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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안을 주노라 요14:25~31 1999년경 설교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도입 주1)
◑몇 시간 후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지금 며칠이 아닙니다. 바로 몇 시간 전입니다.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라고 하고, 히브리말로는 ‘샬롬’입니다.
십자가 전야에 예수께서는 샬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평화라고 하면은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평화를 생각해 왔습니다.
두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질 않습니다.
그 하나가 '팍스(PAX)'입니다. 로마사람들이 주장했던 팍스, *peace
이것은 온 인류가 지향하는 평화입니다.
물질적이요 상대적이요 때로는 순간적이고 권력 지향적입니다.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경제력, 정치력에 의해서 혹은 때로는 군사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힘에 의한 평화,
그 힘 앞에서 모두가 조용합니다. 공동묘지 같은 평화입니다. 이것이 팍스입니다.
강한 힘 앞에 강한 권력 앞에 이 권력 앞에 모두가 조용합니다. 이것이 참 평화입니까.
어쨌든 인간들은 팍스를 지향해서 오늘까지 몸부림쳤습니다.
또 하나는 에이레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이것은 샬롬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영적이요 종교적이요 특별히 개인적이요
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평화를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요14:27
그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를 하나로 만들어 보려고 하고 하나 되기를 소원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요14:27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습니다.
믿을 수 없어서. 그래 믿지 못하는 이유는 뭐 교만하기 때문이죠.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다 지내 봤잖아요.
정치, 권력, 경제, 재산, 여러분이 쥐고 있는 증권 뭘 믿을 것이 있어요?
그리고 뭐 가정, 나 자신을 내가 못 믿는데 누구를 믿어요.
결국은 이 세상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지금 크게 걱정을 합니다. 온 국민이 정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정권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문제올시다.
믿지 못하면 평안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안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것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요.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없고 과거에 대해서도 알 수 없고.
뭐 지난날에 잘못된 것을 한 번 바로잡아 보겠다고 해서
뭐 청문회도 해 보고 검사도 해 보고, 특별검사도 하고 특특검사도 했다는데 안돼요.
알 수 없어요. 오리무중이요. 점점 더 모를 일만 가득해요.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누구도 몰라요. 알 수 없어요. 불확실해요.
그런고로 우리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병든 이성의 판단은 항상 병적이에요.
우리 이성 자체가 판단의 그 기본능력 자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불안합니다.
또한 불만이 많아요. 그것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 그렇게도 애써서 모아놓은 재산 이렇게 홀랑 달아날 줄 몰랐지요.
가질 수 없어요. 뭐 권력이고 지혜고 지식이고 뭐고 가졌다 해봐도 아무 것도 없어요.
여러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잡을 것이 없습니다. 소유한 것도 없습니다.
이래서 불만이 많습니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그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케이체프 노이드 라는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말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섯 가지 감옥에 갇혀있다.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는데 이 감옥으로부터 탈옥하기 전에는
누구도 평안할 수 없다.
1) 첫째 감옥은 자기만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기 도취의 감옥, 공주병 뭐 그런 거죠.
자기만 잘난 거 같아요. 자기만 예쁜 거 같아요.
이것 한번 미치면 이것도 구제불능이에요. 자기도취, 그 감옥.
2)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 자꾸 생각하게 되는 비판의 감옥,
그것도 못 말리는 거예요. 많은 장점은 보지 못하고 꼭 단점만.
심지어는 자기가 위해서 돕고 키우는 자녀들까지도 그 장점 많은데 하나도 보이지 않아
꼭 나쁜 점만 보고 그것만 지적하고 그것만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
이거 또 하나의 비판이라고 하는 감옥이에요.
3) 오늘, 내일, 항상 세상을 암담하게만 보는 절망의 감옥.
이것도 고치지 못하는 병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능력 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꼭 절망적으로만 보는 사람, 끝도 없는 거예요.
4) 옛 일만을 황금시대로 생각하는 과거 지향적 성향,
항상 오늘은 나쁘고 어제는 좋았어요. 사실 어제도 죽을 지경이었어요
사실 알고 보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옛날은 다 좋다고만 생각하는 이것도 못 고치는 병이에요.
5) 다른 사람의 것만 무조건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
자기가 가진 것은 좋지 않고 남이 가진 것은 다 좋고, 남의 것은 다 좋게만 보이는
이것도 무서운 감옥이요 정신적 감옥이요.
