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3OLuMYtHlm8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art 1. 선교사로 부름 받기까지 ☞모든 글 보기
▲어린 시절 성장기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화례 Florence Root 는
1893년 12월 21일에 뉴욕주 북부에 옷세고 Otsego 카운티 버터너츠 마을에서
아버지의 윈필드 스캇 루트와 어머니 에발리나 루트 사이에
3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루트 가문은 이 지역에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넓은 농장을 일구었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다.
루트 가문의 먼 친척 중에는, 법률가이자 공화당 정치인이며
미국 국무장관과 뉴욕주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1912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엘리후 루트가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분위기에서 유화례의 부모는 농촌에서 낙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서,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고
아버지도 딸을 아들과 차별하지 않았기에, 네 자녀가 모두 대학을 다녔다.
루트의 가정은 인근의 뉴욕 시에 자신들의 생산한 달걀과 우유를 납품하며 살면서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유복한 생활을 했다.
그들은 농촌의 평범한 가정답게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유화례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반드시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함께 앉아 식사를 했고,
주일에는 정성스럽게 옷을 차려입고, 예배와 주일학교에 참석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언제나 기도하도록 교육받았고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앙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유화례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유화례가 7세 때 아버지가 우체국장이 되면서
가족은 우체국이 있는 길버츠빌 로 이사를 갔는데
인구가 400명 남짓되는이 마을에는, 교회는 물론 학교, 상점과 은행도 있었다.
11살 때는 부흥사가 마을에 와서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연합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은혜를 받고 그의 형제들과 함께 신앙을 고백한 후
그의 가족이 출석하는 장로교회의 교인으로 입교했다.
유화례는 당시에는 신앙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기도하면서
주일마다 오전 예배와 주일학교, 주일 저녁에는 기독면려 청년회에도 참석했다.
유화례가 13세가 되던 1906년 아버지가 옷세고 카운티 서기가 되면서
가족은 그 지역의 중심지인 쿠퍼스타운으로 이사했고
유화례는 그해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유화례는 지역사회의 문화를 향유하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여름 내내 인근의 옷세고 호수에서 수영을 했고,
가을과 겨울이면 금요일 오후마다 타운홀에서 열리는 농구 경기를 관람하며 응원을 하곤 했다.
농구 경기가 끝난 후에는 그 자리에서 사교댄스가 열렸는데
당시 지역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댄스는 너그럽게 인정되었으며
유화례는 고등학교 시절에 댄스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교활동은 교회 행사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되었다.
주중 기도 모임이 목요일에 있었는데, 유화례는 기도 모임을 마친 후에 댄스 모임에 가곤 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문화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야외 활동, 댄스, 카드놀이가 유화례의 학창시절에 즐거움을 주었다.
댄스와 카드놀이를 불경건하게 생각하는 미국 남부의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와 달리
유화례는 (북부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이다.
▲대학 시절
유화례는 1909년 6월에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영어, 생물학, 라틴어, 독일어, 수학, 물리학 등의 과목을 이수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유화례가 공부의 재능이 있었고, 성실한 학생이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같은 뛰어난 학업성취는, 그가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당시 나이가 15세였기 때문에
부모님은 어린 딸이 집을 떠나 타지의 대학에 다니는 것을 염려했고
유화례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년간 고등학교에서 졸업 후 교육과정에서 공부하다가
다음 해인 1910년 가을, MA 노스햄턴에 위치한 명문 여자대학인 스미스 대학에 입학했다.
유화례는 입학할 때 4년간 학비의 50%를 감면해주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나머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교내에서 열심히 근로봉사를 했다.
1학년 때는 독일어 교수의 업무를 보조했고
3학년과 4학년 때는 생활관에서 살면서 생활관 근로를 했다.
그러면서 생활관 사생회장을 맡았고, 대학 합창단은 물론
수학, 독일어, 스페인어 동아리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유화례는 공부는 물론, 근로와 교내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알찬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유화례는 대학에 있는 동안 신앙생활에 활력을 잃게 되었다.
