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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3

LNCK 2023. 12. 5. 21:10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 11]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3.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 Florence Root 의 선교와 삶

 

◑Part 3 : 수피아 여학교와 교육 선교          ☞지난 호 보기 

▲(문교부) 지정학교 인가를 위한 끈질긴 노력 
유화례가 한국에서 감당해야 할 주된 임무는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 선교였다. 

유화례는 전도자의 열정을 가지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한국에 들어왔지만,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는 수피아 여학교에서 교육선교를 담당할 적임자로서 
유화례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1908.04.01.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Dr. Eugene Bell) 선교사가 여학교를 설립 개교, 
                  초대 교장으로 엄언라(Miss Ella Graham) 선교사가 취임
1911.09.01. 제2대 교장 구애라(Miss Anna McQueen) 선교사 취임
1911.가을   미국의 스턴스 여사가 세상을 떠난 동생 수피아(Jennie Speer)를 기념하기 위해

                   5,000불을 희사하여, 3층 건물 교사(Speer Hall)가 준공되다. 
                   이때부터 교명을 수피아 여학교로 부름 (당시 학생 68명)
1931.04.01. 교장 유화례(Miss Florence E. Root) 선교사 취임

유화례는 1927년에 한국에 온 직후부터 수피아 여학교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학생들을 자녀와 같이 돌보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면서 오랫동안 교육을 많이 했고, 교장으로 봉사했다. 

유화례가 선교사 재임 기간 중, 마지막 안식년을 위해 1957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수피아 여학교는 개교 50주년 행사와 더불어 
유화례 한국선교 30주년 축하 행사를 동시에 거행했다. 
또한 1974년에는 유화례의 이름으로 기념 도서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로 보건대 유화례와 수피아는 불가분의 관계였고, 
그만큼 유화례의 한국 선교는 수피아 여학교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수피아 여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광주 스테이션을 개척한 유진벨 선교사 부부가 
1907년에 집에서 여학생 3명을 가르치기 시작한 데에서 출발하여 
1908년 선교부 학교로 공식 개교하였다. 

1908년에 남장로교 연례회의는 엄언라 선교사가 광주스테이션에 
다른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학교의 책임을 맡도록 했다. 

엄언라 Miss Ella Graham 가 1907년에 내한한 신임 선교사였기 때문에 
혼자 학교 업무를 감당하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다른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선교회가 1908년에 여학교 책임자(엄언라)를 지정함으로써 
광주 여학교는 선교회가 운영하는 미션스쿨로 공식적으로 출발했다. 
이에 따라 여학교 건물 예산도 편성되었다. 

그러나 광주 여학교 건물의 우선순위는 1908년 당시 선교부의 건축계획 우선순위 
중에서 최하위였다. 
이에 따라 광주의 여학교의 건물은, 남학교 건물이 1910년에 건설된 다음 해인 
1911년에 비로소 건축되었다. 

광주 여학교는 시애틀의 스턴스 여사가, 
사망한 자신의 여동생 제니 스피어를 기념하는 추모기금을 기탁하여 
2층의 단독교사인 수피아 홀을 건축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수피아 여학교'라고 명명했다. 

1910년부터 교장으로 봉사한 구애라 선교사의 적극적인 모금활동으로 
수피아 기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후 스피아 여학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유화례가 수피아 여학교에서 교육 선교를 시작한 1927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여성조력회의 주도로, 
교회 여성들이 생일헌금 58,875달러를 모아 학교 발전기금으로 보냈고 
이 기금으로 대강당인 윈스보로 홀과 체육관 음악관, 운동장을 건립했다. 

남장로회가 수피아 여학교에 많은 기금을 지원한 이유는 
선교회가 (문교부)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서 
전주의 중심 남학교인 신흥학교와 함께 
수피아를 중심 여학교 Central Girl's School 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서 예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조선총독부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학교 시설을 대폭 보완해야 했다. 

남장로회가 지정학교 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은 
일제의 교육정책과 제도 아래에서 
미션스쿨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지키면서도 
공립학교 및 인가받은 다른 사립학교에 비하여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후 1911년 8월에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충량한 국민을 기르고, 국민된 성격을 양성"하는 것을 교육의 제일 목적으로 명시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사립학교 규칙"을 공표하여 
사립학교를 그들의 교육제도 아래 편입시켜 통제하고자 했다. 

특히 선교회 학교들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1915년 3월 24일에 공표한 '사립학교 규칙 개정안'이었다. 

이 법안은, 사립학교의 교과 과정을 일제가 정한 커리큘럼에 한정하고 
그 외의 교과목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성경과목 개설, 채플, 예배와 같은 종교활동을 철저히 차단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러한 규칙에 따르지 않는 학교는, 인가를 받지 못하게 하여 학교 문을 닫도록 했다. 
미션 스쿨은 남장로교를 비롯한 재한선교회가 
한국 선교의 중심 사업으로 여기며, 많은 재원을 투입하여 설립 및 운영하였고, 
기독교 선교는 물론이고, 한국의 근대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일제는 자신들의 교육 목적과 이념에 방해가 되는 이 같은 기독교 학교들을 
법과 제도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교육선교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이 법안의 시행을 위한 유예기간으로 설정한 10년 사이에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남으로써, 일제의 교육정책의 수정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1920년 3월 1일에 일제는 사립학교 규칙을 다시 개정하여 
수신(修身)과 일본어 과목을 제외한 교과목에 대하여 
사립학교의 자율권을 인정함으로써 한 발 물러났다. 

