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해도 될까요? 막10:1~9 2023.12.03.설교녹취
◑도입 ☞ <이혼, 독신>관련글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심상치 않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저도 준비하면서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막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이 3년 동안의 공생의 사역을 마치시고
막9장 중간에 보면 가버나움에 계셨는데
가버나움에서 유대 지경으로 내려오십니다.
지도상에 보면, 오늘 본문의 설명처럼
유대지역으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시고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다' 이야기합니다.
이유를 보니까, 눅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보나움으로 바로 내려오셨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되는데
그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통과를 못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단간 건너편 지역 베뢰아로 가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다시 여리고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거죠.
그래서 그 지역에 갔는데, 사람들이 모이니까,
예전처럼 평상시처럼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10:2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여기서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남성명사이기 때문에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는 뜻이죠.
'옳으니이까 lawful' 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법적인 용어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율법에서 이혼이 허용된다고 보느냐,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느냐?'를 질문한 거예요.
그러나 그 시대에는 율법학자들도, 이혼에 대해서 해석이 정반대로 갈렸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샴마이의 학파는 '이혼은 절대 불가하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힐렐 학파의 경우에는
'무슨 조건이든 가능하다'
근데 이게 지금 남성 입장에서 해석한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밥을 태워도 이혼 사유가 된다' 뭐 이런 식의 해석이었어요.
여러분,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굉장히 가슴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법적으로는 혼인빙자간음죄는 2009년, 간통죄는 2015년에 다 폐지됐잖아요.
근데 사람들이 실제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심정적으로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고
고통과 절망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6:29 '남의 아내를 통관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6:32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며'
여러분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이성과 친밀해지더라도
여러분이 선을 지키고 예의를 지키셔야 되는 거잖아요.
오늘날 사람들이 법에는 민감한데, 자기 양심에 민감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민감하지 않은 경우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법에는 민감해서,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는 거에요.
이것을 마치 사회적인 능력을 갖춘 것으로 착각하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어요.
바리새인들도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법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이 질문 자체가 굉장히 세속적인 질문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줄타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하든 간에
그 줄 위에서 예수님이 (어느 한쪽으로든지) 떨어지기를 바랬던 거죠.
정반대의 두 가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하시든, 덫에 걸려드는 것이었어요.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을 하셨는가 3절입니다.
◑막10: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랍비들의 문답 형식의 질문에
예수님은 질문으로 답하셨어요.
'모세가 어떻게 너에게 명했느냐?'
예수님은 단번에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신 거예요.
그들의 논리적인 근거가, 모세의 율법이잖아요. 그러니까 모세를 언급하신 거예요.
모세를 언급하시는 순간 아마 바리새인들은 '아, 덫에 걸려들었다'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 그들의 논거 자체가 굉장히 빈약하고 틀렸다는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였어요.
◑10: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한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모세(율법)를 근거로 이혼을 합당하다고 주장했는데,
예수님은 왜 똑같이 모세를 근거로 이혼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는가요?'
모세의 근거구절은 신명기 24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근데 그 구절을 보면 '아내가 수치되는 일이 있는 경우에는 이혼증서를 줄 수 있다'고 했는데,
모세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거죠.
여러분 이해하시기 편하게 순서대로 7가지로 정리했어요.
1) 모세는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사람이잖아요.
2) 모세는 남자들에게, 아내가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치는 것,
그거 자체가 잘못이라는 걸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3) 이혼증서를 언급한 것은, 이혼증서는 공문서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성문 앞 광장, 사람들이 있는 그 공적인 자리에서
'이것이 이혼 사유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만 해당됩니다.
4) 이렇게 한 것은, 당시 남성의 노동력이 없이는 생존이 거의 불가능했던
'여성들을 내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어요.
5) 이혼증서도 없이 쫓겨나게 되면, 여자는 친정으로 갈 수도 없고
재혼도 할 수 없고, 비명 횡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그런 일이 많았잖아요.
6)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 이혼을 한다 할지라도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의도로, 모세가 (이혼증서 줘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7) 그러니까 모세는 결국 이혼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 제도를 둔 것이 아니라,
이혼을 자제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성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어요.
▲제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막10:2절과 4절에 계속 불편한 표현이 나오더라구요.