사실 유화례의 부모가 다른 곳보다 특별히 스미스 대학을 선호한 이유는
2학년 교과 과정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학은, 오전 채플과 교회 출석이 의무사항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하고 학교에 보고하는 시스템이었다.
유화례는 대학시절 채플과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2학년 필수 과목인 성경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교수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학자들이었고
기적 이야기를 그저 비유로 이해하면서
성경의 중요한 교훈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가르쳤다.
유화례는 그들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졸업할 무렵에는, 신앙이 흔들리며 점점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도 간헐적으로 출석하고, 성경 읽기와 기도도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
유화례의 회고를 잠시 들어본다.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열심히 공부를 잘했고, 그 시절에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여전히 나는 교회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의무 출석도 아닌 대학 채플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일부였을 뿐이다.
성경은 2학년 필수 과목이었고,
나의 부모님이 이 학교 입학을 허락하신 주요 이유였다.
그러나 이 성경 과목에서, 나는 신앙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학식 있는 철학 박사들이었는데
학생들에게 성경의 기적 이야기들은 단지 비유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고,
성경 전체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고, 그 중에 일부만을 받아들이면 된다고 가르쳤다.
(당시에 이런 성서비평주의가 유행했던 시절)
이런 내용을 처음 들었던 나는 그저 아이에 불과했다.
내가 뭐라고 감히 질문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그들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대학교육이 나중에 광주 수피아 학교 교사에 도움이 됐다.
유화례는 대학에서 영어와 독일어 과목을 4년 내내 수강하고,
스페인어는 3년간, 라틴어는 1년간 수강한 것으로 보아
언어 과목에 관심과 특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웅변과 역사 과목을 세 과목 수강했고, 음악은 2년간 꾸준히 수강했으며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수학을 3년간, 물리학을 1년간 수강했다.
대학에서 언어에 집중하면서,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과학과목은 물론
철학과 역사 등 인문학 분야도 골고루 공부했다.
특히 대학에서 음악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이후 광주 수피아 학교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일하며 음악과목을 가르치고
학생들의 합창을 지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화례는 선교사 신상정보에, 자신의 전공을 독일어와 수학이라고 표기했다.
▲졸업 후 직장 생활, 약혼과 파혼
유화례는 1914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열려 있었던
공립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가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 것이, 교사 생활에 밑바탕이 되었다.
뉴욕 주 웨스트 윈필드 고등학교에서 수학, 독일어, 미술을 가르치며 2년간 근무하였고,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댄스와 다른 여가 활동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에 유화례는 한 젊은 사업가와 진지하게 교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웨스트 윈필드에서 좀 더 먼 곳에 있는 엘렌빌 고등학교로 옮겨
수학 교사로 일했고, 교제하던 남성과 약혼을 하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학교를 사임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거나, 남성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남성이야말로 이상적인 결혼 상대라고 여겼다.
무엇 하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데 있어서,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화례에게는, 결혼을 원치 않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유화례는 아무런 이유 없이, 결혼 약속을 파기했다.
유화례의 영문 전기를 쓴 디트릭(이철원 선교사)은
유화례의 가족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
'유화례의 어머니가, 남성이 적합한 배우자가 아니라고 느꼈던 것이
유화례가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유화례는 "내가 그때 결혼하였더라면 선교사로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결혼을 하지 않도록 지켜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한 적이 아주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파혼 후에 유화례는 다시 교직으로 복귀하여 뉴욕시 롱아일랜드의
베이 쇼어 Bay Shore 에 있는 학교에서 교감과 수학 교사로 일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고향인 쿠퍼스타운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여러 지역과 여러 직업을 옮겨 다니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고향에 머물면서 지역 은행과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1919년 가을, 고향을 떠나 뉴욕 주 포투자비스에서 2년간 수학 교사로 일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 교사들도 좋았고, 보수나 생활 환경도 괜찮았지만
유화례는 만족을 느끼지 못했고, 교사직을 아예 그만두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는 삶의 뿌리를 내릴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남동생 가족이 있는 뉴욕주 북부 시라큐스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하고
부동산 회사 사무원으로 일했지만, 그 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유화례는 뚜렷한 목적 없이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그저 평범하게 살기를 갈망했다"고 말했다.