그렇지만 미션스쿨의 진통은 끝나지 않았다. 
1922년 2월 6일에 일제가 단행한 '제2차 조선교육령'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이, 조선의 학제를 일본의 교육제도와 동일하게 개편하여 
내지(일본)와 식민지 사이에 존재하였던 교육의 차별을 해소하고 
조선의 교육의 수준을 높이는 조치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제가 요구하는 학교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립학교들을 
'미인가 각종 학교'로서 분류하여, 차별과 불이익을 받게 하여 
교육 생태계로부터 도태시키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회 학교들은 일제의 학교 시스템에 편입되어 
교육당국의 통제를 받으면서, 기독교 정체성이 위협받는 상황을 감수하거나 
미션스쿨의 교육목적과 교육방식을 지키기 위해 
일제의 학교시스템 밖에 머물면서, 학력인정을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문교부 졸업장 X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1921년 4월 25일에 공표된 '지정학교 제도'가 
1923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미션스쿨이 직면한 위기 상황이, 선교부가 돌파할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제시한 
-교과 과정의 향상, 
-우수한 교원 채용, 
-학교 시설의 개선 기준을 충족하는 사립 각종 학교를 
지정학교로 인가하는 제도였는데, 

선교회로서는, 미션스쿨의 교육의 자율성을 지키면서 
일제의 교육제도 아래서 동일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일제의 교육제도 아래서, 미션스쿨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지정학교 인가'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예산이었다. 

한정된 인력과 예산으로, 모든 미션스쿨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교육위원회는 1923년 남장로교 연례회의에서 
선교부가 운영하는 5개 스테이션의 10개 미션스쿨 가운데 
남학교 하나와 여학교 하나를 지정학교로 인가를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연례회의에서 지정학교 추진을 희망하는 스테이션의 발표를 들은 후 
비밀투표를 진행했고, 
남학교는 신흥학교가, 여학교는 수피아 여학교가 최종 결정되었다. 

남장로교 교육위원회는 지정학교 추진 대상으로 선정되지 않은 학교들은 
고등학교 과정의 상급반을 운영하지 않기로 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한 후폭풍도 있었다. 
탈락한 스테이션과 학교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남학교의 경우에는 군산의 영명학교가, 
전주 신흥학교와 지정학교 추진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선교회 내부에서 회의로 결정된 일이었지만 
스테이션 간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묘한 긴장감이 생겨났다. 

최종 결과에 대하여, 군산 지역의 교회와 선교회 일부가 
영명학교가 지정학교 추진에서 탈락한 것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고, 
선교회는 교육위원장과 선교회 대표가 이에 대해 답변하기로 했다. 

군산의 남학교인 영명학교는, 1924년 당시 고등학교 과정까지 
300명의 학생과 8명의 한국인 교사가 있었고, 
인돈(윌리엄 린튼)의 지도하에 발전하는 과정 중이었기 때문에 
탈락에 충격을 받고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이후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한 예산이 
전주의 신흥학교와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유화례는 이러한 상황에서 수피아 여학교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1928년 9월 27일 서신에서 유화례는 남장로교 지리산 선교사 캠프에서 
4주간 휴가를 보낸 후, 8월 중순에 돌아와 새학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직 선교회가 요구하는 언어학습의 필수 조건을 절반도 끝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선교회가 집중 육성하고 있는 중심 여학교로서, 학교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언어 훈련을 받으면서, 학교 일을 병행하도록 했다. 

유화례가 수피아 학교에서 담당했던 일은 
수업과 학생 자조반(self-help department)을 지도하는 일, 
그리고 60명의 여학생이 생활하는 기숙사의 사감 업무였다. 

유화례는 이러한 업무에 매우 미숙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 일에 흥미를 느끼며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신에서 유화례는 그의 8월 말부터 9월 둘째 주까지 계속된 집중호우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엄청난 재산 피해가 일어난 상황 또한 전했다. 

농부들은 한해 수확을 모두 잃어버렸고, 
농지가 유실되어 커다란 상실감과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 여성들이, 자신들도 가난한 처지에 있지만, 
수혜로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을 돕기 위해, 헌신적으로 성금을 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유화례는 커다란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 

유화례의 편지를 잠시 들여다 보자. 
「여러분(미국 교회)도 신문을 통해 소식을 들었겠지만, 
한국의 한 지역에 끔찍한 홍수가 일어나 400명이 목숨을 잃고 
최소 400명이 실종되었으며, 1천 가정 이상이 완전히 무너졌고 
많은 집이 반파되었으며, 논과 밭이 완전히 유실되었습니다. 