'버리다' 라는 단어예요.
왜 '버리다' 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자기 아내를 '버린다'고 표현을 했잖아요.
그것은 정말 그 시대는, 사회경제적으로 여성이 홀로 되면 자생력이 없었어요.
여성 혼자 생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여성들이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박차고 나오는 경우들도 많아지게 됐어요.
이 시대를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결혼은 굳이 안 해도 되고,
이혼은 적극 권장하는... 그런 사회 분위기가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분위기가 어떤지를 보기 위해서
도서 사이트에 들어가서 책 제목들을 한 번 검색해 봤어요.
압도적으로 이혼을 권장하는 책들이 많더라고요. 이런 책들입니다.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이혼할 용기'
'이혼해도 될까요?'
'오늘 나는 이혼을 꿈꾼다'
'이혼 수업'
'이혼 시뮬레이션'
'이혼해도 괜찮아'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했기 때문에, 이제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혼한다'
'당신의 이혼을 응원합니다'
'이혼의 기술' 등등의 책 제목들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이혼 말고도 방법은 있습니다' 이런 책은 없더라고요.
▲여러분 오늘날 결혼과 이혼의 풍속도를 보면,
사람들이 결혼.. 그거 의무 아니지, 결혼은 선택이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젊은이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 그리스도인들도, 현대인들은 다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혼은 불가하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논지와는 달리
'이혼도 선택이지, 내가 이혼을 선택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기저에는, 책 제목처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행복하기 위해서 이혼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행복이 가치판단의 절대기준이 된 것,
이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쾌락주의입니다.
'쾌락주의' 라는 것은, 행복하지 않은 상태, 고통의 상태를 거부하고
고통 자체를 죄악시하는 거예요.
제가 늘 인생에 대해서 표현하는 말은,
인생은 긴 고통과 짧은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 자체를 거부할 생각을 한다면,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어요.
자녀들이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그러는데
왜 조금 공부하다 말고 핸드폰 뒤척거리고, SNS하고, 게임하고 그러나요?
여러분,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통증이에요.
사람이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겁니다.
에너지를 엄청 쏟아 부어야 돼요.
사람이 고통이 싫다면, 공부할 수 없는 겁니다.
고통이 싫다면, 피트니스에서 운동하는 것도 못하는 거예요.
고통이 싫으면, 일도 할 수 없어요.
세상에 고통 없이, 수고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과연 고통이 있기 때문에 이혼을 고려하시는 건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쳤기 때문에 이혼을 고려하는 것인지?'
▲저는 이런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여성들도 참 안타깝지만
한국 남성들도 불쌍하다고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아요.
한국 남성들을 보면, 스파르타 식으로 돈 버는 기계로 길러진 사람들이 아닌가?
스파르타 문화가, 훌륭한 용사, 전사가 될 사람들,
신체 건장하고 그런 아이들만 키우고, 나머지는 버리잖아요.
이 경쟁 구도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도태됩니까?
어려서부터 성적에 대한 압박, 성공에 대한 압박, 높은 연봉, 멋진 직장...
이런 환상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매진하도록 교육받잖아요.
그리고 매일 야근하고, 종종 출장 가고
힘겹게 돈 버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중년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니까, 아내와 자녀들이 자기를 반가워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그 집 강아지보다 서열이 낮아집니다.
게다가 남편이 평생을 헌신했는데, 집에 돌아오니까 '삼식이'라고 그러잖아요.
여러분 이런 조롱의 말을, 가정에 평생 헌신한 남자들이 들어야 되는가요?
돈만 벌어서 가져다 주다가, 가장이 건강도 잃었어요. 영혼도 잃었어요.
모든 대가를 지불했는데, 집에서 설 자리가 없는 남자들...
돈 버는 것 외에는 인간관계의 기술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발끈할 겁니다.
'내가 왜? 내가 사업할 때 얼마나 훌륭한데?'
그런데 비즈니스가 걸려있을 땐 (인간관계를) 하는데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인간관계 기술이 상당히 떨어져요.
자기 아내 조차 아내조차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아내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삶의 실제적인 지혜와 기술과 적용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남편들이 주일 날 아내 따라서 교회를 왔는데
졸다가 아내한테 혼나고...