▲방황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조금씩 찾아가는 여정
교사로서 성공할 수도 있었고, 가진 재능으로 인생을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유화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만족과 갈증은
그가 바라던 평범한 일상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며
계속 자기 자신과 갈등하게 했다.
그것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그의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거룩한 불만족과 가난한 마음이었다.
유화례의 내면적 방황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 나가는 순례의 여정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답을 찾기 위해서
그는 이리저리로 헤매었고, 그러한 여정을 통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유화례는 자서전 머리말에서 선교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사도 바울처럼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분명한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가 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그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갑작스러운 책임감이 들거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면서
조금씩 깨달으면서 선교사가 되는 경우이다.
이 중에서 자신은 두 번째 경우라고 말했다.
유화례의 방황의 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깨달아가며
자기의 소명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전환점
삶의 뜻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유화례의 인생의 전환점은
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한 일자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남부의 미시시피 주 로렐 Laurel 에 있는 제재업자인 윌라스 로저스의 비서직이었는데,
회사 업무를 하는 것뿐 아니라, 대표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하며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교회 사역을 돕는 것이 근무조건이었다.
이 일은 북부 출신인 그가 남부로 내려가고,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교회 사역에 깊이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비서 업무는 그리 많지 않았고, 일도 힘들지 않았다.
유화례는 그곳에서 넉넉한 보수를 받으며, 여유있고 편안한 생활을 하면서 3년간 일했다.
그곳은 유화례가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그곳을 찾은 부흥사가, 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3주간 인도한
부흥 집회를 통해, 커다란 신앙의 감화를 받게 된다.
유화례는 그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그날 내가 받은 축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삶을 새롭게 헌신하면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향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화례는 대학 시절 이후 멈추어진,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상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몇 주 지속되지 못했고
이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유화례는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 커다란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이렇게 남은 생을 살려 하는가?
오로지 자신의 기쁨과 이익만을 좇으려고 하는가?
이렇게 이기적인 태도를 고집하려는가?
왜 다른 이를 위해서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내면의 음성은, 이미 유화례를 전도자와 선교사의 삶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을 바라는 욕망이, 그를 붙잡으며 번민하고 있었다.
▲한국 선교사와 만나서, 한국 선교에 이끌리게 되다
당시 유화례가 출석하고 있었던 로렐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의 사모는
그와 좋은 친구 사이가 되어, 유화례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여 전도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유화례에게
자신이 졸업한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남장로교 총회 교사양성학교를 추천해 주었다.
이 학교는 이후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와 합병한
장로교 기독교 교육대학원의 전신이었다.
마침내 유화례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리치먼드 총회 교사양성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화례는 이 학교에 입학하여 1년 6개월을 공부하면서 "천국을 맛보았다"고 고백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 교육과, 교수 윌리엄 톰슨의 조교로 일하기도 하였고,
웨스트버지니아 찰스턴에 있는 장로교회로부터 청년부 사역자로 청빙받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리치몬드에서 공부하는 기간은
유화례를 한국선교와 연결시켜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그곳에 와서 연수받고 있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을
만나며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광주에서 함께 지내게 될 간호사 변마지 Margaret F. Pritchard 도
이 학교에서 만났다.
유화례는 어느 독신 여성 선교사 한 사람으로부터, 한국 선교에 대한 제안을 받게 된다.
유화례는 자서전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회고한다.
「어느 날 독신 선교사 한 분이 나에게 선교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선교사들의 이야기 등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의 다음 질문은 이러했다.