농부들은 다시 농사를 지을 땅으로 복구될 때까지 여러 해가 걸릴 것이라고 한탄
하고 있습니다. 한편, 홍수의 피해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 젊은이와 노인, 가난한 자와 부자를 포함하여 온 나라의 사람들이 
성금을 모으고, 옷가지를 모으며, 그 지역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이곳에 있는 한국교회의 여성조력회 모임에서 
'기회가 된다면 수해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하여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두 명의 시각장애 여성이 앞으로 나와, 각각 50전과 10전을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여성들은 도움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남을 도운 것입니다)

또한 단돈 10전도 낼 수 없는 어떤 여성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교회의 기증물품과 함께 보내기 위해 
단 위에 가져다 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희생적 기부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안락함과 우리의 기부를 
이와 같은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나에게 큰 감동과 감격을 주었습니다.」 

유화례는 한국어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지는 않아 
1930년 2월까지 한국의 언어학교에 계속 다녔지만 
광주의 선교지에 빠르게 적응해가면서, 수피아 여학교에서의 역할이 점점 커져갔다. 
당시 유화례의 초미의 관심사는, 수피아 여학교의 당면 과제인 
'지정학교 인가'를 받는 것이었기에, 그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유화례는 1929년 7월 서신에서 
수피아 여학교의 지정학교 추진 상황에 대하여 언급했다. 

학교는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총독부가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유능한 교사진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주요 교과목의 교사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자격을 갖춘 사람은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 선교회가 원하는 기독교 신앙을 갖춘 교사가 부족했다. 

선교회는 좋은 교사를 찾으면서도, '교사는 먼저 신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사진의 부족은 수피아 여학교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중요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유화례는 이 서신에서, 선교사로서 당시 교사진에 포함된 사람은 
교장인 김아각 Daniel James Cumming, 녹스 부인과, 자신 뿐이라고 말했다. 

김아각은 여전히 목포의 영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 교장을 겸직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교사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김아각은 목포 영흥학교와, 수피아 여학교 외에도 
1929년부터 1931년까지 광주 숭일학교의 교장까지 겸직했다. 

김아각이 목포와 광주에서 3개 학교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1930년 연례회의가 지리산 선교사 캠프에서 개최되었고 
선교부는 1931년부터는 유화례가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의 책임자로 내정되면서 
수피아 여학교뿐 아니라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중책을 맡을 인물로서 
그 비중과 역할이 커졌다. 

실제로 1929년에는 유화례는 선교회 안에서 교육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었다. 
특히 1929년의 교육위원들인 목포의 김아각, 군산의 볼 부인 Mrs. William Bull, 
전주의 공정순 Susanne Colton, 순천의 백미다 Meta Biggar, 광주의 유화례 중 
김아각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선교사였다. 

또 이 5명 가운데 독신 여성 선교사가 3명이었다. 
이로 보건대 남장로교 교육선교회에서 여성 선교사, 특히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유화례였다. 

이 편지에서 유화례는 지정학교 인가의 또 다른 조건인 학교시설과 관련하여 
새롭게 마련한 강당, 체육관과 운동장, 과학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으며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도서관도, 후원금을 받아 새로 조성하고 있고 
8대의 오르간과 2대의 피아노도 설치하여 음악 수업에 활용하고 있다고 썼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수피아 여학교는 등록 학생 수가 50% 증가했고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학교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의 외적인 발전 상황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한 미션 스쿨로서 
수피아 여학교의 기독교적 특징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했다. 

고등학교 재학생 가운데 55 %가 세례교인이며 
37.8 %가 학습교인이고 
47.5 %가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다. 

또한 기숙사 학생 72명 중 61명이 
매주일 시내와 인근 지역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화례가 수피아 여학교의 현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며 
학교 발전 계획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한국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그는 이미 선교회와 수피아 여학교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학교를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수피아 교사진 중에서 유화례에게 누구보다도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은 
정신 여학교 출신으로 미국 남장로교 여자 대학인 아그네스 스캇 Agnes Scott 대학
에서 유학하고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에 마치고 돌아와 
수피아 여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던 김필례였다. 

김필례는 유화례가 교장으로 일하던 1930년대에는 교감으로 동역하였고, 
수피아 여학교가 신사참배 강요 문제로 (자진) 폐교했다가, 
해방 후 동문들에 의해 재개교했을 때, 교장으로 일했다. 

이후 그는 정신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 기독교 여성 지도자였다. 

김필례는 1928년 12월에 인도에서 열린 <세계 기독학생 연맹 
World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와서 
많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대회에서 김필례는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 보이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정서'는 
종교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서양의 제국주의적 위협과 
문화우월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대회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신뢰하지 못하고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유화례는 '선교지의 모든 문제는 계속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연합하여 함께 기도하고, 우리의 목적에 헌신하고, 
온 마음으로 우리가 선포하는 주님을 향해 충성을 다하면.. 선교가 성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유화례는 김필례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피해와 고통 당한 경험이 있는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 선교 제국주의와 문화우월주의 빠져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오로지 복음의 대의에 헌신하여, 모든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협력할 때, 
선교사역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화례와 김필례는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면서 
수피아 여학교를 통한 교육선교에 협력하였다. 

유화례는 서울로 어학 훈련을 받으러 다니던 1930년에도 
지정학교 인가에 필요한 교사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화여전을 방문하여, 
졸업생 가운데 수피아 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사람을 찾아보았다. 

이화여전이, 당시 한국에 있는 유일한 기독교 여자대학이었기에 
수피아 교사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기관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선교를 위한 활발한 교류와 협력이, 선교회와 교단의 차이를 넘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화례는 1930년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수피아 여학교 교감으로 선임되었고 
1931년 4월부터 교장으로 일하도록 결정되었다. 

