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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장 빈칸과 여백

LNCK 2023. 12. 4. 08:06

출애굽기 강해 '빈칸과 여백' / 송태근 목사 - YouTube

 

◈빈칸과 여백     출1:1~14      2019.02.11.

 

<출애굽기> 서론 시간입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 '출애굽기'의 이름은 '웨 엘레 쉐모트' 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어서, 두루마리를 둘둘 펴서 열면, 
첫 출에 가장 먼저 보이는 중요한 단어를 그 성경의 '제목'으로 정했어요.  

출애굽기의 첫 단어는 '웨 엘레 쉐모트' '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이다'입니다.
놀랍게도이 출애굽기 성경은 첫 단어가 접속사 그리고(웨)로 시작합니다. 
이건 앞에 창세기와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되죠. 

그러다가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고 포로로 붙들려 가죠. 
그러면서 끌려간 1.5세, 2세들이 자연히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당시 국제적인 용어였던 헬라어로 히브리 성경을 번역을 합니다. (기원전 3~1세기)

그게 유명한 70인 성경 (LXX) 입니다.  
이분들이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이 책 이름을 그냥 '출애굽기' 라고 명했는데 
그 근거는 출애굽기 19장에 있습니다. 

출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여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났다' 여기에서 책 이름(Exodus)이 나옵니다. *70인역

▲성경의 역사를 보면 계시가 침묵했던 두 시기가 있어요. 
계시가 침묵했던 큰 공백기 같은 두 시기가 있어요. 

1)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300~400년간 아무 계시가 없고 또 기록도 없죠. 
그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라 부릅니다. 

그러면 계시가 침묵하고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는 빈칸일까요. 
여러분, 이 차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백' 과 '빈칸'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여백과 빈칸은 다릅니다. 여백은 '그냥 비어 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죠. 
전체 도화지에 어떤 내용 중에, 여백도 아무것도 쓰여지거나 그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내용과 메시지를 담고 있죠

빈칸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공백 이죠.
그래서 빈칸과 여백은 틀립니다. 

2) 또 하나, 역사가 툭 끊어지고 어떤 계시도 제시되지 않았던 시기가 
바로 출애굽기의 이 시기입니다. 

즉 창세기 50장에서 출애굽기 1장으로 넘어가는 이 어간을 
학자들은 놀랍게도 중간기 역사와 비슷하게 400년 사이로 봅니다.

출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이 두 시기가, 아무 기록도 없고 역사가 툭 끊어져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툭 끊어진.. 마치 빈칸처럼 느껴지는이 역사의 공백기는 
빈칸이나 공백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침묵의 여백의 시간이었어요. 

 

여기서 '여백'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 침묵 같아 보이지만, 그 침목 속에서 하나님은 꾸준히 
하나님의 역사와 일을 진행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위 두 시기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 텅 빈 침묵의 역사를 건너뛰고, 그 다음에 누가 일어나느냐면, 구원자가 일어나요. 
출애굽기에서는 누가 일어나죠. 모세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 준비됩니다. 

신구약 중간기에는 누가 준비됩니까? 
바로 그토록 절망 속에 고대하던 메시아가 준비되지요.

이것은 우리 신자들이 살아가는 굵은 삶의 물줄기 속에 굉장히 중요한 패턴이에요. 
뭔가 지금 꽉 막혀 있거나, 답답하거나, 아무 음성이나, 뜻이나, 
신정론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역사의 침묵, 

(신정론적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는 하시나? 
-하나님은 그때 뭐 하셨나? 욥이 물었던 질문이란 말이에요.) 

그때 하나님은 빈칸 같고, 공백같지만 
그 빈칸과 공백은 뭐라고요? 여백의 시간이에요. 

조금만 더 그 하나님의 침묵의 설득 속에 
여러분들이 버티고 견디는 믿음을,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듣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뭔가 준비하신 바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거죠. 

▲출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아들들의 이름' 
여기 아들들이라는 '브네이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 출애굽기의 이름은 "그것들의 이름들이다" 그랬어요. 

근데 누구의 이름인가 봤더니,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이라 그랬어요. 
근데 똑같은 문장이 7절에 또 나옵니다.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은'이 '브네이 이스라엘'입니다. sons of Israel,  children of Israel
1절과 똑같은 표현이죠.

개역성경에는 1절에 '이스라엘의 아들들'
7절엔 '이스라엘의 자손들' 이렇게 약간 다르게 나오지만, 히브리어는 같다는 거죠.

또 '자손'이라는 말은 사실 '민족'이란 뜻이거든요. 
히브리 관점과, 성경 기자에 이해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이나, '이스라엘의 민족'은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죠.