'당신이 선교사가 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러나 나는 대학을 졸업한지 이미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라면 모를까,
동양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식년으로 들어와 있는
광주에서 온 뉴랜드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그러고 싶다고 대답했고... 그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광주의 여학교에서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고,
나의 교사 경력을 고려할 때, 내가 충분히 자격이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인양 그에게 대답했지만
오히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도해 보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기도했고, 그 결과는 1927년 1월 11일에 한국에 들어왔다.」
유화례에게 한국 선교를 권한 독신 여성 선교사가 누군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화례는 자서전에서 그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안식년에 맞아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총회 교사 양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유화례를 만나 교제하면서 그에게 한국 선교를 권면했고,
안식년 기간 중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광주 스테이션의 남대리 Newlandm Leory Tate 선교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러므로 유화례을 한국으로 인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독신 여성 선교사와, 남대리 선교사였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독신 여성 선교사로서 유력한 인물은 마정원 Miss Margaret Martin 선교사이다.
광주 스테이션의 마정원 선교사는, 당시 안식년으로
미국의 장로교 총회 교사 양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을 오랫동안 맡으며
학교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구애라 Anna McQueen 선교사가
과로와 건강 악화로 교장직을 사임하게 되었고
목포 영흥학교 교장이었던 기마각 선교사가
임시로 수피아 여학교 교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로교 선교회는 마정원이 안식년에서 복귀한 이후
수피아 여학교 교감을 맡아, 기마각을 도우면서 실질적인 책임을 맡도록 했다.
그러나 마정원은 안식년 후 복귀하지 않고 1927년 사임했다.
그러므로 광주 스테이션 선교사로서 소피아 여학교를 이끌어 나갈
여성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1926년 당시 안식년 중에, 리치몬드 총회 교사 양성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유화례을 남대리 선교사와 연결해 준 인물로는, 마정원 선교사가 유력하다.
마정원이 선교사직을 사임했기 때문에
유화례가 그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주장처럼 구애라가 유화례을 수피아 여학교로 인도했다면
유화례가 남대리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구애라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구애라는 이후 유화례와 광주해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일했던 관계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유화례는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기로 결정하고
1926년 4월 17일에 지원서를 냈고, 그해 6월 10일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유화례가 선교사로 지원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은
그가 찰스턴 WV 의 장로교회에 청년부 사역자로서의 청빙을
이미 수락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유화례는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의 의견을 구하였다.
그리고 그 담임 목사로부터 (목사) 자신도 젊은 시절부터 선교사가 되고자 하였으나
상황에 가로막혀 꿈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선교사로 나가려는 사람을 가로막지는 않을 것이라는 답장을 받고서
유화례는 선교사로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회는 소피아 여학교 교장직을 사임한 구애라를 대신하여
목포에 있는 기마각을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세우고
목포에 거주하면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광주에 머물며 근무하도록 했다.
광주 스테이션은 구애라의 교장사임으로 부족해진 수피아 여학교 교사 인력을
보강하기 위해 유화례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이때는 유화례가 남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직후였다.
마침내 유화례는 1926년 12월 18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하여
1927년 1월 11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34세경
유화례는 자신이 선교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상황을 주관하셨고
이 모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서, 나를 이러한 결정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말로 이것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 모든 상황들이 합력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극적이거나 갑작스러운 일은 없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인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내가 깨닫는 데까지
여러 해가 걸렸을 뿐이다.」
유화례는 자신이 겪은 여러 상황과 과정이 다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일이었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여겼다.
34살의 늦깍이 선교사 유화례의 한국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2. - YouTube
◑Part 2. 한국의 첫인상과 정착
▲미국에서 조선의 광주까지 25일 걸려서 도착하다
미국을 떠나 미지의 땅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은
배로 오랜 시간을 항해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전혀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지만,
항해는 여행의 추억과 즐거운 만남도 선사했다.
1926년 12월 1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항한 배는, 7일 후
크리스마스의 중간 기착지인 하와이 호놀룰루에 잠시 정박했다.
