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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P4

LNCK 2023. 12. 6. 16:32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의 선교와 삶 : Part 4.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과 남장로회 학교 폐교

◈한국에 뿌리내린 유화례 Florence Root 의 선교와 삶

 

◑Part 4 :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과 남장로교 학교 폐교       ☞지난 호 보기 


남장로교는 미국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선교의 예산이 대폭 축소되는 상황에서도 
교육 선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특히 1935년에서 1936년에는 전도 예산의 2배에 가까운 재정을, 교육선교에 지출했다. 

일제 당국의 지정학교 승인을 얻기 위해서 신흥학교와 수피아 여학교의 예산을 
집중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1935년에서 1936년의 결산과, 
1936년에서 1937년의 예산안을 보면 
남장로교가 중심학교인 신흥학교와 수피아 여학교에 집중한 재정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1935년에서 1936년에는 선교부 전체 예산 대비 21.5%, 
1936년에서 1937년에는 18.7 %를 '교육선교비'가 차지했다. 

선교부 안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전주와 광주 스테이션에 지출되는 예산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교육선교를 위해 남장로교 중심학교에 투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예산과 노력을 집중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던 남장로교 교육선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남장로교가, 선교부 차원의 결의와 
본국 선교본부의 최종 승인에 따라, 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정하면서 
교육선교는 중단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강화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일본의 정권을 군국주의자(군부)들이 장악하면서 

신사참배는 종교화된 천황제의 국가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요구하는 표시로써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예외 없이 시행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남장로교는 이미 1933년에 신사참배 문제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이 문제를 검토하였지만, 별다른 경고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러나 1935년 11월 14일에 평양의 숭실전문 윤산온 George McCune 학장은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을 때, 양심상의 문제로 이를 거절하였고, 
총독부로부터 경고를 받았으나 재차 거절했다. 

윤산온은, 신사참배가 신사에서 이루어지는 분명한 종교적 예배이고, 
많은 사람이 실제로 그곳에서 영들을 숭배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효도와 구별되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의 죄라고 생각하고,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므로 
개인적 양심의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 결과 윤산온 학장은 1936년 1월 18일 학장직에서 쫓겨나고 
3월 21일에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는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를 비롯한 재한 선교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곧이어 일제교육당국은 <1936년에> 한국에 있는 모든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행정명령을 하달했다. 

또한 선교부는, 신사참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국민 의례를 행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일제 당국은 강경한 태도로, 신사참배에 대한 공적인 토론이나 논의를 금지시켰다. 
일제는 국가신도 神道와 종파신도를 구분하여 전자는  
국민 의뢰로서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는 일본 제국의 모든 국민에게 요구되는 국민의례 라고 강조했다. 

국가신도는, 총독부 학무과가 주관하고 있으며, 
종파신도는 종교과가 주관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일제의 요구에 대하여, 재한 선교부의 입장과 대응 방식은 다소 달랐다. 
대체로 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임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고, 
감리교 선교사들과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결정할 문제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며 한 발 물러섰다.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에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된 이슈를 보고한 
변요한 J. Fairman Prest 선교사는 

당시 여러 재한 在韓 선교부 가운데 
-신사천배를 종교적 행위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국민 의례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대체로 반반으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의 입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어떤 이들은 신사에서 참배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라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 이 이슈는 정치와 혼합되어 있고, 
그 경계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은 의견의 완전한 차이로 이어진다. 
어떤 선교사들은, 양심적으로 신사에 가서 참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선교사들은 개인의 양심의 차원에서 신사에 갈 수는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자기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경남에서 활동)는, 이 문제를 본국 선교본부에 의뢰하였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다른 선교부와 비교하여 호주 장로교는, 교육선교의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산온 학장을 비롯한 북장로교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단호했고, 
1936년 7월 1일, 이러한 상황에서는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하며 
교육사업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서울과 대구에서 교육선교에 관여하고 있던 일부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부의 결정에 반대하며, 학교 폐쇄 결정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미국의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는, 이러한 두 입장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 문제를 한국교회와 깊게 상의해야 하며 
즉각적으로 폐기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와 비교하여 남장로교는 가장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의사를 표명하면서 폐교를 결의하였고, 
미국의 남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는 한국 선교부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한 목소리를 내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신사참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내다가 
일제의 압력과 체포와 투옥과 위협을 받게 되자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제의 지도를 따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내에서는, 학교 운영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남장로교가 가장 염려했고, 선교사들을 위축시켰던 부분이 
바로 학교 운영을 요구하는 한국교회와, 한국인들의 강력한 요구였다. 

