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9 주일예배 //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 - YouTube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 골1:21~22 ☞ 골로새서 설교모음
◑복습 및 도입 주1)
◑본문 골1:21~23절의 개요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오늘 우리가 살피는 21절은, 원문을 보면 무슨 단어로 시작을 하느냐?
21절 제일 뒤에 나오는 '너희를'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영어로 and you '그리고 너희를'
이것은 초점이 바뀌는 거죠.
앞서 15~ 20절까지는 초점이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었다면
본문 21~23절은 초점이 "너희"로 옮겨집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로 초점이 옮겨집니다.
21절은 "골로새 성도들의 과거 모습이 어떠했나?" 를 기록하고,
22절은 "이런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놀라운 일을 하셨는가?" (현재)
그래서 골로새 성도들의 현재,
그들은 지금 어떤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는가?
23절은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골로새 성도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23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미래)
◑골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골로새 성도들은 과거에 누구였나, 어떤 상태였는가?
위 21절을 보시면 세 가지 단어가 등장하는데,
원문 순서대로 하면,
-멀리 떠나 있었다.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
-악한 행실로
이것이 골로새 성도들의 과거의 모습을
바울은 세 단어를 통해 압축적 묘사합니다.
▲1 그들은 '멀리 떠나 있었다'
지리적인 거리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멀리 떠났다'는 것은 관계가 뒤틀렸다,
더 나아가서 '단절되어졌다' 라는 뜻입니다.
그럼 누구로부터 멀리 떠났나요?
엡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라고 했죠.
여기 엡4:18의 '떠나 있도다' 단어가, 본문 골1:21의 '멀리 떠나'와 같은 단어죠.
*아팔라트리아오, 영어로 alienated
엡2:1~2절에도 보면, 우리 성경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 했는데,
위 구절에서, 또한 다른 구절에서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던 상태를
바울은 '죽음'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본문의 '멀리 떠나'가 그런 뜻입니다.
▲2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 :21
'마음'의 원어적 뜻은 사고방식, 마인드셋, 성향, 마음의 방향 입니다. *영어로 mind
너희 마음의 방향이 어떠했느냐?
'하나님을 향해 원수가 되어있었다'는 거죠.
비슷한 표현을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골로새 교인들에겐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 라고 짧게 편지했지만,
로마 교인들에겐 롬1:21~23절에서 길고 자세히 썼죠. 같은 맥락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 또는 금수의 형상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왜 바꾸었습니까?
왜냐면 사람들은 신도 자기 구미대로 길들이기 원하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사람은 싫어하고 미워해서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만들어 버렸는가?
'자기에게 길들여진 신으로 만들어 버린' 거죠.
좀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길 들이려는' 신자가 간혹 있습니다.
돈 좀 갖다드리고, 그리고 교회 몇 번 나와 주고..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서 한없는 복을 주신다고 믿는...
로마 사람들이 당시에 여러 우상을 섬긴 이유는
썩어질 사람의 형상과 금수(짐승)의 형상을 한 신들을 섬긴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 신을 스스로 만들어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흐름은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 :21 를 살피는 중입니다)
나아가 롬1:2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
미국에서 아이들 유아원 보내놓으면,
제일 먼저 배워오는 말이 'I hate you' 나는 네가 싫어!
거기 또래 친구들이 그런 말을 종종 쓰니까, 자연히 배워오는 거죠.
로마교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싫어했다는 거죠. I hate you 식으로요.
이것은 결국 무엇의 반영이냐?
창3:5절은 뱀이 여인과 아담을 부추길 때, 결정적으로 날린 말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으면, 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서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바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게 됩니다.
다 무엇이죠? 하나님을 향한 반역,
그 중심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과 원수됨, 하나님을 미워함이 있다는 거죠.
▲3 '악한 행실로' 21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악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단절되면, 그 결과로 또 악한 행실에 휩쓸리게 됩니다.
엡4:18~19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래서)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자신을 방탕에다 던져버렸다'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했다' 이렇게 바울은 묘사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과거를!
엡2:3절에도, 에베소 교인들이 주님을 믿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지배를 받았다는 거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악한 행실'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끝도 없이 '죄'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죄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이거는 '자기중심성 self-centered' 입니다.
내가 항상 중심이 되기를 원하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Self-centered 가 아니라 God-centered 입니다.
바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죠. *소설가 박완서의 자기중심성 회개 주2)
그러나 예수 믿기 전 자연인들, 죄인들은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게 '악한 행실'의 본질인 거죠.
정리하면, 지금 본문 골1:21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이, 주님을 믿기 이전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설명합니다.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악한 행실', '멀리 떠나 있고', '원수가 되었던'
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과 관련된
에베소서의 내용, 또한 로마서의 내용을 더불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골로새 교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과 똑같죠.