순예배에서는 엉뚱한 소리한다고 옆구리 찔리고...
그래서 제가 '토요 남성 모임'을 하는 거예요.
토요 남성 모임은, 저희가 어제까지 이번 학기 14명이 함께 6주 동안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어요.
그래서 저희끼리 의기투합하고 좋아졌는데,
가능하면 저희가 아웃리치까지 방학에 갔다 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구석에서 애배드리고 사라지던 한 분이, 너무너무 친해졌어요.
그래서 저는 마음이 기쁩니다.
여러분 한국 여성들도 그렇지만, 한국 남성들도
너무나 고착화된 성 역할을 강요받아왔고
그리고 그 역할이 머니 메이킹, 돈 버는 그 역할이고,
그 역할이 끝나고 나면 버림받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들이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면, 이제 스스로 변화를 선택해야 합니다.
토요 남성 모임에서 '남자도 변화될 수 있다'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뭐 만세 반석처럼 늘 똑같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세 반석은 주님 한 분으로 족하고,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반응을 하셨는가요? 5절입니다.
◑10: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예수님은 '모세 율법의 규정은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이 규정을 둔 것이다. (원래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인간들의 폐부를 찌르신 거예요.
이혼 소송 진행하시는 분들이, 기도요청도 하고 상담도 많이 하시거든요.
이혼하는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에 대해서
사실 무근의 비난과 정죄를 하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일단 법적으로 내가 유리한 고지에 서야 되니까요.
그러다보니까 또 착한 분들은 아예 그냥 소송하는 거 멈추고, 비방전을 멈추고,
그냥 손해를 다 떠안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서 '손해 보시면 안되니까 (소송을) 계속 하세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없고, 저도 참 옆에서 보면서 난감할 때가 많아요.
여러분 그 과정 자체가 얼마나 고통의 과정인지요...
예수님은, 인간이 완악해서 모세가 그 얘기(증서 줘서 내보내라)를 한 것이지
이혼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10:6~9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이 있지만, 그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주신 규정이고'
그러면서 창세기를 인용하셨어요. 창세기를 왜 인용하셨을까요?
'너희 바리세인들이 법을 논하는데, 모세의 율법보다. 더 근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 아니냐(창세기 법 아니냐?)'
예수님은 2가지를 인용하셨어요.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
창세기 2장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인간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죠.
인간이 나눠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의 경우에는 상당히 오픈되어 있으셨어요.
그렇게 진보적이셨던 분이
왜 이혼 규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보수적이실까요?
주님은 가정이 깨지는 게 너무나 안타까우신 거예요.
가정이 깨져서 우리의 영혼이 깨지게 되고
우리 자녀들의 인생이 깨지게 되는 것..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우신 거예요.
▲여러분, 결혼 생활을 하시면서 절대로 쉽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마십시오.
물론 쉽게 꺼내는 분은 아무도 없겠죠.
'난 도저히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겠다. 우리 이제 그만 이혼해!'
이런 얘기 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여러분, 인생이 힘들면 악 소리가 날 수밖에 없어요.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힘들 때는 '힘들다' 고만 얘기하세요.
힘들 때 '힘들다'고만 얘기해야 되는데
'날 이렇게 힘들게 하시다니... 하나님은 계시는 겁니까?
난 더 이상 하나님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2절로 넘어가지 마세요.
여러분 부부간에 힘드시면, 그냥 '힘들다'고까지만 얘기하세요.
'이혼하겠다'고 얘기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저는 그런 분들도 상담을 많이 하기 때문이에요.
부부관계가 너무 힘들어 가지고, '이혼'이란 말을 한 번, 혹은 두 번 언급했는데
그 말을 들은 배우자는, 1년 동안 2년 동안 소리 없이 준비해서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러면 그날에 가서 '내가 이혼을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내가 너무나 힘들어서 얘기를 했던 거야, 나는 절대 이혼할 생각이 없어!'
'어 그래? 난 너가 그 얘기를 하는 순간, 내 마음은 무너졌고
내 인생은 무너졌고 난 다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이혼하시는 가정들이 꽤 있어요.
▲결혼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반쪽으로 태어나서 나의 반쪽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가는 그 과정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완성해가는 과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은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순종의 과정이에요.