선교의 중심 여학교인 수피아 여학교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교육선교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유화례는 1930년 9월 12일 서신에서 
수피아 여학교가 '지정학교 인가' 기준에 따라 신청서류를 제출했지만 
일제교육당국이 계속 수정 및 보완을 요구하며 되돌려 보내고 있다고 언급하며, 

이것은 학교가 지정학교 조건에 미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 당국이 이전에는 없었던 지침을 조금씩 추가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가 계속 트집을 잡고 절차를 까다롭게 해서 
미션스쿨에게 '지정학교 인가'를 쉽게 내주지 않으려 하던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유화례는 학교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면서 
일제교육당국의 부정적인 평가 앞에서 
'지정학교 인가' 획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수가 지난 해에 83명에서 113명으로 증가했고 
교사진이 탁월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교육당국의 기준에 맞춰서 준비를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예기치 못한 문제로 신청서류가 되돌아온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마음이 무겁고 허탈해지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한번 힘을 내야 했다. 
이러한 때에 든든한 동료 선교사의 존재는,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유화례는 이 편지에서, 그의 친구 변마지 Margarret Pritchard 선교사가 내한해서
광주의 선교회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기뻐했다. 

유화례는 리치몬드 총회 교사 양성학교 재학 시절, 변마지를 만나 교제했었는데, 
그는 유화례보다. 좀 더 늦게 한국 선교사로 들어왔다. 

이로써 유화례는 광주의 독신여성 선교사들이 가족처럼 살아가는 선교사 사택에서 
단짝 도마리아 Mary Dodson 와 변마지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외로운 한국에서 고단한 선교활동을 오래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족보다 친밀하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료 여성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화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가렛 프리처드 양을 우리의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 
선교회의 구성원으로 맞이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녀는 뉴욕의 장로교 병원에서 정규 간호사로 일하였으며 
이제 언어 공부를 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광주의 병원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벌써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날마다 시간을 잘 보내면서 병원의 상황과 간호사들을 알아가고 있고,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광주병원은 오랫동안 간호사 없이 지내왔던 터라 
그녀를 너무나도 간절히 필요로 했고, 
우리는 그녀가 있음으로 인하여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합니다." 

1931년 5월 16일자 서신에서 유화례는 
4월 1일부로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수피아 여학교가 겪던 어려움은 
지정학교 인가를 계속 거절하는 교육당국의 까다로운 심사과정과 트집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의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예산 삭감과 
선교사업의 위축에 뼈아팠다. 

이로 인해 많은 예산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학교 개선 작업에 비상등이 켜졌다. 
남장로교 해외선교 위원회의 총 예산도 33%가 줄었고, 
한국선교회도 1931년 예산의 20%와 선교사 사례의 10%가 삭감되었다. 

유화례는 이 서신에서, '올해의 예산이 삭감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가 
선교사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학교 교사들과 직원들의 봉급이 삭감될 위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해 4월에 현실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중에도, 수피아를 비롯한 미션스쿨들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한국교회의 성장이 미션스쿨의 발전을 이끌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미션스쿨이 서로 건강하고 긴밀한 선순환의 관계를 갖는 것이 
남장로교 교육선교회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미션스쿨은 교회의 지도자와 전도자, 기독교 인재를 길러내고 
교사와 학생들은 인근 교회의 전도활동과 주일학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회 발전에 기여하고, 

교회는 미션스쿨에 학생을 보내거나 재정적으로 기여하고 
더 나아가 미션스쿨 이사회를 통해 학교에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학교발전에 기여했다. 

유화례는 이 서신에서, 한국인 전도자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교인들이 늘어나고,
교회와 모임이 조직 되면서 학교가 발전하고 
또한 학생들이 지역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와 학교가 상호 발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화례의 편지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대학과 기독교학교 발전의 이상적인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유화례가 교장 직무를 수행할 때 가장 어렵다고 여긴 일은 
교사회의를 주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사들이 서로 도우려는 정신이 가득하기 때문에 
걱정했던 것처럼 교장 일이 아주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장 유화례가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동료 교사들로부터 도움과 지지를 받았으며 
교사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화례는, 학교 행정 일은 부담스러워했지만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즐거워했고 
교사나 행정가로서 보다는, 전도자로서의 열정이 컸다. 

유화례는 공식 업무 외에도,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주일 아침에는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 중 기독교인이 아니고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학생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중에는 성경을 처음 접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했다.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열정은 
유화례의 선교 초기부터 선교 사역의 마지막까지 한결같이 이어졌던 모습이었다. 

1929년 서신에서 유화례의 선교 초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여학생 한 사람이 유화례에게 찾아와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중에,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성경 수업 시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인지 모르고 
구약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유화례는 그 학생을 방으로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누면서 
주일마다 자신과 1시간씩 따로 만나 공부하자고 제안하였고 
매주 1대1로 성경을 가르쳤다. 

유화례는 오히려 그 여학생이 자신을 크게 고무시켰다고 말했다. 
이 서신에서 유화례는 광주 스테이션에 많은 자녀들이 있는 선교사 가정이 여럿 있지만, 
자신은 사랑스런 여학생이 72명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녀가 많다 라고 재치있게 말했다. 