△그럼 모태신앙인은 어떻게 되나요?
위 21절이 모태신앙인에게도 해당 되나요?
여러분,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저는 모태교인으로 신앙생활 하다가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난 때는
대학교 2학년 겨울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저는 모태신앙 이었지만, 언제가 제일 무서웠냐면,
저는 기도 할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제가 교회 학생회에서 회장이고, 모든 칭찬을 다 받고 했는데,
그런데 기도만 하면, 저는 하나님과 남남처럼 느껴졌어요.
당시 저는, 기도만 하면
하나님과 저 사이에 누구도 깨트릴수 없는 뚜꺼운 벽이
하나님과 제 사이를 막고 있는 거 같았어요.
제 동생이 먼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동생이 기도하는 걸 보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같이 느껴졌는데,
아직 주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저는
아무리 목 놓아 부르짖어도 (가끔 이럴 때도 있죠. 지속적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이 남남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성경 가운데서 가장 무서웠던 가르침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구원받는다' 했는데,
저는 이 말씀, '내가 이렇게 열심히 (몸부림) 하는 데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걸 보면, 하나님이 나를 안 택하신 모양이다...'
저는 참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제가 마음에 결심을 해서
'내가 이제는 성경을 한번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 말씀과 그 뜻대로 한번 제대로 살아보자!'
그래서 제가 대학교 1~2학년 때, 정말 독한 결심으로
제가 가장 성경을 많이 공부했고, 말씀대로 살려고 제가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역설적으로 '내가 얼마나 악한 행실에 빠져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나만큼 천사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하나님 말씀 뜻대로 한번 살아 가려고 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내 의지보다,
그것을 좌절시키는 어둠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칠 때, 제가 깨닫게 된 것이
'내 속에 얼마나 깊은 어둠이 있는가?' 하는 것을
저는 그때 역설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는 사실 골로새 성도들의 과거의 모습이
제 과거의 모습과도 같다는 거죠...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21절에 그랬던 그들을,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어떤 놀라운 일을 하셨느냐?
그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화목하게 하셨나요?
'그의 육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님은 그분의 친구가 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원문에는 '육체의 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몸'이라는 게 2번이나 강조되어 있어요. *24절에 '몸된 교회'에서 또 한 번 나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참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기억하셔야 되는게,
정말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진리라면
혹시 마음이 저처럼 높아진 사람이 있다면,
이제 은혜를 받고 세월이 지나면
나의 열심, 나의 수고, 나의 노력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목을 이루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만약에 지금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려면,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목회 열심히 한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수 있죠.
그러니까 마음이 높아진 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을 낮추셔야 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너무 낮아진 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나는 주님께 돌아가기에 너무 망가진 거 같아' 하지 마세요.
그건 주님의 '화목케 하신 사역'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청년들 섬기면서 참 이런 청년들을 많이 만났어요.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회복시키기에도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너무 망가졌습니다.'
근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내가 아무리 망가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케 하셨습니다. :22a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케 하신 것은, 놀라운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22b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여기서 '세운다'는, '가까이에 두다, 곁에 두다, 세운다' 라는 뜻입니다. stand by, present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곁에, 가까이 두시기 위해서
어떤 존재로 만드시느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곁에, 하나님 가까이에 두시기 위해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고, 흠없고' 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제사와 관계된 표현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죠. 제사장도 거룩합니다.
제물도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됩니다.
그 개념을 지금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이 보실 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거죠.
'책망할 것이 없는'은
법정 용어로 '고소 당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법정에 섰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고소당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참 놀랍지 않나요? '우리가 거룩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드려진 인생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흠이 없다'
구약에 제물로 양을 바칠 때, 흠이 없는 것을 골라서 바쳤죠.
얼룩이 없는 빨래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화목을 통해서, 이런 사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이런 성화와 관련된 표현들은, 결국은 미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현재적인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의 삶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보실 때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서 의로운 자가 되었고, 그 후로 변화되어 믿음의 삶을 추구합니다.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과 화목되어,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는, 이제 이후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거룩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가 되어서, 그 신분에 걸맞게
거룩하게 사는 것이죠. 심령이 변화된 사람은 그렇게 거룩을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그런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영원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실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꿈입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아주 재밌는 구절은 엡5:25~27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5절에, 남들들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26절에, 예수님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시냐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은 말씀을 뜻함
마치 목욕시켜 주시는 것과 같죠.
27절에, 이제 깨끗하셔서 거룩하게 하셔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해서
티나 주름잡힌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게 하나님의 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지금도 누가 일하고 계시느냐?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거죠.