그래도 사실 행복하려고 결혼하지, 뭐 불행하려고 결혼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왔기 때문에
'여기 이곳에 행복의 파랑새가 없으면' 또 떠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파랑새 찾기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을 완성해 가는 그게 인생이에요;
▲우리가 많이 얘기하는 거잖아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가 대학만 가면'
대학생으로 4년 지내면서는 '내가 취직만 하면'
싱글일 때는 '내가 결혼만 하면'
돈이 없을 때는 '내가 돈만 많이 벌면 내 인생이 행복해지겠지'
'내 인생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손에 넣겠지'
그런데 여러분 이런 갈망의 배후에는, 힘겨운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는 거예요.
그래서 '도피 심리'라는 것은, 지금 여기가 불만이기 때문에
다음에 저기로 가면 좋아질 것 같은 마음인 거예요.
그런데 정신과 닥터가 '이거는 굉장히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안 좋은 심리적 태도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게 안 좋기 때문에, 저것이 정답이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안 좋기 때문에, 여기를 피해가기 위해서 저쪽을 선택하면,
끊임없이 끊임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돼 있어요.
그리고 자신의 운신의 폭을 좁히게 돼 있어요.
결국엔 자기가 설 그라운드 자체를 없애는 심리가 도피심리 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하고 결혼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늘 술에 취해서 폭력적이던 아버지,
늘 불행의 언어를 쏟아내던 강박적인 어머니,
가난하고 열악한 원가정의 모든 역기능적인 상처들을 다 떠나고 싶어서
결혼하는 분들이 있어요.
근데 그렇게 결혼하면 내 인생의 결핍이 해결이 되는가요?
해결되지 않거든요.
오히려 내 안에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결혼을 했기 때문에,
과도한 강박과 집착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자기를 힘들게 해요.
그리고 어느 순간 보니까 남편의 부재, 아이들의 방황,
결혼을 하고 나서 보니까 전혀 다른 차원의 어마어마한 결핍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는 또 동일한 심리 패턴이 작용을 합니다.
이번에는 이혼이 도피처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혼만 하면 해결되겠지.. 이혼만 하면 행복해지겠지..'
그래서 왜 이혼을 결정하셨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자녀들이요? 엄마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이혼 찬성해요'
'우리 애들이 지지해줬어요.' 이런 얘기를 하세요.
그러니까 행복하려고 결혼했고,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혼을 선택하는 거예요.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혼의 자리에 정말 가면,
이혼이 여러분의 삶의 현실이 되고 나면
거기에는 또 다른 불행과, 또 다른 결핍이
어두운 그늘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이, 그건 목사님 생각이죠'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이혼을 가장 많이 시킨 우리나라 최고의 이혼 전문
여성 변호사가 한 얘기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혼한 후에 '후회한다.
내가 그때는 이혼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 너무너무 후회한다'
수많은 이혼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유일한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전에는 결혼이 도피처였는데,
나도 결핍덩어리 이고, 만나 보니 그 사람도 결핍 덩어리인 거예요.
집안 살림살이야 돈 벌어서 채울 수 있겠지만,
텅빈 영혼을 채울 길이 없잖아요. 이거는 돈으로 해결 안 됩니다.
세상적인 쾌락으로 해결 안 됩니다.
성공으로 다 채워지지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결혼이 나의 도피처, 안식처가 되지 않으니까
다시 남자는, 일터가 도피처가 되고, 술이 도피처가 되고, 외도가 도피처가 되는 거에요.
아내는, 아이가 도피처가 되고, 돈이 도피처가 되고, 쇼핑이 도피처가 되고...
또 시댁이 너무 힘들게 하면, (미혼인 경우) 부모님이 너무 힘들게 하면,
유학이 도피처가 되고, 해외 근무가 도피처가 되죠.
이혼을 꿈꾸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이 꿈꾸는 그 자리에 가면, 여러분이 꿈꾸던 그것은 없고,
거기서 또 탈출을 꿈꾸게 될 거라는 거죠.
그래서 이혼을 하신 분들이, 재혼이 도피처라고 생각하셔서
재혼을 선택했다가 이혼하는 확률이,
첫 번째 이혼보다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됩니다. 세 가지 질문인데요.