이러한 말 속에서 학생들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느껴진다. 
선교사와 교사로서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학생을 자녀와 같이 여기며, 인격적 관계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교육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서 산적한 업무에 매달리면서도 
부지런히 전도활동을 병행하였던 유화례는 
1931년 8월에 예정보다 일찍 안식년을 가졌다. *1927년 최초 입국

과로로 인해 건강을 잃어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빠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자는 편지를 받고 
한국에 온 지 4년 6개월 만에 안식년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유화례가 안식년으로 떠나 있는 동안 
수피아의 지정학교 인가 추진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1932년 4월에 열린 전체 위원회에서, 이 사안을 다루고 있었던 교육협의회는 
선교부 예산 축소를 고려하여, "중심 남학교의 지정학교 인가를 계속 추진하되 
예산은 10% 삭감한 것 이하로 지급되며 
중심 여학교의 지정학교 인가는 계속 추진하되 
이번 해에는 재촉하지 않도록 한다"고 결정했다. 

유화례가 안식년으로 학교를 비우는 상황에서 
당분간 관망하는 입장을 취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화례는 미국에서 18개월간 안식년을 보냈다. 
첫 6개월은 고향인 쿠퍼스타운에서 지냈고, 
1932년 2월부터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하며 
1년 만에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공교롭게도 신흥학교의 교장으로서 남장로교 교육선교를 주도했던 인돈(린튼)도 
컬럼비아 대학교 교육대학원의 동일한 과정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던 터였다. 

이들이 교육선교를 주도할 중요한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선교회는 안식년을 통해 공부하고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유화례는 학위를 취득하고 1933년 2월 25일 미국을 떠나 
3월 중순에 광주에 도착하여 수피아 여학교의 졸업식에 참석하고 
4월부터 새학기를 시작했다. 

복귀하자마자 유화례는 엄청나게 많은 업무를 감당해야 했다. 
갑자기 교사 한 사람이 사임하는 바람에 대체할 인원이 없어서 체육 수업을 지도했고, 
그 밖에도 학생들에게 벼농사와 토끼와 돼지 사육하는 법을 지도하는 일 등 
전혀 생소한 일들을 해야 했다. 

그는 선교편지에서,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쓰면서, 다음번 안식년에는 아마도 건물 감독하는 일은 물론 
벼와 보리를 심고 수확하고 잡초 뽑는 일에도 숙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학교에 딸린 논에서 여자 고등학생들이 농사일을 하고 가축을 길렀던 것은 
가난했던 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한 근로의 일환이었다.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특징 중 하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는 근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인돈(린튼)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미션스쿨 들만이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그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목사, 교사, 의사 등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돕고, 
실용적 기술을 연마하여 이것을 직업으로 발전시켜서 
가정과 이웃과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도우고 있었다. 

부명광 G. Thompson Brown 에 따르면, 남장로교 미션스쿨은 산업 교육을 강조했다. 
한국의 농업사회에서 상업과 산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회로 빠르게 변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교육이 중요하기도 했고, 
노동을 천시하는 유교와 달리, 기독교는 노동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남장로교 미션스쿨은 학생들에게 산업교육을 강조한 측면이 있었다. 

각 스테이션마다 산업부를 두고 운영하였는데, 
순천 남학교에서는 1921년에 부임한 원가리 James Unger 선교사가 목공을 시작했고, 
이어서 놋제품 제작과 토끼 사육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여학교는 산업 교육을 위해서, 비싼 설비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업 교육에 더욱 성공적이었고, 각 스테이션 여학교마다 특성화 분야가 있었는데 
목포는 바느질, 군산은 단추 달기, 전주는 뜨개질, 순천은 자수, 광주는 레이스였다. 

학생들은 상품을 만들어서, 미국 교회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판매하여 수익을 얻었다. 

유화례 역시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학생들이 여러 가지 실용적인 일을 배우고 
일하면서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도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나아가 가정과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유화례는 학생들이 농사 일과, 가정수업 실습을 통해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여학생들은 학업과 더불어 다양한 실용적인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유능한 여성이 되고,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데 적합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후자의 방향으로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2주에 한 번씩 채플을 인도하고, 
정규수업의 일환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실용적 기술을 습득하여 가정을 잘 경영하는 주부의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 지도자로서 여성의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 
유화례가 추구했던 여성 교육의 핵심이었다. 

안식년 복귀 후에 유화례가 학교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은 업무는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한 작업이었다. 

전주 신흥학교는 인돈(린튼)이 모든 준비작업을 주도하면서 
마침내 1933년 4월 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지정학교 인가를 취득했다. 

1933년 4월 25일에 열린 남장로의 연례회의에서 
지정학교 인가 취득에 수고한 위원들에게 선교회가 기립으로 감사를 표하고 
교육위원회가 관계당국에 감사를 표시하도록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위원회는 이눌서 William Reynolds, 강운림 William Clark, 
우월순 Robert Wilson, 인돈 Linton 으로 대표단을 구성하고 
전주의 도청을 방문하여 신흥학교의 지정학교 인가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서로득 Martin Swinedhart, 이눌서, 강운림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빠른 시일 안에 서울의 총독부 학무국을 방문하여 
신흥학교 지정학교 인가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비슷한 조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남장로의 중심학교인 전주 신흥학교가 
지정학교로 인가 받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광주 수피아 여학교였다. 
유화례로서는 낙관적인 기대를 가질만 했다. 

 

그러던 가운데 광주 스테이션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다. 
1933년 10월 26일에 광주의 선교병원에서 직원의 실수로 큰 화재가 일어나 
소방관이 출동하기도 전에 병원 본관이 모두 타버리고 잿더미가 되었다. 