고전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9절입니다.
고전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바꿔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론'을 생각할 때, '칭의' 한 면만 보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성경적 구원론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칭의'와 '성화'가 같이 갑니다.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칭의'가 일어나면, '성화'가 같이 일어납니다.
완전한 성화는 천국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이 땅에서 성화를 추구하며 살게 되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에서
그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회심한 성도들은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이미 성화되었고,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심
그 상태에서 남은 인생, 성화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 성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는 칭의가 제대로 일어난 것이 아닌 증거가 되죠.)
이걸 믿으시나요?
우리가 앞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바꿔가실 것입니다.
지금 저를 한 번 쳐다봐 주세요.
'제가 앞으로, 하나님 보실 때,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정말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여러분, 각자도 한 번 대입해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성도로 바뀌겠습니까?
바뀔 것이라고 믿으셔야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많은 환난, 고생, 시험을 보내시죠.
성화의 용광로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으시는 거죠.
그러므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절대 안 바뀔 거야!'
△저는 과거에 청년들을 섬길 때
'저 친구는 도저히 안 되겠다' 라고 생각했던 그런 형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했죠. '하나님, 쟤들은 안 될 거 같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정말 생생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저 형제, 저 자매를 귀중하게 만들어주겠다.'
정말 하나님께서 제가 거부할 수 없는 음성으로, 큰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제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 제가 볼 때는 안 됩니다. 제가 볼 때는 가망이 없는데,
하나님은 뭘 믿고 지금 저한테, 저들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까?
제가 볼 때는 안 되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하나님, 제가 두고 보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나, 안 되나 두고 보겠습니다'
우리 청년 형제 자매들이 절망스러운 행동을 할 때마다,
제가 이빨을 깨물고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두고 보겠습니다. 되나 안 되나 두고 보겠습니다'
도저히 안 바뀔 것 같았는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정말 그 청년들을 바꾸어 가시는 것을, 나중에 제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제가 가장 가슴 뛰었던 것은 무엇이냐?
'나도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거예요.
저는, '저는 안 바뀔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저는 정말 바뀌지 않으리라 믿었죠.
저는 이중적이고, 모순 덩어리라고.. 제 자신을 그렇게 오래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정말 주님께서 제게 '야, 내가 너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내가 너를 세우겠다'
그래서 저는 가장 가슴 뛰는 가르침이 '내가 바뀔 수가 있구나..'
그 다음에 이제 저를 가슴 뛰게 했던 게 무엇이냐면
'우리 성도들이 바뀔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성경의 약속이죠.
아무리 사람들이 볼 때는 '저 사람은 안 바뀔 것 같고, 바뀔 수 없는 것 같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면 자꾸 뭐가 보이나?
사람들이 가진 약점과 허물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약한 것만 보이죠.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더 크게 보여요.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 이 세상의 유혹.. 얼마나 그게 큽니까?
그러니까 이런 세상, 그리고 이런 사람이 살아갈때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이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때, 우리들 속에 무엇이 찾아오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진정 회개, 회심한 심령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의 약한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는
우리를 망가트리고 하는 이 세상의 유혹과, 이 세상의 어떤 시련 보다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지혜는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냐?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오면 우리가 끊임없이 확인해야 되는 게 무엇이냐면,
'나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나도 바뀔 수 있습니다.' 하는 사실, 약속입니다.
내 옆에 앉은 사람들도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인내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영광스럽게 그분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22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시죠.
◑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여기에 정관사가 빠졌습니다. '너희가 그 믿음에 거하고'가 원문입니다.
앞에 언급했던 '예수님의 육체의 죽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영광스럽게 바꾸실 것입니다' 하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거한다'는 것은,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겁니다.
'터 위에 굳게 서서'
이 구절은 두 단어가 합쳐졌습니다.
'터를 닦고, 굳게 서서' grounded and settled
먼저는 그 믿음으로 확실히 터를 닦아야 합니다.
다음에 그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복음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문맥을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된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꾸실 것이다.' :22
이 복음이 주는 소망에 흔들리지 아니하면, 바로 '그러하리라'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바로 너희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도전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고, 흠이 없고, 거룩하게 된다는 거죠.
△저희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파킨슨 병으로 고생하셨는데
하루는 제게 전화를 하셨어요. "이목사, 빨리 좀 와 봐라"
어머니이 그런 말씀 잘 안 하시는데, 그러시니까 제가 급하게 가봤죠.
그때 제게 하시는 말씀이
"이목사, 내가 꼭 귀신들린 사람 같아..."