자 근데 이스라엘은 누굽니까? 야곱이에요. 
이것은 당연히 자연인 '야곱'의 이름을 쓰지 않고, 
이제 12지파가 확정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제대로 출발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새로운 조직을 설명하기 위해서 
'야곱'의 이름이 여기서부터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 야곱의 바뀌었던 이름, 얍복강가에서 새로 개명된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자 근데 원래 이 아들들이, 당시로부터 약 400년 전에 고센 땅으로 들어갈 때는 
70명이 들어갔어요. 창46:27
출1: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참고로, 사도행전에는 75명이라고 나옵니다.  행7:14
70명과 75명의 숫자의 차이는, 성경의 오류가 아니라 
70명에는 요셉의 가족이 빠진 거예요. 요셉은 미리 들어갔으니까요. 

그런데 잘 보시면, 들어갈 때는 70명이 들어갔는데 
엑소더스 할 때, 애굽을 나올 때는, 놀랍게도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에요. 

그래서 어림잡아 200만으로 성경 기자들은 봅니다. 
70명이 들어갔다가 4대 만에 한 민족과 국가를 이루어서 나옵니다. 대단한 번성이죠.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15:16
4대 만에?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출12:40은 430년이라 했고, 창15:16은 4대라고 했는데, 
그럼 한 세대 generation 가 100년이 넘는다는 뜻인가요?

'세대'의 히브리어 '도르'는, 세대 generation 의 뜻도 있지만,
기간 period of time 이란 뜻도 있기 때문이죠.

또는 당시 100세가 넘었던 족장들의 평균 수명에 따라 한 세대를 100년으로 계산한 거죠. 
12아들 중 레위가 1세대, 레위의 아들 고핫이 2세대, 고핫의 아들 아므람이 3세대 
아므람의 아들 모세가 4세대였습니다. 출6:16~20

모세도 120세를 살았고, 아론도 123세를 살았으니
가임 기간이 지금보다 훨씬 길었던 것이고, 
요즘은 3~4세대가 함께 산다면, 당시에는 7~10세대가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면 4대만에, 또는 400년 만에 70인이 60만이 되는 것은 가능하죠.) 

창15:14~16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 정확하게 4세대 만에 출애굽할 것을 약속하셨어요. 
70명의 한 줌 밖에 안 되는 한 족속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4세대 만에 정확히 한 민족이 되어서 
200만 가량의 거대한 나라를 이루어 나오는 것은, 결국 누가 하시는 일이겠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죠. 

하나님은 여백 같기도 하고, 캄캄한 칠흙 같기도 한.. 
계시가 끊어지고, 기록이 없는 흑암의 역사 속에서도 
손 놓고 계시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을 묵묵히 진행하고 계셨어요. (자손 번성으로)
여러분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침묵하시고,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구원사역을, 나를 통해서, 이루어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놀랍게도, 공부를 하다 보면, 
우리 생각이 크게 하나 바뀌는게 있습니다. 

뭐가 바뀌냐면, 단순히 애굽에서 탈출하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에요. 
출애굽기를 공부하다 보면,
'하나님이 도대체 이스라엘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걸 눈여겨 목격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 다음에는 레위기가 나오죠.
레위기는 주로 전체 책이 초점이 어디에 모아지냐면,
'그 하나님을 예배하라' 입니다.  '그 하나님을 이렇게 예배하라' 입니다. 

레위기 다음에는 민수기, 신명기가 나오죠. 거기에는 
'너희들이 들어가 살 그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계율을 가지고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백성들의 규칙과 규례가 빼곡히 담겨져 있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공 상태로 들어가는게 아니에요. 
가나안 땅에는, 이미 우상에 찌든 거대한 원주민 일곱 족속이 
그들의 나름 우상숭배와 문화를 잉태해서 발전시켜 살고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그럼 애굽은 진공 상태였나요?
아니죠. 가나안 땅에 못지 않았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고대 시대이긴 해도, 
제가 외국 TV 방송에서 봤는데,
그 수천 년 전 찬란했던 애굽의 문명을 그대로 한번 재연을 했어요. 

근데 이렇게 과학문명이 발달한 지금 시대와 방불한, 그 정도로 문명을 꽃피웠다는 거죠.
그러니까 애굽에서 피라미스를 만든 그런 과학적 두뇌와 기술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문명과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런데도 그 피라미드 지금 쉽게 못 만든다고 해요. 
그 당시 수천년 전인데도 얼마나 그 문명이 위용스럽고 대단한 문명인지 
가히 짐작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굉장히 세속적으로 매력있는 국가였어요. 

창13장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자기 살 곳을 택해 가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13:10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애굽 땅을 '여호와의 동산'과 대등하게 놓고 있습니다.
굉장히 매력 있는 땅이요, 도시였던 거죠.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애굽에 내려가서, 그 땅과 문명을 이미 경험했죠. 창12장에서.
근데 롯이 삼촌과 헤어지면서, 자기가 택할 땅을 보니까 얼마나 비옥했던지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복인 줄 알았다'는 거에요. 그 정도로 매력이 있었던 땅이었어요.