당시 미국 남장로의 해외선교위원회 총무 다비 풀턴 C. Darby Fulton 은 
학교를 폐교한다면 한국교회와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는 재한 선교부와 일제 당국 간의 문제가 아니라 
재한 선교부와 한국인들 간의 갈등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풀턴은 당시 한국교회의 입장을 이렇게 전했다. 
"신사참배가 의심할 여지 없이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강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신사참배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학교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보다는 
여기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남장로교의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명확했다. 
신도神道 의례는 일본의 국가를 종교화한 것으로서 
그 핵심에는 천황숭배가 있으며 
이는 종교와 국가주의가 완벽하게 동일시되어 있어서 
정치적 종교 의례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분명히 우상숭배라는 입장이었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35년 11월 5~6일에 목포에서 열린 남장로교 임시위원회는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선교부를 대표하여 일제와 협의한 
인돈(윌리엄 린튼)의 보고를 받은 후 
신사참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미션스쿨의 정책을 만들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으로는 인돈, 김아각, 변요한, 노라복, 유화례가 임명되었다. 

▲이후 남장로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학교 폐쇄의 입장을 정한 것은 
1936년 11월 4~5일, 전주에서 열린 임시위원회였다. 

이 회의에는 각 스테이션에서 2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광주 스테이션을 대표해서는 유화례와 남대리 Newlandm Leory Tate 가 출석했다. 

특이한 점은 이 회의에, 전주경찰서에서 파견한 5명의 경찰대표도 참석했다는 점이다. 
임시위원회 의장은 남대리, 서기는 인돈이었다. 

11월 5일 오전 회의에서, 광주스테이션이 질의한 안건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폐교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의 핵심은, 과거처럼 일반 교육의 장에서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분야의 선교사업에서 철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1936년 11월 임시위원회는, 선교부의 각 스테이션과 협력하여 
교육사업 철수 결정을 실행할 위원회를 조직했고 
어떤 스테이션도 이 위원회의 허락 없이 다른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폐교를 실행할 위원회의 위원들은 
인돈, 노라복 Robert Knox, 변요한 John Fairman Preston, 
강운림 William Clark, 김아각 Daniel James Cumming, 배요한, 
유화례, 백미다 Meta Biggar 였다. 

일사분란하게 폐교의 입장을 정한 남장로교 선교부 안에서도 
교육선교 중단과 미션스쿨 폐교 결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션스쿨의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지역의 한국교회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선교사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남장로교는 미션스쿨 운영을 위해 
지역노회와 연합이사회를 조직하여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노회는 학교 운영에 대하여 선교부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위원회의 허락 없이 다른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문구가 
삽입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선교부 내부의 이견들은, 1937년 2월에 미국 해외선교위원회 총무 
풀턴이 방한하여 한국선교부의 입장을, 본부 차원에서 지지하고 최종 승인함으로써 일단락되었고, 
내부적으로 하나의 방침으로 결속되었다. 

▲남장로교 선교부 안에서 학교 폐쇄 결정으로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한 이는 교장 유화례였다. 

일제가 수피아 학교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시점은 1935년이었고, 
당시 유화례는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36년 9월 이후부터>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었고
도청 학무과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1936년 11월 선교부 임시회의에서, 학교 폐쇄 문제가 논의된 사실을 
학생들이 전해듣고, 
11월 20일경 일부 교사들의 사주를 받은 학생 160여 명이 
유화례의 숙소로 몰려와 그곳을 애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유화례에게 학교 폐교에 대하여 따져무르며 
폐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든지, 교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다. 