유화례는 스미스 대학 동창생의 주선으로 호놀룰루에서 살고 있는 동문 선배
샬롯 다지를 만났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로 호놀룰루를 두루 관광하면서
와이키키 해변에서 수영도 하고, 크리스마스 가족 만찬에도 초대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배는 다시 하와이를 출항하여 13일을 달려서 일본 고베 항에 도착했다.
남장로회의 광주 스테이션 선교사들의 세심한 배려로
고베에서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영국인이 항구로 마중 나와서
유화례를 숙소로 데려와, 여장을 풀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 머물면서 주일을 보냈고,
월요일에 그 영국 신사의 배웅을 받으며 시모노세키 항으로 가는 기차를 탔고,
거기서 부관 페리를 타고 1927년 1월 11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34세 경, 일제시대
그런데 부산에서는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화례는 배에서 내려 홀로 낯선 길을 헤치고 기차역을 찾아갔고
무사히 표를 끊어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창문 너머로 마주 대하는 한국의 시골 풍경들을 감상했다.
당시는, 광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기 위해서, 대전역에서 내리자
광주 스테이션의 서로득 Martin Swinehart(장로) 선교사가 마중 나와있었다.
그의 인도를 받아 광주 송정리로 가는 기차를 탔고,
광주역에 도착하여 동료 선교사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기차역에서 자동차를 타고 광주 스테이션 경내로 들어와
앞으로 그가 오랫동안 살게 될 독신 여성 선교사 숙소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광주까지 오는데 꼬박 25일이 걸린 것이다.
▲광주의 첫 인상
그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다.
유화례는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기도했다.
"나를 부르심을 이제야 확실히 알았습니다.
나의 불만, 나의 고통, 모든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이 지배하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설사 부족하고 고집이 세다 하더라도
나를 누구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유화례가 선교사로 들어왔던 시기는 *192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대공황 이전까지, 선교의 호황기를 맞던 때였다.
한국도 3 .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의 흐름 속에서
1920년에서 1925년 사이에, 교회 성장과 선교회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 남장로회 선교회 역시, 세운 미션스쿨에 학생들이 대거 몰려왔고
부족한 인력을 호소하며, 미국에 선교사 충원을 요청했다.
비록 충분한 숫자가 충원되지는 못했지만,
1926년에는 남장로교 한국 선교사의 인원이 최고점인 98명에 이를 만큼 충원되었다.
유화례는 일제강점기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성장하고 있던 시점에
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유화례는 광주에서 첫날 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낯선 장소에서 겪는 어리둥절함,
앞으로 선교지에 정착할 일과 감당해야 할 사역에 대한 부담감도 그 이유였지만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유리창을 넘어들어와, 방 안에 냉기가 가득한 것도
잠 못 이루는 첫날 밤이 되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눈을 부비며 처음 마주대한 것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예쁜 색시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신비로운 무등산의 모습이었다.
유화례의 숙소는 수피아 여학교와 가까워서, 아침에 교정에 나가자
등교하는 여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잡으며 이름을 물으니
여학생은 부끄러운듯 자기 손을 빼면서 이름을 말하고, 고개 숙여 인사했고
어떤 학생들은 신기한 듯이 유화례를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지나갔다.
유화례는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 여성의 고운 얼굴, 맑은 눈망울, 친절함을 느꼈다.
그러나 학생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했다.
▲광주의 선교지에서 유화례가 무엇보다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우리 말을 익히는 것이었다.
남장로회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어 훈련을 매우 엄격하게 강조하였고,
정해진 이수 조건을 다 충족하지 못하면, 사역에 투입하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언어 교육을 시켰다.
보통 2~3년 안에 읽고 쓰기, 듣고 말하기의 기본적인 우리말 실력을 갖추는 것이
신임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 조건이었다.
유화례는 언어훈련을 받으면서도, 지역전도 활동과 수피아 여학교 보조업무를 맡았다.
언어훈련을 이수하기까지 어떤 업무도 맡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수피아 여학교의 교사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에,
한국에 온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나, 보조업무라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가 처음 맡은 학교 일은, 음악교사와 생활관 사감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언어훈련을 위해서 유화례는 1927년 4월, 서울에 있는 언어학교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2개월간 머물면서 우리말 공부를 하고, 광주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언어공부에 매진했다.
