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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LNCK 2023. 11. 30. 20:43

https://blog.naver.com/kaikk/220352840489

 

◈하나님의 이름         출3:11-22        펀 글, 정리

 

출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을 모시고 있는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 이라고 불립니다.

이곳은 매우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근 100m가 넘어가는 매우 길고 큰 기와 사당으로, 늘 문이 굳게 잠겨 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종묘 제례 행사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니, 그 곳은 텅 빈 공간이었습니다.

 

대형 그림이나 신상이나 장식물들은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역대 왕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위패를 작은 상자 안에 담아 모시고 있을 뿐입니다.

그 게 다입니다.

이름은 단지 구분하는 기호나 호칭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영화 《실미도》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버스 안에 갇힌 북파공작원들이

버스 안벽에다 자신의 이름들을 피로 새깁니다.

자기 존재를 어떻게든 남기고 싶은 감정에서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쓴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희생된 304명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글을 채웠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304개의 우주가 우리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졌다.”였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바로 그 존재자체입니다.

 

▲중동에서 신의 이름은 더욱 그러합니다.

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정보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름은 존재 자체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신을 예배하겠다는 말이고,

그 신은 이제부터 너희를 내 백성으로 알고 지키고 복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위 본문 말씀이 대단한 것은, 성경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공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앞서 창세기에서 사용된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후에 소급 적용된 경우라 할 것입니다. ↙

 

출6: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먼저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묻습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3:13

 

그러자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여러 이름들이 나옵니다.

‘스스로 있는 자’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 : 엘로힘

 

여기서 모세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찾기 힘들죠?

바로 ‘여호와’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이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이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 호칭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이름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홀로 유일하신 분이신데, 그냥 신이라고 부르면 되었지

신의 이름이 구지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것은 사실은 수모입니다.

마르둑, 제우스 등 여타 신들과 경쟁하는 존재처럼 보이니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름으로 계시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행동입니다.

자유로운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어떤 형식 없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한다는 것은 최초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그 이름에 가둡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니 자꾸 교리적이 되고 부자유해집니다.

이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는 제3계명에 “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교만에 대한 경고입니다.

 

구약에서만 ‘여호와’라는 이름이 6,800번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도나이’ 곧 ‘나의 주님’이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고대 히브리어 글자는 자음만 표기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이름에 대한 정확한 발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여호와’는 사실 잘못된 발음입니다.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이다 보니 여호와라는 발음이 나왔습니다.

 

실제는 ‘야웨’나 ‘야훼’가 맞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여’는 아니지 않습니까?

 

2천 년이 흘러버린 지금, 그 누구도 정확한 발음을 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관습적으로 사용된 ‘여호와’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도 저는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추시는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여호와란 이름은 히브리어 be 동사에 해당하는 ‘하야’에서 기원합니다.

‘하야’ 동사의 3인칭 형태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입니다.

‘하야’ 동사가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번역이 잘 안 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나는 나다’로 번역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영원불변한 신을 가정하는 헬라철학적 냄새가 너무 납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동작 개념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사역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있게 할 것을 있게 하는 자” 바로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히브리어는 ‘여호와’

그 ‘여호와’를 개역성경에 ‘스스로 있는 자’로 풀어서 썼습니다.

영어성경에도 히브리어 ‘여호와’를 ‘하야’ 동사의 변형으로 보고

‘I AM THAT I AM’ 이렇게 풀어서 써 놓았죠.

 

히브리 성경에는 그냥 ‘여호와’ 라고 나옵니다.

그 ‘여호와’란 말을, 설교자는 “있게 할 것을 있게 하는 자”라고 해석합니다.)

 

내가 지금부터 놀라운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바로 그런 능력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창조와 변화와 운동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이 가진 해석이 난해한 것은

그 이름이 하나님을 가르쳐 주면서, 동시에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추시는 하나님 (Deus absconditus)입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출애굽기 33장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정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다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등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비밀”(골2:2)입니다.

비밀은 인간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인식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곧잘 바리새인이 되고 교리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크심을 이해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이름에 하나님을 가두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름 하나를 붙잡고 자기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란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동시에 감추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야웨 엘로힘)이라는 이름보다는

여호와란 이름을 가지신 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한 인간을 선택하시고 복 주시는 분입니다.

 

(*택한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3: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니까, 하나님이 늘 외롭게 홀로 계시는 분으로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데, 이어지는 15절에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자신이 선택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을 성취시켜가는 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사입니다.

이 언약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 인류에게 미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라는 이름의 뜻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신도를 모으는 종파적인 하나님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억압 받는 자들을 해방하는 해방의 하나님입니다.