6)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증오와 시기의 감옥,
질투, 이건 무서운 감옥입니다. 자 이런 것에 매여있는 동안은 절대로 평안하지 못하다.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때 비로소 평안할 수 있어요.
이런 것에 매이는 것, 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평안할 수 없는 평안. 그러나 이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얻을 때
거기에 참 평안이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본문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요절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지금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이 사실을 비유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습이라” 요14:30
이 세상 권력이 내게 오겠다. 이제 가야바가 있고 빌라도가 있고
로마 군인이 있고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 확실한 사건을 총칭해서 세상 권력이 내게로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 보세요.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14:30b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너희가 아무리 나를 재판하고 나를 아무리 죽여도 나와 아무 상관없다.
다만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내가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과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사건일 뿐이다!’
아, 놀라운 얘기입니다. 아주 초연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조금 후에 너희가 나를 못 보겠고 조금 후에 나를 볼 것이다." 요16:16
어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평안. 이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평안을 내가 네게 주노라."
예수님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말합니다.
"너희가 다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평안합니다.
33절에 다시 말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미 이겨버렸어요 벌써. 다 그 마음속에서 그 생각 속에서 철학 속에서 믿음 속에서
다 해결하고 다 이겨버렸어요. 승리해 놓고 나머지 일을 초연하게 처리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평안입니다. 놀라운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어떻게 이 평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평안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며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잘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이 성경말씀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사건을 자세히 읽고 또 묵상하고
또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깊은 평안함, 그 엄청난 평안을
그 위대한 평안을 이해해야 됩니다.
놀랍습니다. 깨달아야겠습니다. 알아야겠습니다.
이 안다는 것이 바로 그 평안에 함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가끔 묻는 분들이 있어요.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깐, 제가 뭘 안다구요.
제게 묻기를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정치가 어떻게 될까요?", "경제가 어떻게 될까요?"
다행히 나더러 증권이 오를까요 내릴까요 그건 안 물어 보더만요. 모를 거 같은가 보죠?
꼭 물어봐요. "어떻게 될까요?" 저는 늘 대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할 탓이지요" (우리 하기 나름이지요)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왜 물어봐요? 내 탓인데.
우리가 진실하고 우리가 의롭고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재를 무릅쓰고 주님 앞에 돌아올 때 거기서 바로 되는 것이죠.
우리가 정직함을 찾아야지요. 그게 바로 되는 것이죠.
이 모양 이대로 세상만 달라지길 바래요? 다를 거 없어요.
망할 짓만 하면서 망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꼭 죽을 짓만 하면서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이 그건 미신이죠.
그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할 탓이에요.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옳습니다.
그 평안의 뜻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깊이 깨달아야 되요.
그리고 믿어야 되죠.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지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지요. 예언의 말씀을 믿어야지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합당한 오늘을 내가 살아야지요.
어떤 아버지가 장마철을 앞두고 2층집 지붕에 기와가 몇 장 깨진 것을 알고
이걸 고치기 위하여 긴 사다리를 놓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그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아이가 아주 재미있어 보이거든요.
"아버지, 나도 좀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해 주세요."
아버지는 사다리를 딱 붙들고 "올라와라. 단, 절대로 내려다보지 마라. 나만 쳐다봐라 나만."
이 철없는 아이는 정말 아버지만 쳐다보고 겁 없이 그냥 한 계단 한 계단 사다리를 막 올라갑니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내려다보았습니다. 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휘청거리고
현기증이 나 정신이 없어요. 막 울려고 그러고 손을 어떻게 하질 못하는 거야.
아버지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놈아 보지 말라는 걸 왜 봤냐? 나만 보라.
내 눈동자를 보라. 내 얼굴을 보라." 아버지를 딱 쳐다보았어요.
그리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그냥 올라갑니다 그냥. 아주 잘 올라갔어요.
아버지가 손을 잡아 거뒀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이 곤두박질하든 변하든
뉴 밀레니엄이 오든 올드 밀레니엄이 오든 상관할 거 없습니다. 그건 나와 상관이 없어요.
세상은 나와 상관이 없어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
주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으세요.
▲또한 "너희가 나를 사랑했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했으리라." 요14:28
옳은 말씀이요. 내가 그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의 행동에 대해서 기뻐하는 거죠.
사랑하는 자가 기뻐하는 걸 내가 기뻐할 수 있어야지요.