1) 나에게는 정말 하나님 한 분만이 인생의 유일한 피난처이신가?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인생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면서, 나는 살고 있는가?
더 이상 다른 피난처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하나님 안에 안착을 했는가요?
2)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 영혼은 충족하게 채워졌고, 만족하고 있는가?
내가 마치 무엇을 얻어야만, 누구를 얻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서 족한 내 인생!
3) 가족을 위해서, 배우자를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첫 번째 부르심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가?
어떤 분들은 이렇게 얘기하면
'인생 열심히 살면 되지요.. 교회는 그냥 주일날 한번 가는 거죠..' 하면서
신앙생활은 보조적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요. 제가 목사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인생을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자기 영혼이 채워지지 않아요.
결국 여러분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으면, 여러분의 인생은 방황하게 돼 있고
여러분의 가정도 위태로워지게 돼 있어요.
나의 배우자는, 내 결핍을 채워줄 도구적 존재가 아닙니다.
함께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나도, 그도 결핍을 채워가는 법을 배우는
믿음의 동지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청년 사역을 할 때, 교회 안에는 믿음이 좋은 자매들이 많잖아요.
자매님들에게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제가 신앙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형제요!'
제가 속으로 '그런 형제가 과연 몇 명 되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맡았던 여호수아 청년부가 2,500명이었는데
형제 자매 비율이 2대 8이었거든요.
그러면 존경할만한 정도까지 가지 않아도,
믿는 신앙이 있는 형제하고만 만나도
60 %의 자매들은 결혼 못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자매들에게 이런 얘기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교사로 평생 헌신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 가능성 있는 사람이면,
불신자하고 결혼해서 한 영혼 구원하고, 한 가문을 구원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런 헌신들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근데 오히려 정반대 케이스들도 있어요.
제가 볼 때는 신앙이 나이롱인 자매가
안 믿는 형제 사귄다고 하면서
'제가 그 집에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뭐 선교사는 아무나 보내주나요?
자기 신앙도 흔들리는 사람들이
결혼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본인이 먼저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나서 기도의 눈물을 흘릴 줄 알고,
헌신의 수고를 할 줄 아는 성숙한 인생이 되어야 되는 거죠.
▲오늘날 시대를 보면 '결혼해도 될까요?'를 묻는 시대가 아니라
'이혼해도 될까요? 비혼해도 될까요? 졸혼해도 될까요?'를 묻는 시대가 됐어요.
물론 예수님의 일관된 대답은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외도만 제외하고 이혼은 안 된다'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에요.
간음한 연고 이혼하는 건 안 된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나누지 마라.
하나님도 가슴이 아프시고, 당신도 가슴이 아프고,
당신의 자녀들도 가슴이 아프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제가 성경을 계속 읽다가 충격을 받은 것은
예수님도 이혼을 반대하셨지만,
외도의 경우에는 허용할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어떨까요?
영적으로 우상숭배하고 외도한 우리를 버리실(이혼)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야 이건 너무 극단적인 경우니까 그래 내가 허용해줄게.
그러나 나는 너희를 버릴 생각이 없다.'
호세아서를 보면, 훌륭한 선지자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집을 나가잖아요. 자기 연인들을 만나고 돌아다닙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야, 네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오는데
신부값을 다시 들고 가서, 다시 한번 신부값을 지불하고 그 아내를 데려와라.'
그리고 호세아는 그 아내에게 '우리 다시 시작하자. 우리 가정을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은 우상숭배, 영적인 외도, 영적인 간음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지셔서
'우리 다시 시작하자, 우리 가정을 다시 시작하자' 말씀하시는 거에요.
호세아서 1장과 2장을 보면, 이게 초혼이 아니고 재혼이잖아요.
'나는 너에게 장가들 거야' 하나님이 마치 신혼인 것처럼 기뻐하세요.
죄로 인해서 망가진 우리들을 건지셔서, 우리와 다시 재혼을 하시면서
하나님 혼자 막 들떠서 기뻐하세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정도로 한탄하셨던 그 하나님이
무지개까지 보여주시면서 노아에게 하시는 말씀이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난 너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다. 난 널 버릴 수 없다.'
예수님이 실패한 수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우리 다시 시작하자!'
'주님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요.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 하나님의 손 안에서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