"아니 어머니, 어릴 적부터 교회 다니시고, 권사님으로 수십년 섬기시면서
그렇게 성실히 신앙생활 하셨는데, 지금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근데 지금은 그때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돼요.
몸은 자꾸 움직이기 힘들어지죠. 누가 자식들이라고 해서 잘 찾아오지는 않죠.
또 누가 돌봐주는 사람이 있어도, 어머니의 마음까지 헤아려 줄 수가 있습니까? No
그러니까 지나온 세월, 살아왔던 게 다 헛수고 같고,
그리고 평생 교회에서 헌신했지만, 또 뚜렷하게 남은 게 없는 거 같고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께서 "야, 내가 꼭 귀신들린 사람 같아" 하는
외로움과 고독함가운데 회의감이 엄습할 때도 가끔은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어머니한테 기도를 해 드리고, 시간을 겉이 보낸 적이 있어요.
늙을수록,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흠이 없는 자로 하나님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가 만족하게 되는 것이지,
그 외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가 잘 아는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의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3.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후렴)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그런데 영어가사가 더 마음에 와 닿아요.
Jesus loves me, loves me still / Though I'm very weak and ill
From His shining throne on high / Comes to watch me whence I lie.
Yes, Jesus loves me! Yes, Jesus loves me!
Yes, Jesus loves me! The Bible tells me so.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Jesus loves me, loves me still Though I'm very weak and ill'
'나는 비록 몸이 연약하고 아프나,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셔!'
그러니 지금 시인은, 요양원에 누워계시는 모양입니다. 자기 집이든지요.
정말 몸이 너무 약해져서, 교회도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될 정도인데도..
그 침상에서 누워있지만, 예수님의 여전한 사랑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거죠.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From His shining throne on high / Comes to watch me whence I lie'
높고 빛나는 천국 보좌 위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보러 오신다는 거죠.
'낮은 나'가 (침대에) 누워있는 나입니다.
몸은 비록 너무 연약해서,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앞에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흠이 없는 자로 세워지는
그 소망이 있기에...
낙심하지 않고, 높은 보좌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
주1)
골로새서 1:1~3절은 <인사>를 했습니다.
1:3~6절은 <감사>를 했습니다.
1:7~8절은 골로새교회의 사역자 에바브라 를 개 <칭찬, 격려>해 주는 내용입니다.
1:9~14절은 바울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1:15~20절까지는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저도 지난 2주간 동안 정말 이렇게 몇 번이나 정리를 하고 정리를 해도 좀 어려웠는데
이제 약간 좀 정리가 되는 거 같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15절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신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명확하고 정확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 입니다.
2) "만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16~17절
한마디로 하면 "으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근데 이것을 본문에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으로 설명했죠.
그 뜻은, 지위와 서열에 있어 최고의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분 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을 통해, 그리고 그 분을 위해서
만물은 창조되어 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
3) "교회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18~19절
교회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자세히는 '죽은 자들 중에서 먼저 나신 이'
쉽게 표현하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분'이시죠.
그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니까,
그 머리에 붙은 몸에 속한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활의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예수님 안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머리에 연결된 몸으로)
4) 그리스도는 안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20절
특별히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주2) 소설과 박완서의 자기중심성 회개
1988 년 우리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릴 무렵, 그 분은 5남매 중 하나 뿐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당시 25세였던 창창한 젊은 의사였던 아들이었어요.
그 분의 고백에 의하면 자기 슬픔은
“수시로 짐승처럼 치받치는 통곡”이라고 표현을 했더라구요. .
명색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그 수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과 회의, 포악,
심지어는 저주로 차 있을 만큼, 그 분의 아픔은 지독했습니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할 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없이 육박해 왔다.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발산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같이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고통의 터널을 진하게 지나가는지요?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올림픽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는 걸 어찌 견디랴.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
그 수기를 보면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 어느 순간 그 분이 뭔가를 깨닫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이 아주 숭고한 다른 뜻으로 승화되는 것을 봅니다.
엄청난 아픔이 어느날 부턴가 절실하게 드리는 기도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그해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자기의 죄가 떠오른 겁니다.
먹은 음식이 안 좋았는지 토하나라 변기 앞에 엎드렸을 때 번뜩 주어졌다는 거예요.
자신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죄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최소한 의식적으로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하나님께도 겁없이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명료하게 깨달았다”
그러면서 기도가 튀어나오더라는 겁니다.
“주여 나를 받아 주옵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모든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옵소서.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립니다. 모든 것이 당신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의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내려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자 그 분에겐 행복에 가까운 기쁨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일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아픔에도 분명 하나님의 전능하신 숨은 뜻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나 깨달음은 나머지 그녀의 생애와 독자들에게
충분한 자양(滋養)으로 열매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