이렇게 몇 해 동안 우리말을 공부했다.
유화례가 우리말을 배우면서 가장 어려웠고, 심지어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것이
존대어와 관련된 어법이었다.
유화례의 서투른 우리말 표현은, 종종 주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동료 교사에게 "진지 먹었습니까?" 라고 말하여, 웃고 지나간 일은 비교적 가벼운 실수였다.
전북 진안의 어느 농촌 교회에 가서, 교인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을 때
'감자를 삶아 달라'는 말을 "남자 좀 삶아주시오" 라고 잘못 말하여
함께 있던 여성들을 싸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학창 시절 어학에 재능이 많았던 유화례였지만
이처럼 우리말을 배우고 익히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리고 한국인들과 가족처럼 오랜 시간 동안 살아가면서
유화례는 우리 말로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는 수준에 이를 만큼
한국어가 편안하고 익숙해졌다.
후에는 남장로회 어학위원회에서 신임 선교사들의 어학훈련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이 땅에서 살면서 우리말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한국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정든 고향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말할 만큼,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유화례가 1927년 5월에 서울에 머물면서 어학공부를 할 때 작성한 편지가
그의 첫 선교편지였다. 이 편지에는 한국에 대한 유화례의 첫인상이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왜 한국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하였다.
「나는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충분치 못했습니다.
한국은 그 어디나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라고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언덕과 산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광경이 내게는 큰 기쁨입니다.
긴 겨울 내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산 너머 해가 아름다운 빛을 뿜으며 솟아나는 모습을
창밖으로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때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봄에 한국을 볼 때까지 기다려라'
나는 지금 한국의 봄을 경험하면서,
진실로 그 말의 진가 그 이상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3주 동안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만개하여
마당과 언덕과 거리를 정말로 동화의 나라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서울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타고르의 시 때문에 알려짐
아침은 10시까지 여전히 청명한 아름다움으로 놀라움을 자아내고
그 후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해가 져서 어두움이 짙어질 때까지
낮 동안 계속 (그 아름다움은) 잔잔히 이어집니다.」
같은 편지에서 유화례는, 한국에 대한 일제의 통치를
우호적인 입장으로 바라보는 생각을 내비쳤다.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의 재한 선교사들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유화례는 미국 북장로교가 세운 세브란스 병원을 맡고 있었던 에비슨 선교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처음 한국에 들어와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O. L. Avison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화례는, 구한말은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였지만
일제의 통치 이후로 사회가 질서를 잘 유지하며 발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일제의 식민통치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근대화의 관점에서 외형적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구한말의 무질서와 혼란과 달리
일제의 통치 이후에 한국이 안정되고 발전했다고 여기면서
대체로 일제(일본제국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특히 구한말과 일제 통치 시기를 모두 경험한 선임 선교사들의 인상과 평가는
유화례와 같은 신임 선교사의 인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화례는 서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북장로교 허대전 James Holdcroft 박사님과 사모님과 같이 지낼 수 있는
놀라운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두 분은 나의 오랜 친구이며, 사실 나의 목사님이시며 나의 선생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온 것이 갑절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 오기 전에도 개인교사와 함께 한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어학원의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캐나다, 영국, 남아프리카에서 온
6명의 국제적인 그룹이고, 미국인은 저 혼자입니다.
우리는 수업시간 외에 이 흥미로운 도시를 함께 관광하면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 주에 우리는 에비슨 박사가 왕실의사로 근무했던 초창기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조선은, 안으로는 혁명과 밖으로는 압제에 시달리는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
현 정부(일제)는 매우 효율적으로 통치하면서, 모든 것이 기대 이상으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이 고전과 문헌을 파괴하고 모든 학교에 일본어로 교육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지워 없애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 나라는, 자신들의 정부가 집권할 때는
끔찍한 조세착취와 실정으로 소요가 끊이지 않았지만
현재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도로와 철도와 다른 20세기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위의 편지에서 유화례는 일제의 한국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과 긍정적인 평가,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소개하였지만
대체로 후자를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억압적인 면이 있어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는, 그의 낙관적 평가였다.