유화례가 1933년 10월 31일 서신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화재가 일어난 본관 진료소 반대쪽에 있었던 간호사 숙소는 다행히 지킬 수 있었고, 
입원 환자들도 안전한 곳으로 재빠르게 피신했다. 

그리고 불이 크게 번지기 전에, 많은 장비를 건져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레이 기계를 비롯한 고가의 장비들과 기구들을 잃었고, 
약제실 전부가 불에 탔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음 날 화재를 피한 장비들을 간호사 숙소로 옮기고 
다시 환자들을 돌보면서 진료소를 정상적으로 운영한 병원 직원들의 
투철한 사명감과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새로운 환자들도 화재가 피해간 감염병동에서 계속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유화례는 이 처참한 사고 속에서도 
의료선교사와 한국 전 직원 모두가 놀라운 정신력과 헌신을 보여주었고 
광주스테이션 모두가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칭찬했다. 

무엇보다도 선교 병원을 향한 한국인들의 뜨거운 성원, 
그리고 비기독교인들까지도 지갑을 열어서 병원을 돕는 모습은 
지금까지 광주의 선교 병원에서 이루어온 의료선교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마치 일상적인 업무를 하듯이, 
화재의 피해에도 전혀 용기를 잃지 않고, 어려운 의료사역들을 수행하면서 
모든 일을 기쁘게 감당하였고, 커다란 열정으로 임했습니다. 

지역의 한국인들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병원을 돕기 위한 관심과 마음을 표했습니다. 
지역기관들로부터 기부금이 답지했고, 비록 그것들이 작은 것일지라도 
기부자의 편에서는 자기 희생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혼란을 수습하려고 엄청난 수고를 하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격려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비기독교인들도 병원이 지금까지 감당해온 일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지갑을 열었고, 우리 선교병원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나는 이 재난의 결과가, 결국에는 우리 공동체의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위의 편지에서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의 지정학교 추진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유화례는 신흥학교 지정학교 인가 취득에 한껏 고무되어 
"수피아 여학교도 요즘 크게 고무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정학교 인가를 신청하는 서류를 서울의 학무국에 다시 제출했고, 
곧 당국의 심사를 받게 될 것이며 
모든 학생과 교사들이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난히 통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야 '무허가 교육기관'이라는 당국의 제재도 피하고, 졸업장도 줄 수 있는 듯)

유화례는 1933년 11월의 서신에서도 겨울에 당국의 심사를 통과하면 
다음 해부터는 지정학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유화례는 서울의 총독부 교육 당국자들을 방문하여 학교에 관한 협조를 부탁했고,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돌아왔다. 

또한 서울의 다른 학교들을 방문하며 
지정학교 인가에 필요한 새로운 교사진 구성에 관한 자문도 받았다. 

그동안 수피아 여학교가 교사진 확보, 학교 시설 확충과 개선 등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지정학교 심사에서 탈락했던 이유는 
일제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교사진 구성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화례는 이 편지에서 수피아의 교사들이 매우 헌신적이고 협조적이어서 
교장인 자신이 오히려 그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하며, 
교사들의 능력과 헌신도를 높이 평가했다. 

유화례는 이렇게 교사진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도를 드러냈지만 
지정학교 인가를 위한 일제의 기준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미션스쿨에 필요한 교사진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일제가 요구하는 교사진의 자격과 조건은 서로 부합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일제 교육당국의 평가를 앞두고 있었던 수피아 여학교의 상황이었다. 
낙관적인 기대와 확신에도 불구하고, 지정학교 신청은 또다시 통과되지 못했다. 

(*1929년 11월에 있었던 '광주항일학생 운동' 때
수피아 여학교도 일부 여학생들이 '백청단'을 조직해서 도왔던 일이 있었고,
그런 일이, 일제의 감시망에 찍혔을 수도 있었을 개연성 있음.
지금 지정학교 인가 신청 시기가 1931~33년 경임. / 주) 

유화례는, 일제가 요구하는 교사진의 자격 조건에 담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거나 
또는 미션스쿨이 요구하는 교사의 기본 자질과 조건을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에 
양자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번번이 지정학교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7월 18일자 유화례의 (선교보고) 서신에는 
지정학교 승인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커다란 실망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어떻게 편지를 써야 하고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운을 떼면서 
1934년 2월에 교육당국의 심사를 받았지만 
지정학교로 승인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실망이 컸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몇 달간 정상적으로 학교 업무를 보면서도 
일제 교육당국과 협의하고, 점검을 받는데 매달렸다. 

일제 당국이 요구한 것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교사 2인을 새해에 확보하라'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지체 없이 지정학교 인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렇게 탈락을 통보하고, 개선책을 제시하며 회유하는 방식은 
교사의 자격을 문제 삼으면서 
미션스쿨을, 
법과 제도로 압박함으로써 길들이려는 일제의 의도였다. 