학생들은 밤 12시까지 시위를 하다가, 교감 김필례의 설득으로 돌아갔지만 
이후로 학교 안에서 냉랭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는, 교육선교사업 중단과 미션스쿨 폐쇄의 최종 결정은 
미국 해외선교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풀턴 총무가 방한하여 이 문제에 대한 본부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하고, 재한 선교부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승인해 주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풀턴 박사가 1937년 2월에 방한하여, 총독부 당국자와 최종 협상을 벌였지만, 
기존의 입장 차를 재확인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학교 폐쇄에 대한 최종 결정을 위해 
1937년 2월 24일, 전주에서 임시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 풀턴 박사도 참석했다. 

또한 광주, 목포, 순천에서 파견된 한국교회 대표들도 참석하여 
학교 운영과 관련한 의견을 전달했다. 

회의장 밖에서는 선교부의 폐교 결정에 불만을 품고 몰려든 반대 시위대로 인하여 
혼란과 위협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 회의에서 풀턴 박사가 작성한 <한국 학교 문제에 대한 정책>이라는 
본부의 지침이 직접 전달되었다. 

이 지침은 구례인 John C. Crane 과 인돈이 풀턴과 협의하여 
우리말과 일본어로 번역하고, 각 스테이션에 사본을 배포하기로 했다. 

선교부 임시 회의록에 첨부된 풀턴의 입장문의 주요 내용은 
'기독교 원칙을 양보하지 않고는 교육 사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학교를 폐쇄할 것을 권고하고 
1937년 4월 새학기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존의 재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유지하기를 바라지만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된다면, 지체 없이 학교를 폐쇄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폐교되는 학교의 자산은 증여, 임대, 대여 혹은 판매의 방법으로 
제3자에게 양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풀턴의 성명서 이전까지, 선교부는 신사참배에 타협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네 가지 대안을 놓고 고민했다. 

1) 첫째 일제 당국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학교가 강제로 폐쇄당할 때까지 운영하는 방안이었다. 

이는 일제와 강대강 충돌로 비춰지고, 
선교부가 일제의 법과 제도를 위반하는 불법행위 단체로 오인될 수 있으므로 
선교사들의 거부감이 컸다. (*성경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구절도 있으므로)

2) 둘째 학교 부지, 건물, 시설을 한국교회에 인계하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한국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일부 선교사들은 이 안을 선호했다. 
그러나 선교부 내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신앙과 양심의 문제로 교육사업을 중단하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한국교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3) 셋째 학교를 비기독교 그룹에 팔아, 그들이 학교를 운영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도, 선교부가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또 다른 방식이며 
한국인들에게 '선교부가 원칙을 훼손하며 편법을 쓴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거부되었다. 

4) 넷째 교육사업을 전격적으로 중단하고, 학교를 무조건 폐쇄하는 강경책이었다. 
사실 이 마지막 안으로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결과적으로 풀턴이 작성한 최종안은 
내용적으로 타협을 불허하는 매우 강경한 안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유연한 자세를 취하여 
일제를 자극하지 않고 교육선교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교육사업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었다. 

▲다른 학교들은 비교적 조용했던 것과 달리 
수피아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폐교 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유화례의 회고에 따르면, 학생들의 배후에는 
이들을 움직이며 시위를 부추기는 3명의 교사들이 있었다. 

심지어 유화례가 1937년 2월에 선교부 임시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에 갈 때, 
그를 미행하여 동향을 파악하고 일제당국에 보고하는 교사도 있었다. *일제 프락치

유화례가 임시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광주에 돌아왔을 때, 
이미 학생들이 소식을 듣고 강당에 집결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유화례 교장에게 회의 내용을 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교감 김필례가 선교부 결정사항을 우리말로 번역한 내용을 읽었다. 

발표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폭발 직전에 팽팽함이 감돌았다. 
학생들은 발표문 낭독 이후에, 곧바로 퇴장하려는 유화례를 가로막고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유화례는 의자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교사들도 분노한 학생들을 수습하지 못했다. 
광주 스테이션의 노라복 Robert Knox 선교사가 유화례의 안전을 염려하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의 요청으로 유화례가 출석하는 양림교회 김창국 목사와 
주형욱 장로가 학교로 달려와서 
유화례를 보호하고, 학생들을 설득하려는 차원에서 유화례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김창국 목사가 발언을 하려고 일어났으나 
학생들의 기세에 눌려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형욱 장로가 어렵게 일어나 한동안 침묵하다가, 
학생들의 마음과 학교 사랑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달래면서 
유화례에게 선교부가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는지 물었다. 