유화례가 한국에 입국한 지 4달밖에 지나지 않았고,
일제 식민통치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제가 부각시키는 한국 사회의 외적인 측면만을 보면서 갖게 된
그의 피상적 인식이, 이 편지에 나타나 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다.
특별히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의 종교적 우상성, *신사참배 등
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비민주적 독재,
제국주의 확장 전쟁에 열광하는 호전성,
한국교회를 핍박하는 반기독교적 성격을 파악하면서
유화례는 일제체제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특히 기독교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하여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맞섰다는 점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초기에는, 그는 긍정적이고 밝은 점만 보려고 하는
신임 선교사 특유의 자세로, 일제 체제에 대하여 낙관적이고 낭만적이었다.
1929년 11월 2일자 서신에서도 유화례는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면서
그해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박람회에 다녀온 인상을 남겼다.
유화례가 말하는 행사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통치의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조선 박람회였다.
얼마 전에 완공된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심으로
경복궁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이 행사는
경복궁과 전근대적 조선의 이미지를 뒷배경으로 삼고,
총독부 청사와 일제의 근대적 식민통치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에 대한 식민지 근대화와 식민통치의 발전상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총독부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장려하는 방식 등으로
100만 명의 군중을 박람회에 동원하기 위해 애썼다.
유화례는 이 박람회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이래로
지난 20년간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전시회였고
경찰의 특별 경계령 속에서 많은 군중이 동원되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이, 이 행사장 중앙에 임시 건물을 세우고
전시회에 찾아오는 군중들을 전도했고,
그 결과 방람회 기간에 3,072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전하면서
참여한 모든 이들이 기뻐했다는 평가를 남겼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이 일제의 통치 아래 근대화되고 있는 외형만을 바라보고,
식민 통치의 본질과 한국에 대한 억압적 통치의 현실을 관과하면서
일제와의 우호적 관계 속에서 전도활동에 집중했던 선교사들의 단면을 보여준다.
▲유화례는 서울에서 언어를 배우면서, 광주 수피아 여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서 일했고
또 간간이 시골지역을 방문하며 전도활동도 했다.
유화례는 1927년 11월에 보낸 선교편지에서, 첫 시골 전도여행에 대한 스케치를 담았다.
이 전도여행은 남장로의 여성선교사 반리라(리나 폰테인) 선교사와 함께
1927년 9월에 2주간 5개의 마을을 방문한 전도여행이었다.
유화례는 이러한 전도여행이, 자신의 한국어 학습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도여행을 통해 유화례는 한국의 깊숙한 마을을 찾아다니며 한국과 한국인들을 만났고
기독교의 복음이 이 나라와 사람들에게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의 소중함과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다.
아래의 편지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현명한 사람은, '당신이 정말로 한국어를 배우려 한다면
하루 종일 날마다 그 언어만 듣게 되는 시골로 가라. 그러면 그 언어가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가을에, 리나 폰테인 선교사와 9월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할 때
2주 동안 동행하면서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방문 여행이라서, 한 장소에서 하루나 이틀만 머물면서 다섯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확실히 언어가 충분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의식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폰테인 선교사는, 내가 잠자면서 이야기하는 한국어가 훨씬 유창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의식적인 순간에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이 2주간 동안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경험하였고, 모두가 진정 흥미로웠습니다.
선교사들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원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종교를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회의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처럼, 내가 방문했던 마을들에 가보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공동체에서 비기독교인들보다 얼마나 더 뛰어난 사람들인지
당신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백석이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은, 맑은 산골짜기 시냇가에 있는 오지인데
지금까지 내가 본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비기독교인인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전주에 있는 우리 선교회 여학교에 여러 해 동안 다녔던
17살 크리스천 여학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의 옷은 깨끗하고 단정했고, 그 여성은 깔끔하고 조심성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의 수동적이고 지저분한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어울려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널리 나타납니다...」
▲선교 초기부터 유화례는, 한국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깊은 연민을 느꼈다. 1927년 8월에 작성한 편지에서 유화례는
이미 두 차례나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한국 교인의 결혼식을 도왔다고 이야기했다.
