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ikk/70113355609 정리
◈무엇을 찾습니까? 요1:35-39 2011.01.30. ☞▣ 제자 양육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요1:38
◑도입 / 50대 여성들의 삶의 행복도 조사
얼마 전 (2011년 설교) 조선일보사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 10개국의 50대 여성 5,190명을 대상으로
삶의 행복도에 대해 조사를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5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보통 인생의 행복도가 20대로부터 40대까지 꾸준히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는 통계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사 결과, 놀랍게도 한국인 50대 여성이
조사한 10개국 중에서 가장 불행한 집단으로 드러났다고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자주 모델 나라로 꼽는 우리 조국은
가끔 이렇게 자랑스럽지 못한 일로 세계 1위를 기록하곤 합니다.
아마도, 이민자로 사는 50대 한국 여성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한국에 사는 50대 여성들보다 더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저의 눈길을 끈 대목은 정작 다른 데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해 마음에 안정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가졌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한국의 50대 여성들 중에 77.8%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여성들의 응답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를 찾았다고 답한 여성 가운데
오직 7.4%만이 종교의 본질인 ‘진정한 믿음’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92.6%는 종교에 귀의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믿음보다는, 마음의 평화나 그 외 비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 가지의 유혹을 뿌리치고 또한 여러 가지의 불편을 마다하고
오늘 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종교의 본질인 믿음을 추구하는 7.4%에 속하십니까?
아니면, 종교를 마약처럼 혹은 요술 방망이처럼 취급하는 92.6%에 속하십니까?
◑ ‘무엇을 구하느냐’ 요1:3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니,
이 질문은 예수께서 첫 제자들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려앉는 모습을 본 다음 날의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 둘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1:35절의 요한은, 세례요한입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이고,
다른 하나는 이 복음서를 쓴 세베대의 아들 요한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 곁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곁에 있던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36절). 간단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 뜻을 제가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저분을 보게.
어제 내가 말한 것처럼 저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네.
이제는 저분을 따라가게. 나의 시대는 끝났어.
자네들이 나를 따라다닌 이유는 메시야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메시야가 오셨는데 망설일 것이 무엇인가?
내 걱정하지 말고, 떠나게. 저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게.”
요한과 안드레는 선생의 뜻대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1:37
그들이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돌아서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38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러자 요한과 안드레가 대답합니다.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38
이 대답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혹은 “영생을 얻고 싶습니다.”
혹은 “질병의 치유를 받고 싶습니다.”
혹은 “큰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더 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과 안드레는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을 알고 싶다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나 봅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그분이 머무시는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그 날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 날만이 아니라, 내내 함께 지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자,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두 제자는 왜 그렇게 답했으며,
예수님은 왜 그 대답을 반갑게 여겼을까요?
두 제자는 선생으로 모셨던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보냄 받은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분이 장차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한 제사를 드리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또한 성령의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를 이제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선생님, 저희를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선생님과 함께 살려 합니다.
선생님이 잡수시는 음식을 저희도 먹고, 선생님이 잠자는 곳에서 저희도 자고,
선생님이 가시는 곳에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말은,
저희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제자로서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의 이 같은 헌신과 결단을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여 도움을 얻으려는 한국의 50대 여성 중에서
오직 7.4%만이 믿음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어떤 종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과 더불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교회를 찾고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
진실로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과 동고동락하면서 더불어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이들은 소수입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미치지 않는 일(복)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어내고 싶어 합니다.
사정이 절박하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더욱 절박해집니다.
하지만 사정이 나아지면 하나님은 필요가 없어집니다.
때로 그렇게 하소연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제 신앙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제 사정이 급할 때면 열심을 내다가,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그 열정이 식어버립니다. 제 신앙이 참 이기적이지요.”
이 말씀에 공감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너무 자책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실상입니다. 대략 믿는 사람들의 92.6%가 거기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다수가 그렇다고 해서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분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기만을 바랄 때,
우리의 믿음은 여지없이 그같이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던진 이 질문을 마음 깊이 새겨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혹시, 질병의 치유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질병이 낫고 나면,
혹은 하나님이 자신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해 주님을 찾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그 욕심이 채워지고 나면,
혹은 믿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마음이 들면, 그 사람은 믿음을 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즉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을 먹이신 일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절정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뒤로 하고 산으로 몸을 피하십니다.
