠서 못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용서 받을 것들이 점차 쌓여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