교육당국이 제시한 처방에 따라 유화례는 
가능한 신속하게 이러한 교사를 찾을 것이며 
오랫동안 목마르게 기다리던 목적을 성취하는데 
그 어느 것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또한 과학관의 신축 계획을 당국자들에게 설명할 것이며 
1934년 9월에 과학관 건축을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국내 또는 해외 선교지에서
신학교 또는 미션스쿨을 운영하는 일부 사역자들은
아예 신앙 위주의 일종의 '대안 학교'로 방향을 설정하고,
꼭 당국이 주는 학교 허가증에는 연련하지 않는 분들도 있죠.
대신에 졸업장은 좀 권위가 없죠. '우리는 신앙 노선만 지키겠다'는 거죠.
미션학교가 꼭 일반 고등학교나 일반대학처럼 자격을 갖출 필요는 없다는 거죠)

또한 여학교로서 가사 실습을 위한 시설이 실제적으로 전무하고, 
일제 교육당국이 이 부분을 특별히 지적했다고 말하면서 
남장로교 여성조력회의 후원으로 필요한 시설을 보완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이러한 유화례의 노력 속에는 두 가지 모습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나는 남장로교 중심 여학교 교장이면서 
여성을 위한 교육선교의 책임자로서 
학교 발전을 위해 기필코 지정학교 인가를 받아내기 위한 헌신적인 모습과, 

또 하나는 일제의 교육이념을 관철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동원하여 
미션스쿨을 길들이려는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학교의 정체성과 생존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었다. 

일제당국은 '기독교 신앙은 결국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충돌할 수밖에 없고 
기독교 학교는 그 본성상 일제의 우상화 교육과 국민화 교육 방향에 역행할 수밖에없다'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미션스쿨과 교육선교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남장로교 선교회는 1933년 열례회의에서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요구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다. 
인돈, 유화례, 원가리, 이눌서가 조사위원이 되었다. 
교육선교회 책임자였던 인돈과 유화례가 
미션스쿨에 대한 친사참배 강요의 문제를 조사하는 위원회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유화례와 선교회가 유사한 조건에서 
지정학교 인가를 받은 신흥학교에 비해 
수피아 여학교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탈락하는 이유를 
일제의 의도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했다는 내용은 발견할 수 없다. 

이들은 해결책을 제시하며, 미션스쿨을 압박했던 일제의 이중적인 태도 가운데서 
그들의 숨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유화례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학교 폐교를 들먹이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된 
1936년 이후의 상황에서는 
미션스쿨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지정학교 승인을 위해, 일제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는 교사를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국의 자격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교사 2명을 내보내야 했고 
그 중 한 사람은 유화례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핵심 인물이었다. 

객관적인 자격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미션스쿨의 교사로 합당한 기독교인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학교를 위해 헌신적인 교사는 내보내야 하고 
정작 필요한 교사는 부족한 모순적인 상황이 
일제의 식민교육제도 아래에서 미션스쿨이 겪는 딜레마였다. 

그런데 일제 당국의 교사의 자격 기준은,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유화례는 1935년 5월 2일자 서신에서 
"학기말에 두 명의 교사가 지정 학교 교사자격 기준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둘 중 한 사람은, 인근지역에서 이미 지정학교로 승인 받은 학교에 
재직하던 교사였으므로,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가 요구하는 자격기준이, 상황에 따라 매우 자의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화례는 학교 발전을 위해 일제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망을 맛보았다. 거듭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지적받은 부분을 보완하여 
지정학교 인가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일제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학교로서 정체성과 본연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 
교사와 학생의 신앙을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 예로, 학교가 어려운 때에 교사와 학생들의 기도 모임을 만들어 
신앙을 굳건히 하고 더욱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담임교사가 정규 채플이 있는 아침 시간에 학급 기도 모임을 인도하고 
토요일에는 채플 시간을 활용하여 주일학교 공과를 가르칠 때 
나머지 교사들은 특별기도 모임을 하기로 한 것이다. 

유화례는 기도회가 교사들을 단합시키고, 그들의 영성을 심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이 시점에서 유화례는, 학교가 그동안의 많은 노력을 통해 
어떠한 결실과 성취를 이루었는가에 대하여 자문해 보았다. 

일제 당국의 외적인 평가가, 
학교의 결실과 성취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피아 여학교가 이룬 결실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유화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과거의 활동을 돌아보면서 과연 무엇을 성취하였는가를 질문해 보니 
졸업해서 나간 졸업생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에만 이곳을 졸업한 26명의 여학생의 이름들이 
즉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지금 그들은 교회의 유능한 사역자로 일하거나 
선교회 학교와 교회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거나 
그 중 한 사람은 광주 선교병원에서 정규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13명 이상이 현재 (상급) 기독교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면서 
기독교 교사나, 간호사나, 교육을 잘 받은 가정주부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4년간 전체 졸업생의 절반에 달합니다." 

내가 이들을 생각했을 때, 내 마음이 확실히 위로받았습니다. 
일제교육당국이 학교시설과 교사의 자격과 학력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기고 
평가하는 것이, 학교의 업적과 성취라고 생각했다면 
당시 상황에서 낙심했겠지만 

그는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하여 
훌륭하게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학생들이 
수피아 여학교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람과 감사를 느꼈다. 

과거를 생각하며 무엇을 이루었나 생각했을 때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이름들이 즉시 떠올랐고 
그들의 활약상과 눈부신 발전이 생각나면서 
그들을 생각했을 때 '내 마음이 확실히 위로받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학교의 수준과 결실은, 학교가 배출한 인재들의 역량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유화례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수피아 여학교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당국으로부터 지정학교의 기준에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배를 마시고 있었지만 

유화례는 학교가 교육하고 배출한 학생들의 질적 수준을 생각하며 
미션스쿨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미션스쿨의 내실을 기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미션스쿨 본연의 사명을 지속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일제의 교육환경에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했기에, 지정학교 인가는 포기할 수 없었던 과제였다. 
그래서 수피아 여학교는 당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학교 시설을 더욱 보완하고자 계속 노력했다. 