그분이 주려 하는 것과 무리들이 구하려는 것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분에게 열광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갑니다.
대부분이 떠나고 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6:67)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곁에 끝까지 남아있을 7.4%에 속하십니까? 아니면,
한동안 열광하다가 결국 떠나가고 말 92.6%에 속하십니까?
지금은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담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는 그분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우리는 비 본질을 찾는 절대 다수에 속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본질을 찾는 소수에 속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결국 나 좋자고 믿는 거 아닙니까?
나에게 필요할 때까지만,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만큼만 믿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대부분 나 좋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로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를 곰곰이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분에게서 얻어내기만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까?
짧게 보면, 하나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것이 더 좋아 보이지만,
길게 보면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두 종류의 학생을 생각해 보십시다.
선생에게 잘 보여서 좋은 학점을 받으려는 학생이 있습니다.
반면 선생 자신이 좋아서, 그와 가까이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정성을 쏟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의 관심은 좋은 학점이 아닙니다.
선생과의 관계가 목적입니다.
짧게 보면 선생에게 잘 보여 좋은 학점을 받는 것이 이익이라 할 수 있지만,
길게 보면 선생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더 이익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제 아무리 대단한 것을 얻어냈다 하더라도.. 하나님 자신만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에게 돌아가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고
그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요 17:21)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환상 속에서 사도요한에게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계 3:20)
여기서 보듯, ‘더불어 먹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구하는 모든 다른 것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실은 이토록 분명한데,
왜 사람들은 믿음의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만을 구하고 살아갈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더불어 먹고 그분과 더불어 자고
그분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누리는 길이지만,
동시에 많은 손해와 불편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순간 나의 주권을 포기하고 그분께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변해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그분이 나를 이끌어 가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눅 9:57)
그러자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58절)
여기서 예수님은 마치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 속에 날카로운 질문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메시지>에서 그 의미를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묵는 곳은 일류 호텔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항상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런 신비로운 차원이 믿음의 삶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호의호식하며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성령에 감화 받아 주님께서 가신 길을 가야하고, 주님께서 사신 삶을 살야 합니다.
▲얼마 전 속회모임에서 어느 교우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두 번 뵈었다고 합니다.
두 번 다 꿈속에서 만났습니다.
한 번은 사는 형편이 너무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너무도 힘들던 어느 날,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은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걱정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또 한 번은 남편이 어느 후진국에 잠시 동안 교수로 가르치는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분은 그 나라에 사는 주재원들과 상사 직원들과 함께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후진국에서는 달러 파워가 강하다 보니, 하인도 몇 사람 두고,
매일 같이 파티와 오락을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뵌 예수님은 과거에 만났던 그분과 사뭇 달랐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타나셔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주님은
이번에는 차가운 포정으로 책망하시는 겁니다. “네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
이렇게 살라고 너를 구원한 줄 아느냐?”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역경과 고난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할 수 없습니다.
나와 함께 동거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낭비하며
살 수 없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어찌 산해진미만을 찾고 원앙금침만을 구하겠습니까?
◑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1:39
오늘 본문에 보면,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요한과 안드레가 주님과 함께 살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했을 때, 예수님은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39절에 보니,
일행이 예수님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0시 쯤이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여기서 왜 굳이 시간을 명시했을까요?
그 날의 그 사건이 요한에게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만나고 그분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한 그 날,
그리하여 그분에게 제자로 받아들여진 그 날, 그리하여 그분과 동고동락하게 된 그 시간이
요한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때로, “당신이 구원받은 날과 시간을 말해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한 때, 그 같은 질문으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서 꼬여 넘기던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이 구원받은 날과 시간을 모르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전환점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전환점이 한 번에,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여러 번의 전환점을 거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된 전환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전환점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께 내 삶을 헌신했는지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날을 적어놓고 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전환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도에 회심한 사람들도 그렇고, 모태신앙인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본질을 구하는 사람에게만 이 같은 전환의 경험이 일어납니다.