근데 지금 히브리 사람들은, 그 매력적인 땅에서 400 년을 살았어요. 
우리는 36년을 일제 아래에 있었서도, 지금도 그 일제 잔재 문화가 뼛속 깊이 
우리 부모 세대 속에 남아 있는데, 400년을 살았다고 생각을 해 봤어요. 

그나마도 그들이 처음 요셉이 살아있을 적에 
고센 지역이라는 한정된 지역에 따로 구분, 구별시켜서 하나님이 살도록 했습니다. 
왜요? 애굽의 문명에 물들까봐 배려하신 거예요. 
목축하는 자들을 가증히 여기는 그 당시 애굽의 시대적 문화를 핑계 삼아서 
고센 땅이라는 곳에 그들을 격리시켜서 먹고 살도록 했어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400년이 흐르고, 사람들이 내왕을 하면서 
그 애굽의 화려한 문명의 매력과 그 맛을, 그들이 왜 맛 보지 않았겠어요, 왜 물들지 않았겠어요? 

▲근데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알 듯 모를 듯한 얘기가 하나 나와요. 
1:6~7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지금 출애굽기는 요셉도 죽었고, 그 조상들도 다 죽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죽는 숫자보다, 태어나는 생명이 더 어마어마한 겁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와 섭리로! 

근데 놀랍게도 이것은 무엇의 완성인지 아세요?
창1:28 '하나님의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이 언약이 갱신되는 현장이죠. 
같은 내용의 문장이 등장을 하죠. 
이 내용이 본문 1:7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한 공동체와,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을 이루시기 위한 
일관된, 고집스러운, 줄기찬 하나님의 언약의 섭리와 갱신이었어요. 

그것이 지금 희한하게도 애굽이라는 둥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출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어쨌든 애굽에 많은 정변이 일어났고, 침략을 당했고 뺏기도 했습니다. 
제국을 이루었죠. 
근데 어쨌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는 힉소스 왕조였어요. 
근데 그 힉소스 왕조가 셈족 계통입니다. 그래서 총리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어떻게 요셉을 모를 수 있을까요. 
애굽이 지독한 흉년과 기근으로 국가적 위기에 있을 때, 
국가적 위기가 아니라 당시 고대근동 전체의 위기였죠. 

그 시대적 위기를 극복케 했던 인물이 누구였습니까?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셉을 모르겠어요? 아무리 왕조 바뀌어도 그렇죠.

이건 무슨 뜻인가 하면 '요셉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새 왕조가 일어났다' 그 말이에요. 

△2008년도는, 야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었어요. 우리나라가 금메달 그때 땄죠. 
그때 일본 야구 대표팀이 최강 전력을 구성했습니다. 
일본이 소위 야구 최강 드림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일본 야구감독이 호시노 라는 감독이에요. 
그 야구 한일전 전에, 어느 기자가 호시노 감독에게 '이승엽 선수를 아느냐?'고 물어요. 

그때 이승엽 선수는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스타였죠. 
그랬더니 호시노 감독이 뭐라 그랬는가 하면 "이승엽이 누굽니까?" 그랬어요. 
자기는 모른다는 얘기예요. 

호시노 감독이 이승엽을 모를 리가 없죠. 그런데 '모른다'는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그 사람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게 당시 신문에 가십거리로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다'는 말은 그런 개념이에요. 
요셉의 정책과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애굽의 왕이 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얘기가 왜 나오는가 하면, 잘 보셔야 돼요. 

▲1:9~10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지금 바로의 염려는 굉장히 이중적이죠. 
히브리 노예들이, 즉 이스라엘 민족들이 두려운데 
그들이 애굽을 떠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만한 노동력을 어디 가서 찾습니까? 
지금도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들이 빠져나가면 
공장들이 거의 올스톱 할 지경이라 그래요. 

왜냐하면 이제 한국 사람들은, 손에 기름때 묻히는 일을 이제 안 하거든요. 
그들이 싼 노동적으로 그 일을 지금 대신 자리매꿔주고 있는 거죠. 

그래서 대림동이나 안산 지역 가면, 거의 외국 분위기에요.
우리는 그들을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자원으로 잘 보듬고 안아야 되겠죠. 

바로에게는 그런 두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이 두렵지만, 동시에 또한 그들이 떠날까봐 걱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가 꺼내든 카드가 뭡니까? '고난'이라는 카드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일관된 패턴이 뭔지 아세요? 출애굽기는 이런 패턴으로 흘러갑니다. 
'고난 - 하나님의 구원 - 백성과 언약 - 하나님이 임재' 의 패턴!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거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광야에다가 설치케 하신 게, 성막을 만들게 하신 겁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엄청난 분량의 페이지를 
전부 성막 설계도로 채워 놓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출애굽기 전체를 관통하는 패턴이에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서예요. 
'고난 - 하나님의 구원 - 백성과 언약 - 하나님이 임재' 의 패턴!