유화례는 번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유화례는 선교부가 입장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바꾸기를 원치 않았다. 

학생들은 오랜 시간 동안 시위를 벌이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자리를 떠났다. 
이후 학교 수업은 파행될 수밖에 없었고, 그 해 졸업식도 진행할 수 없었다. 1937

일제교육당국은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유화례와 선교부가 학생들의 반발에 의해 굴복하기를 바라는 상황이었다. 

학교가 계속 파행되면서, 학교의 법적 대표자인 김아각 Daniel James Cumming 이 
개입하여 수업을 중단시켰다. 

유화례는 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교사 3인에게 사표를 요구했으나, 
그들은 완강하게 거부했고, 유화례 또한 이들의 사표가 수리되기 전까지 
학교 문을 열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맞섰다. 

이렇게 1937년 4월이 지나도록 학교는 휴교 상태에 있었다. 
도청 학무과는, 해당 교사들과 유착관계가 있었으므로 소통이 되지 않았고, 
유화례가 서울총독부의 학무국에 가서 진정을 낸 이후 
도지사가 개입하고서야 3인의 사표가 수리되어 학교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결국 1937년 9월 6일,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다시 
불거지면서 폐교를 전격 강행했다. 

오전에는 광주 숭일학교 학생들이 일부 교사들의 인솔로 신사참배를 하자 
교장이었던 노라복 목사는 학교 정문을 폐쇄하며 폐교를 단행했다. 

그날 오후 수피아 여학교도, 교사들의 인솔로 
교사 2명과 학생 2~3명을 제외하고 모두 신사참배를 하러 갔고 
유화례 역시 학교 정문을 폐쇄하고,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학교를 폐교했다. 

학교 인근에 신사가 없었던 군산을 제외한 
선교부의 다른 학교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하며 노력했던 수피아 여학교의 지정학교 인가승인은 
교묘하게도 폐교를 단행하기 직전에 통보되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학교를 폐교하는 마당에 '지정학교 승인'이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일제는 선교부와 미션스쿨을 철저히 우롱했다. 

▲당시 미국 총영사 마쉬 Gaylord Marsh 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학교 폐쇄를 단행하는 
북장로교 및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특히 광주 수피아 여학교의 유화례를 언급하며 
이 문제에 대하여 완전히 비이성적이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이 마치 순교자인 줄로 착각하며 행동하고 있으며 
신경 과민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천주교, 감리교, 안식교, 회중교회는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신사참배를 하고, 
이로 인해 총독보로부터 학교의 특혜를 받고 있는데, 
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고집스럽게 신사참배에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총영사 마쉬는, 일제의 통치 아래 있는 한국에서 
외국인인 선교사들은 일제 당국을 존중하면서 법과 제도에 순응해야 하고, 
일제의 통치권 아래 있는 조선인들에게 
당국이 요구하는 국민의례와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거나 
한국에서 일본 제국을 무시하는 사상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신사참배 논쟁을, 사소한 윤리적, 종교적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기독교 학교에 스며들어 있는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여겼다. 

그는 기독교와 선교사들에 대한 일제의 편향된 시각에 영향을 받으며, 
오랫동안 한국에서 활동해온 선교사들의 신앙적 양심과 도덕적 판단을 과장되게 오해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한국의 민족주의 요소가 
특정 선교 스테이션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기독교회와 학교를, 그들의 민족적 열망을 추구하고 
일제에 반대하려고 이용하려는 것이다. 

일부 선교사들은 이러한 목적에 가담하는 것 같고, 
일부는 오래전에 형성된 편견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다른 이들은 민족 감정을 추종하는 이들로부터 폭력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신사참배 반대는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동조나 
일제의 법과 제도에 대한 무시나,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아니었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게 하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선교의 원칙과 신앙의 양심에 충실하였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선교의 목적과 신앙의 양심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조용히 학교 사업을 중단하고, 폐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천황제 국가주의의 우상성과, 군국주의의 야망을 간파했지만, 
1936년에 막 부임한 신임총영사 마쉬는 편견에 이끌려 
선교사들의 행동이 한국 민족주의에 편승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유화례는 학교를 폐교한 후 
29년간 한국에서 여성 지도자를 길러냈던 수피아 여학교가 폐교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칭찬이나 명예를 얻는 것보다
귀중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도 "수피아 인(동문)"이 일제의 압제하에 있는 한국과 
전남 지역에서 보람된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자긍심과 감사를 느꼈다. 