다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을 찾아 그 문제 해결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 받는 전환의 경험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찾을 때, 우리는 그분을 대면하게 되고,
그 같은 대면을 통해 우리는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같은 만남의 사건이 없이는 구원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불치의 병을 치료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그분이 가시는 곳으로 가고 그분이 품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까? 축복도, 건강도, 이적도,
혹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필요해서 그분만을 간절히 찾았던,
그리고 그 간절한 열망을 다해 그분께 내 마음과 영혼을 바쳤던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러한 간절한 열망이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만지심과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순간이 있었습니까?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요한이 주님을 만나 그분에게 자신의 전 생애를 내어 드린 그 때를 기억하며
“그것이 오후 네 시 쯤의 일이었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 순간과 그 경험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그 같은 전환의 경험이 없었다면, 한 번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서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질문 끝에, “내가 찾는 것은 다만 나를 지으시고 나를 구원하셨으며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오직 그것밖에 없습니다.”
라고 답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고생이 되고 손해가 되고 때로 피 흘림이 되더라도
그분과 함께 있는 것만이 나에게 복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 고백과 기도와 열망이 주님을 만나게 할 것입니다.
그 만남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줄 것입니다.
혹시, 요한처럼 주님을 만나고 그분에게 삶을 통째로 드렸던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까?
혹은, 그렇게 또렷한 기억은 없지만, 작고 소소한 전환점들을 거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해 오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도 큰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현세적인 축복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그분에게 받아들여져서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큼
큰 축복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상황의 어떠했든, 저와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본질을 찾아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7.4%에 속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곳에 머물러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분이 가시는 길을 가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며, 그분처럼 변모되어 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누구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겸손입니다.
왜냐면 저는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의례적으로 갖게 된 스승이 아니라
제가 마음으로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스승 말입니다.
20대 때까지만 해도 저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대 후반 이후
그들도 다 저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불과하게 되었기에
깨달음을 위해 누구의 책도 읽지 않습니다.
성경과 성 프란시스의 글들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에 대해
Self educated person, 독학생이라고 합니다.
이는 제가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여러 교설에 휘둘리지 않고
예수님만을 스승 삼기 위해서이고
실제로 예수님만이 저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스승’이라는 말도.. 대단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시는 것도.. 대단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내가 존경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나의 스승으로 모셨다면
그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소중한 분이시며, 참 현명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럴게 스승이 대단한 존재라 할지라도.. 스승은 주님만큼은 아닙니다.
스승 Master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분이지만
주님 Lord은.. 그 존재를 따르는 분입니다.
스승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분이지만
주님은 나를 좌우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스승께는 자기 존재 영역을 포기할 필요가 없으나
주님께는 자기 존재 영역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눅5:11
예수님은 나의 스승님이십니까?
아니면 나의 주님이십니까?
△집을 떠나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가 사는 집을 떠나는 것이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눅9:58)
그런데 우리는 집을 비우지를 못한다.
더 큰 집, 더 편안한 집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보면, 모든 것을 소유물로 바라보게 된다.
집에 사는 부모도 처자도, 만나는 사람도.. 나의 소유물로 보이게 된다.
집은 더 이상 먹고 자고 일어나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된다.
집이 소유물이 될 때, 그 집에는 오로지 나를 잃는 일만이 남아있게 된다.
집을 비울 때, 집이 소유물이 아닐 때, 집이 집일 때,
나는 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으며, 집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제야 비로소 내 ‘집’에 유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주님을 집에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집을 비워야 한다.
집을 팔고 처분하라는 뜻이 아니라,
집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라는 뜻이다.
집에 대해 자유 해야 한다. 집이 집이면 된다.
△‘전세방을 정리하면서’ (펀 글)
며칠 전에 전세방을 완전히 정리했습니다.
3년 반 동안 내 집처럼 편하게 살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떠날 때가 되자 그 집이 내 집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얼마 전 소그룹에서 어떤 형제님의 나눔이 생각났습니다.
“전세를 얻어서 오래 살다 보면
그 집이 자기 집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주님이신데,
살다 보면 우리가 주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고전 6:19-20).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전세를 내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인 앞에 서야 하고
주인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결산을 해야만 합니다.
주님이 언제 전세방을 빼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내 삶에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지 맙시다.
주인이 집 빼라면, 아무 소리 없이 빼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전세를 빼서 이사 다니는 것도,
영성 훈련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을 붙드소서.
주님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도록,
주님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도록,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만을 구하도록,
저희를 붙드소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주님과 더불어 고난을 당하며
주님과 더불어 부활에 참여하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을 누리도록
저희를 이끄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