 

출3:16~1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의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그들을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빈곤에서 풍요로, 억압에서 자유로 인도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고 좌절해 있는 자들에게 비전을 주시는 분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것이 노예 상태에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주신 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입니다. 이 희망 때문에 우리는 현재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이 희망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앞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은 희망이요, 비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꿈을 꿉시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가

“있게 할 것을 있게 하는 자, 되게 할 일을 되게 하는 자”

바로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이 해방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것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거라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3:19~20절입니다.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완강한 저항이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고

그들을 물리칠 방안도 준비해 두었다는 말씀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승리하게 될 것인지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3:21~22절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여인들과 자녀들이 은금패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애굽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비참하게 탈출하는 자들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 나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이미 싸움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모세의 머릿속에는 승리의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는 이들이 그린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꿈과 비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이 말씀이 떨어질 때,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니까요.

이 말씀을 우리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결과를 모른 채 이 말씀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떠할까요?

과연 그렇게 될지 불안할 것입니다.

‘내가 착각을 하거나 헛된 환상을 본 것은 아닌지?’ 의심할 것입니다.

사람들도 여러 부류로 나뉠 것입니다. 믿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

 

결국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믿고 나가는 자가 승리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의 순간 모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 이럴 줄 알았어?’ 아니면 ‘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항이 있구나.

그러나 하나님은 더 강한 힘으로 누르실 거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자가 미래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림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생생한 그림을 주셨습니다.

‘은금패물로 치장하고 애굽을 떠나는’ 그림입니다. 머릿속에 그림을 가진 자가 승리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그림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비전(vision)이고 드림(dream)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주고 있는 것은 꿈입니다.

꿈이 헛된 것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졌던 꿈대로 출애굽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 민족을 향해서도, 내 인생을 향해서도 꿈을 꾸고,

구체적인 그림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을 가진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적용

 

이름은 친밀한 사람에게만 가르쳐 줍니다

오늘도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길을 걸어가면..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전혀 모릅니다. 친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낯선 사람과 내가 친밀해지는 첫 단계는,

서로 이름을 물어보고, 통성명을 하는 것입니다.


양떼를 칠 때도, 이름이 없으면 그냥 ‘양’입니다.

그러나 양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그 양이 나에게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이제 모세와 이스라엘을 자기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표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호와(야웨)’라고!

 

▲1. 그 이름만 붙들어도 좋아헀던 다윗

그래서 다윗은, 시23: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여호와’ - 있을 것을 있게 하시고,

될 일을 되게 하시는 분 .. 임을 확실히 알았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했고,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라고 했는데, 시16:11

 

즉 ‘여호와’라는 이름만 갖고도 만족했고, 즐거워했고, 잔이 넘쳤던 것입니다.

그 이름만 붙들고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

주님이 주시는 기쁨, 능력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잔에 넘치도록!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9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말 3:20)

 

그러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눅21:17-19)

 

그렇지만 진실로 그 이름을 좋아하는 성도는,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2.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뜻도 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있게 할 것을 있게 하는 자, 될 일을 되게 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이렇게 대언했죠.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45:7

 

그 분은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시고,

그들의 여인들과 자녀들이 은금패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애굽을 떠나게 하셨죠.

그들은 애굽에서 비참하게 탈출하는 자들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 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 이름 앞에 벌벌 떨며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이름, 예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왜냐면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그가 비는 축복이 그에게 임하고, 부어질 것이고,

또한 성도가 발에 먼지를 떨어버릴 때는, 결국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적절히 사용해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지팡이 하나 들고, 바로 왕 앞에 나아갔던 것도,

그 이름의 권세가,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당당했던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낫고 저주가 떠나갈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할 줄 알았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오늘 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3.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사42:8

 

여호와는 섞인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어느 선교사 사모님이 밝은 빛(환상) 가운데

자기 앞에 항아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항아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진 그가 주님께 질문하자,

주님이 이런 답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네가 평생 동안 나를 위해 불렀던 찬양이 담겨 있단다!”

 

이 사모님은 성악을 전공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며 수많은 특송과 찬양대 찬양을 해 왔습니다.

독창한 적도 매우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항아리에 찬양이 가득 담겨 있으리라 은근히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니,

겨우 바닥을 채울 정도의 적은 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사모는 놀라 주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어머, 이것이 정말 제가 부른 찬양 전부가 맞나요? 혹시 잘못된 것 아닌가요?

그 동안 제가 부른 찬양이 얼만데...”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는 네가 오직 나만을 위해 부른 것만 담았단다!”

 

하나님은 섞인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사42:8

 

때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에, 나도 영광받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내 것과 주님 것이 섞여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받으실 수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분께 합당한 영광과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은 뒤섞일 수 없습니다.

사역을 통해 주어지는 성취감이나 칭찬은 달콤하지만,

우리가 여기에 중독되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게 됩니다.

 

자칫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버리거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내 영광을 추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여?

 

내가 그 일이 실패했다고 느낄 때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서운하다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해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실패에 직면하는 내 반응을 보면,

내가 정말 무엇을 위해 주의 일을 수행해 왔는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순수하게 섬긴 사람은

그 결과 자기가 망가지고, 영광을 받지 못하더라도... 잠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