그래서 '성막'은 우리 신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 설계도가 얼마나 섬세하고 자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에게 친밀하고 자세하시다는 말이에요. 

대충 우리와 동거하거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것이 계속 출애굽기 전체를 통해서 관통됩니다. 

출애굽기는 모든 40장이에요. 
근데 거기에 상당한 페이지가 전부 무슨 성막을 만드는 설계도 이에요. 

우리는 이런 출애굽기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내셨다'
이 구원의 역사가, 출애굽기의 메인 이벤트가 아니에요.

(메인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임재해 들어가시고, 
하나님은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어떻게 실천하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주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설득해 가시는가? 
이것을 출애굽기 전체 과정을 통해서 설명하시는 겁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계사도 손에 붙드시고, 엎어버리시기도 하고, 일으키시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열심히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지금 트럼프나 시진핑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이스라엘)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말이에요. 믿습니까? 

북에서 조금 핵가지고 위협하면, 겁먹고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이 세계를 경영하는 손길을 보면요. 
그래서 남북의 통일도 갑자기 될 것 같아요. 

아무리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고, 자료를 들여다보고, 생각을 해도
이 남북관계는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를 위해 남겨 놓으신, 
민족 복음화뿐만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특별 카드인 것 같아요. 
이럴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는 짧은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12번도 절단날 상황이 너무나 많았어요. 
꺼져 갈 듯 하다가도 다시 지펴주시고... 

그리고 세상 밖을 나가보면, 대한민국이라는, 
아직도 허리가 끊어진 조그마한 땅덩어리에서 
어떻게 이 민족이 이런 위대한 반전의 역사를 일궈냈는가? 

역사 속에서 원조 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된 경우는 유일하게 대한민국입니다.
OECD 국가 가운데 이거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거예요.
나머진 대부분 나쁜 거로 1등이에요. 
뭐 맨날 툭하면 OECD 꼴찌... 

근데 어쨌든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된 경우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나라입니다. 
여기 저는 메시지가 있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이번에도 몽골에 가 보니까, 뭐 커피숍에도 무슨 가게에도 전부 
한국 드라마 틀어놓고 있어요. 
현빈 같은 한국 배우들이 유명해요. 캄보디아에 가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 교회 우리 성도들과 청년들은, 정말 선교가 본업이 돼야 됩니다. 
선교밖에 할게 없어요. 

저는 사실 이 교회 부임하기 전에는,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머리로 알았어요. 
그런데 이 교회에 부임해서 지금 6년째 접어들면서 
하나님이 뼛속 깊이 그것을 DNA 화 해주시더라고요. 

'정말 이 땅에 피로 값 주고 세운 교회가, 해야 될 본질은 이거(선교)밖에 없구나' 
우리가 먹고, 있고, 사는 것도, 선교를 위해서 먹고, 입고, 살아야 되겠구나. 

선교 위에서 돈 벌고, 선교를 위해서 직장 다니고, 
선교를 위해서 6개월 열심히 일하고, 선교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행위는 구원행위 이에요. 보세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을 보내신 거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고난이라는 불못 속에 던져지지 않고는 
그 땅을 떠날 생각을 할 수 있겠나..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얼마나 매력 있는 땅인데, 눌러앉으려고 그랬죠. 

광야에 나와서도 그들은 계속, 고기가 이 사이에 낄 정도의 그 풍성한 
애굽의 문명과 넉넉함을 추억하고 기억했어요.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다 끌어내서 
그 안에 들어간 모든 불순물들은 뽑아내리려니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얼마나 힘들었겠고, 
모세는 그 가운데 끼워가지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리고 오죽했으면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사람들을 낳았습니까?' 민11:12
'왜 나한테 이건 맡겨 가지고.. 하나님 같이 가시면 가고, 안 가시면 나도 안 가겠습니다.' 출33:15 

아무것도 없는 광야 그 벌판에 200만 명을 데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늘만 바라봐야 되는데, 하루하루가 어떻겠어요?

광야라는 곳은 딱 하나, 
그 애굽의 풍족한 문명과 삶에서 그 기름 때를 벗겨내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도록 훈련하는 공간이.. 광야였어요. 

지금 이들이 들어가 살 땅도, 애굽 못지않게 만만치 않은 땅이거든요. 
광야 40년을 담금질 하지 않고, 어떻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오늘도 이 출애굽기 말씀을 붙들고,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그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말씀 붙들고 또 간절히 부르짖는이 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