주님이 기뻐하는데 나는 왜 슬퍼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이제 주님께서 하시는 일,
주님의 기쁨을 내가 같이 기뻐하게 되는 거죠.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을 기뻐했으리라."
그 말씀이에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이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령이, 보혜사 성령이 너를 위로하고
내가 한 말을 생각나게 하고 내가 한 말을 믿게 하고
내가 한 말이 너희를 주장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양과 사슴 .. 물 먹는 모습이 다르다. (펀 글)
옛날에 동물의 왕국에서 보니까, 연못 같은데서 물을 먹는 모습들이 나왔는데..
거기 보니까 사슴이 물을 먹는 모습과, 양이 물을 먹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사슴은 그 특유의 불안한 눈동자.. 그 긴장한 모습...
그래서 아주 작은 소리 하나만 나도 그냥 놀라서 도망치는 모습으로
잠시 잠시 와서 물을 마시는 모습을 봤다.
반면에 양들은 천하태평으로, 편하게 물을 마셨다.
지키는 목자가 있으니까,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뭐 무슨 소리가 나던, 다른 소란이 일어나던, 아무 관계없이 물을 먹는 걸 봤는데...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은 불안과 근심과 스트레스, 의욕상실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사슴’처럼,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놀라서 펄쩍 달아난다.
그러나 성도는 ‘양’이기에,
편안하게 물을 마시고, 편안하게 누워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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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입
지난 달 1일자 그러니까 2000년을 두 달 앞둔 시점에서 발간된 뉴스위크지에
커버스토리로 나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주제는 이렇습니다. "묵시록의 예언",
그렇게 큰 글자로 커버를 내 놓고 있습니다.
요새 와서 여러분 전에는 못 듣던 이야기 하나를 늘 듣게 될 것입니다.
밀레니엄이라고 하는 겁니다. "뉴 밀레니엄(New Millenium)"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밀레니엄이란 라틴어의 '천(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 천년을 "뉴 밀레니엄"이라고 말합니다.
이 새 천년을 앞두고 성경이 말하는 종말에 대해서 일반들이 알아들을 만큼
이렇게 논리 정연하게 설명한 기사였습니다.
이 글을 쓴 안네 언더우드는 재미있는 말로 말을 시작합니다.
"2000년 1월 1일 0시 1분에 종말이 찾아온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습니다. 2000년이 끝나는 시간에 세상이 다 끝나는 것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시민을 상대로 할 때
미국시민의 40%가 '세상이 언젠가는'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 언젠가인 것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해 주는 거와 같은
아마겟돈 전쟁과 함께 세상이 끝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마겟돈 전쟁의 성격, 그것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세상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요
예루살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다음 세대, 신천신지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이루어지는 역사의 종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종말을 맞이하고
그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새 시대를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년에 모여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측하는 대로는 적어도 300만명 이상이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금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을 맞이하려고 여러 가지로 백방으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서 승천하십니다.
그 때에 들려진 음성은 이것입니다. "본 대로 다시 오리라."
그래서 지금 감람산 그 현지에 기독교인들이 100명이 들어가서 집을 사 가지고
집을 짓고 거기서 산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맞이하고 싶다고. 이 모든 일로 인해서 소위 말하는
"밀레니엄 포비아(Phobia)"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포비아'라는 말은 원래 '공포'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밀레니엄 포비아' 하면 새 천년에 대한 공포올시다.
그 공포로 이 온 세상이 지금 꽉 차있습니다.
이제 안네 언더우드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우리가 늘 듣던 얘기입니다 만은 일반이 들을 때는 새로운 얘기입니다.
두 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가 됐다.
이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다음 단계는 심판의 단계로 역사한다는 것이죠.
그런고로 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파괴하시는 하나님, 진멸하시는 하나님,
그런 공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밀레니엄 포비아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의인은 하나님의 품속에 평안을 누릴 것을 생각하며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역설적입니다. 성경진리가 언제나 그렇습니다.
복음적 진리가 언제나 그렇습니다.
복음이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복음이 심판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 복음을 거역하는 자에게 심판.
복음이 많이 혹은 정확하게 들려지면 들려지는 만큼 심판은 더욱더 확실해지는 것이올시다.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올시다. 이 역설적 진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종교적이요 개인적이요 구원론적 종말을, 우리는 새 천년과 함께 내다보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앞에 놓고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새 천년을 맞이할 것인가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