유화례는 과학관과 음악관을 개선하고 있으며 
1935년 여름까지 공사를 마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움과 학대를 받는 아이의 신세를 면치 못하던 가사실습실을 개선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화례는 지정학교 인가는, 훌륭한 학교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지정학교는, 불리한 식민지 교육 환경에서 학교의 생존을 보장하고 *학교 인가
미션스쿨로서 사명을 계속 감당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지, 
미션스쿨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지상 목표는 아니었다. 

유화례는 며칠 안에 지정학교 신청서를 일제 당국에 보낼 것이며 
이번에는 즉각적인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기도문을 적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이 나를 신실하다고 여기셨고, 나를 지명하여 그분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맡은 교육선교의 사명은 주님의 일이며 
하나님이 자신을 믿고 그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이 기도안에 담겨 있었다. 

유화례는, 이번에는 반드시 지정학교 심사에서 통과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격을 갖춘 교사가 새로 채용되었고, 
과학관이 새롭게 개관하면서 모든 준비가 잘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다시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 채용한 교사가 지정학교로 승인된 다른 학교에서 일했었고 
심지어 대학에서도 가르친 사람이었음에도 
일제 당국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격기준에 맞는 교사를 다시 찾아야 했다. 
유화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인내를 배우게 된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당국으로부터 지정학교 승인을 받든지, 못 받든지 
학교가 해야 할 일을 계속 열심히 해나가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학교 수업을 진행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모든 학생을 기독교적인 생활로 훈련시키는 
미션스쿨 본연의 사명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한 일은 많았다. 
학교의 위기 속에서,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가 교사와 학생들을 하나로 결속시켰고, 
사랑과 상호협력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1935년 봄에 공사를 시작한 새로운 과학관 및 음악관이 
1935년 9월 마침내 완공되었다. 

미국 경제공황의 여파로, 선교 재정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원자들의 기도와 기부로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교가 발전함에 따라, 이전에 비하여 학생수가 33%나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격을 갖춘 교사를 찾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고, 
당국이 요구하는 교사 충원 인원에, 교사 수가 모자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격 기준에 부합한다고 임용했던 교사가, 자격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교사를 교체하는 시행착오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것이 지정학교 심사에서 계속 탈락하는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낙심에 빠지지 않도록 유화례를 격려하는 목소리들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우리 선교회의 북쪽으로부터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내가 한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작게나마 감당하는 것에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떤 메시지는, 우리 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칭찬을 전해주었고, 
또 다른 메시지는, 지정학교 인가를 받지 못한 것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정학교 인가를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 여러분에게 우리의 여학생(졸업생)들을 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훌륭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배출한 학생들이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그들의 역할을 탁월하게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지정학교 인가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학생들을 학교에 보내겠다는 격려의 메시지는 
유화례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이러한 메시지는 지정학교 탈락에 대한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유화례와 남장로교 선교부가 지켜나가려는 학교의 교육 방향과 내용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성원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탈진 상태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결과 
유화례는 질병으로 인하여 수술을 받으면서 강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서 1936년 이래로 광주 기독병원에서 일하며 
유화례의 주치의를 맡았던 디트릭(이철원 선교사)은 
유화례가 수술을 받았던 질환은 '난소 낭종'이었다.고 밝혔다. 

수술 후 회복하기까지 원래는 몇 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몇 달로 길어지면서 
1936년 봄과 여름 사이에 불가피한 업무 공백이 생겼다. 

그러나 유화례는 광주스테이션 동료 선교사들과 
수피아 여학교 교사들의 우정과 도움으로 그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고, 
이 시간을 통해 진한 동료회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러분들 중에서, 내가 스스로 회복하느라 몇 주간 병가를 가져야 하는 것이 
몇 달로 연장된 일을 궁금해 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스테이션과 선교회, 그리고 우리 학교에 
여러분 친구들이 보여주신 사랑과 친절한 도움이 
내가 강제적으로 휴식해야만 하는 일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선교지에 얼마나 놀라운 친교가 우리 안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 이 경험을, 나는 계속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신의 질병은, 열심히 일하는 선교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의 사랑과 기도, 한국 친구들의 지지와 격려는 
넘어진 선교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더 열심히 달려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쁘고 어려운 상황에서 갑작스런 질병으로 수술을 받아 
병원에서 강제 휴식을 취해야 했던 유화례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불편했을까? 

그러나 광주 스테이션과 남장로교 선교부의 동료 선교사들, 
수피아 여학교와 광주의 여러 지인들로부터 따뜻한 성원과 사랑을 받으면서 
오히려 이때에 잠시라도 쉬는 것이 행복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깊은 우정과 사랑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유화례가 동료들과 지인들을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가 지치고 아파서 쓰러졌을 때, 그 사랑이 더 큰 파도가 되어 진하게 밀려왔던 것이다. 

유화례는 '아름다운 사랑과 교제가 한국의 선교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뿌듯해하며, 그것을 언제나 감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