학교선생, 고아원 원장, 여전도회, YWCA 등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는 이들이 많기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학교 폐교 다음 날인 1937년 9월 7일자 서신에는 
학생들과 교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 있으며, 
이와 더불어 전시 체제 아래서 군국주의 일제가 자행하는 
신앙과 자유의 억압에 대한 유화례의 비판과 우려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일제의 탄압 하에 놓여 있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신사참배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교부의 입장이 
많은 문제와 심적 고통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한국인들의 반발이 거셌고, 이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신입생은 받지 않더라도, 재학생들만은 졸업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일제의 전쟁 심리로 인하여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없었고 
결국 9월 6일에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자진) 폐쇄되었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얼마 전 소요를 일으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질서있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수피아의 자녀(학생)들이 줄지어 전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찢어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유화례는 "주님이 이 어려움 중에도 우리를 인도하셨고, 
우리가 가는 거친 길을 평탄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다가올 일들에 대하여 주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학교 폐교와 관련된 행정일로 당분간 바쁠 것이지만 이제 곧 자유롭게 된다면,
자신은 전도하는 일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치 신임 선교사처럼, 그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전도사역의 기쁨을 누리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일제의 강요 속에서 15명의 초등과정 교사들 가운데 
5명만이 신앙 양심을 지켰고, 
10명은 다른 학교에서 자리를 보전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씁쓸함을 표현했다. 

이것이 그들이 기대하고 얻은 대가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꼬집었다. 
수피아 여학교 교사 중에서는 오직 2명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나머지 4명은 광주의 공립학교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연약해서 믿음을 지킬 수 없었던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용감한 7명의 교사들은 
일제의 정권 아래서는 다시 교사 일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대단한 용기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유화례는 수피아 여학교에서 수고한 교사들과 작별을 고하며 
이 유혹과 시험의 시간에 그들을 지켜줄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믿음에 바로 선 이들로 인해 기쁘고, 
또한 믿음이 부족했던 이들을 위해서는 계속 기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유화례는 일제의 군용 열차가 한국을 지나 만주를 향해 
북으로 계속 달려가고 있는 상황을 전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확장의 야망을 꼬집었다. 

일본이 원치 않는 사람에게도 군사활동을 강요하면서 
커다란 불만족과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신랄하게 고발하며 
신사참배를 넘어, 군국주의화 와 전쟁동원으로 치닫는 
일제의 광적인 행보에 대하여 우려했다. 

또한 한국에 검열이 강화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했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군사적 야욕으로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완강한 결정들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점차 많은 시련을 당할 것을 염려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한국 교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는 현실은 
일본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의 조항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요청했다. 

유화례는 모든 서신이 엄격한 검열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한동안 편지를 쓰지 않았지만, 
위의 1937년 9월 7일자 서신은, 우편이 아니라 인편을 통해서 전달하는 서신이었기 때문에 
매우 솔직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사실 이 서신의 추신에, 유화례가 1937년 11월 9일에 안식년에 가는 여정 중에 
호놀룰루에 머물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이 서신(선교보고)을 직접 선교본부에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화례는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전 
이미 일제의 제국주의 확장 전쟁의 야욕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미칠 억압과 핍박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 문제는, 당시 미국 총령사의 판단처럼 
사소한 윤리적,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이었고,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전쟁노력과, 총동원체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온 힘을 다해 헌신했던 미션스쿨의 터전이 무참히 짓밣히고, 
사랑하는 학생들과 교사들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한 후 
유화례는 쇠약해진 몸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새로운 사역을 위한 준비,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죽음 등의 이유로 
예정보다 일찍 1937년 10월에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났다. 

이로써 일제강점기 유화례의 교육선교는 일단락되었다.