음악은, 우리 말이 서툴렀던 유화례가
한국인들과 교제하고 어울릴 수 있었던 좋은 소통의 수단이 되었다.
유화례는 결혼식 때, 한국의 신부들이 하나같이 수줍어하면서 슬퍼 보였고
눈길을 피하려는 듯 전혀 쳐다보지 않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유화례는 "여성들이 기독교 가정에서조차, 아내가 아니라 종과 같이 살면서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은 물론, 가족 모두를 섬겨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기독교인 가정에서 신부들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대와 멸시를 당하기까지 한다는 것에 깊은 연민을 느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열등한 지위에 대한 유화례의 안타까움은
여성 전도와 교육으로 여성 지도력을 개발하고
여성을 교회와 사회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유화례는 선교회 안에서 빠르게 적응했고,
그때까지 남장로회가 한국에서 수행한 선교사업을 배우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신임 선교사가 선교를 빨리 파악하고, 선교회의 모든 활동에 쉽게 적응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베테랑 선임 선교사들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이었다.
특별히 선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참석하여 선교회의 모든 사역을 논의하는 연례회의는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지고, 선교회 노하우를 습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유화례는 연례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교제하고
선교회의 선교활동을 부지런히 배우고 논의사항을 좇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은, 그가 앞으로 선교회 안에서 중요한 책임을 감당하는 리더로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첫 연례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왜냐하면 연례회의에 참석할 때까지 기다려보라.
그 후에야 당신은 정말로 선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연례회의가 길고 지루한 보고들과, 끝없이 계속되는 회의들과
재미나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었습니다.
그런데 순서를 하나라도 놓칠까 봐 노심초사 하며
매번 모임 시간에 맞춰서 참석하려고 서두르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놀라워했는지 여러분은 아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교사로서의 나의 경험에 비춰보건데
연례회의는, 우리 선교회가 실제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을 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채 안 된 1929년 11월,
유화례는 <광주학생운동>을 목격하게 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민족적 반감과
한국 학생들을 차별하는 식민지 교육현실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우발적으로 충돌하게 된 사건을 계기로 점화되어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한 사건이었다.
광주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도 1930년 2월에 조아라를 중심으로 '백청단'이라는
비밀 결사 조직을 조직하고, 2년 만에 18명의 회원을 모았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하고자 하였다.
유화례는 1930년 2월 서신에서, 광주학생 운동을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 정책에 대한, 한국 학생들의 집단 반발로 이해하면서
한국의 모든 학교와 학생들이 들끓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운동의 원인이 무엇이며, 누구의 잘못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한국 학생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염려했다.
그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학생들을 위한 기도가 절실하다고
선교 후원자들에게 기도 요청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유화례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현실에서
선교회가 한국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과 선교에 대해 고민했다.
유화례는 학생들이 바른길로 인도되어서
그들의 민족과 동양의 모든 민족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 라는
간절한 소망을 편지에 표현했다.
유화례가 말한 '바른 길'은
"그들의 민족과 동양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축복과 연결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유화례에게 진정한 축복은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복음으로 한국 민족을 살리고, 나아가 아시아의 민족들을 구원하는
기독교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이
한국에서 감당해야 할 교육 선교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일제의 지배 아래, 억압과 차별을 당하며 분노를 분출하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기독교적 교육이었고,
그것이 선교회가 한국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봉사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과 일왕에게 충성하는 식민교육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한국과 아시아의 모든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기독교적 교육이 한국에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생각은, 남장로회 교육선교를 이끈 인돈(윌리엄 린턴)이
'선교회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교육선교'라고 말했던 맥락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